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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죄선일보 > 월간 인물과사상이 파헤친 죄선일보 - 1998년4월호~2000년9월호


이 름 정혁
제 목 90년대 문화적 코드 한 석 규
정 혁(충북 영동군 영동읍)


왜 한석규인가

한 사회의 지배적인 이미지 읽기는 한 사회의 모습을 알게 해주는 흥미로운 단서를 제공할 수 있다.(김정란, <비어 있는 중심>, 「언어의 세계」, 53쪽, 1993년)

한 사회의 지배적인 이미지? 어쩌면 위 언술은 당위적인 측면에서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궁극적으로는 지배적인 이미지가 지배하는 사회가 결코 건강하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쨌거나 당위의 문제, 나는 위 언술을 접하고 하필 한석규가 생각났다. 한 사회의 지배적인 이미지, 이처럼 한석규에게 어울리는 표현도 드물지 않을까.

요즘 한국 영화계에서 한석규는 그의 첫 주연 영화의 표제어처럼 ‘봉’으로 통한다. 그가 출연한 영화는 예외 없이 흥행해 왔고 「쉬리」라는 전대미문의 흥행 대작을 통해서 그는 명실상부한 한국 최고의 배우의 지위에 올랐다. 문득 나는 궁금해진다. 왜 한석규인가. 왜 하필, 한석규인가. 이런 비교가 가능할 지 모르겠지만 그의 외모는 정우성보다 못하다. 그렇다고 재기(才氣)가 임창정에 이르는 것도 아니다. 이 사실은 집단 무의식적인 신세대들로부터 각광받을 그 어떤 요소도 갖추지 못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의 연기력은 어떠한가. 비단 비전문가인 나의 시각에서 뿐만이 아니다. 그 어떤 평에서도 나는 그의 연기력에 대한 찬사를 읽어본 적이 없다. 카리스마는 어떤가. 그의 연기도 카리스마도 안성기나 최민수에 이르지 못한다. 그런데도 그가 출연하는 모든 영화는 ‘대박’이 된다.

물론 그의 감식안이 말해지기도 한다. 그의 예민한 감식안은 놀랍게도 그 영화가 ‘흥행’할 물건임을 예견해냈고 단 한 번도 그 예견은 틀리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타당해 보이는 분석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그가 출연한 영화는 ‘상업영화’뿐만이 아니었다. 이 말은 그가 출연한 ‘예술영화’도 흥행에 성공했다는 얘기가 된다.

「쉬리」는 한국 영화의 신화였다. 그러나 매스컴은 한석규에게 ‘신화’라는 타이틀을 붙이는데 인색해 보인다. 나는 과감히 한석규에게 ‘신화’라는 딱지를 붙이고 싶다. 한국 영화사상 상업영화, 예술영화 할 것 없이 주연으로 출연한 전 영화가 흥행했다는 전례가 있었나. 고쳐 말해서 그의 ‘신화’가 앞으로도 개인의 이름으로 깨질 가능성이 있을까. 이것 하나만으로도 그에게 ‘신화’라는 타이틀은 조금도 과해 보이지 않는다.

이미 눈치 챘겠지만 나는 단순히 ‘신이 내린’ 한석규의 감식안에만 만족하지 않는다. 한석규가 출연하지 않은 「초록 물고기」가 흥행에 성공했을 것이라고 장담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관객들이 한석규의 심미안을 믿고 5,000원의 도박을 건다고 해도 그것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나는 한국 최고의 출연료를 받는 이 배우에게 팬티를 집어던지거나 그 앞에서 실신하는 여자가 없다는 ‘기현상’을 설명해야만 한다.

한석규는 한국 영화의 신화

그러나 이러한 작업은 아주 체계적이며 정교하고 치밀한 분석을 요구하는 것이다.
김정란이 앞서의 언술 뒤에 덧붙여 놓은 문장이다. 나는 이 문장 앞에서 망설인다. 앞으로의 글이 체계적이거나 정치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의적이고 비약적일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평자들의 직무유기를 핑계대기에는 내 과문(寡聞)함이 양심에 걸린다. 결국 궁색하지만 철저히 개인의 범주로 소급시켜서 이해를 구한다. 따라서 당연히, 뻔뻔스럽게도 여기에는 어떠한 권위 있는 근거도 제시되지 않을 것이다.

한석규에게 내려진 평가로부터 시작해보자. 내가 알고 있는 평가의 공통점은 배우로서는 유감스러운 말이지만 탁월한 연기력이나 극중 장악력, 혹은 내면 연기의 특출함 따위가 아니다. 그에게 내려진 진단은 평범함, 편안함이 고작이었다.

