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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죄선일보 > 월간 인물과사상이 파헤친 죄선일보 - 1998년4월호~2000년9월호


이 름 조상식
제 목 “똘레랑스” 혹은 “관용”, 그 미덕과 해악
- 한국 사회에의 올바른 적용을 위하여

조 상 식 ∥독일 괴팅겐대·scho1@gwdg.de∥




“빠리에서 어느 정치적 망명객이 전해준 똘레랑스의 미덕.”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즉 서구에서 오래 살아온, 그것도 정치적 억압을 피해 원치 않지만 이국에서 살 수밖에 없었던 홍세화의 한국 사회에 대한 문화비평에 대한 반응에서 왔다. 필자 또한 유럽 생활을 경험하면서 그의 비판의 상당 부분에 공감했다. 특히 글 사이에 스며 있는 글쓴이의 감수성, 고국을 비판할 수밖에 없는 진한 조국애, 그리고 제3세계 지식인으로 겪는 고뇌를 통해, 내용에 담긴 ‘논리적 설득’을 넘어 카타르시스적 감동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이 글은 홍세화의 “똘레랑스” 개념을 개념사적으로, 그것도 서구 역사의 독특한 산물이며 동시에 오늘날 서구의 정치·사회·문화를 움직이는 정신적 토대로서 이해해 보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또한 이 글은 이러한 개념사적 접근을 통해 “똘레랑스” 개념에 대한 이해의 수준을 높이고자 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개념이 가지고 있는 “논리적 파라독스”를 지적해 보고 한국적 상황에서 어떻게 수용 가능한 지에 대해서도 반성적으로 검토해 보고자 한다.

똘레랑스 개념의 역사적 변용 과정

홍세화가 ‘전파한’ 불어 “똘레랑스”(`tole、ance`) 개념에 가까운 우리말은 관용이다. 이 말은 우리의 일상적인 용법에서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용서함’을 뜻하므로 언뜻 보기에 “똘레랑스”의 의미를 충분히 담고 있다. 하지만 서구적 개념으로서 “똘레랑스”는 그 자신의 역사를 갖고 있을 만큼 독특한 “개념의 실재”이다. 따라서 그 개념에 대한 역사적 이해가 필요하다.

서구 언어에서 의미하는 “관용” 개념은 일반적으로 “도덕적 혹은 다른 이유에서 거부되는 개인·행동·주장을 허용하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이것은 ‘타인’ 혹은 이방인에 대한 수용 내지 그에 대한 존중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하지만 본래 이 개념은 고대 희랍과 로마 시대에는 종교적 의미로서의 관용으로 제도화되었다. 마찬가지로 非서구 세계인 이슬람 사회에도 제한적으로 종교적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적 의미에서 관용을 의미하는 개념이 있었다는 점은 흥미롭다.

그러나 원래 라틴어로 관용의 개념은 개인적 용맹성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즉 이 말은 상처나 고문으로 인한 아픔을 인내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다가 이후 기독교 성서를 라틴어로 옮기면서 이 말은 신앙인의 열정을 뜻하게 되었고 종교적 의미를 담게 되었다. 그 후 아우구스티누스는 관용 개념을 이교도에 대항해 기존의 기독교적 신앙 질서를 보호하기 위한 도구적 의미로 사용했다. 그는 오늘날 의미의 이교 및 이교도에 대한 관대가 아니라 더 큰 악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사소한 잘못을 용서(`“permissio comparativa”`)한다는 의미로 관용 개념을 사용했다. 결국 관용 개념은 당시 지배적인 기독교적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기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의미하는 이교도에 대한 관용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러 비로소 나타난다. 그에 의하면 유대교를 위시한 이교도에 대한 “강제적인 세례”는 복음 자체에 위배되는 것이며 자연법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바로 오늘날 의미하는 종교적 관용의 효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종파간 혹은 교리 논쟁에서와 같은 종교적 의미에서의 관용은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점차 세속적 사회 집단간 혹은 정치적 당파간의 대립의 지양을 의미하는 데까지 확대되었다. 하지만 프로테스탄트의 창시자들인 루터나 칼빈조차도 非신앙인 즉 非기독교도인에 대한 관용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듯이, 종교개혁기까지 종교적 관용은 오늘날의 의미로서의 종교적 다원성을 인정하고 있지 않았다. 기독교도뿐만 아니라 유대교, 심지어 이슬람교를 포함하여 모든 인간의 동등성을 기초로 한 관용에 대한 주장은 신비주의자인 프랑크(`S. Franck`)로부터 유래한다.

