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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추수
제 목 [물총] 조선일보 80년 史? or 詐? (7~8)

작성자

 추수

작성일

2001-04-02 (08:25:34)

조회수

27

제   목

 조선일보 80년...史? -7-


조선일보 80년...史?..^0^ 詐! -7 의혹들-



방응모의 조선일보 인수를 둘러싼 몇 가지 의혹들

방응모가 금광을 매각하고 조선일보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상식적으로 이해 할 수없는 점들이 몇 가지 눈에 띕니다. 이 글에서는 그것들을 한번 짚어보겠습니다.

[이 글은 '조선일보 80년史'의 내용 중 미심쩍은 부분들에 대해 섣부른 추측이나 결론은 유보하고 일단 의혹을 제기해 본 것입니다. 혹시 필자의 능력이 부족해서 그 내용을 잘못 이해했는지도 모르고 또 다른 무엇인가를 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조선일보 80년史' 중 이 글과 관련된 부분, 즉 방응모의 조선일보 인수 당시에 대한 내용 원문(한글파일 17p 분량)을 위에 올려놨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읽어 보시고 이 수수께끼를 한번 풀어보십시오. 조언도 부탁드립니다.]

- 금광의 매각동기

이 사람들 스타일이 늘 그렇지만 방응모가 금광을 처분한 동기도 역시 아리송하게 처리해 놓았습니다. 의도적이건 아니건 간에 도대체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읽는 사람들이 헷갈리게 글을 쓰는지 모르겠습니다. 참 취미치고는 더러운 취미를 가졌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선 “계초 방응모는 조선일보 인수설이 나올 당시 교동광산을 경영하던 조선의 금광왕이었다”(6-3-6)는 구절만 보면 금광을 경영하던 중 조선일보 인수를 결심하고 금광을 처분했다는 말같이 들립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문단의 “그러나 금광 매도는 선뜻 이뤄지지 않았다. 이 때 계초의 조선일보 인수설이 나왔고.....”(6-3-6)라는 글을 보면 또 조선일보 인수를 결정하기 전에 이미 금광 매각을 결심했다는 얘기 같기도 합니다. 이건 방응모의 조선일보 인수 경위나 동기를 알수있는 중요한 내용인데 이렇게 허술하게(?) 다뤘더군요.

당시 교동광업소는 종업원 수만 1,000명이 넘는 조선 5대광산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런 큰 사업체를 매각하는데 특별한 이유나 목적이 없었다고 보기는 어렵겠지요. 이 사람들이 밝히기를 꺼리는, 방응모가 한참 잘 돌아가고 있던 금광을 처분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요?

- 금광 매각에 일본이 개입?

금광을 매각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글 중 [日本은 중추원 참의 고일청(그때 義州邑長)의 중개로 일본의 중외광업주식회사로 하여금 방응모의 금광을 매입하도록 종용하고 있었다.](6-3-6)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건 방응모가 금광을 매각하는데 총독부나 일본이 직접 간여했다는 얘깁니다. 그것도 단순한 개입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매각을 도왔다는 의미입니다. 한 개인의 사업체를 매각하는데 일본이 직접 나서서 도움을 준 이유는 뭘까요?


☞ 잠깐! 금광매각의 또 다른 의미

조선일보 인수와는 별개로 당시 금광을 일본회사에 매각한 점에 대해서도 한번쯤 짚어봐야 할 점입니다. 당시 일본은 통화정책의 일환(금 수탈정책)으로 조선에서 생산되는 금을 거의 싹쓸이 하다시피 일본 본토로 실어 날랐습니다. 방응모가 금광을 매각한 다음 해(1934년)만도 조선의 전체 금 생산량 16t 중 10t이상, 즉 2/3 이상의 금을 일본으로 가져갔을 거라는 자료도 있습니다.(전봉관 "황금광시대" [emergy] 2000. 11)

조선인이 소유한 금광에서 채굴한 금은 일단 조선 중앙은행에서 사들여 다시 일본 중앙은행으로 옮겨집니다. 그러나 일본인이 소유한 금광에서 나는 금은 조선의 은행을 거치지 않고 직접 일본으로 가져갑니다. 즉, 일본으로 금은 빠져나가지만 우리나라로 들어오는 돈은 없다는 얘깁니다. 결국 우리 민족의 입장에서 본다면 금은 금대로 뺏기고 돈은 구경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는 겁니다.