한석규에게 열광하는 매니아를 주변에서 만나기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석규가 출연하기 때문에 영화를 본다는 사람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물론 그의 출연 영화가 늘어나면서, 또 그 영화마다 관객들을 실망시키지 않으면서 생긴 일종의 대중적 기대감, 혹은 신뢰감이 주된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한두 번이지. 그 얼마나 ‘변덕’스러운 관객들인가 말이다.

배우의 이미지 변신은 배우의 생명연장을 가늠하는 척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명제에 기댄다면 한석규가 얼마나 관객들의 변덕에 무감한지 알 수 있다. 한석규는 배우로서 이렇다 할 이미지 변신없이 ‘편안하게’ 영화계를 평정한 셈인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넘버3」의 깡패역과 「닥터 봉」의 바람둥이 의사역을 들어 반박이 가능할 지도 모르겠다. 관점 나름이겠지만 과연 이 한석규가 과연 저 한석규인가, 도저히 믿기 힘들만큼 그의 모습이 다르게 보였나. 이를테면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나 「그들도 우리처럼」에서의 문성근이 「꽃잎」에서 보여준 파격에 수렴하느냐는 것이다.

한석규가 지닌 편안함, 평범함은 한석규만의 이미지가 아닐 것이다. 편안함, 평범함이라는 코드는 분명 이 시대 대중들이 갖는 기호이자, 이 사회의 지배적인 이미지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조금 더 과감하게 나아가 대중들이 한석규에게 열광하면서 열광하지 않는 이 기현상을 그 ‘편안함, 평범함’ 속에서 추출해보고자 한다.

카리스마와 몰입

나는 나의 얘기가 조금이나마 설득력을 얻기 위해 전제가 필요함을 느낀다. 내가 한정하는 범위는 은막의 배우와 관객 사이, 딱 그만큼의 공간이다. 나는 우선 관객들을 무장 해제된 수동적 지위로 앉혀두고자 한다. 이 관객은 곧 은막을 누비는 배우에게 흡입당할 것이다. 이 흡입력 있는 배우는 도대체 어떤 마력을 지니고 있기에 그보다 더 실체적인 관객을 자신에게로 몰입시키는 것일까.

손쉽게 먼저 어떤 영웅적인 이미지가 떠오른다. 영웅은 역사상 모든 서사물이 즐겨 다루는 가장 보편적인 주인공의 유형이었다. 영웅은 현실의 영역에서 볼품없는 관객을 끌어당겨 대리만족을 경험하게 해준다. 이 대리만족이 매우 성공적일 때 은막의 배우는 카리스마를 갖는다. 주변에서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이란 하나의 집단을 비교적 별 반대급부 없이 일정한 방향으로 인도하는 자이다. 이때 그가 반드시 보통 이상의 능력을 지닐 필요는 없다. 이 말은 카리스마를 지닌 모든 사람이 영웅일 필요가 없다는 말과 동격이다. 적어도 현대에 와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철칙, 그는 결코 평범해서는 안 된다.

절대 말이 많아서는 안될 것, 그 대화는 시적이거나 냉소적이어야 할 것, 영상과 교합된 그의 이미지가 매우 강렬해야 할 것, 그에게 요구되는 것은 합리성보다는 날카로운 직관력이다. 가령 「모래시계」를 보자. 「모래시계」에 등장하는 인물은 비단 중심 인물뿐만 아니라 주변 인물도 거의 예외 없이 카리스마적이다. 그들은 간결한 대사와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80년대 역사의 질곡과 광기를 그려내고 있다. 그들이 수다스럽고 매우 ‘합리적(?)’이었다고 생각해 보라. 「모래시계」에서 이 휘황한 카리스마적 인물들은 결코 쉽게 담을 수 없는 80년대의 영상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태수와 우석과 혜린, 혹은 윤 회장과 재희, 그들에게서 영웅의 이미지를 읽기는 힘들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평범하지 않으며 성격 역시 매우 강렬하고도 직선적이다. 비록 영웅은 아니지만 그들은 그들을 바라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편안함’을 누릴 수 있게 하지는 않는다. 때에 따라 다소 불편하기까지 하다(삼청교육대에서의 태수를 상기해 보라). 그러나 관객은 그 불편함을 감수하고 그들이 겪는 운명과 질곡을 겸허히 수용할 준비가 돼 있다. 관객은 그들의 거대한 운명 앞에 자기 자신의 개연성을 포기하고 극과 조화되는 카리스마를 뒤쫓게 된다. 이 순간 관객의 시선은 그들의 카리스마를 정점으로 암묵적인 집단을 형성하게 된다.

