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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죄선일보 > 월간 인물과사상이 파헤친 죄선일보 - 1998년4월호~2000년9월호


이 름 한종호
제 목 '박세리 현상' 유감(有感)
한종호(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프로 골프 선수로 이제 20살이 된 젊은 여성이 세계 정상에 서게 된 것, 그것도 한국인이 그런 위치에 도달하게 된 것은 감사한 일이다. 그 과정에서 그녀가 치렀던 혹독한 자기 훈련과 극기, 그리고 맹렬한 프로 근성은 모두 좌절에 빠져 있는 우리 민족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통쾌감을 불어넣을 만하다. 더군다나 기대했던 축구가 무너지면서 잔뜩 쌓여 있는 스트레스의 분출구를 찾지 못했던 상황에서 박세리의 출현은 박찬호를 뛰어넘는 열광을 우리 사회에 끓어오르게 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그녀를 가리켜 `이 시대의 영웅'이라고까지 했으니 박세리가 끼친 사회심리적 공헌은 만만치 않다.

마지막 순간에 연못에 빠진 공을 쳐서 정상 진로에 들어서는 모습은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은유하는 듯한 광경이었다. `그래, 저렇게 물 속에 빠져도 침착하게 신발과 양말을 벗고 결코 포기하지 않는 모습으로 현실을 타개해 나가는 것'이라고 골프의 `ㄱ'자도 모르는 우리들은 속으로 다짐했는지 모른다. 정치·경제·사회 그 어디를 둘러봐도 뚫린 데 없이 막혀 있기만 한 상황이니 그 답답한 심사를 온통 젊디 젊은 여성의 골프채 하나에 건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슬픈 열광'이었다. 프랑스의 문화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가 아프리카의 현실을 보면서 슬픈 열대 (한길사 번역 출간)라는 책을 지었다. 아프리카 문명이 서구의 잣대에 의해 해체되고 야만의 취급을 받으면서 무너져내리는 것에 대한 아픔의 표현이었다. 우리의 박세리 골프 열광도 그런 연장선 위에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는 골프 문화가 없으면 세련미가 부족한 나라가 되고 마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는 셈이다. 골프는 부유층의 운동이어서 위화감을 조성하고, 골프장 설치는 잔디에 대한 화학 관리로 농지를 폐토로 만들어 생명 환경에 피해를 입힌다는 주장은 박세리의 골프채 앞에서 일순 무력해져 버렸다. 그리고 너도 나도 제2의 박세리 꿈을 안고 아이들에게 골프채를 휘두르게 하느라 열을 내고, 백화점마다 박세리를 내세운 상술이 넘쳐나도, 그리고 삼성에서 박세리 이름을 독점해 버린 것을 알고서는 부랴부랴 그 이름을 지우는 어처구니없는 소동이 일어나도 우리 사회는 이런 일체의 현상 앞에서 아무런 논란을 벌이지 않는다. 박세리가 이긴 것이 중요하고, 그것이 우리 사회의 활력으로 변할 것이라는 이상한 미신에 집착하고 있는 집단적인 마취 상태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생각해 보자. 박세리는 프로 선수이다. 그것은 돈을 목표로 하는 스포츠 종사자라는 뜻이다. 골프 공을 몇 번 쳐서 몇 십만 달러를 벌게 해 주는 운동이 과연 온당한 것일까? 그 선수를 상품화해서 온갖 이득을 취할 준비를 하고 있는 상술이 아름다운가? 골프는 과연 우리의 풍토에 맞는 운동인가? 진종일을 쏟아 18홀을 채우는 운동을 국민적 바람을 일으키는 품목으로 내세워도 괜찮은 것인가? 그동안 골프를 입에 담고 싶어 근질근질했으나 주변의 눈치를 봐야 했던 이들이 이로써 자신이 골프 도사임을 내세워 허영을 떠는 것을 곱게 봐 주어야 하는 것인가?

미국에서는 골프가 대중운동이라고 해도 시간이 있지 않으면 칠 수 없는 운동이라고 한다. 최소한 반나절을 소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실정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 있다. 여전히 무수한 사람들이 생존에 허덕이고 있고, 비싼 골프채 한 번 잡아 볼 수도 없는 처지에 있다. 최근에는 일부 부유층들의 골프장에서의 짝짓기가 가정 불화와 불륜까지 낳고 있는 현실은 어떻게 봐야 하는가? 골프장의 잔디를 보존 관리하느라고 화학성 물질이 땅 속에 스며들어 주변의 농토와 토지를 못 쓰게 만들고 있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평소에 환경 문제를 심각하게 논쟁하는 언론들이 골프장의 생태계 파괴 문제에 대해서는 왜 일체 침묵하는가?

