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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죄선일보 > 월간 인물과사상이 파헤친 죄선일보 - 1998년4월호~2000년9월호


이 름 강준만
제 목 "젊은 여성이여, '직장의 꽃'이 되라"?; 정신과 의사 이시형의 '마초 콤플렉스'
"젊은 여성이여, '직장의 꽃'이 되라"?; 정신과 의사 이시형의 '마초 콤플렉스'

강준만

‘지식인으로서의 사회교육’?

‘마초 콤플렉스(macho complex)’? 이상한 말 써서  죄송하다. ‘싸나이 콤플렉스’라고 해도 안 될 건 없겠지만, 콤플렉스는 뭐 우리말인가? 남자다운 걸 유난히 강조하면서 남성우월주의적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 우리 주변에 적지 않다. 그 정도가 아주 심한 사람이라면,‘마초 콤플렉스’에 걸려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물론 요즘 페미니스트들의 활동이 만만치 않아 본인은 절대 자신이 남성우월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그렇게 부인한다고 해서 그 혐의를 벗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언행의 내용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제부터 한국에서 정신과 의사로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유명한, 어떤 분의 ‘마초 콤플렉스’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누군가? 이시형이다. 이시형이 정신과 의사로서 본업에만 충실하다면, 이런 글을 쓰는 건 온당치 않을 수도 있다. ‘마초 콤플렉스’라는 게 ‘마초’들 사이에선 자랑일 수 있어도 사회 저명 인사로선 결코 자랑일 수 없는 바, 그걸 공개적으로 까발리는 건 지나친 일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시형은 정신과 의사인 동시에 일반 대중을 상대로 저술 활동을 매우 활발하게 하는 지식인이다. 그는 어느 기자로부터 정력적으로 책을 많이 쓰는 원동력이 뭐냐는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답한 바 있다.

“딱 한 가지, 사회교육입니다. 내가 배우고 공부한 것이 모두 한국사회의 은혜다, 내게 주어진 시간과 정력으로 내가 갖고 있는 모든 지식과 체험을 사회로 돌려주자는 것입니다. 지식인으로서의 사명으로 생각합니다.”

그렇다. 바로 ‘사회교육’의 문제다. 나는 이 문제에 관한 한 개입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어떤 분이 내가 보기에 매우 잘못된 ‘사회교육’을 한다면 나는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그 분의 주장이 적어도 논란의 소지가 있는 것이라는 점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는 말이다.

게다가 이시형이 일반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너무 크다.1991년엔 “이 박사는 스타와 같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심지어 40대 이후 중년층은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불면증을 병명으로 내세워 특진 신청까지 할 정도이다”라는 보도가 나온 바 있다. 또 95년엔 “그는 82년에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배짱으로 삽시다』 이후 대중을 위한 정신건강서를 꾸준히 펴낸 덕에 학계로부터 정신과의 문턱을 낮추는 데 실질적으로 큰 공헌을 한 인물로 평가되기도 한다”는 보도도 나왔다. 또 그런가하면 97년엔 “15년 전 어느 날 방송·인쇄매체 등에 신선한 충격으로 등장한 그 날부터 이미 한국사회의 병리현상에 메스를 대기 시작하여 줄기차게 한국인의 의식변화를 주창하고 이를 통한 미래지향적 한국인상을 제시해온 이시형 박사--정신과 의사의 예리한 시각으로 인정의 기미를 포착해 의표를 찌르는 그의 에세이들은 삶의 자양분으로 오래도록 읽는 이의 가슴 깊이 앙금처럼 점착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이제 이 정도면 한 정신과 의사의 ‘마초 콤플렉스’를 지적하고자 하는 나의 시도가 정당하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으리라 믿는다. 남은 문제는 나의 주장이 얼마나 타당한가 하는 점일 것이다. 독자들께서 판단할 문제이긴 하지만, 나는 자신만만하다는 걸 미리 밝혀두고자 한다.

‘남성우월주의’에도‘급’이 있다

이시형은 1934년 대구 출생으로 경북중고등학교를 거쳐 59년에 경북대 의대를 졸업한 뒤 64년에 미국 유학 길에 올라 69년 미국 예일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72년에서 76년까지 경북의대 교수를 거쳐, 76년부터 고려병원 신경정신과 과장으로 일하다가 91년에서 94년까지 고려병원 원장으로 일했고, 그리고 최근엔 강북삼성병원 정신과 부장이면서 성균관대 의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는 사회정신건강연구소장이기도 하다. 사회정신건강연구소는 무얼 하는 곳인가? 그는 외국을 다니면서 한국 경제의 위기를 절감하였는데, “국민들은 흥청망청, 정경유착, 부정부패, 썩은 교육, 인색한 기술 투자, 부채, 적자, 선진국은 저만치 멀어져가고 중국은 바짝 뒤쫓아오고, 우리 경제가 설 자리가 보이지 않았던 것”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의 고질적인 사회 정신병리를 고발·치료·계몽”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는데, “참으로 고맙게도 삼성에서 사회정신건강연구소를 설립, 이 문제에  대해 본격적인 연구·계몽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한다.

이제 본격적인 ‘이시형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직접적인 동기를 말씀드려야겠다. 페미니스트들이 들으면 펄쩍 뛸 수도 있겠지만, 나는 평소 일부 남성들의 ‘마초 콤플렉스’에 대해 크게 분노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런 사람들이 워낙 많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내 자신이 전혀 떳떳치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론적으론 철저한 페미니스트인데, 실천으론 전혀 그렇지 못하다. 한 가지만 고백하자면, 나는 젊은 아가씨가 있는 술집에 가서 못된 짓도 많이 한 ‘쓰레기’같은 인간이다. 물론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 나는 이후 적어도 여성의 성적(性的) 접대가 제공되는 곳엔 절대로 가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했으며 앞으로 계속 이걸 사회적 이슈로 삼아 ‘술’과 ‘여자’ 좋아하는 동료 지식인들을 괴롭힐 생각이다. 나는 젊은 아가씨들이 있는 술집에 가서 아가씨의 허벅지를 주무르는 행동과 진보와 개혁을 부르짖는 행동 사이에 아무런 갈등과 모순을 못 느꼈던 나의 과거를 참회한다. 나는 아직 참회를 하지 못한 많은 지식인 동료들을 옳은 길로 인도하기 위해 앞으로 그 어떤 악역(惡役)도 감수할 것을 약속드린다.

나의 결심이 어떠하건, 나는 내가 이론으로야 어떨망정 실천으론 명백히 ‘남성우월주의’에 찌들은 인간임을 인정한다. 그래도 나는 ‘정도의 차이’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내가 아무리 남성우월주의에 찌들은 인간일망정, 나 같은 인간이 생각하기에도 ‘해도 너무 하는’ 경우에 대해선 분노해야겠다는 것이다. 이게 모순이라거나 우스꽝스러운 짓이라고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비판은 달게 받겠다. 그러나 나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할 말은 해야겠다.

나는 오래전부터 이시형이 많이 쓰는 신문 칼럼들엔 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해왔지만, 그걸 문제삼을 생각을 하진 못했다. 정신과 의사로서의  ‘특권’을 인정했다고나 할까? 뭐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내가 이시형의 칼럼에 대해 분노를 느낄 정도는 아니었기에 나로선 그저 ‘세상엔 사람이 많다’는 다양성 존중의 사상을 음미하는 것으로 그의 칼럼들을 지나치곤 했던 것이다.

‘거세(去勢) 사회’?