또 다른 유형이 가능할까. 전혀 강렬하지도 카리스마가 있지도 않은데 관객들을 흡입하는 인물이 가능할까. 가령 김수현의 드라마들을 보자. 「목욕탕집 사람들」에서 과묵한 인물을 발견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중심 인물은 물론이거니와 주변 인물들도 예외 없이 모두 수다쟁이다. 그런데도 관객들은 「목욕탕집 사람들」의 시청률을 마구 올려 주었다. 몰입이 되지 않는 영화, 드라마가 흥행에 성공하기는 힘들다. 관객들은 「목욕탕집 사람들」에게 몰입한다. 그리고 그들의 수다를 통해 욕구를 해소한다. 당연하게도 수다를 떠는 그들은 우리와 매우 유사한 동족이며 어쩌면 우리 앞집에 사는 아줌마, 뒷집에 사는 새침떼기 아가씨, 어쩌면 바로 당신일 수도 있다. 관객은 그들에게 복종할 필요가 없다. 그들의 카리스마 앞에 운집해 그의 지도를 받을 필요도 없다. 비로소 관객은 관객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서 인물로의 몰입이 가능하다.

집단적 무의식으로부터 개인으로

오해 마시라. 내가 위에서 시도한 단순한 구분은 순전히 한석규를 설명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인물이 극의 전부를 결정하는 것도 아니며 몰입, 혹은 자기 이입 역시 온전히 인물에게만 투사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인물로의 몰입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얼마든지 얻어터지며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하는 보디가드 이정재에게 공감할 수 있다.

한석규는 당연히 비(非)카리스마적인 인물이다. 그는 제법 강렬해야 할 「쉬리」의 정보원역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게 소화해 냈다. 그런데도 그가 관객들을 사로잡는다고? 나는 앞서 비카리스마적인 인물이 관객의 몰입을 유도하는 조건 중에서 ‘수다’를 들었다. 그러나 한석규는 유감스럽게도 수다쟁이도 아니다.

나는 그 해답을 그의 일상적이지만 일상적이지 않은 이미지에서 찾아낸다. 관객은 어쩌면 극장을 나가는 순간 한석규와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얼굴과 목소리가 말끔하고 그리 튀지 않는 인상, 도회적이며 약간은 지적인 분위기. 우리는 우리의 대부분이 「목욕탕집 사람들」처럼 수다스럽고 시끄럽지만 주위에서 이런 사람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발견 가능한 형상이 바로 우리의 이상형이 됐을 때 한석규가 영화에서 누리는 지위의 한 해명이 가능하다. 관객들은 영화를 통해서 드디어 현실적인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흔히 신세대의 새로움, 혹은 자유분방한 개성에 찬탄과 비난이라는 양극단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개성이 아니다. 그들은 그 개성을 가늠할 잣대를 어디서 구하는가. 자기 자신? 그들은 집단이다. 집단적 무의식에 갇힌, 덜 깨어난 자의식이다. 그들이 HOT에 열광하고 정우성에게 열광하는 것은 집단 최면이다. 카리스마 앞에 속박돼 자기 개연성을 포기한 존재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집단적 속성을 숙주로 카리스마적 기호는 예나 지금이나 맹위를 떨치고 있다. 그들이 간직하고 있는 그 집단 무의식은 분명 고대의 항목이다. 집단과 개인의 이상이 일치하는 세계, 그래서 루카치의 표현대로 그들은 행복하다. 그러나 고대와 달리 그 일치는 가상일 뿐 현실이 아니다. 이제 곧 집단에서 떨어져 나와 개인의 실존에 부닥뜨릴 것이다.