근세에 이르러 관용의 문제는 정치·법률적 문제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시민 사회에서의 조화로운 공동생활의 전제로 가정됐다. 예컨대 홉스(`Th. Hobbes`)는 전통적인 종교적 의미로서의 관용을 개인의 “私적인 의견”으로 규정했다. 이러한 관용에 대한 이해는 당시 모든 계몽주의자들이 공통으로 갖고 있던 생각이었다. 물론 관용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이미 피력한 사람들도 있었다. 예컨대 당시로선 보수적인 사상가였던 미라보(`H.G. Mirabeau`)는 관용을 베푸는 사람과 관용의 수혜자간에 놓여 있는 권력 관계를 이미 날카롭게 지적한 바 있다. 이 점은 실로 중요한 측면인데, 미라보는 관용의 전통이 제국주의적 패권시대에 이르러 非서구세계에 대해 적용되면서 발휘됐던 서구중심주의적 의혹을 이미 지적했던 셈이다. 이것은 뒤에서 다시 거론해 보기로 한다.

이제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관용의 의미를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시들을 몇몇 사상가의 글로부터 인용해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관용의 근대적 의미가 더욱 분명히 드러나리라 본다.

물론 칸트(`I. Kant`)는 관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개념을 규정한 적도 없으며 이를 둘러싼 논쟁에도 기여한 적이 없다. 하지만 그의 철학에 나타난 도덕성의 최고 상위 원칙으로서, 그리고 인간 자유의 조건으로서 “인간 의지의 자율성” 개념은 이후 관용 개념의 내용을 풍부히 해주는 데 영향을 끼쳤음을 간과할 수 없다.

근대 관용 개념을 이해하는 데는 볼테르(`Voltaire`)의 규정이 대표적인 생각으로 가장 유용하다고 본다. 그의 글로부터 일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관용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성 자체이다. 우리 모두는 약점과 실수투성이 이다.  그 때문에 우리가 서로 자신의 어리석음을 이해해 주는 것은 제1의 자연법이다.…… 인류의 최고 惡은 불화이며 그에 대한 유일한 치유는 관용이다.…… 따라서 우리가 서로 참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약하고 쉽게 흔들리며 언제나 실수를 저지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관용의 의미가 계몽주의적 사회이론의 근간이 되었던 자연법 사상에서 파악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아울러 관용을 인간성 자체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관용의 필연적 정당성이 계몽주의적 이성에서 이끌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특히 독일의 레싱(`G.E. Lessing`)에게서 시민 사회의 정치 원리로 더욱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국가에는 수많은 종류의 政`體`들이 있고 수많은 종교가 있다.…… 시민 사회는 인간을 분리하지 않고서는 그들을 통합할 수가 없고 그들 사이의 대립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그들을 분리할 수도 없으며…… 이렇게 시민 사회는 수많은 하위 부문으로 끝없이 해체되어 간다.

이러한 시민 사회 내에 존재하는 분리와 대립은 인간 이성으로 해결 가능하며 그것은 바로 국가라는 최고선 내지 공동선의 보장으로 현실화된다.

시민 사회 성원들은 국가라는 가장 현명한 지혜와 선에 복종할 때만이 가치로우며…… 그렇지 않으면 애국이라는 미덕이 싹틀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관용이라는 인간간의 미덕이 정치 생활의 원칙으로까지 격상되어 시민 사회의 질서 원리로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당시 사회 계약론자들의 국가이론의 공통된 가정이었다.