그러다가 나는 이시형이 『중앙일보』 2000년 7월 6일자 6면에 쓴 <거세(去勢) 사회>라는 제목의 칼럼을 보고선 ‘폭발’하고 말았다. 이건 정말이지 ‘해도 너무 한다’는 게 내가 내린 결론이었고, 그래서 급기야 이 글을 쓰게 된 것이다. 우선 이 칼럼에 대한 논평으로 이 글을 시작해보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요즘엔 온통 ‘부드러운 남자’ 일색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남학생이 눌린다. 이 나이엔 모든 성장에서 여자가 빠르다. 말도, 공부도  잘해 반장을 맡고 덩치도 커 싸움에서도 이긴다. 모든 주도권이 여자 아이에게 있다. 게다가 여선생님이 많아 사내 아이들에게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가르치기도 어렵다. 수컷적인 공격성, 수렵적·맹수적·야성적 속성은 점점 억압돼간다. 이러다 전쟁이라도 나면 어쩔 것인지 걱정이다. 실제로 프랑스는 1차세계대전 패배의 원인을 여기서 찾고 있다.”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심하다. 반론을 하고 싶지도 않다 이런 따위의 주장에 대해 한국성폭력상담소장 최영애가 반론을 한 게 있어 그걸 인용하는 걸로 대신할란다. 최영애는 일간지들의 성범죄·성 관련 보도 사례들을 구체적으로 분석한 후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중앙일보는 ‘소녀들이 드세진다’(98. 7. 29)라는 타이틀로 신세대 소녀들의 의식 및 성 행태를 기획기사로 다루었다. 기사 보도 내용에 의하면 소녀들이 드세지는 근거로 ‘사랑해 넌 내꺼야’라는 식의 여학생들의 대담한 애정 표현과 여학생들의 데이트 신청이 늘고 있음을 들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을 “성이 무너지고 있다. …… 중·고교 여학생이 급속히 남성화, 개방화되고 있다”라고 진단한다. 이것 역시 남성만이 성적 주체자이며 성적으로 적극적인 여성은 좋은 여성이 아니라는 성 역할 고정관념을 보여준다. 또한 이러한 현상을 “여학생이 교내 행사를 주도하고 이성교제 때도 편지, 선물, 전화  등으로 애정 표현을 먼저 한다. …… 여성스럽고 차분한 애들은 극소수다. 전반적으로 여자애들이 여자답지 못하고 거칠기까지 하는 등 남성화되고 있다”고 우려하는 중학교 선생님의 언급만을 인용하여 성의 성적 표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강화시키고 있다. 그뿐 아니라 이 기사에서는 여성은 수동적이어야 한다는 성 역할 고정관념에 의해 여학생들이 학생회장이나 반장을 맡고 학보사, 영자신문사, 서클 활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여자답지 못한 드센 행동으로 규정, 한탄하는 모습을 보인다. 더 나아가 여학생들의 수능 평균 성적이 남학생보다 높아진 것을 우려하며 역시 소녀들이 드세졌기 때문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 ‘교실마다 여학생 드세 … 남학생 주눅’이라는 부제를 달아 여학생들의 활발한 활동을 사회적으로 우려할 현상으로 규정하고 ‘여권 신장 따른 남성화 현상’이라는 부제를 통해 여성운동을 여학생을 드세게 만드는 주범으로 매도한다.

중하층 여성은 사람이 아닌가?

“성장 후에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남자들이 치열한 경쟁에 시달리고 있을 때 여자들은 자유분방하다. 해외여행에다 멋도 부리고 고급문화에 접할 기회도 많은 게 독신 여귀족이다. 인심 좋은 상사나 선배로부터 대접도 잘 받는다. 고급식당의 고급메뉴까지 알고 있다. 기껏 대포집이나 찾는 이 나이의 남자와는 생활감각과 차원이 다르다. 결혼해도 경제권은 주부 쪽에 있다. 고급식당만인가. 고급 스포츠·문화행사도 괜찮은 주부 몫이다. 맞벌이주부는 말할 것도 없고, 전업주부도 남편 봉급을 몽땅 차압해 경제권을 행사한다. 요즘은 내 돈이건, 남의 돈이건 돈 쥔 사람이 강자다. 용돈 한 푼에 눈치를 봐야 하는 게 남정네들이다. 배운 것도 아는 것도 많은 게 여자라 남편 말에 고분고분할 리도 없다. 충고·비판, 심지어 남자 직장 일에까지 간섭이다. 이젠 성(性)에서도 여자다. 당당히 요구하겠단다. 이건 남자의 본성이 뭔지도 모르는 ‘폭력’이다. 성에서조차 ‘이래라, 저래라’라니. 뭐 이런 게 다 있나. 성의 원점이 뒤바뀐 느낌이다. 직장일과 성, 여기만은 아내가 건드릴 부분이 아니다. 여기에서마저 자부심과 긍지가 꺾이면 남자는 껍데기뿐 남자로서 구실을 못한다.”

이시형의 사고(思考)엔 ‘계급’ 또는 ‘계층’이라는 개념은 전혀 없는 건가? 아니면 정신과 의사로서 상층에 속하는 자신의 계급적 관점에서 보는 세상이 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건가? 이시형이 지적한 그런 여성이 적지 않다는 건 분명하다. 그러나 그런 여성의 남편들은 ‘기껏해야 대포집’이나 찾는 사람들이 아니다. ‘기껏해야 룸사롱’이라고 해야 더 어울릴것이다. 나는 이시형이 중하층 계급에 속하는 여성의 삶도 제발 구경해보기 바란다.

그리고 성(性) 문제도 그렇다. 서로 의논해서 하면 좋은 것이지 꼭 남자가 일방적으로 찍어눌러야 직성이 풀리나? 남자가 남자로서 구실을 못한다면 그건 이시형이 두려워하는 것처럼 아내가 건드려서 그런 게 아니라 이 세상의 생존경쟁이 필요 이상으로 살벌해서 그런 건 아닌지 살펴볼 일이다. 그러나,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이시형은 ‘자본주의의 과잉’을 염려하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의 과소’를 염려하는 분이다.

한국의 성폭력 발생률과 남아선호사상

“최근 연상의 여인과 결혼하는 남자가 늘고 있는 것도 거세(去勢) 사회와 무관치 않으리라. 엄마처럼 포근한 여자와는 안심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서구 귀족사회에선 남자의 첫 경험을 엄마의 친한 친구와 갖게 하는 전통이 최근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굳이 마마보이여서만은 아니다. 최근 극성인 성교육도 문제다. 교육이란 미명 아래 성은 신비스러울 것도, 흥분할 일도 아닌, 마치 물건처럼 취급되고 있다. 모든 걸 다 까발리고, 벗기고 하는 통에 아예 성에 대해 무신경·무감각해진다. 호기심도, 가슴 조이는 아슬아슬함도 없다. 이걸 교육이라고 하고 있다.”

정말 심하다. 이 정도면 ‘마초 콤플렉스’도 그야말로 중증(重症)이다. 명색이 정신과 의사라면, 그간 ‘성교육의 불모’였던 우리 현실에 대해 일말의 책임감을 느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서 성교육에 대해 건설적인 제안이나 비판을 해야지 ‘극성인 성교육’이라니, 이게 정신과 의사로서 할 말인가?

“지금 우리 사회는 남자 기를 꺾는, 아예 죽이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오해 말자. 여성의 권위, 여성의 권리를 침해하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살리기 위해 하는 소리다. 마음 약한 남자의 거세 불안을 이해하자는 뜻에서다. 남자 기가 꺾이면 그 가정도, 사회도 무기력증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건 ‘오해’의 문제가 아니다. 오해하고 말 것도 없다. 이시형의 본색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는데, 무슨 놈의 오해가 있겠는가? 왜 이시형은 남자의  기가 꺾이는 문제를 악착같이 남녀관계에서만 찾으려고 하는가? 아무리 정신과 의사라지만, 사회 전반으로 눈을 돌려볼 생각은 없는가? 그럴 생각이 없다면, 아예 신문 칼럼을 쓰시지 말든가.