나는 한석규를 비현실적인 꿈에서 현실적인 꿈으로 돌아선, 그리하여 집단에서 개인으로 날개를 펼친 대중의 문화적 징후로 읽으려 하고 있다. 물론 이것이 아직까지 무리한 독법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우리는 아직도 많은 할리우드 액션스타에게 열광한다. 그들의 이미지는 영화 밖에서조차 우리를 지배한다. 할리우드 영화는 그들의 서구적 인물(외모에서부터 성격, 복장에 이르기까지)을 우리의 이상향으로 전파하는 데 가장 주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바로 이들의 틈을 비집고 한석규는 하나의 현상으로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집단과 개인의 과도기

지난 70, 80년대는 몇몇 자각적인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무지몽매한 시절이었다. 그들은 쉽게 동원됐고, 쉽게 동의했다. 박통(朴統)의 죽음 앞에 많은 국민들이 ‘집단적’으로 오열했다. 그 순간 그들은 개인이 아니었다. 그 집단의 도식은 민주, 반민주를 구분하지 않았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집단의 구심력은 서서히 해체됐다. 학력도, 성격도, 능력도 평준화됐다. 그리하여 그들은 더 이상 집단의 강권에 동의하지 않게 됐고 동원돼도 냉소할 줄 알게 됐다. 그러나 문제는 남았다. 그들은 각자 자신만의 고유한 꿈을 꾸어야 했고 경험의 일천함으로 인해 방황했다.

그들은 영화에서 보여주는 몇몇 영웅상의 이미지로부터 ‘비현실감’을 말할 수 있게 됐다. 그 ‘비현실감’으로부터 허황됨을 느끼게까지 됐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선 한석규는 얼마나 현실적이고 그럴 듯한가. 관객은 쉽게 그에게 동의했다. 그렇다면 또 하나의 집단이 형성되는 것인가.

꿈은, 그것이 비현실적일수록 더 목마르다. 비현실적일수록 통제되기 어렵고 또 비합리적이다. 보다 현실적인 꿈을 꿀 때 우리는 좀더 냉정해지고 시야가 넓어진다. 열광할 필요가 없다. 그냥 추구하면 된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한석규에게(보편적으로) 열광하면서도(개인적으로) 열광하지 않는 하나의 해답이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나는 우리의 문화적 대중이 집단에서 갓 떨어져 나온 민둥이라고 추측한다. 털도 없고 관절과 근육도 아직 갓난 상태다. 뼈와 근육이 자라고 자기만의 털이 됐을 때 그들은 집단 단위가 아닌 개인 단위 수준의 개성을 갖추게 될 것이다. 그 과도기적 단계에 한석규는 서 있고 결국 그는 하나의 디딤돌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쉬리」,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 그리고 「유령」

이 세 영화는 모두 한 제작사에서 만들어졌다는 것 말고 매우 많은 제작비가 들어간 야심작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또 다른 공통점은 이들의 이데올로기가 다소 부도덕하다는 게 아닐까. 「쉬리」는 영화 흥행사를 새로 썼고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은 흥행에 실패했다. 「유령」은 아직 미정이다. 「쉬리」는 조금 예외가 되겠지만 나머지 둘은 모두 일본을 상대로 한 극우적 색채를 띠고 있다. 이들은 하나같이 안전판 구실로 극우적 색채를 띤 민족주의를 이데올로기로 삼고 있다. 「쉬리」가 이데올로기의 표피만을 부도덕하게 차용해왔다면 나머지 둘은 다소 더 적극적이다.

나는 하나의 예언을 하고 싶다. 극우적 이데올로기도 보다 탄탄한 개연성을 가져야 할 것이다. 예전과 같이 무식하게 선동만 해서는 적어도 문화판에 있어서 효용력이 없다. 그러나 이 이데올로기의 남루함이 언제까지 견뎌낼 수 있을까. 일본의 핵 도발을 막는 길은 오직 우리도 핵을 갖는 길일 뿐이다? 조금 세련돼 보이는 이 결말은 그러나 역시 남루하다. 그 비전이 반일 감정에 기초됐을 때 그 부도덕함은 더하다.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내가 지목한 한석규라는 현상은 이상과 현실이 조화되는 징조이다. 당위와 현실이 조화될 때 개인은 행복하다. 이것이 도대체 현대에서 가능할까.

여기까지이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매우 복잡한 ‘근대’의 문제가 되겠지만, 나는 한석규를 그 근처에까지만 놓아두고 이 글을 끝맺고자 한다. 「유령」은 과연 유령처럼 남아 있는 우리의 집단적 반일의식에 호소할 수 있을까. 설령 호소하지 못한다고 해서 흥행에 실패할 것이라는 재단은 섣부르다. 최민수와 정우성이라는 주연 배우는 물론이거니와 잠수함이라는 이색적 소재 모두 흥행 조건이기 때문이다. 다만 조금은 무책임하게 시비를 걸고 싶은 것이다. 한석규라는 문화적 코드를 지닌 이 시대의 관객들은 적어도 그런 남루한 집단적 이데올로기에 동원되지도, 동의되지도 않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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