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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죄선일보 > 월간 인물과사상이 파헤친 죄선일보 - 1998년4월호~2000년9월호


이 름 조흡
제 목 새천년에 추구해야 할 새로운 가치들
조 흡 │문화 연구가│



문화는 삶의 모든 모습이다

문화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관한 이론적 합의가 아직도 이뤄지지 않아서인지 학자들마다 그 의미가 제각각이다. 일부는 문화를 국가 단위에서 나타나는 국가적 특징으로 보기도 하고, 또다른 학자들은 문화를 한 사회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고급문화를 지칭하는 것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로 문화는 고급스런 문화를 일컫는 경우가 많다. 역사책에는 항상 양반들의 문화만이 주로 소개돼 있고, 이는 곧 한국의 문화라는 역사관이 아직도 성행하는 것을 보면 문화는 고급스러운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 모양이다.

서구에서도 사정은 비슷한 듯 하다. 시대를 대표하는 ‘최상’의 작품이 바로 ‘문화’라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19세기의 영국 비평가 매슈 아놀드의 유명한 ‘시금석 이론’이 그 전형적인 이론일 것이다. 한 시대의 문학작품을 평가하려면 이제까지 존재했던 ‘최상의 작품’과 견주어 손색이 없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문화란 곧 천재들이나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사고’였다. 어떤 비평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를 초월한 생각, 따라서, 영원불멸한 가치를 지닌 것만이 ‘진리’며 문화의 범주에 속할 수 있다고 그는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 지나간 천년을 마감하면서 돌이켜 생각해 보면, 국가라는 울타리 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런 절대적 가치들은 그 중요성이 점점 쇠퇴하면서 ‘새로운 가치’와 ‘헌’ 것의 충돌로 치닫고 있다. 단지 서구에서만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 아니라 한국을 비롯한 많은 ‘세계화’된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특징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는 이런 절대적 가치가 중요치 않아서가 아니라 그런 절대적 가치를 유지하기에는 너무 많은 저항이 뒤따르기 때문일 것이다. 시대가 바뀐 것이다. 시대가 바뀐 만큼 옛 생각의 효용이 떨어진 것이다.  

그 바뀐 생각의 가장 큰 핵심은 아마도 문화를 국가적 산물로 본다거나, 정치·경제에 예속된 개념으로 파악한다거나, 아니면 사회 지배계층의 생각과 가치를 반영한 ‘유산’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 생활을 통틀어 일컫는 것이라는 점일 것이다. 이 사회에서 돈 가진 사람과, 권력을 가진 자, 그리고 담론을 독점하는 사람들이 남용하는 힘에 맞서 일상의 삶에서 창조적 아이디어로 생활해 가는 그들의 모든 생활방식이 곧 문화라는 말이다. 한마디로 삶 자체가 곧 문화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문화는 모든 것이 될 수도 있다. 정치현상도 문화의 일부라고 볼 수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이라 얘기하는 경제 또한 문화의 한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모든 사회적 현상이 결국은 문화라고까지 얘기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묵은 천년을 보내고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는 이 시점에서 옛 가치와 새로운 가치의 충돌을 얘기한다는 것은, 따라서, 바로 전통적 의미의 문화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모든 문화현상을 아우르는 총체적인 평가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그 작업은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기도 하다.

