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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죄선일보 > 월간 인물과사상이 파헤친 죄선일보 - 1998년4월호~2000년9월호


이 름 홍세화
제 목 왜 고소당하기인가?
왜 고소당하기인가?

홍세화

‘언론’의 장(場)보다 법정과 더 친숙한 기자?

나는 {한겨레신문}의 「빨간 신호등」 칼럼난에 <나를 고소하라!>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한국과 프랑스에 비슷한 재판이 열렸던 우연이 나로 하여금 그 칼럼을 쓰게 했다. 한국에선 재판 결과와 관련하여 네티즌들이 중심이 되어 ‘벌금 대신 물어주기 운동’이 일어났던 바, 이에 연대하기 위해서도 그 칼럼을 써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한국 사회에서 극우 헤게모니의 극복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행위이기도 했다. 또한 글쓰기를 사명으로 알아야 하는 기자가 ‘언론’의 장(場)에서 비판, 논쟁하는 대신에 법정으로 달려간, 내 판단으로는 비상식적인 일에 대해 프랑스 문인들의 표현법을 빌려 비판한 것이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 “나를 고소하라!”는 글 제목은 내 정서에 어울리는 게 아니다. 내 정서는 비유컨대, 파도치는 바다보다는 고요한 호수 쪽을 택한다. 그러나 세상은 간단치 않았고 나에게 순탄치 않은 삶을 요구했다. 하지만 순탄치 않은 삶이 꼭 심성까지 바꾸는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죽을 때까지 법 없이 살 수 있기를 바래왔던 사람이다. 그런 내가 “나를 고소하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나는 희생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조키스트가 아니다. 실로 새 천년부터는 사상검증 같은 시대착오적인 행위가 없어져야 하겠기에 외친 말이다. {미디어 오늘}에 의하면, ‘고소하라고 했으니 고소하겠다’는 {조선일보} 기자의 의사 표명이 있었다고 한다. 나는 칼럼을 쓰면서 실제로 고소당할 가능성을 50%정도 예상하기도 했다. 한국은 프랑스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다. 장 마리 르펜이 프랑스의 문인들을 고소했다는 얘기는 아직 듣지 못했다. 아마 영영 듣지 못할 것이다. 프랑스의 토론문화는 극우에게도 토론과 논쟁을 요구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소송당하기’의 목표지점은 {조선일보}라는 조직에 있지 {조선일보} 기자 개인에게 있지 않다. 따라서, 내가 유의하는 점은 {조선일보}가 다만 하수인을 내세워 싸움의 본질을 흐리게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의 이른바 명예훼손에 관련된 재판 결과에 대하여 나는 비판하거나 딴죽 걸 의사는 전혀 없다. 그리고 {조선일보} 기자 개인에게 특별한 감정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럴 이유가 있을 턱이 없다. 나는 {조선일보} 기자 개인을 극우 세력의 대표 조직인 {조선일보}의 ‘하수인’이며 동시에 ‘희생자’로 보고 있을 뿐이다. ‘희생자’라는 말에 의아하게 생각할 독자도 있겠다.

‘왜곡된 한국 사회가 낳은 희생자’

{조선일보} 기자는 왜곡된 한국 사회가 낳은 가해자인가, 아니면 희생자인가? 이 질문은 실상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대부분의 {조선일보} 기자를 나는 희생자로 보고 있다.    

사회 안에 살면서 개인은 조직으로부터 어디까지 독립된 존재가 될 수 있는가? 즉, 조직과 조직 안에 몸담고 있는 개인 사이의 갈등. 특히 조직논리와 개인의 양심이 서로 맞지 않을 때에 조직원인 개인은 스스로 적극적인 조직원이 되고 마는가, 아니면 소극적인 조직원으로 남을 수 있는가? 이런 갈등은 어느 사회에서나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한국처럼 획일화된 사회에서 이 갈등은 첨예하고 극단적인 모습을 띄게 된다.