이시형은 아시는가? 우리 나라의 실질적인 성폭력 발생률이 세계 제1위라는 걸? 또 우리 나라의 남아선호 사상이 세계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만큼 매우 강하다는 걸? 정치, 언론, 대학, 의학 등과 같은 분야에의 여성 인력 진출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는 아시는가? 이런 문제를 지적하면서 여성 권리를 주장하는 칼럼을 단 하나라도 쓴 적이 있으신가? 이시형은 오로지 자나깨나 여성이 드세지는 것만 걱정이 된 나머지 남자의 모든 불행이 여자들로부터 비롯되고 있다는 노이로제에 걸리신 건 아닌가?

여자는 ‘직장의 꽃’이 되어야 한다고?

‘마초 콤플렉스’에 빠진 남자들이 갖고 있는 한 가지 공통된 특성은 여자의 말은 무조건 우습게 안다는 것이다. 이시형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그간 이런 저런 자리에서 자신의 남성우월주의적인 발언에 대한 여성의 반발을 적잖이 접했을 텐데도 그는 도무지 요지부동이다. 무조건 ‘오해’랜다. 내가 보기엔 ‘오해’를 할 것도 말 것도 없는 명백한 사안인데, 그는 왜 자꾸 ‘오해’라고 주장하는 걸까? 그의 경험담 하나를 들어보자.

“어느 좌담회에서 여성스럽다는 말을 했다가 아주 혼이 난 적이 있다.  ‘여성스럽다는 게 무슨 뜻이냐? 그 말 속에 남녀 차별의 불순한 의미가 있는 게 아니냐? 결국 여성을 모독하는 말’이란 게 그날 나온 여성 지도자의 항변이었다. 내가 만약 섹시하다는 표현을 했더라면 이분들은 아마 기절이라도 했을 것이다. 어쨌든 공석에서는 이런 류의 말은 가급적 안 하는 게 좋다. 자칫 불필요한 오해를 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여성은 수동적이어야 하고 남성에게 복종적이어야 한다는 남성 우위론을 주장하는 듯한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발끈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분명히 해 두지만 난 그런 뜻으로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 여성스럽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여성 본래적인 것을 일컬음이다. …… 섹시하다는 표현을 쓰면 실제로 화를 내는 여자도 있다. 마치 자기가 남자를 유혹하려고 꼬리치는 선정적인 여자로 취급되는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되나 보다. 경멸하고 추하게 본다는 생각과 함께 마치 화냥기라도 있는 여자쯤으로 취급하는 줄 아는 모양이다. 천만의 말씀, 이건 진심으로 보내는 축하의 찬사다. 그 말 때문에 정말 화가 난다면 여성이 되길 포기하지 않는 이상 그건 위선이다. 누구나 의식, 무의식으로 섹시한 분위기를 연출하려고 애를 쓴다. 남자도 예외가 아니다. 이건 모든 동물이 가진 종족 보존의 본능적 행동이다.”그 문제의 ‘여성 지도자’로부터 욕을 먹을 수도 있겠지만, 나 역시 ‘여성스럽다’는 표현의 선의(善意)를 이해한다. 그러나 나는 이시형의 경우 그 선의를 인정 못하겠다. 이시형의 경우, 그의 부인(否認)과는 달리 명백한 ‘남성우위론’에 근거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이제 곧 적나라한 증거가 계속 나올 것이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기 바란다. 그는 이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섹시한 여자가 좋다는 건 야한 여자가 좋다는 뜻과는 차원이 다르다. 섹시함이란 지성과 감성, 그리고 여성스러운 전(全) 인격과의 조화를 일컫는다. 이번에 조사한 나의 관찰로도 일에 성공한 여성들은 상당히 섹시하더라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내 추정이요 결론이다. 남자들은 섹시한 분위기에서 일하길 좋아한다. 일을 해도 즐겁고 능률적이다. 그런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는 여자라면 성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직장의 꽃이란 말에 지나친 모욕감을 느끼거나 반발심이 생긴다면 한 번쯤 그게 자신의 과민 반응은 아닌지 생각해 보는 것도 슬기로운 일이다. 그러는 남자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고 싶거든 보다 더 아름답게 자신을 가꾸어라. 초동의 접낫쯤은 감히 닿을 수도 없게 아름답게 피어나라. 그리고 그 화려한 꽃이 회사에는 훌륭한 결실의 열매로 성숙되게 하라.”

남녀불평등 구조를 전제로 한 처세술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시형은 자신을 마광수와  차별화하려고 그러는데, 그거 실수하시는 거다. 마광수는 ‘마초 콤플렉스’는 전혀 없지만 솔직하다는 장점은 있다. 그런데 이시형은 ‘마초’이면서도 전혀 솔직하지 않다. “섹시함이란 지성과 감성, 그리고 여성스러운 전(全) 인격과의 조화를 일컫는다”고? 이건 거짓말이다. 진정 그 뜻으로 한 말이라면, 그 경우엔 ‘섹시함’이라는 단어를 쓰는 게 아니다. 지나가는 남자 아무나 붙들고 물어봐라. ‘섹시함’을 느끼는 데 지성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말이다.

나는 ‘섹시함’을 무척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다. 내가 이시형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는 건 왜 여자들만 그래야 하느냐 이거다. 남자들은 섹시한 분위기에서 일하길 좋아한다고? 여자들은? 왜 이시형은 모든 걸 남성 중심으로만 생각하시는 건가? 직장의 꽃이란 말에 지나친 모욕감을 느끼거나 반발심이 생긴다면 한번쯤 그게 자신의 과민 반응은 아닌지 생각해 보는 것도 슬기로운 일이라고? 무슨 이런 ‘슬기’가 다 있나? 그러는 남자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고 싶거든 보다 더 아름답게 자신을 가꾸라고? 이걸 ‘마초 콤플렉스’라 하지 않으면 무얼 ‘마초 콤플렉스’라고 해야겠는가?

“선배를 중히 여기는 것이 직장인의 기본임을 다시 한번 강조해 둔다. 동료와 깔깔대는 시간에 무료하게 앉아 있는 상사에게 차 한잔 대접하는 게 얼마나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되는지를 젊은 여사원은 잘 모른다.”

동의한다. 그렇게 하면 여사원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젊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이시형의 조언이라는 게 죄다 기존의 남녀불평등 구조하에서 권력을 쥔 남자에게 이쁨받아 여자들이 이득을 취할 수 있는 그런 처세술 차원의 것들이다. 그러니 이시형의 책을 읽고 큰 효과를 보았다며 그에게 감사드리는 여성이 많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다. 나는 이시형의 그런 기여까지 무시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게 ‘지식인’이 하는 ‘사회교육’일 수는 없다. 이시형은 좀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 그런 일을 해야 할 것이다.

우정(友情)은 남자에게만 있나?