관용 개념은 이렇게 서구 시민 사회의 정치원리로서 자리 잡으면서 오늘날 서구 사회를 떠받들고 있는 자유 민주주의의 생활 원리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서구인들에게 관용은 시민 생활에 필요한 책임성과 공동선 추구라는 “윤리적 실재”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관용은 서구인에게 문화적 성숙의 본질적인 계기이면서 동시에 그 개념 속에는 타인과 공공생활(`res publica`)에 대한 극단적인 ‘무관심’이 숨어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이러한 점은 이미 근세 초에 “관용의 파라독스”라는 이름으로 지적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관용 개념이 서구적 상황을 넘어서 非서구인 내지 非서구적 맥락에 옮겨질 때 발생하는 “의미변용 사태”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이 점에 관해 계속 이야기해 보자.
“관용의 파라독스”

관용의 정당성과 한계에 대한 논의는 20세기 초 특히 정치철학의 분야에서 있었다. 기본적으로 관용의 논리적 모순은 “거부되는 것 자체를 허용한다”는 데에 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非`관용적인 행위까지도 관용해야 한다”는 주장에서 극단적인 자기 모순이 드러난다. 이 문제는 켈센(`H. Kelsen`)과 슈미트(`C. Schmitt`) 간에 있었던 정치·법률적 논쟁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켈센은 다수의견과 소수의견, 집권세력과 야당세력의 병존의 허용(`이것이 그에게 관용이다`)을 “모든 민주주의의 삶의 원칙”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비해 슈미트의 의견에 따르면 이러한 켈센식의 관용은 “소극적 관용”일 뿐이며 이것은 단지 탈(`脫`)정치 혹은 무(`無`)내용성의 표현이라고 비판했다.

이러한 관용이 갖고 있는 내재적인 모순에 대해 포퍼(`K. Popper`)는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다음과 같은 역설적인 해결안을 제시한다. “무제한의 관용은 관용 자체의 소멸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非관용을 관용하지 않을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 또한 다른 곳에서는 서구 자유주의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밀(`J.S. Mill`)을 쫓아 관용을 긍정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따라서 합리주의는 상대가, 자신의 의견이 진지하게 경청되고 동시에 자신의 입장을 방어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는 생각과 관련 있다.”

이렇게 관용의 개념은 이미 현대에 이르러 “관용의 한계”(`limits of toleration`)니 “관용의 파라독스”(`Paradox of Toleration`)니 하는 이름으로 비판적으로 논의되었지만 근대 법치주의와 근대 시민의 정치적 생활을 규정하는 원칙이 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개념은 서구 근대화 과정의 밑바닥을 흐르고 있는 극히 서구적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非서구 사회의 맥락에서 이 개념을 다룰 때에는 근대성 내지 근대화의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다루기로 하고 서구 시민 사회의 발전 과정에서도 이미 관용의 전통이 그리 순탄한 윤리·도덕적 원리만은 아니었음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서구 근대화를 이끈 주된 세력은 시민 계급이다. 이들의 초기 “건강한 계급성”은 자유 민주주의의 국가 정체성, 그에 걸맞은 정치적 실천, 이를 성공적으로 이끄는 정치 윤리를 확립해 주었다. 그래서 관용은 “일반의지”로서 국가의 정치적 실천과 “특수의지”로서 시민의 정치적 실천이 별다른 모순 없이 진행하도록 해주는 윤활유 역할을 했다. 다시 말해 이기적 시민 사회에서의 대립은 책임성과 공동선의 추구에 의해 무난히 해소될 수 있는 것으로 보였다. 헤겔의 {법철학}은 이러한 조화로운 이상에 근거해 있었다.