금 같은 광물은 개인의 재산이기 전에 우리 민족의 자산입니다. 그것도 무한정 묻혀있어서 맘만 먹으면 파 먹을수 있는 것도 아닌 ‘한정된 자원’입니다. 노동력과 자본만 있으면 아무 때나 만들어 팔 수 있는 다른 상품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재화인 것입니다. 이런 걸 일본회사에 넘겼다는 건 제 배 불리기 위해 우리의 소중한 자원을 송두리째 일본에 넘겨 준거나 다름없는 행위인 거지요.

김대중정부 들어서 공기업의 해외매각을 입에 거품을 물고 가장 반대하던게 조선일보였죠 아마? 그러나 금광을 일본회사에 매각한 것은 공기업 해외매각 따위에 견줄 바가 아닙니다. 그 자체가 ‘매국’이라 볼수도 있거든요. 이 부분에 대한 조선일보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하군요.

- 조선일보 인수동기

조선일보는 이 부분에 대해 [(주요한의 증언) “조선일보는 사장에 曺晩植 선생, 내가 편집국장, 趙박사가 영업국장으로 새로이 운영되고 있었다....” 이때 주요한은 정주의 방응모를 여러 번 찾아가 조선일보의 인수를 종용했으며, 그것이 여의치 않자 조만식을 내세워 설득 했다](6-3-6)고 말합니다. 그리고 방응모는 그 '강청'을 못 이겨 조선일보를 인수하기로 맘먹었다고 말입니다.

‘80년史’에는 조선일보가 조만식, 조병옥, 주요한 체제로 출발한 시점이 1932년 11월 23일이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방응모가 금광을 매각한 시점은 1932년 말, 공식적으로 조선일보에 참여한 시점은 1933년 1월 16일이라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주요한의 권유와 고당의 간청, 방응모의 금광매각과 조선일보 인수 결심이 불과 한달 남짓한 시간에 이루어 졌다는 얘깁니다. 이건 물리적으로 가능한 얘기가 아니겠지요.

이번에는 두 페이지정도 앞부분에 있는 이 글을 한번 봅시다.

[주요한의 증언은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임경래는 조선일보에 대한 채권자로서 큰 소리를 치고 있었다. 우선 임경래와 접촉해서 1천원을 줄 터이니 판권을 빌려달라고 해서 발행권은 확보하였으나, 그 다음은 사무실이 문제였다. 그래서 염주동 貞信學校 근처에 서양 사람이 살던 세 채의 벽돌 2층 집이 비어 있는 것을 알아가지고 이 집을 교섭해서 그 곳에 사무실을 차리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방응모씨가 돈을 댄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때까지 방응모씨는 광산을 팔지 않았었기에 실제로 수중에 돈을 쥐고 있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조병옥과 주요한은 일단 임경래로부터 8월 1일 판권을 인수했다. 임경래는 3만원에 조선일보 발행권을 조병옥 주요한에게 양도했다. 그러나 선불로 2500원밖에 낼 수 없었던 조병옥과 주요한은 양도 대금을 완불할 때까지 부사장 직위와 발행인 명의를 그대로 임경래로 두기로 하고 운영권만 우선 받아낸 것이었다.]
(6-3-6)

여기서 주요한이 방응모의 조선일보 인수에 대해 말한 시점, 즉 '1천원에 판권을 빌린 때'란 판권을 인수한 8월 1일 이전을 말하는 겁니다. 이때는 고당을 영입하기 전이지요. 따라서 이 증언은 주요한과 고당은 처음부터 방응모의 조선일보 인수를 종용한 적이 없으며, 방응모가 인수를 결심한 시점도 1932년 8월 이전이라는 말입니다. 당연히 ‘고당의 간청으로 조선일보를 인수했다’는 조선일보의 말도 사실이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이제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하게 된 동기가 분명하지 않게 됩니다. [미디어 오늘]의 '신문자본연구'에는 그것이 "동아일보와의 감정(동아일보 지국 운영 시 차압을 당하는 등 수모를 당함; '80년...史?' 5 참고)'때문일 거라고 했지만, 이건 사실 조금 무리한 추측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 신문 발행은 수지가 맞는 사업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동아가 밉기로서니 요새 돈으로 수십 수백억이 들어가는 사업을, 그것도 성패가 불확실한 사업에 뛰어 든다는 것은, 고당의 간청에 못 이겨 인수를 결정했다는 조선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가능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방응모가 조선일보 인수를 결심하게 된 진짜 동기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 총독부와 사전협의 있었을 것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판권을 담보로 조선일보에 돈을 빌려준 임경래는 이를 기화로 판권기재사항 변경 신청을 총독부에 냈다. 조선총독부에 발행인 변경을 요구했고 총독부는 즉각 이를 허가했다. 임경래는 총독부 허가를 근거로 조선일보 발행인-편집인-부사장에 취임했다.](6-3-2)