이시형의 ‘마초 콤플렉스’는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는 그 문제의 『중앙일보』 칼럼을 쓰기 오래전부터 그걸 드러내왔다. 그는 『조선일보』 1998년 2월 6일자에 쓴 <아버지 세대를 배워라>는 제목의 칼럼에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요즈음 신문 방송의 얄팍한 처방들을 듣노라면 귀가 간지럽다. 얼마나 가장이 나약했으면 남편 기살리기 이야기가 나올까? 제왕으로 모셔라. ‘당신이 최고예요!’ 아내가 이 말을 한다고 입이 헤벌레 벌어져 기가 살아난다면 세상에 그것도 남자인가. 하늘에 계신 할아버지가 웃는다. 요즈음 젊은 아버지가 한국남자 망신 다 시킨다. …… 냉방에 하도 춥고 배고파서 밤새 떨다 보니 이빨이 아프긴 했지만, 그래도 아침엔 툭 털고 일어나 찬물 한잔에 길을 나섰던 아버지 세대를 생각하라. 이럴 때일수록 고개를 쳐들고 눈을 부릅뜨고 내 가족은 내가 책임진다는 의지를 보여야 할 때 아닌가.”

지금 이시형은 차원의 구분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 이 말은 그가 개인 상담 차원에서 해줄 수 있는 말이다. 개인 차원에서 해주는 말과 ‘사회교육’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 세상 모든 남자들이  다 이시형처럼 능력 있고 배짱 있고 박력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아내의 위로와 격려를 받음으로써 잃었던 기를 되찾을 수 있는 그런 남자도 있을 수 있다. 그런 남자가 한국 남자 망신 다 시킨다고 말해선 안 된다. 왜 이시형은 이 세상 모든 남자가 다 ‘마초’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시형이 ‘우정’을 남자들만의 전유물인 양 말하는 것도 듣기에 민망하다. 어찌나 민망한지 이시형이 기초적인 사회과학 개론서들을 좀 읽었더라면 하는 아쉬움까지 든다. 내 말이 너무 심한가? 그렇지 않다. 나는 여성들의 ‘우정’이 남성들의 ‘우정’에 비해 약하거나 모자란다면 그건 남성우월주의적 사회 구조와 관행에 그 책임이 있는 것이지, 우정은 남성들만의 것이라는 식의 발상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이시형의 다음과 같은 주장엔 결코 동의할 수 없다는 말이다.

“남자들은 애정보다 우정이 먼저다. 그리고 우정을 잘 키워 나간 사람만이 진실한 애정을 경험할 수 있다. 친구끼리의 돈독한 우정의 경험 없이 이성 간의 애정은 꽃필 수 없다. 서로를 믿고, 아끼고, 의지하고, 배려하며, 충성하고, 희생하고, 봉사하는 ……. 우정 속에는 모든 인간 관계의 기본 요소가 다 담겨 있기 때문이다. 건전한 우정의 경험 없인 어떤 인간 관계도 불가능하다. 하물며 이성 간의 애정이랴. 남자끼리 몰려간다고 질투나 불평을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들에겐 새로운 애인보다 낯익은 친구가 더 소중할 수도 있다. 애인을 위해 친구를 소홀히 할 순 없다. 저 남자들이 애인을 빼앗아 간다고 생각지 마라. 저들로부터 남자를 빼내 온 사람이 누구인데. 이야말로 적반하장이다. 애정은 우정의 방해자다. 적당히 함께 하고 다시 돌려 줘야 한다. 욕심은 금물이다.”

‘여자의 세계’는 이해하기 쉽나?

왜 이시형은 반대의 경우는 상정하지 않는 건가? 남자에게도 여자끼리 몰려간다고 질투나 불평을 하지 말라고 말할 수는 없는 건가? 내가 이시형의 어법을 그대로 흉내내 남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면, 이거야말로 나라 망칠 짓이란 말인가?

남자들이여, 여자들에겐 새로운 애인보다 낯익은 친구가 더 소중할 수도 있다. 애인을 위해 친구를 소홀히 할 순 없다. 저 여자들이 애인을 빼앗아 간다고 생각지 마라. 저들로부터 여자를 빼내 온 사람이 누구인데. 이야말로 적반하장이다. 애정은 우정의 방해자다. 적당히 함께 하고 돌려줘야 한다. 욕심은 금물이다.

남자가 느닷없이 밤중에 친구들이 있는 술집으로 나오라고 불러낼 때 여자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이시형이 제시하는 ‘정답’을 들어보자.

“바로 이 대목이 여자에게 이해시키기 힘든 부분이다. 하지만 내 충고는 차려 입고 나가라는 것이다. 틀림없이 그 악당들은 함께 낄낄거리고 앉아 있을 게다. 잊지 마라. 밝은 표정을 지어야 한다. 그 남자는 녀석들 앞에서 재고 싶은 과시욕이 있다는 것도 잊지 마라. 그리고 남자들의 이런 끈끈하고 깊고 무거운 우정이 앞으로 우리 둘이 어려울 때 큰 힘이 되어 줄 것이라는 점 또한 잊지 마라. 남자들은 친구 세계 속에 깊이 뿌리를 내려야 앞으로의 험한 세파를 넘는 데 큰 힘이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깊은 정만이 아니다. 사회적인 기능면에서도 현실적으로 중요한 게 남자의 우정이다. 그런 면에서 여자의 우정은 순수하다. 오직 정만으로 얽혀 있으니까. ‘남자의 세계’란 걸 이해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세계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아량은 있어야겠다. 우정을 소중히 여기는 남자가 애정 또한 소중히 여긴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내가 소중해? 친구가 소중해?’ 농담이라도 이 말은 삼가야 한다.”

아니 ‘여자의 세계’란 건 이해하기가 쉽나? 하지만 남자에게도 그런 세계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아량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우정을 소중히 여기는 여자가 애정 또한 소중히 여긴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내가 소중해? 친구가 소중해?’ 남자는 행여 농담이라도 이 말은 삼가야 한다.

이시형의 ‘입시 전쟁 예찬론’

이시형의 ‘마초 콤플렉스’는 비단 남녀관계에서만 드러나는 건 아니다. 그의 ‘마초 콤플렉스’는 ‘경쟁 예찬론’으로 이어진다. 한국의 살인적인 대학 입시 경쟁을 예찬한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멀리 갈 것 없다. 바로 여기 있다. 이시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입시는 그야말로 전쟁이다. 하지만 그만큼 우리 경제 성장도 아직은 가파른 상승 곡선이다. 입시에 시달려야 하는 학생들에겐 좀 미안한 이야기지만 이대로 좀더 갔으면 좋겠다. 한데 이게 그리 멀지 않을 것 같다. 대입 경쟁률은 해마다 떨어지다가 2002년엔 드디어 역전, 학생보다 정원이 많아진다. 벌써 대학생 비율이 미국 다음이다. 난 이 점이 걱정이다. 내 아마추어 감각엔 어쩐지 필리핀 생각이 자꾸 떠오르기 때문이다. 경제 발전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국민 개개인이 근면하고 도전적이며 상향지향적이어서 사회 전반에 활력이 넘쳐야 한다. 이것이 발전의 원동력이다. 난 우리 젊은이들에게 이런 도전심을 길러주는 데 수험 공부의 체험이 큰 몫을 하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다. 입시는 개인의 성장 촉진제로서만이 아니라 한 나라의 발전 요인으로서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

이 놀라운 단순성! 나는 이시형이 이런 무모한 주장을 과감하게 하시는 가장 큰 이유가 너무 자신의 경험에 매몰돼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는 자신의 입지전적인 성공에 감격하고 도취한 걸 아닐까? 이어지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들으니 아무래도 그런 생각을 지울 길이 없다.