하지만 사회 계약론적 가정은 서구 시민계급의 자기모순적 속성 때문에 그리 굳건한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부르주아지 계급은 자기 지배력이 확립된 이후 그들 특유의 개인주의 ‘습성’을 전면에 드러내기 시작했다. 즉 자신들의 “`私`적인 영역(`말하자면 가정이나 좁은 인간관계`)으로 은닉”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독일 시민계급에게서 더욱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교양 있는” 독일 부르주아지들의 삶은 “내면적 가치의 우선, 감정의 깊이 강조, 독서에의 침잠” 등과 같은 것에 더 중요한 가치를 둔다. 이러한 삶의 특성은 오늘날에 비추어도 건강하고 긍정적인 미덕으로 보이지만 그것이 전적으로 시민사회의 공적인 영역(`말하자면 res publica`)으로부터 도피를 대가로 한다는 점에서 극단적인 가족 이기주의 혹은 개인주의적 원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관용은 ‘타인의 삶이 어떻든 간에 나의 삶만을 보호하면 그만’이라는 공적인 사안과 타인의 삶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을 의미했다. 이것이 바로 시민생활의 윤리적 원칙으로서 관용이 위기를 겪게 되는 계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용이 여전히 서구 자유주의의 기본 생활원리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의 피해를 피하는 방법으로서 준법생활과 타인의 삶을 침해하지 않는 철저한 사회계약의 원칙을 양쪽 날개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서구 사회에서 태생한 관용의 전통은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非`서구 사회에 전혀 다른 의미를 던지게 된다.

非`서구 사회에서의 관용의 문제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인간을 뜻하는 “anthro”라는 말에서는 이방인이란 뜻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에게 인간의 문제는 ‘횡설수설 이상한 말’을 하는 그리스 바깥 세계의 사람에 관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오늘날 인간학 혹은 인류학을 가리키는 단어의 기원은 이렇게 시작했다. 이러한 전통은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식민지 민족을 ‘이해’하기 위한 이론의 창출을 위해 ‘보편적’ 학문으로 발전했다. 여기서 관용의 문제는 非`서구인의 인종적 차이, 언어,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에 적용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인류학 연구의 기본 원칙이 되고 있는 “문화적 상대주의”도 서구인들의 관용에 대한 이러한 전통의 산물이라고 ‘상대화’(`!`)해야 한다. 이러한 나의 생각은 문화적 상대주의를 규정하는 인류학자 헤르스코비츠(`M. Herskovits`)의 말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문화적 상대주의는 가슴이 따뜻한 철학이며…… 모든 관습에 내재해 있는 고유한 권위를 강조하고 우리에게 다른 관습에 대한 관용을 요구한다.

여기서 나는 서구 인간학 혹은 인류학의 성과를 단순히 非`서구인들에 대한 서구인의 ‘수혜적 차원’으로 격하시키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나는 非`서구인에 대한 서구인의 이해가 유럽 중심주의라는 자신들의 한계에서 도출된 것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非`서구 문화에 대한 관용은 애초부터 서구 ‘문명’의 힘의 산물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서구인의 타민족 문화에 대한 관용은 그들 문화의 우월성과 오만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의혹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서구 “문명” 개념이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결국 힘의 논리가 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우리 사회가 경험했으며 그리고 어쩌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여 사회발전의 규정력으로 간주되고 있는 “근대화” 논리에도 이러한 서구적 힘의 논리는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관용이 왜 필요한가?

바로 위에서 말했듯이, 관용은 서구 사회의 역사적 산물이다. 따라서 그것을 우리 사회의 윤리적 덕목으로 가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발전양상이 서구 사회의 발전 논리와 일치 혹은 유사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의 근대화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와 같은 논쟁이 깔고 있는 “서구적 보편성을 인정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관련되어 있다. 이미 많은 국내 학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많은 논의를 했으며 그리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관용의 한국적 적용의 문제도 이러한 대답의 한계 내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