강제적 ‘일치’에서 자발적 ‘동의’의 정치

한국에서 가장 강조하는 정치·문화적 가치 중 하나가 ‘일치단결’이라는 것 일게다. 모든 일을 위에서 결정하고 아랫사람들은 따라야 하는 상명하복의 원칙을 강요하면서도 굳이 아랫사람들과도 의견의 일치를 본 것처럼 형식을 취하는 문화적 가치가 정치영역에서도 하나의 특징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총화’와 ‘일치’는 말 그대로 형식논리였을 뿐 실제로 아랫사람들이 정치적 안건을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과거의 정치에서 ‘국민총화’가 존재했던 이유는 단 하나, 그것은 총칼로 억압하고 중단 없는 ‘이데올로기 공세’로 밀고 나갔기 때문에 가능한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이런 구시대적 가치를 현대의 정치인들이 추구해야 할 미덕으로 착각하고 국가적 안건에 모든 시민들이 한 목소리로 지지해 줄 것을 위정자들이 바란다면 이는 변화된 정치 환경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다. 이제 그 어느 정치적 사안을 다룬다 해도 시민들로부터 ‘전폭적 지지’ 내지는 ‘국민총화’를 이끌어 내기는 어렵게 돼있다. 사회가 그만큼 갈기갈기 나뉘어져 있기 때문이다. 다양하게 사회가 분화된 만큼 안건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도 항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일사불란한 의견의 일치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따라서 새시대에는 전 국민의 일치단결이 정치적 목표가 아니라 정치적 사안마다 시민들의 ‘동의’를 추구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일치’가 상명하복의 강압적 정치논리였다면 ‘동의’는 시민들의 자발적 정치참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정치의 주역이 위정자에서 시민으로 뒤바뀌어야 된다는 말이다. 권력이 시민사회를 지배하고 일방적인 요구와 수용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정권과 시민사회가 함께 하는 정치만이 새시대에는 살아 남을 수 있을 것이다. 보다 엄밀하게는 정치적 사안에 대해 위정자들이 시민들의 ‘동의’를 구하는 방법만이 통할 수 있다는 얘기다.

물론 이런 주장은 원칙론에 근거한 얘기다. 시민들을 정치 파트너로 존중하라는 강세의 표현인 것이다. 그러나 제각각 이익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는 시민사회의 모든 구성원들로부터 동의를 받아 내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위정자들은 다양한 정치·사회적 이슈들에 대해 다양한 사회구성원들로부터 임기응변식의 ‘동의’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동의’는 만장일치의 개념이 아니며 다수결의 원리만도 아닌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느 사안에 대해 찬·반의 입장을 동시에 수용한 새로운 가치가 ‘동의’의 원리인 것이다.

만약 한국 사회가 ‘다원적 민주주의’를 추구한다면 그것을 실현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분명 ‘만장일치’의 원리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사안에 따라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시민들의 ‘동의’를 구하는 것에서 가능할 것이다. 이것이 이제까지의 정치와 비교해서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며 이런 변화에 위정자들은 하루빨리 적응해야 할 것이다. 이제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는 당연한 정치 안건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는 누구도 완벽하게 만족시켜주지 못하는 타협과 양보의 정치다. 그러나 바로 이 가치야말로 ‘다원적 민주주의’의 특징이 아니던가?

이렇게 정치에 대한 인식을 달리 한다면 위정자들도 ‘국민총화’의 신화에서 해방되고 ‘정치적 부담’을 의식하지 않으면서 과감하게 정책을 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정치는 ‘설득’의 예술이고 또 설득을 위해서는 양보가 필요한 것이다. 만약 집권정부가 시민들에게 더 많은 혜택을 가져다주기 위해 기득세력에게 더 많은 양보를 요구한다면 그 정권의 헤게모니는 오래 지속될 것이다. 한국에서, 예를 들어, 부패를 척결하는 일에 저항하는 세력이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이런 정책에 대한 범시민적 동의를 받아내기는 쉬운 일이다. 새로운 정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바로 이렇게 동의를 바탕으로 한 정치일 것이다.

주권을 잃어버린 한국 경제

적어도 경제 영역에 있어서 한국은 주권국이 아니다. 억울한 얘기지만 부정할 길이 없는 현실이다. 이는 단지 한국이 국가적 경제 위기를 맞아 IMF로부터 구제금융 지원을 받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이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이를 극복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많은 전문가들이 주장하고 있다. 그 주된 이유는 한국의 경제가 세계경제체제에 편입되어 있고 수출을 해야만 전 국민이 먹고 살 수 있는 경제체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벗어나기 위한 대안을 찾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이 한국 경제의 딜레마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산업구조상 한국은 중국의 경공업 구조보다는 앞서 있지만 일본의 제조업과 미국의 첨단 정보산업과는 한참 거리가 있는 중간적 입장에 놓여 있다. 그러나 중국의 산업구조가 한국보다 열등하다고 해서 국제수지에서도 중국이 한국보다 열등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값싼 노동력을 바탕으로 생산한 중국 상품은 세계 시장에서 거의 판로가 보장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 경제가 활성화되면 상품이 많이 팔려 호황을 누리고 경제가 침체되면 값싼 물건이기 때문에 팔리는 것이 중국산 제품이다. 마치 70년대의 한국 상품처럼 말이다.