“우리가 대학입시를 치르던 53년은 한국전의 와중이었다. 병역 보류라는 특전 때문에 의과 대학은 경쟁이 더 치열했다. 거길 뚫은 것이 이른바 ‘출세’를 가능케 한 밑바탕이 되어 준 것이다. 난 이점에서 한국의 수험 경쟁이 많은 젊은이에게 코리안 드림을 이룰 수 있는 관문을 열었다고 확신하고 있다. 수험 경쟁이 없었던들 시골 두메에서 보리죽으로 겨우 연명이나 하던 나에게 어떻게 예일 대학 유학의 문이 열릴 수 있었겠나! 따지고 보면 오늘의 나의 모든 영광은 -- 남들이 보기에 하찮은 것일지라도 -- 수험 경쟁에서 비롯된 것이다. …… 희망적이고 낙관적인 국민성, 온 국민 중산층 형성의 배경이 수험이라는 경쟁 체제에서 비롯된 것을 간과해선 안된다. …… 코리안 드림은 멀지 않은 것에 있다. 그리 높지도 않은 곳에 있다. 조금만 열심히 뛰면 잡을 수 있다. 수험 공부가 우리에게 코리안 드림의 실현을 약속해 주고 있다.”

아니 ‘사회 교육’을 하시겠다는 분이 그렇게 자기 자신만 생각하시면 어떡하나? 그 살인적인 경쟁에서 낙오하는 더 많은 학생들을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무리 ‘마초’가  패배자들에겐 눈길도 주지 않는다곤 하지만, 이건 해도 너무 하는 것 아닌가? 그래도 이건 약과다. 그는 이어 살인적인 대학입시 경쟁이 가져다주는 더 큰 혜택에 대해 말씀하신다.

수험 경쟁은 수험생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다. 온 가족이 희생적으로 참여하는 가족 전체의 공동 사업이다. …… 이 점에서 한국의 가족 관계는 자랑스런 자산이다. 실제 세계 석학들은 이 점을 부러워한다. 이렇게 끈끈하고 농밀한 가족 관계는  다른 나라에선 보기 드물기 때문이다. ……  아이에 대한 끝없는 애정과 후원, 헌신적인 희생은 서구 가정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우리 가족의 이러한 힘은 수험 전쟁에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가족 수험 체제는 우리 가족의 자랑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러한 체제를 가능케 하는 또 하나의 원인이 있다. 그렇게 공부한 아이가 자라 출세하면 그 은공을 부모에게 갚은 ‘효’라는 아름다운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만약 이 아이가 출세했다고 부모를 무시하거나 거들떠보지 않는다면 헌신적 희생을 할 부모도 줄어들 것이다.

이시형의 창의성은 대단하다

솔직히 이시형의 주장이 매우 창의적이라는 건 인정해야겠다. 모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 그리 좋게 이야기한다는 건 용기만으론 되는 일이 아니다. 창의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시형의 창의적인 이야기를 더 들어보자.

“쓰다 보니 수험 경쟁 예찬론이 되어 버렸다. 물론 우리의 수험 체제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러나 가족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긍정적인 쪽도 무시할 순 없다. 다 큰 아이를 지나치게 의존적으로 만들 위험은 여러 학자들이 지적해왔고 나 역시 그래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험 공부를 둘러싼 가족 예찬론을 편 것은 긍정적 의미도 있다는 걸 잊지 말자는 뜻에서다. 최근엔 엄마들의 나들이가 너무 눈에 띈다. 점심 식당은 주부들로 초만원이다. 헬스, 문화 센터, 그리고 골프장에까지 아줌마 부대가 아주 휩쓸고 다닌다. 단체 국내외 여행도 주부들 모임이 단연 더 많다. 교육 마마가  갑자기 ‘내 생활!’ 하며 기치를 바꿔 들고 나온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다. 설마하니 수험생을 집에 두고 나온 건 아니겠지.”

이건 참 이해하기 힘든, 이상한 말씀이다. 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수험 공부를 둘러싼 가족 예찬론을 편 것은 긍정적 의미도 있다는 걸 잊지 말자는 뜻에서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가? 그러니까 ‘지금 이대로가 좋다’는 건가? 아니면 바꾸긴 바꿔야 하는데, 그런 좋은 점도 있으니 좀더 즐거운 기분으로 인내하라는 말씀이신가? 그러나 다음 말을 들으니 그는 아무래도 ‘지금 이대로가 좋다’는 쪽인 것 같다.

“여린 감성이 입시라는 중압감에 시달려 피기도 전에 상처를 받는다는 건 애처로운 일이다. 하지만 우린 여기서 좀더 대국적으로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수험 경쟁이 없었더라면 이 아이들에겐 달리 문제가 없었을까? 해답은 간단치 않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문제를 일으킨 그 아이들은 이미 정서적으로 그 같은 소지를 안고 있었다는 것이다. 성격적으로 이미 취약점을 안고 있는 아이들이다. 이들은 작은 스트레스에도 적응을 잘 못한다. 입시가 아니라도 상처받기 쉬운 아이다. 이들의 적응 문제를 수험  경쟁 탓으로만 돌릴 수 없다는 것이 전문가의 견해다. ……  공부 스트레스를 못 이겨 정서적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는 전체의 1%도 채 안 된다. 나머지 99%는 잘 견뎌낸다. 그리고 이걸 이겨내는 것만으로도 인생에 참으로 소중하고 값진 체험이 된다. 수험 제도 폐지론도 등장하고 있다. 완화라도 되면 아이들 정서 발달을 위해 좋겠다고들 한다. 그 몇 안 되는 아이들을 위해 폐지? 완화? 그런 제도가 현 시점에서 가능한지도 의문이지만 그런다고 아이들 부담이 줄어들진 않는다. 한 마리 양도 희생시켜선 안 된다지만 그건 이론이지 현실은 아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 아이들은 입시뿐 아니라 다른 데서도 상처를 받을 아이들이다. 연애, 취업 …… 앞으로의 인생 여정을 생각해보라. 산 넘어 산이다. 지금부터 훈련을 쌓는 게 오히려 좋을는지 모른다. 역설적이지만 수험 공부는 아이들 정서 교육에 오히려 도움이  된다. 그리고 탈선을 방지하는 데도 큰 몫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이미 지적한 바 있다. 고3병이니 해서 앞에서 말한 적응상의 문제가 없는 건 아니지만 탈선 예방을 위해 치르는 값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방종으로 흘러 자칫 젊음을 망치기보다 그래도 공부에 매달리다 고3병에 걸리는 게 낫지 않느냐.”
이시형에겐 일관성이 없다

다시금 입이 벌어지게 만드는, 놀라운 창의력이 아닐 수 없다. 만약 이시형이 이 창의적인 주장을 계속 고집한다면, 아주 바람직한 사회적 논쟁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하여 이시형의 주장이 우리 사회의 상식이 되거나, 아니면 이시형이 더 이상 그런 창의적인 주장을 하시지 않게 되는 그런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게 돼 있다. 왜? 이시형은 듣는 사람에 따라 말을 전혀 달리 하기 때문이다.

이건 결코 비아냥이 아니다. 이시형을 이해하고자 하는 선의(善意)의 결론이다. 나는 이시형이 쓴 책들을 거의 모두 정독(精讀)하면서 의외로 일관성이 약하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그게 왜 그런가 하고 깊이 생각해 봤더니 각  책이 겨냥하는 주요 독자층이 다르더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위와 같은 창의적인 주장은 1996년 12월에 낸 『그래도 대학은 가야지: 젊은 부모를 위한 미래 사회의 인재 키우기』 라는 책에 실린 것들이다. 자식을 좋은 대학에 보내고자 안달하는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해서 쓴 책이다. 그러니  그 책에선 대학입시 전쟁을 ‘긍정’해야지 어떡하겠는가?