홍세화의 “한국 사회는 관용에 너무 인색하며 그것을 적극 수용해야 한다”는 주장은, 한국 사회엔 진정한 의미의 서구적 자유 민주주의가 여전히 허약하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렇게 지극히 ‘온화한’(`!`) 주장을 하는 옛 사상범을 과거 정치세력이(`아니, 우리 사회가`) 배제했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한국의 허약한 자유 민주주의적 토양을 인정 해주는 셈이다. 내가 보기에,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주장하는 그는 서구 사회를 오랫동안 경험하면서 결국 본래의 의미대로 ‘진정한 자유주의자’가 되었다. 이와 동시에 그는 국내에서 오래 산(`!`) 비판적 지식인들과 달리 ‘편협한’ 민족주의를 극복한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그는 민족에 대한 사랑을 저버리지 않으면서도 ‘서구적 보편주의’를 적극 수용하는 지식인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나는 홍세화 주장의 타당성을 양면적으로 평가하고자 한다. 우선 그가 지적하고 있듯이 한국 사회의 “미성숙한 근대성”과 “半봉건적 인습”은 “창의적 개인주의”에 기초한 자유의 발현을 짓누르고 있다. 한국 사회 특유의 지나친 “집단적 동질성”의 ‘횡포’는 서구 자유주의의 자양분으로 볼 수 있는 관용의 미덕으로 치유될 수 있는 것으로 제시된다. 특히 분단이라는 치명적인 상황에서 기인하는 이념적인 편향성은 서구적 자유 민주주의의 싹조차 필 수 없게 한다. {진보는 죽었는가?}를 비유하여 “과연 한국 사회에 보수가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도 제기될 수 있다. 서구적 보수주의를 영국 명예혁명 이후 나타난 ‘체제통합적 정치이념들’에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다면 우리에게 보수주의는 거의 “수구 반공주의” 내지 “매카시즘”과 구별되지 않는 이념적 스펙트럼에 위치해 있다. 여기서 관용은 다양한 이념의 공존을 보장해줄 수 있는 치유수단으로 제시된다. 이러한 생각들이 바로 홍세화가 한국 사회를 비판하는 범주로서 관용의 본래 의미이다.

이와 함께 내가 앞 절에서 서술한 관용의 개념이 가진 극히 서구 중심적인 의혹을 짚어 보아야 한다. 관용에 대한 개념사적 접근은 그것이 발아된 토양을 읽게 해주며 다른 땅에 옮겨 심어질 때 있을 수 있는 ‘변이’를 돌아보게 해준다.  이것은 특히 관용이 20세기를 거치면서 서구적 힘의 논리를 담게 되었음을 상기해 볼 때 더욱 설득력을 가진다. 엘리아스의 표현을 빌자면, 초기 유럽 내 문명화(`civilization`) 과정이 프랑스 귀족적 고상함과 우아함의 全유럽화였다면 식민지 시대의 문명화는 ‘全`세계의 서구 편입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관용의 미덕’도 예외가 아니라고 보아진다. 이러한 시각에서 홍세화의 관용에 대한 ‘숭배’가 지나친 서구 지향적 태도라고 비판하는 소리를 귀담아 들을 수 있다.

현대 한국인이 보여주는 유행에의 민감은 홍세화가 보기에 말살된 개인주의 내지 ‘맹목적 집단적 군무’로 비쳐진다. 또한 前`근대적 인습에의 속박은 합리화된 생활방식을 파괴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이 한국 사회의 근대화 내지 문명화 지향에 부정적인 것이라면 그가 제시하는 관용은 충분히 비판적·규범적 덕목으로 추천될 만하다.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그토록 ‘촌스러워 하는’ 한국인의 원형 중엔 반드시 버릴 필요가 없는 것들도 있다. 예컨대 우리의 ‘前`근대적인’(`!`) 공동체 문화와 인간관계 지향적 전통은 차가운 합리성의 전횡에 ‘피’가 흐르도록 하는 가능성도 아울러 갖고 있다.

“우리 것을 되찾자”라는 구호가 우리의 모든 것을 무작정 감싸고 돌자는 것이 아니듯이 “우리 자신을 비판하자”라는 주장 또한 우리의 모든 것을 버리자는 게 아닐 것이다. 오늘의 한국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과제의 해결과 미래 전망은 이렇게 모순되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와 관련 있다. ‘빠리에서 날아온’ 관용에 대한 대답도 이와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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