나는 월간 {인물과 사상} 1999년 10월호에서 {조선일보}가 한국 사회에 극우 헤게모니를 관철시키기 위하여 그람시의 헤게모니이론을 어떻게 적용시키고 있는지 밝힌 바 있다. {조선일보}가 최장집 교수의 사상을 검증했던 목적이란 다름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극우 헤게모니를 지키기 위한 것임도 말한 바 있다. 권력과 부의 계속적인 확대와 유지가 {조선일보}라는 조직의 종국적인 목적이고 이를 위한 그들의 주무기는 안보상업주의다. 안보상업주의는 한국 사회에 극우 헤게모니가 관철될수록 힘을 얻는다. 따라서 극우 헤게모니의 관철은 {조선일보}의 조직논리 그 자체다. 극우 헤게모니가 {조선일보}라는 조직 안에서부터 관철되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 있는 {조선일보} 기자들의 행동반경은 어떤 것일까? 나는 {조선일보} 기자들이 모두 김대중 주필의 <간첩이 삿대질하는 공안>({조선일보}, 1999년 11월 27일) 따위의 칼럼에 동의하리라고 보지 않는다. 좌파나 진보에 대해 ‘동의하지 않더라도 인정할 줄 아는’(똘레랑스란 이런 것을 두고 말한다) 우파나 보수라면 김대중 주필이 벌이는 선동에는 동의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김대중 주필에 반대하는 평기자가 있을 때, 그가 취할 수 있는 길에는 어떤 게 있을까? 두 가지 길이 가능할 것이다. 하나는 반대 의사를 표명하는 길이다. 그런데 이미 말했듯이, {조선일보}는 극우 헤게모니가 관철되고 있는 조직이다. 이념적으로 열려있는 조직이 아니다. 따라서 반대의사 표명에 대한 {조선일보}의 반응은 “그래? 그러면 그만둬!” 밖에 없다. 이를 {조선일보} 기자들이 모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반대 의사는 실존적 고민을 통과하지 않고는 뛰쳐나올 수 없고 결국 {조선일보}를 뛰쳐나오는 것으로 끝난다(반대자를 배제시키는 극우 논리의 적용이다. {조선일보}가 바라는 한국 사회의 모습이 바로 이런 것이다).
두 번째 가능성은-대부분이 이 길을 택하는데`-`반대 의사를 표명하지 않고 소극적인 조직원으로 남는 길이다. 이 경우, 처음에는 갈등이 생기지 않을 수 없고 나아가 괴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조직논리와 개인의 양심 사이에 괴리가 있기 때문이다. 조직논리와 개인의 양심 사이의 싸움은, 그러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조직논리 편으로 기울게 된다. 개인들은 조직이 제공하는 당근-편안한 생존과 언론 권력-에 점점 물들게 된다. 그런가 하면, 인간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괴로움을 떨쳐버리고 싶어한다. 그리하여, 조직을 자신의 양심 편으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개인들은 자신의 양심을 내던지거나 조직논리에 자신의 양심을 복속시킴으로써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경향을 갖는다. 소극적이었던 조직원은 차차 적극적인 조직원으로 바뀌게 된다. 그가 원래 갖고 있었던 인간성은 조직의 위력 앞에서 여지없이 파괴되는 것이다. 내가 {조선일보} 기자를 왜곡된 한국 사회가 낳은 희생자라고 말한 것은 이런 배경에서이다.

뒤틀린 한국 인문학의 자화상

나는 예를 들어, 민중당 3인방이 한나라당 안에서 벌이고 있는 활동에 대해 크게 놀라지 않는다. 그들이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는 뜻은 물론 아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행위는 인문학도가 사상검증에 가담했던 일에 비하면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근대 이후 인문학의 기본 정신은 누구나 알다시피 인본주의 정신이다. 계몽철학 시기 이래 인본주의자들은 인간의 기본권을 신장시켜 왔고 특히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교권과 정치권력에 맞서 피를 흘리며 싸워왔다. 그런데 {조선일보} 기자는 배운 인문학 지식을 사상을 검증하는 데에 사용하였다. 사상검증 자체도 그야말로 시대착오적인 일이지만 하물며 인문학도가 동원되어 이에 가담하다니 이런 일은 지구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 요즘 한창 말하고 있는 ‘인문학의 위기’는 오히려 사치스러운 표현이다. 한국 사회에서 인문학이 역할을 제대로 한 적이 있었는지 의심스럽다. 제 역할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인문학에게 위기라니? 잠깐 돌이켜 보자. 일제 시기는 말할 것도 없고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박정희 정권을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인문학자들은 지금까지 극우 헤게모니 앞에서 거의 모두 끽소리도 내지 못하고 입을 봉해 왔다. 자유민주주의가 압살되고 인간의 기본권이 희생될 때, 그리하여 고문이 일상적으로 저질러질 때에도 그들은 발언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극우 헤게모니의 입이 되기까지 했다. 사상검증을 저지르고도 부끄러움조차 모르는 {조선일보} 기자는 한국의 인문학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에 지나지 않는다.