반면 그가 거의 같은 시기인 97년 1월에 중판을 낸 『여성 20대 나를 바꾼다』는 주요 독자층이 대학을 나오지 않은 직장 여성들일 게다. 놀랍게도 또는 당연하게도, 이시형은 이 책에선 대학입시 경쟁에 대해서 지극히 비판적이다. 그는 “학교 콤플렉스는 참으로 한국적이다. 이 문제에 관한 한 한국에서 태어난 걸 원망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학력에 관한 한 우리만큼 심각한 곳은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어디 그뿐인가. 그는 “살벌하리만큼 치열한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인정은 메말라지고 심성도 거칠어졌다”는 진단까지 내린다. 그는 더 나아가, 내가 생각하기에도 현실성이 별로 없는, 개혁적이지만 너무 과격한 주장을 내놓으신다.

“우리 교육은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는 대량 획일 교육이다. 개성을 살리는 교육이 아니고, 일정한 틀 속에 집어 넣기만 하는, 개성을 죽이는  교육이다. 이건 썩은 교육이다. 과외비까지 합쳐 세계에서 가장 비싼 교육비를 투자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비효율적인 교육을 시키고 있는 것이다. 미국 선진 기업이 한국 박사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도 그래서다. 독창적인 창의력이 뒤떨어지기 때문에 첨단 기업의 선도자로서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 이젠 개성의 시대다. 남과 똑같은 교육, 똑같은 공부로는 특출한 실력가로 성장할 수 없다. 내 생각으로는 이런 교육제도에서라면 고졸이나 중졸 학력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믿는다. 그 정도면 사회 생활의 기본 바탕은 마련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일단 그 획일적인 억지 제도의 학교를 떠나면 이제부턴 자유다. 하고 싶은 걸 공부할 수 있다. 그제서야 비로소 공부에 재미가 붙는다. 이젠 억지가 아니고 자기 의지로 결정한 일이기 때문이다. 자기 취미와 적성, 능력을 살려 선택한 길이기에 하는 공부도 신나고 재미있다. 일터에서 배우는 건 더욱 효율적이다. 이론이 아닌 실전을 겸한 공부이기에 더욱 생동감이 있다. 하고 싶어하는 일이기에 효율도 높다. 남이 하지 않는 공부를 하기 때문에 어렵긴 해도 도전이 있어 더욱 좋다.”

180도 달라진 주장

글쎄, 대학을 나오지 않은 직장 여성들의 기를 살려주시려는 고귀한 뜻은 감동적이긴 하지만, ‘사회교육’을 하시는 분이 대상에 따라 이렇게까지 말씀을 전혀 달리 하셔도 되는지 당혹스럽다. 이시형이 99년 10월에 나온 『21세기를 향한 교육개혁』이라는 책에 쓴 <부모의 과잉이 경제를 망쳤다>는 제목의 글에선 제목 그대로 부모들을 호통치시는 게 듣기에 이만저만 민망한 게 아니다. 교육학자와 교육자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책이라서 ‘오버’하신 건가? 일단 말씀을 듣고 나서 생각해보기로 하자.

“사회·학교·가정이 다 병들었다. 병도 아주 중증이다. 굳이 전문가의 해석을 들을 필요도 없다. 거리에 나서면 저 속에서 애들이 정신착란증을 일으키지 않고 집 찾아 돌아오는 것만으로 고맙다. 가치관의 혼란 속에 불확실성 시대는 모든 사람에게 불안을 심어주고 있다. 선택의 폭이 넓어지면서 그만큼 선택하기도 힘들어졌다. 방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거기다 학교는 또 어떤가. 경쟁과 입시 위주의 교육이 전부다. 인간 교육이란 허울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패배와 좌절 속에 허덕여야 한다. 그렇다고 대학에 들어간 아이에게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다. 명문대 학생 중 80%에게서 노이로제 성향이 나타난다는 보고는 가히 충격적이다. 이제 남은 건 가정이다. 가정이야말로 애들 정서 교육, 인격 함양 그리고 인간 교육을 위한 최후 보루인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가정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오늘의 우리 가정도 병세가 짙다. 아버지는 실종, 엄마는 과잉이다. 엄마는 너무 해 탈이고 아버지는 너무 안해 또 탈이다. 전통적인 엄부 자모의 틀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불과 3년 전엔 “공부 스트레스를 못 이겨 정서적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는  전체의 1%도 채 안 된다. 나머지 99%는 잘 견뎌낸다. 그리고 이걸 이겨내는 것만으로도 인생에 참으로 소중하고 값진 체험이 된다”고 말씀하셨던 분이 “명문대 학생 중 80%에게서 노이로제 성향이 나타난다는 보고는 가히 충격적이다”고 정반대의 말씀을 하시니 정말 충격적이다. 180도 달라진 주장이 아닌가. 그간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계시다가 뒤늦게 발견하신 건가? 어찌됐건 새롭게 변신한 이시형은 이젠 ‘학교 신화’에서 깨어나야 한다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지금까지 우리는 달달 외우기만 잘하는 기계 같은 아이를 키웠다. 그 비싼 과외를 위해 가족의 모든 걸 희생했다. 오직 명문대라는 목표를 향해 전력투구했다. 낡은 지식을 달달 외워 대학에만 들어가면 중류 생활은 보장되었었다. 그만큼 우리는 후진국이었기 때문이다. 불행히, 우리도 웬만큼 선진국을 따라갔다. 이젠 남의 지식, 남의 기술로 승부를 할 수 없다. 우리 독자적인 것이 있어야 하는데, 외우기만 잘하는 꽉 막힌 ‘교육부 지정 수재’에겐 그럴 능력이 없다. …… 분명히 말하자면 이젠 간판의 시대는 끝났다. 세계 시민의 자질을 갖추는 것이 바로 경쟁력이다.”

이시형의 ‘연고주의 옹호론’과 ‘자본주의 옹호론’

과연, 이젠 간판의 시대는 끝났는가? 나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당분간 끝날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시형은 이상주의자인가? 아무래도 그게 아닌 것 같으니 문제다. 그는 지독한 이상주의와 지독한 현실주의를 정신없이 왔다갔다한다. 예컨대, 그는 지독한 현실주의에 근거해, 이 또한 매우 창의적인 ‘연고주의 옹호론’을 다음과 같이 역설하신다.

한국 사회는 관계 사회다. 연과 줄로 얼킨 사회다. 혈연은 물론이고 학연, 지연 등 우리는 수많은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관계 속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어딜 가나 우리는 일단 관계 있는 사람, 아는 사람부터 찾는 습성이 있다. 또 그래야 일이 잘 풀린다. 흔히 듣는 이야기지만 ‘줄’이 없어, ‘빽’이 없어 출세를 못 한다고들 한다. 실력은 있는데, 천만에! 줄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실력 있는 사람은 못된다. 이것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만고의 진리다. 대통령이 사람을 써도 아는 사람을 쓴다. 엇비슷한 조건이라면 자기가 아는 확실한 사람을 쓴다. 이건 미국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차별이라고 흥분할 일이 아니다. 생각해보면 원리는 간단하다. 그 중요한 나라 일을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어떻게 믿고 맡길 수 있을 건가. TK니 PK니 하는 소리가 역겹다. 물론 그것이 공평한 일은 아니다. 부조리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게 현실이다. 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현실이라고 해서 무조건 받아 들여야 하나? 정치인이나 기업가는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시형은 스스로 ‘사회교육’을 하겠다고 나선 ‘지식인’이 아닌가? 이시형은 과거엔 어땠을망정 너무 수구적인 게 아닌가? 그의 열렬한 ‘자본주의 옹호’도 말 자체로선 타당할 수 있으나 ‘맥락’으로 보아 그가 과연 그렇게 열을 내야 할 주제인지에 대해선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그는 『중앙일보』 98년 4월 7일자에 쓴 <가진 사람 분풀이식 매도 말자>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바 있다.