또다른 문제는 한국 산업이 일본이나 미국의 기술과 견줄만한 수준에 이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이 개발한 신기술을 수입하기에 급급한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쉬운 일이 아니다. 돈이 될만한 신기술은 그들이 움켜쥐고 있고 기술의 수명이 제 나라에서는 다한 구식 테크놀로지만을 넘겨주기 때문이다. 이를 수입한 대기업들은 주로 국내 시장을 상대로 해 돈벌이를 하기도 하고 수출을 겨냥해 상품을 생산하지만 국제 시장에서 경쟁력이 높을 리가 없다. 이렇게 한국 경제는 구조적으로 일본과 미국 그리고 서구의 영향력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게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 상품을 이런 구미 시장에 수출한다는 것은 우리도 그들의 상품을 수입해야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들은 지속적으로 한국의 시장 개방을 요구하고 있고 현실적으로 이를 거절할 힘이 한국 정부에게는 없다. 이 또한 한국 경제가 더 이상 한국인의 손에 움직여지는 상황이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특화된 상품을 생산하는 길밖에 없다. 이는 또 첨단기술과 인적 자원 그리고 거대 자본과 새로운 경영 방식을 필요로 하는데 한국 경제의 구조적 취약성으로 인해 이를 쉽게 제공할 수 없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상황이 이렇다고 해서 기술과 자본을 손에 쥔 선진국들이 한국의 경제 주권을 박탈했다고 얘기할 수는 없다. 한국 경제가 설령 그들에 ‘종속’되어 있다 하더래도 말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항상 약자가 움치고 뛸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틈새를 찾아 빠져나갈 방법을 확보하는 길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위대함은 세계 자본시장이 한국의 경제를 압박만해서 고사시키는 구조를 형성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구조적 한계와 벽을 넘기 어렵지만 그래도 이를 뛰어 넘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도 구조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가능성을 향해 노력해야 할 대기업들이 국내 시장에서의 보장된 단기적 수익에 만족하면서 곧 다가올 ‘무한경쟁’을 외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본은 취약하고, 경영은 정치에서 찾아볼 수 있는 권위주의에 근거한 전근대적인 방법으로 이끌어 나가고 있으며, 인물은 시대를 앞서가는 기발한 아이디어의 소유자가 아니라 두루뭉실 모나지 않은 무난한 인재들로 채워져 있고, 기술은 국내의 것을 활성화하고 활용하기보다는 100% 수입에 의존하면서 회사의 몸집이나 불리고 재벌 체제를 유지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대기업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니었던가?  

한국의 경제 위기가 한 가지 다행스런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면 그것은 재벌들이 지금과는 달라져야 한다는 인식을 스스로 하게끔 만들어 줬다는 점일 것이다. 다만 ‘어떻게’ 변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은 것 같다. 여기서 우리는 자본의 발달사에서 교훈을 얻을 필요가 있다. 재벌들은 장기적 헤게모니를 위해 국가에 자신의 장래를 맡기는 수밖에 없다. 국가는 시민과 재벌의 이익을 대표해서 재벌로부터 일부 기득권의 포기를 받아내는 중재자의 역할을 해야 될 것이다. 재벌은 이렇게 국가와 공조하면서 시민들이 납득할 정도의 과감한 ‘양보’를 통해서만 재벌의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보다 수백 년 먼저 자본주의를 시작한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결과이니 이미 검증된 방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의 사회적 역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국가의 역할이 끝났다’고 얘기하는 ‘최신이론’에 역행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한국 같은 과도기적 체제하에서는 국가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국가 소멸론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지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나, 늘어나는 범죄, 그리고 불공정한 복지제도와 분배 같은 문제에 닥치면 ‘최소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마지못해 국가의 기능을 인정하고 있다. 국가 소멸론을 굳이 주장할 수 있는 나라는 자본이 확보되고 시민사회가 정착된 서구의 몇 나라일 것이다. 물론 이런 사회에서조차 실제로는 그 소멸 근거를 찾아보기 힘들지만.