새천년과 극우 헤게모니의 극복

새천년이라고 한다. 우리는 새천년을 맞으면서 동시에 중대한 전기를 맞고 있다. 극우 헤게모니를 끝장낼 것인가, 아니면 극우 헤게모니의 굴레 아래서 계속 신음할 것인가? 국가보안법이나 준법서약으로 계속 세월을 보내야 하고 억울하게 자식을 잃은 어머니들이 계속 천막 농성을 벌여야 할 것인가? 앞으로도 계속 양심수를 양산해 낼 것인가? 북한과 계속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할 것인가? 노동자와 실업자의 생존권을 계속 무시할 것인가? 문자 그대로 봉건적인 호주제를 이대로 둘 것인가? 지역주의는? 권위주의는? ……

극우 헤게모니의 극복은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달려 있다. 특히 인문학이 제 역할을 하는 사회 환경을 이룬다면 극우 헤게모니는 눈 녹듯이 사라질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99년 12월 3일자 르몽드에 실린 대담은 나에게 많은 시사를 던져주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와 {양철북}의 작가이며 금년에 노벨상을 받은 독일의 귄터 그라스가 대담을 나누었다. 대담 제목부터 흥미를 끈다. ‘아가리를 여는 전통(La tradition )’이다. ‘아가리(gueule)’라는 표현은 ‘아가리 닥쳐!’라고 말할 때에 쓰는 단어인데 그 아가리를 여는 전통이 몽테뉴, 볼테르, 디드로 이래의 유럽의 전통이었다는 말하고 있다. 즉, 계몽철학 시기 이후 유럽에 ‘아가리를 여는 전통’이 있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 오늘의 지식인들이 침묵하고 있다며 답답해하고 있다. 지식인들의 ‘아가리를 여는 전통’이 신자유주의의 공세 앞에서 허물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극우 헤게모니의 문제는 갖고 있지 않은 그들이 나는 부러웠다. 당장 신자유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 여유를 갖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피에르 부르디외의 다음 말은 프랑스의 예를 말한 것이지만 한국의 지식인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말하고 있는 듯했다.  

공인되고 잘 알려진 사람들 이외에는 공론의 장에 다가가기가 무척이나 어렵습니다. 내가 이 대담을 시작하면서 당신에게 ‘아가리를 열기’를 바란다고 말했던 것은 오직 공인된 사람들만이 이 서클을 깨부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점잖고 말없는 사람들만 공인되고 또 계속 점잖고 말없도록 공인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발언하기 위해, 단지 발언하기 위해, 발언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까지 내기 위해, (사회가) 인정해 준 상징적 자본을 사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이에 대해 귄터 그라스는 이렇게 화답하고 있는데 한국의 문인계도 그의 비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 같다.

독일 문학계의 젊은 세대들은 계몽주의에 내재한 전통, 즉, ‘아가리를 열고’ 참여하는 전통을 이어가려는 의사도 흥미도 거의 보여주지 않고 있습니다. ……

‘아가리를 여는 전통’ …… 우리에게도 이 전통이 있었다. 직언(直言)이 선비의 전통 중의 하나라면 그게 바로 ‘아가리를 여는 전통’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직언하는 전통을 잃어버렸다. 그 대신에 듣기 좋은 양비론이나 점잖은 말씀들과 현학적인 수사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지금 여기’를 말하지 않고 ‘저기’의 얘기를 빌어서만 하고 있다.

부르디외의 말을 비추어볼 때, 예를 들어, 강준만 교수는 지금 한국에서 ‘아가리를 열고’ 있는 많지 않은 지식인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점잖고 현학적인 지식인들로부터 ‘튄다’는 말도 듣고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튀는’ 칼럼을 썼다고 점잖게 꾸짖을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아가리를 연’ 까닭에 소송당하는 것이라면 나는 이를 즐겁게 받아들일 것이다.

귄터 그라스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내가 ‘진보란 달팽이와 같은 것이다’라고 말했을 때에 대학생들이 아우성쳤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그의 말은 윈스턴 처칠의,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진보가 아니다”라는 말을 상기시킨다. 그렇다. 진보는 달팽이처럼 느린 것이다. 그래도 한국 사회는 꾸준히 진보하고 있다. 나 자신을 예로 들어 쑥스럽지만 내가 고소당하는 정도에 머문 것도 한국 사회의 진보를 말해주고 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네티즌들의 ‘벌금 대신 물어주기 운동’과 ‘고소당하기 운동’은 설령 작아 보이더라도 그것들이 바로 진보라는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걸음 하나하나가 바로 한국 사회 진보의 발걸음들이다. 그 발걸음들에 조그마한 디딤돌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족하고 또 기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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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 가실 분은 참고하세요. 이 글의 주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neo.urimodu.com/bbs/zboard.php?id=choisun_insa&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name&desc=desc&no=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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