언론들의 박세리 보도는 아닌 말로 `오두방정'에 가깝다. 차범근 감독에 대한 띄우기와 죽이기의 패턴은 박세리에 대한 보도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박세리의 주가가 언젠가 떨어지는 날, 언론은 다른 떠오르는 별을 향해 냉혹하게 이동할 것이다. 단숨에 정상에 올려놓았다가, 단숨에 지옥으로 떨어뜨리는 재주를 가진 언론들의 섬뜩한 폭력은 사람이 제대로 자라나지 못하게 만든다. 누가 한 번 관심과 인기를 모으면 자질구레한 식성과 심지어 화장실 습관까지 챙겨서 이러쿵저러쿵 기사화하고, 조금 시들해지면 불도저로 깔아뭉개듯이 인격 모멸과 인간 지우기에 열을 올린다. 그래서 아마 박세리도 속으로는 무척 불안해할지도 모른다. 지금의 갈채가 어느 순간 험악한 화살이나 무정한 무관심으로 되돌아올 것이라는 점을 알 만큼 성숙해 있다면 말이다.

박세리가 기특하다면, 월드컵 축구에 나간 우리 선수들도 기특한 것이다. 월드컵 축구에 아시아 대표의 하나로 나갔다는 것이 어디인가? 그들이 패배했으나 그 치열한 접전과 그로 인한 두려움, 상처, 좌절, 허탈, 슬픔 등을 어루만지는 사회가 되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풀 한 포기 제대로 자라날 수 없는 `인정(人情)의 동토(凍土)'가 되고 말 것이다.

분명히 직시해 보자. 박세리를 그만큼 키운 땅은 미국이었다. 박찬호를 키우고 있는 땅도 미국이다. 차범근이 우뚝 자란 땅은 독일이었다. 조수미도 그렇고, 백건우도 그러하며, 정경화 정명화 정명훈의 기량을 성숙시킨 것도 한국 땅은 아니었다. 안 트리오도 그렇고, 기라성 같은 바둑계 천재들의 일본 유학은 또 어떠한가? 우리는 인물은 내놓고 사람은 못 키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차직하면 매장하고, 조금 눈에 뜨이면 정신없이 올려놓고 하는 식의 되풀이로는 인간을 인간답게 성숙시키면서 우리 공동체 모두의 역량을 훌륭하게 자랄 수 있도록 하지 못한다.

`박세리 현상'은 충분히 이해가 갈 만한 상황에서 터져나왔다. 그만큼 우리사회의 기력이 기진해 있고, 한꺼번에 집단적으로 흥분하면서 결집력을 가질 만한 사건이 없는 터에 그녀의 등장은 고마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야망을 향해 뛰는 프로 선수일 뿐이라는 점, 그녀의 기량이 우리 전체의 기량과 동일시될 수는 없다는 점, 골프라는 운동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문명사적 의미에 대한 정리가 우리에게 너무도 빈곤하다는 점, 골프의 사회적 보편화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서도 석연치 않다는 점 등이 짚어져야 한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인간적 모델은 미안하지만 박세리가 아니다. 고난을 무릅쓰고 이웃의 아픔을 함께 지면서, 무너져내리는 공동체의 기둥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진력을 다하려는 `의(義)의 사람'이다. 그는 돈이 벌리지 않는 일에도 자신을 바친다. 명예와 갈채가 쏟아지지 않아도 해야 할 일을 한다. 골프채를 잡을 손으로 붕괴되어 가는 이 사회의 재건을 위해 망치와 못을 들 것이다. 그러다가 자신의 손이 다치는 일이 있다 해도 기쁘게 일에 몰두할 것이다. 이름도 빛도 없이, 고통에 빠진 사람들에게 사랑과 용기의 손길로 다가가는 사람들이 우리에게는 더욱 필요한 존재들이다. 행여 이들이 박세리 열풍에 열등감과 좌절을 느끼지 않았으면 하고 기원한다. 세상의 관심이 온통 거기에 쏠려, 정작 쏠려야 할 관심을 받지 못하고 슬퍼하는, 고난 속에 있는 이들을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있음을 우리는 아마도 까맣게 잊고 있는 것은 아닌가?

승리자에게만 월계관을 씌워 주려는 사회는 사랑을 자라게 할 수 없다. 패배자들에게 따스한 격려와 용기를 주지 않는 사회는 언젠가는 갈기갈기 찢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어떤 사회를 원하는가?

박세리로 돈 벌 궁리를 하는 사람들, 박세리로 정치적 주가를 올리고 싶어하는 사람들, 박세리로 허영을 채우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모두 우리 사회의 고통을 외면하는 이들이다. 신문과 방송이 박세리라는 이름으로 온통 덮일 때 이 사회에서 숨죽이면서 아파하는 사람들의 삶은 보이지 않게 된다는 사실을 무섭게 깨우칠 때, 우리 사회는 비로소 희망이 있게 될 것이다. 박세리도 바로 이러한 우리 사회의 현실에 눈을 뜨는 아름다운 여인이 되기를 빈다.


퍼 가실 분은 참고하세요. 이 글의 주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neo.urimodu.com/bbs/zboard.php?id=choisun_insa&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name&desc=desc&no=536

2002/06/26 (15:31:21)    IP Address : 147.46.116.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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