“요즘 우리는 호화 사치족을 규탄, 매도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 …… 우리는 형편이 어려우면 그만 잠재적인 평등주의 심리가 발동한다. 더 나아가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 나라고 왜 못살아. 이런 기분은 사회정의상 그럴 듯하게 들린다. 하지만 이건 참으로 위험한 발상이다. 이런 사회주의·전체주의는 자본주의에 완패하지 않았는가. 이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있는 사람들 작태가 꼴사납기도 하고 비판받아야 할 점도 물론 많다. 그들의 절제가 아쉽다. 하지만 매도는 말자. 좀더 큰 눈으로 보자.”

이시형이 아주 드물게나마 경제정의를 부르짖는 칼럼을 쓰면서 그런 주장을 하시면 가슴에 쏙 와 닿을 텐데 그런 경우는 전혀 보지 못한 것 같아 그게 아쉽다. 그는 99년 4월에 낸 『경제는 심리다』라는 책에서도 빈부격차에 대해 불만이 많은 사람들은 미국을 배워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역설하신다.

“미국 개인이 모두 부자냐? 천만에다. 일본에 비하면 미국 개인은 거지나  진배없다. 국부의 40%가 불과 1% 사람에게 편재되어 있고 국민의 15%가 의료 보험 혜택도 못 받고 있는 빈민층이다. 이 점에선 우리보다 더 못하다. American dream? 이것도 말이지 그 꿈을 이룬 사람은 기적이다. 그래도 미국 시민들은 세계 최강, 갑부 국가임을 자랑스럽게 떠들고 있고 또 그렇게 느끼고 있다. 이것이 미국의 자신감이요 저력이다. 이들은 쇼핑몰에서 쇼핑할 수 있는 것만으로 지상의 행복이다. 질이나 유행은 뒷전, 쑤겨라도 거기서 쇼핑할 수 있는 것만으로 고맙게 생각한다. 빌 게이츠 덕분이라고 고맙게 생각한다. 부의 편재라고 이빨을 가는 사람도 없다. 미국의 꿈을 이룬, 성공한 사람으로 축하한다. 나도 언젠가는 그렇게 된다는 꿈을 꾸면서.”

이 정도면 왜 삼성에서 이시형을 위해 사회정신건강연구소를 만들어 주었는지 알 것도 같다.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인지, 이시형은 지칠 줄 모르는 정력을 뽐내면서 ‘배 아파 하지 말자’ 캠페인을 전개하신다. 그는 대구 『매일신문』 2000년 6월 26일자에 쓴 <정서적 자본주의>라는 제목의 칼럼에선 ‘신흥졸부의 작태’를 잠시 이야기한 다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우선 ‘같이 잘 살아야지, 제가 뭔데’ 하는 생각부터 지워야 한다. 같지가 않다. 과정이 어떠했건 그는 지금 부자다. 고로 나보다 잘 살 자격이 있다. 배가  아파도 이걸 인정해야 한다. 분수대로 살아야 한다. 그렇다고 서러워 해서도 안된다. 호화·사치라지만 나와는 생활감각이 다르다는 것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 부자는 있어야 된다. 있는 사람이 써야 시장이 돌아간다. 세금도 많이 낼 것이고 기업도 일으켜 일자리도 만들어낸다. 존경까진 안해도 좋다. 그러나 감사히 여길 줄은 알아야 한다. 노력한 대가를 받아야 하는 것이 공평한 사회다. 똑같이 잘 살아야 한다는 한국적 악평등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 형식 차원이 아닌 정서적 차원에서도 자본주의가 정착되어야 비로소 세계시장에 나갈 자격이 있다. 오해말자. 낭비하자는 건 아니다. 큰 장사를 하자는 거다.

그러나 이시형이 자본주의 정신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일관성 결여’라고 하는 이시형의 치명적인 약점이 바로 여기에서도 나타난다. 그가 갖고 있는 자본주의 정신은 그의 지독한 애국심 또는 ‘국가주의’의 하부 개념일 뿐이다. 다음과 같은 발언을 어찌 ‘자본주의 예찬론자’의 발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인가?

“도로 공사 현장에 집 한 칸이 달랑 남아 공사가 중단된 채 있다. 저 집 주인은 누구일까. 무슨 배포일까. 억울한 사연이 있겠지, 해서 누구도 말은 못 하지만 이건 정말 역겨운 일이다. 물론 내 몫은 챙겨야 한다. 당연한 권리다. 다만 권리란 내 이웃, 나라를 지키기 위해 내 생명도 버릴 수 있는 의지까지  포함된다는 사실도 유념하자. 함께 더불어 살아야 다 잘산다.”

이시형의 매카시즘

내가 이시형을 가리켜 ‘수구적’이지 않느냐 하는 건 어느 한 가지 측면만을 보고 그런게 아니다. 나는 때때로 그의 ‘다혈질’이 겁난다. 그는 『경향신문』 1994년 8월 5일자에 쓴 <그들을 꼭 잡아야 한다>는 제목의 칼럼에선 시위 학생들의 파출소 습격 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건 말이야 바른 말이지, 흥분해 마땅한 그런 사건이었다. 그러나 흥분해 마땅하다고 해서 애꿎은 사람의 인권까지 함부로 건드릴 수 있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닐 게다. 그 점에서 이시형의 칼럼은 전혀 사려 깊지 않았다.

우선 이시형은 그 사건과 관련, “그것은 민주주의의 조곡이었다. 세계시민 앞에 우리의 민주역량의 한계를 보여준 국치(國恥)의 날이었다. 국민의 자존심을 말살시킨 비극의 장이었다”는 진단을 내린다. 그리고 “그때의 솔직한 국민정서로는 치안총수가 자결이라도 하는 장렬한 심정으로 제복을 벗어 국민앞에 바치고 부둥켜안고 울기라도 하고픈 심정이었다”고 토로하신다. 그리고 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이들이 노린건 무엇인가? 그것은 수령에 대한 충성심의 표현이다. ‘우리는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다’는 징표를 보여주기 위함일 것이니 그들의 입을 통해 아주 공개적으로 북을 향해 외치게 하라. 그리고 이제 김일성 상주가 되겠다는 그들에게 6·25 상처를 안고 통한의 세월을 살다간 제 애비, 할아비 묘소참배나 했는지도 물어보라. 고얀것들!”

정말 고얀 것들이 아닐 수 없다. 다소 문제가 있다손 치더라도 백보 양보하여 이시형의 분노에 동참하기로 하자. 그러나 “친북 인사들이 민주의 탈을 쓰고 정부의 요직을 비롯, 사회 각계 요소에 포진하고 있다더니 그래서 본격적인 수사를 못하고 있는건지”라는 따위의 표현엔 결코 동의 못하겠다. 이건 고약한 매카시즘이다. 절대 이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안 된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 파출소를 습격한 학생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시형은 정녕 그걸 모르시는 건가?

학생들의 시위에 관한 한, 이시형의 이데올로기적 수준은 『한국논단』급이다. 그는 『중앙일보』 96년 8월 21일자에 실린 <긴급좌담: 한총련 폭력시위 이렇게 본다>에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문민정부 들어와 경찰의 정보능력이 약화된 것이 걱정스럽습니다. 좌경세력은 통일이라는 당의정으로 포장돼 있습니다. 그 세력이 일반 학생들과  격리됐다면 이번과 같은 폭력시위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경찰의 정보능력이 약화된 걸 걱정하는 건 좋지만, “좌경세력은 통일이라는 당의정으로 포장돼 있습니다”라는 식으로 말씀해선 안 된다. 미국에서 살 만큼 살고 공부도 많이 하신 분이 그런 식으로 말씀하면 어떡하나?