오히려 한국에서는 경제 위기에 대처하고, 사회를 보다 더 발전시키기 위해 국가의 기능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누가 나서서 경제 위기를 막고, 노사의 분쟁을 중재할 것이며, 재난에 대비하고, 환경을 보존하면서, 법치를 정립하고, 위기를 관리할 것인가? 여전히 해답은 국가이다. 물론, 이런 주장이 국가우선주의의 폐단까지 인정하거나 권위주의적 관료 체제를 옹호하는 얘기는 아니다. 국가의 관료 체제도 혁신적인 개혁이 이뤄져 그들이 시민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봉사하는 체제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주장에는 이의가 없다. 시민사회와 국가의 경쟁과 연대가 동시에 필요한 것이다.  

현재 가장 필요한 국가의 사회적 기능은 교육 개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작게는 한 개인이 변화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더 크게는 국가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은 교육의 개혁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이 일은 아무래도 국가가 나서서 해야 될 일이다. 산업 구조가 중화학공업에서 정보통신산업으로 전환되면서 새로운 기술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교육 개혁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명심해야 할 일은 국민 모두가 정보통신의 기술자가 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이다. 이 사회가 정보통신 전문가만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 적성에 맞아떨어지는 다양한 교육, 그리고 교육간의 불공평한 차별이 이뤄지지 않는 환경 조성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개성을 존중하고 다양한 교육을 추구하는 것은 한국 경제가 처한 구조적 약점을 극복하고 창의력 하나로 틈새상품을 개발해 틈새시장을 개척하기 위한 마지막 희망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렇게 교육 개혁은 사회 개혁의 출발이면서 경제 개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많은 교육 비평가들이 이런 사실을 충분히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학교는 여전히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적성에 맞고 개성을 살려주는 교육이 단순히 경제적 측면에서만 필요한 것은 물론 아니다. 보다 성숙한 민주사회로 한국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의 다양성이 보장되어야 하고 바로 그런 토대에서만이 사회가 보다 건전하게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권위적인 정치가들의 모습, 전제주의적 회사 경영방식, 군림하기만 하는 기성 세대, 이 사회에 만연한 패거리 문화 등도 따져 보면 교육의 실패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와는 다른 가치를 지닌 사람을 인정하고 존중할 줄 아는 훈련이 곧 민주시민의 자질을 기르는 첩경이라는 점에서도 교육 개혁은 시급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상을 교육을 통해 심어준다 해도 현실이 따라주지 않았을 때는 별로 커다란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는 분배에서 공정하도록 더욱 더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세금제도던 복지와 교육의 기회던 관계없이 계층간의 차이를 줄이는 정책을 펴 시민들로 하여금 ‘상대적 빈곤감’을 느끼기 어렵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바로 이렇게 국가가 계층간의 중재자가 되어 서로에게서 조금씩 ‘양보’를 받아내 사회적 대타협을 이루는 것이 공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국가의 사회적 기능은 소멸된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는 더욱 더 중요한 것으로 대두되고 있는 셈이다.

문화적 국수주의를 초월한 다양한 문화의 수용이 필요하다  

교육 개혁은 시민들의 문화적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작업이다. 이제까지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주입시켰던 ‘세계 최고의 한국 문화’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한민족’이라는 왜곡된 주장은 구세대들의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얘기일 뿐이지 어떤 뚜렷한 객관적 근거가 있는 말은 아니다. 그냥 ‘훌륭한’이라는 수식어로 충분한 한국 문화며 한민족인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런 주장들이 오랫동안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보다 한국 사회가 그만큼 폐쇄적이었던 것이 원인이었고 또 국가의 트로마(trauma)적 경험을 문화적으로 보상받으려는 선조들의 왜소한 심리가 작동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의 유입이 자유롭게 이뤄지고 있는 새시대에는 이런 구세대의 문화적 국수주의가 도대체 어울리지가 않는다. 경제적으로 서구자본에 예속되어 있으면서 문화적 독창성만을 과장하다보니 ‘타자’들에 대한 배척감만 증폭되는 병리적 현상이 나타나곤 한 것이다. 결과는 항상 ‘우리’와 ‘놈’들이라는 편가르기가 성립되고 그러다 보니 다양한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게 된 것이다. 세계 무대에서 가장 ‘촌스러운’ 짓을 많이 하는 민족 중 하나가 ‘최고’의 문화를 지니고 있는 한민족이라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 것은 바로 이런 국수주의적 내용을 아직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사항은 우리가 이런 전통적 사고에 빠지게 되면 안과 밖을 구분해 이중적 기준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한국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는 지극히 국수주의적인 가치관을 가지도록 교육시켜 놓고 일단 그 울타리를 벗어나면 세계인으로서 행동할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심한 지역감정에 빠져 있는 사람이 외국에서 흑인들을 만나면 그들이 자신보다 우월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가 어렵다는 얘기다. 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하나, 그것은 국내에서든 국제 무대에서든 남과 공존할 수 있는 가치를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다.