여기서 보듯 신문의 발행인 변경이 허가사항임을 알수 있습니다. 사업가인 방응모가 이걸 몰랐을 리 없습니다. 따라서 미리 총독부와의 협의를 통해 사실상의 허가를 받아두지 않고 신문인수를 결정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이 사전협의는 언제 어떻게 이루어 진 것일까요?

- 조선일보 인수에 총독부가 특혜?

방응모의 조선일보 인수에 대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때의 편집국장으로 있던 주요한이 계초의 조선일보 인수 상황을 증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러다 마침내 방응모씨는 광산을 일본 사람에게 팔았다. 그리고는 4천원이 든 예금통장을 총독부에 제시했다. 그러자 총독부는 조선일보의 판권문제가 복잡하니 종래의 인가를 취소하고 새로 인가를 내주는 형식을 취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인수하게 된 것이다.”]
(6-3-6) 이건 전에 있었던 조선일보라는 신문을 아예 없애버리고 같은 제호의 전혀 새로운 신문 발행을 허가해 줬다는 얘깁니다.

이 증언에서 우리는 두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하나는 비록 '조선일보'라는 같은 제호를 쓰고는 있지만 현재 발행되고 있는 조선일보는 1933년 창간된 전혀 다른 신문이며 1920년 창간된 기존의 조선일보는 이미 1933년 폐간되었다는 점입니다.

다른 하나는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창간)하는데 총독부가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는 사실입니다. 당시는 신문발행이 허가제였습니다. 또 신규진입을 억제하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이해당사자들이 엄연히 있는 사업을, 굳이 기존의 허가까지 취소해 가면서 별도로 허가를 내줬다는 것은 여간한 특혜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걸 뒤집어 생각해보면 총독부가 방응모의 조선일보 인수를 간절히 원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파격적인 특혜를 줄 리가 없습니다. 총독부에서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하기를 원한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 고당이 말없이 사라진 이유는?

고당 조만식은 1932년 11월 23일자로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해서 1933년 7월 10일 방응모가 사장에 취임하면서 고문으로 추대됩니다. 말이 좋아 '추대'지 밀려난 것으로 봐야겠지요. 이 부분에 대해 조선일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고당은 33년 7월19일 사주인 계초에게 사장 자리를 넘겨주고 고문으로 물러난다. 당시 모습을 조선일보 주필과 사장을 지낸 홍종인은 이렇게 회고했다. “선생님은 하루저녁에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슬쩍 평양으로 내려가셨다. 자신이 신문사 사장을 하실 분이 못되고 신문사 사장으로 하실 만한 일을 발견할 수 없다는 태도의 확실한 표시였다.”](조선일보 사장열전 고당 편)

이 글대로라면 고당은 무능력한데다가 무책임하기 까지 한 사람이 됩니다. 아무리 고당과 방응모 간의 불화를 미화시킬 의도라 하더라도 민족지도자인 고당을 졸지에 이렇게 방응모만도 못한 인물로 만들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이 말은 아마도 고당이 무언가에 격노하여 모든 걸 훌훌 털고 조선일보를 떠났다는 얘기일 것입니다. 고당이 이렇게 노한 것은 과연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 결론: 방응모의 조선일보 인수는 총독부의 작품?

방응모는 특별한 동기도 없이(?) 잘나가던 금광을 매각합니다.
그리고 그 금광의 매각에는 일본이 깊숙히 개입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기가 묘하게도 당시 조선일보를 경영하던 민족지도자들의 망명, 구속 등으로 조선일보가 궁지에 몰려있던 시점이었습니다.
거기다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하기로 결심한 동기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또 조선일보의 인수를 결정하는데 총독부와의 사전협의가 있었음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조선일보 인수 시(창간 시) 총독부의 엄청난 특혜가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민족지도자 고당이 무언가에 진노하여 사장취임 8개월 만에 뛰쳐나갑니다.