‘북한’엔 피가 끓는 이시형의 다혈질

‘좌경세력’이나 ‘북한 문제’만 나오면 이시형은 피가 끓어오르는 모양이다. 이성을 너무 자주 상실하시기에 하는 말이다. 그는 『경향신문』 1994년 7월 17일자에 쓴 <평양의 「스톡홀름 증후군」>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선 “대전후 소련군틈에 끼여 평양에 입성할 때만 해도 김일성이가 가짜라는 건 세상이 다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총칼로 위협하고 때로는 회유하면서 드디어 자신을 신격화하지 않았던가”라고 말씀하시는데, 그렇게 박한 지식을 함부로 과시하시는 건 영 보기에 좋지 않다. 이데올로기로 보아 이시형과 마찬가지로 『조선일보』와 『한국논단』급인 서강대 정외과 교수 이상우가 쓴 『북한정치입문: 김정일 정권의 특성과 작동원리』 개정증보판(나남, 2000)의 55쪽을 읽어보시기 바란다.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경력은 이젠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는 사실로 이상우와 같은 분에 의해서도 받아들여지고 있다.

정신과 의사가 남북문제에 대해 신문 칼럼을 쓰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최소한의 정보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북한’이라고만 그러면 피가 끓어오르는 자신의 ‘다혈질’을 토로하기 위해 쓰는 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례를 계속 몇 가지 지적하겠다. 이시형은 ,『경향신문』 94년 8월 19일자에 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라는 제목의 칼럼에선 북미회담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거만을 떨면서 나타난 북한대표의 그 두꺼운 얼굴을 지켜봐야 했던 우리 심경은 처절했다. 어쩌다 저런 꼴을 세계에 보여야만 했을까. 한 핏줄을 타고난 우리 얼굴이 뜨겁다. …… 당근과 채찍이라더니 오히려 북한의 공갈과 회유에 굴복, 겨우 합의문이 발표되었다. …… 평화를 볼모로 북한은 짭짤한 재미를 본 셈이다. 체면이고 뭐고 그 방법밖에 달리 길이 없는 북한도 딱하지만 그 억지에 끌려 다닐 수밖에 없었던 세계도 딱하다. …… 세계 자유시민이여, 북한의 세뇌에 더 이상 넘어가선 안된다. 백번을 우겨도 콩은 콩이라야 한다. 그리고 명심하라. 세계는 지금 도덕적 기반 위에 상식적인 대화 상대가 아닌 전과자(前科者) 집단을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시형은 『경향신문』 94년 9월 2일자에 쓴  <그렇다면 우리도 핵(核)을…>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세계자유시민이여! 한국전쟁을 상기하라. 평화를 위해 수많은 세계 젊은이가 한반도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라. 그리고 그 전쟁의 원흉들은 지금도 적화통일을 위해 호시탐탐 남쪽을 노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 핵 한두개쯤 불문에 부치자는 건가. 설마 남쪽을 희생양으로 만들겠다는 속셈은 아니겠지. …… 해답은 오직 한가지. 우리도 핵을 갖는 일 뿐이다. 핵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핵뿐이다. 핵 앞엔 어떤 전술, 전략도 무용지물이다. 이것은 우리의 생존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그리고 유일한 방어수단이다.”

이시형은 『경향신문』 94년 12월 23일자에 쓴 <「북·미접촉」과 한국>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선 ‘북·미접촉’에 대해 끝에 가서 “지나친 자학은 말자. …… 흥분도 말아야  한다. …… 입술을 지긋이 깨물고 잘 참고 견뎌내야 한다”는 등 좋은 말씀을 많이 하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시형의 칼럼 대부분을 ‘자학’과 ‘흥분’으로 채운 게 면책되는 건 아닐 게다. 이시형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북핵이 뜨거운 감자로 국제무대에 등장한 이래 우리 심경은 참으로 착잡하다. 어거지와 생떼에 온 세계가 끌려다녀야 했던 상황도 그렇고 한 핏줄 동족의 그 뻔뻔스런 얼굴을 지켜봐야 하는 우리로선 낯이 뜨겁다. 때로는 전쟁의 공포에 떨어야했고, 또 때론 북쪽대표의 그 거드름에 실소를 터뜨리기도 했다. 이젠 미·북회담으로 무대는 좁아졌지만 여전히 우리의 자존심은 상처 투성이다. …… 딱하긴 미국도 마찬가지. 세계 유일의 초강국이 한줌 안되는 나라의 생떼에 끌려다니며 굴욕적 회담을 펼치고 있다니 말이다. 푸에블로호 사건에서 바로 엊그제 헬기격추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자제와 인내로 일관해왔다. 어쩌면 여기에 미국의 위대성이 있는지도 모른다. 명분보다 실리, 냉엄한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 미국의 자세는 지켜봐야 할 대목이다. 다만 걱정은 미국이 북한의 생리를 얼마나 잘 알고 회담에 임하고 있는지다. 어떤 약속도 필요에 따라선 언제든지 팽개쳐버릴 수 있는 북한의 행태를 잘 알고 있겠지. 이건 단순한 우리의 노파심이 아니다. 우리에겐 생존과 직결되는 절박한 문제다. 우리는 너무나 많이 당해왔기 때문이다. …… 생떼와 억지, 상식이 통하지 않는 나라, 이 지구상에 이런 나라는 일찍 없었다.”

제발 사명감을 자제해주시라

‘마초 콤플렉스’라는 게 꼭 남녀관계에만 작동하는 건 아니다. 나는 이시형의 ‘마초 콤플렉스’가 사회 전반을 보는 데에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나쁘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나는 다양성을 사랑한다. 그러나 나는 이시형이 ‘한국사회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정력’으로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지식과 체험을 사회로 돌려주자’는 사명감을 자제해 주셨으면 한다. 물론‘지식인으로서의 사명’도 더 이상  느끼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다.

‘마초’ 남성을 좋아하는 여성이 있을 수 있다. 또 어떤 여성들은 그걸 좋아하건 좋아하지 않건 ‘마초 콤플렉스’가 사회를 지배하는 것에 대해 문제 의식을 못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마초 콤플렉스’가 사회를 지배하는 것에 대해 고통을 느끼는 여성이 있을 수도 있다. 이 여성들이 그러한 사회에 저항하고자 할 경우 그들의 삶은 엄청나게 피곤할 것이다. 그런데 이시형은 사회적으로 매우 영향력이 있는 정신과 의사이자 지식인으로서 ‘사회 교육’ 차원에서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

나는 그런 사태를 그대로 방관할 수는 없다. 그 어떤 고상한 명분은 제쳐놓더라도 우선 당장 나의 사랑하는 두 딸이 ‘마초 콤플렉스’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기를 원치 않을 경우에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딸이 어느 직장에서 ‘꽃’으로서 ‘섹시함’을 과시하길 바라지 않는다. 또 나는 내 딸이 직장에서 무료하게 앉아 있는 상사에게 차 한 잔 대접함으로써 큰 도움을 얻길 바라지 않는다. 나는 내 딸이 남자들과 똑같은 원칙과 기준에 의해 능력을 인정받길 원한다. 나는 내 딸들의 장래를 생각하는 나의 ‘가족 이기주의’는 정당한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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