우리가 그렇게 변화돼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 실질적인 이유 때문이다. 새천년의 시대는 다양한 문화의 시대이다. 상품이 다양하고, 세상에 떠도는 이미지도 다양하며, 담론마저 다양하다. 문화가 한마디로 다양한 것이다. 이는 ‘획일성’을 추구했던 구시대의 가치와 정면 대치되는 현상이다. ‘일치단결’을 주장하던 시절의 한국은 셔츠와 신발을 만들어 수출했고, 그 당시에는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상품을 구매하는 획일적인 소비 문화의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한마디로 획일성이 가장 많은 이익을 가져다 준 시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심화되자 사람들은 곧 획일성의 지루함에 싫증을 느끼고 남과 차별되는 다양성의 가치가 중요하게 되었다.

새시대는 대량생산과 대량 마케팅 방법에서 벗어나 소량생산과 틈새 마케팅, 그리고 시장 분화의 특성을 지닌다. 다양한 제품과 다양한 시장이 형성되고 있다는 말이다. 시장 자체가 여러 개로 나뉘다 보니 자연히 ‘다양성’이라는 가치를 수용해야 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이점이 바로 우리가 변해야 하는 이유다. 변해서 얻을 수 있는 실질적인 결과는 새로운 시장의 확보요 ‘중단 없는 발전’인 것이다. 그렇다면, 변화하는 시장 조건에 맞춰 상품과 마케팅을 다양화하면서 새롭게 적응하는 것이 새시대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이런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다양한 문화의 이해와 수용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다양성을 추구해야 할 진정한 이유는 이렇게 기회주의적으로 취향의 ‘차이’를 수용해서 이익을 극대화하는 자본의 필요 때문만이 아니다. 다양성이 이 시점에서 필요한 가치로 대두되는 이유는 사회 구성원들끼리 사회적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아가기 위함이다. 각기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계층들끼리 서로 협상하고, 수용하고, 때론 극렬하게 대치할 수 있도록 하나의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 다양성이라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다양성은 자유주의적 다원주의가 보장하는 가치와는 다르다. 다양성은 지배적 사회 구성원들이 피지배 그룹의 ‘사회적 차이’를 끊임없이 통제하고 삭제해서 획일화와 동질화를 추구하면서 생겨난 불평등 구조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양성은 이렇게 불평등한 구조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계층간의 갈등 구조인 것이다. 그렇다면 다양성은 불평등한 사회 구조를 변화시키려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계층간의 차이를 유지하는 것 자체가 궁극적으로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는 당위성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양성은 사회 변동의 밑거름인 셈이다. 따라서 사회적 다양성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교육시키는 것이 개혁의 첫걸음이라는 말도 가능한 것이다. 새천년에 필요한 새가치로써 문화의 다양성은 실질적인 이유와 민주사회의 당위적인 가치로 이렇게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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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7    교육계에 불어닥친‘신자유주의’의 허와 실 이기홍 2002/06/28 991
616    TEPS 과연 무엇인가? ② 성기완 2002/06/28 1026
615    ‘오 기자님 힘내세요’ 위택환 2002/06/28 1133
614    김정환씨와 김창은씨의 반론에 답합니다 강준만 2002/06/28 881
613    사고(社告) ‘ 인물자료 이용 회원’ 에 관한 안내 편집부 2002/06/28 1187
612    ‘언론탄압’이라고 주장만 하기에 앞서 오동명 2002/06/28 1071
611    ‘폭로’하는 길이 중앙일보를 영원히 살릴 수 있다 오동명 2002/06/28 1009
610    TEPS 과연 무엇인가? ① 성기완 2002/06/28 1192
609    “똘레랑스” 혹은 “관용”, 그 미덕과 해악 조상식 2002/06/28 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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