이 복잡한 매듭을 풀 '알렉산드로스의 칼'은?


작성자

 추수

작성일

2001-04-04 (14:36:56)

조회수

13

제   목

 조선일보 80년...史? -8-


조선일보 80년...史?.. ^0^..詐! -8-



이 글에서는 '80년 史'의 내용 중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새로이 창간(인수)한 시점을 기준으로 전과 후의 내용(일제시대)을 비교해보고, 또 실제로 조선일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아보겠습니다.

- 70% : 20%의 차이

방응모가 새로 창간하기 직전의 조선일보는 이상재-신석우-안재홍으로 이어지는 민족지도자들에 의해 8년간(1924-1932) 경영되었습니다. '80년 史'에서 이 기간을 다룬 내용은 모두 50페이지(web 페이지), 이중 반일기사 소개와 경영진들의 항일활동 등을 다룬 내용이 35페이지로 전체 면 수의 70%를 차지합니다. 그만큼 자랑스럽다는 얘기지요.

그런데 방응모의 창간부터 폐간(1940)까지 7 년간을 다룬 54페이지 중에는 그런 비슷한(?) 내용이 고작 16件 뿐입니다. 굳이 件이라고 표현한 건, 앞의 것들이 거의 전면에 걸쳐 다뤄진데 비해 뒤의 것들은 면의 일부분, 그것도 구색 맞추기 용으로 궁색하게 삽입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 내용도 앞의 것과는 달리 당시의 시대상황과 언론정책(탄압강도) 등을 설명하는 내용이 대부분입니다. 어쨌거나 백분율로 표시한다면 한 20%가량?

이건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군요. 안 밴 애를 낳으라고 하는 게 낫지, 제아무리 조선일보라 한들 안 한 항일까지 만들어 낼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70 : 20, 이 차이가 방응모 창간 전과 후의 조선일보 민족의식의 차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 총독부 기관지보다도 기사압수가 적었다?

아래는 1920년 조선일보의 창간부터 1936년까지 있었던 기사압수 통계입니다. 물론 '조선일보 80년 史'에 실린, 자신들이 밝힌 자료입니다.

20년-31건 / 21년-26건 / 22년-14건 / 23년-23건 / 24년-59건 / 25년-67건 / 26년-57건 / 27년-59건 / 28년-28건 / 29년-23건 / 30년-20건 / 31년-9건 / 32년-8건 / 33년-10건 / 34년-13건 / 35년-3건 / 36년-13건

우선 1924년부터 압수 건수가 큰 폭으로 늘었다가 1931년부터 다시 준 것이 눈에 띕니다. 1924년은 이상재와 신석우가 조선일보를 인수한 해입니다. 이때부터 폐간되던(방응모가 인수한) 1932년 까지 조선일보는 치열한 반일 노선을 유지합니다. 이건 위의 기사 압수 건수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1931년은 조선일보 사장 신석우가 신간회 활동과 관련, 상해로 망명하고 휴간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안재홍이 사장으로 취임하는 등 조선일보의 격변기였습니다. 또 1932년은 사장 안재홍이 구속되고 약 4개월가량의 휴간, 그리고 사채 때문에 판권이 넘어가는 등 시련이 있던 해입니다. 두 해 모두 그런 사정 때문에 압수기사가 적을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러나 1933년부터는 ‘80년 史’에 버젓이 '조선일보의 중흥기'라 표현해 놓은 시기 임에도 불구하고 압수건수가 현저히 줄어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들 말로 30년대 중반부터 일제의 언론탄압이 더욱 극심해 졌다고 말해놓고 그 시기에 압수건수가 오히려 전보다 현저히 줄었다는 건, 그러고도 그 시기를 '조선일보의 중흥기'로 표현했다는 건 철저하게 자본의 논리로만 얘기하자는 의미일 것입니다. 또 실제로도 ‘그저 알아서 기었다'는 의미도 있을 것입니다.

한 가지 웃기는 건, 1935년의 기사 압수 3건은 당시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의 그해 기사 압수 5건보다도 오히려 적은 횟수라는 점입니다. 이건 당시의 조선일보가 총독부 기관지보다 더 친일이었든가 거의 비슷한 수준의 신문이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거지요.

- 일본인 기생관광의 원조는 동아와 조선이었다.

이런 내용이 보입니다. [1937년 5월 20일에는 동경 대판의 큰 회사 광고주들을 초대해서 조선일보의 실상을 소개하고 금강산 주을 평양지방을 시찰시켰다....이런 광고 기획은 광고주들의 큰 호감을 끌어냈고 광고 획득에도 도움을 주었다. 돌아간 일본의 광고주들이 조선일보 동경지국에서 금강회를 만들고 대판지국에서는 구룡회를 조직했다. 이는 사세 확장을 위한 사업이면서 위세를 돋보이게 한 홍보였다.](7-2-5)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한 [미디어 오늘] '신문자본연구 팀'의 얘기는 좀 다릅니다. 이렇게 말하네요. [1934년 동아일보는 일본의 제약, 제과, 화장품 회사의 간부 20여명을 초청, 기생관광을 시켜준 일이 있었다. 바로 한 해전에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한 후 신문시장 장악을 위해 적극적인 공세를 펴오자 위기를 느낀 동아일보가 기생관광이라는 망국적 방법까지 동원하면서 수성(守城)에 나선 것이다. 이후 조선일보가 동아일보의 대응에 맞서 같이 기생관광을 들고 나왔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광고유치를 둘러싼 추태에 대해 문인 김동인은, 민간지들이 이윤추구를 위해서는 ‘매족적(賣族的) 행위’까지 일삼고 있다고 비판했고, 다른 비평자는 두 신문이 “조선민중이 걸어가는 길과는 다른 방향으로만 달음질”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미디어 오늘] '신문자본연구' 1995.06.21 [6호 9면])

동아와 조선이 일본의 광고주들을 확보하기 위해 앞 다퉈 기생관광을 시켜줬다는 얘깁니다. 결국 요즘의 일본인 기생관광의 원조는 소위 '민족지'라고 자랑하는 신문들이라는 말씀. 그것도 방응모의 공격적 경영이 직접적 원인이었다는 말씀.(이 글을 쓰는데 왜 갑자기 입 안에 가래침이 가득 고이는지 모르겠습니다)

- 오늘날 신문시장 혼탁화의 뿌리는 방응모로부터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새로이 창간한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혁신호 100만부를 찍어 무료로 배포하고(6-4-2) 8면이었던 지면을 12면으로 늘리는(6-4-4) 일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일보의 구독자 수가 약 5만 명이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방응모의 이런 물량공세가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짐작 할만 합니다. 요즘 보이고 있는 조선일보의 대규모 물량공세도 사실상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군요.

그 다음 한 일이 이광수, 서춘, 함상훈 등을 동아일보에서 빼내오는, 소위 '사람 빼 내오기'였습니다. 물론 적당한 당근이 끈끈이 역할을 했겠지요. 이로인해 동아일보가 한 동안 정상적인 신문제작이 어려울 정도였다니, 이건 최소한의 상도의도 외면했다는 얘기네요. 결국 이때부터 방응모는 신문‘판’을 아예 지식을 팔고 사는 노가다 판으로 만든 겁니다.

이런 글도 있네요. [(1933년) 행운권을 발행하여 당첨자에게 금비녀, 옷장, 금시계, 양복 따위를 선물하며 독자 확장에도 심혈을 기울였다.](6-4-5) 이걸 무슨 자랑이라고 써 놓은 모양이지만 이건 지금부터 70년 전에 벌써 조선일보가 경품을 제공하기 시작했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요즘 말이 많은 신문 경품의 시조도 거슬러 올라가보면 방응모였다는 말씀.

말이 나온 김에 '신문자본연구'를 조금 더 봅시다. [두 신문의 각축은 판매망 장악을 위한 치열한 싸움으로 이어졌는데 조선일보는 판매망 구축과정에서 동아일보의 기존 판매망을 파고 들어와 이들 신문간의 갈등은 첨예화되었다....1930년대 중반을 넘어서서는 선정적인 보도와 흥미위주의 대중적 문예물들이 지면의 상당 부분을 채울 정도가 됐다. 한 비평자는 “통속작가들이 비속한 취미와 흥미중심의 스토리를 제공, 신문경영자의 판매정책에 부응하고 독자들은 이것들을 통해 불의의 행복을 마음껏 즐기게 된다”고 비판했다.]([미디어 오늘] '신문자본연구' 1995.06.21 [6호 9면]) 살인까지 부를 정도로 심각한 신문들의 판촉경쟁과 선정성 경쟁 같은 것도 애초에 방응모로부터 시작됐다는 얘깁니다.

간단하게 몇 가지만 살펴봤습니다만 요즘 조선일보와 관련된 문제점들, 즉 물량공세니 경품제공이니 하는 과당경쟁, 선정성 경쟁, 그리고 돈벌이를 위해서는 공기(公器)이기를 과감하게 포기하는 몰염치 등이 결국은 모두 방응모로부터 시작됐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또 이것이 그대로 우리나라의 신문시장에 반영되어 오늘날 같은 이런 혼탁한 기류가 형성되었음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결국 ‘80년 史’의 내용으로 볼 때, 오늘날 볼 수 있는 신문시장의 폐해들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보니 그 정점에 방응모가 있더라, 뭐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되는군요. 그것 참.....
근데 이 ‘조선일보 80년史’, 이거 누가 쓴 거지?



퍼 가실 분은 참고하세요. 이 글의 주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neo.urimodu.com/bbs/zboard.php?id=choisun_chinil&page=2&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33

2002/06/21 (22:40:09)    IP Address : 147.46.116.76

46  [물총] [조선의 심리] 조선은 친일행적이 파헤쳐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추수 등 2002/06/22 2981
45  죄선의 한국역사교과서 왜곡에 대하여 여러 님들 2002/06/22 2133
44  조선일보와 박제화된 친일잔재 청산 홍세화 2002/06/21 1741
 [물총] 조선일보 80년 史? or 詐? (7~8) 추수 2002/06/21 1617
42  [물총] 조선일보 80년 史? or 詐? (6) 추수 2002/06/21 1460
41  [물총] 조선일보 80년 史? or 詐? (1~5) 추수 2002/06/21 1976
40    [re] 첨부사진 추수 2002/06/29 1593
39  일본 조선일보 동경지사 앞의 안티조선 시위 사진과 후기입니다 안호진 2002/06/21 1974
38    [re] 시위사진 안호진 2002/06/29 1588
37    [re] 시위사진 안호진 2002/06/29 1430
36    [re] 시위사진 안호진 2002/06/29 1425
35    [re] 시위사진 안호진 2002/06/29 1123
34    [re] 시위사진 안호진 2002/06/29 1192
33    [re] 시위사진 안호진 2002/06/29 1276
32    [re] 시위사진 안호진 2002/06/29 1311
31  [대한매일] “친일파의 재산되찾기" 헌법에 위배 조태성 등 2002/06/21 1590
30  [미디어오늘 등] 조선일보 광고에 나타난 친일행각/역사의식의 빈혈과 싸우는 정운현 정운현 등 2002/06/21 1706
29  [미디어오늘 등] 일제의 통치도구로 태어난 민족지 '조선일보' 신문자본연구팀 2002/06/21 1669
28  [미디어오늘] 일본군에게 고사포까지 기증한 조선일보 방응모 신문자본연구팀 2002/06/21 1560
27  [크리티즌] '친일'이라는 이름의 반역사 절망의 강 2002/06/21 1625
26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 '민족지' 간판 밑의 친일행각 조선일보 방응모 정운현 2002/06/21 2081
25  "조선일보" 와 "조광" 그리고 방응모 반민특위 2002/06/21 2220
24    동아 공영권의 신장과 국민의 각오 반민특위 2002/06/29 1635
23    극동위기설과 국민의 각오 반민특위 2002/06/29 1546
22    신체제와 吏道선양 반민특위 2002/06/29 1432
21    성수무강 반민특위 2002/06/29 1478
20    시정 30주년을 맞이하여 반민특위 2002/06/29 1348
19    전몰 영령을 弔함 반민특위 2002/06/29 1459
18    이천육백년의 기원절 반민특위 2002/06/29 1494
17    [ 조광 ] 창간 오주년사 반민특위 2002/06/29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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