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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죄선일보 > 월간 인물과사상이 파헤친 죄선일보 - 1998년4월호~2000년9월호


이 름 강준만
제 목 벤 추 라 : 대중은 정치인의 ‘솔직’에 굶주려 있다.
‘벤추라, 미 개혁당 장악’

제시 벤추라. 어디서 듣긴 들은 것 같은데 대부분의 독자들에겐 낯선 이름일 것임에 틀림없다. 프로 레슬러 출신의 미국 주지사라고 하면 신문에서 읽은 것 같다는 기억을 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올해 나이 48세인 미국 미네소타 주지사인 제시 벤추라는 미국뿐만 아니라 이미 우리 언론으로부터도 사랑을 받고 있어서 앞으로 그의 얼굴과 이름을 자주 보게 될 것이다.

벤추라는 로스 페로가 이끄는 개혁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서달라는 요청을 받고 있어서 더욱 그렇다. 개혁당은 지난 92년 대선에 출마했던 로스 페로가 19%의 지지를 얻은 걸 기반으로 삼아 지난 95년에 만든 정당이지만, 민주·공화 양당 체제에 염증을 느끼는 사람들로부터 제법 무시할 수 없는 ‘반사적’ 지지를 얻고 있다. 벤추라는 개혁당 출신 가운데에선 가장 높은 공직에 오른 인물인데다 대중매체의 각광을 받고 있는 인물이니 그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고 해서 크게 놀랄 일은 아니다. 물론 승패에 관계없이 말이다.

벤추라는 레슬러 시절에도 대통령이 되겠다고 큰소리쳤다고 당시의 동료들이 증언하고 있는 걸로 미루어 보더라도 그의 대통령 출마는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다. 그는 대통령 후보의 자격 조건까지 제시했는데, 그건 “제3당 소속으로 선출된 주지사라야 하며 키 193㎝ 정도에 캐처용 글러브만한 손을 가졌고 특대 사이즈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건 바로 벤추라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다(「뉴스위크 한국판」, 99년 7월 21일자, 40면)

그러나 벤추라는 “임기가 끝날 때까지 현직을 고수할 것”이라며 대신 로웰 웨이커 전 코네티컷 주지사를 지지한다고 밝힌 바 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말인가. 웨이커는 확답을 피하고 있지만 다음과 같은 그의 발언은 벤추라가 웨이커를 택한 이유를 짐작케 한다.

공화당을 안방에서 몰아내고 민주당을 회의실에서 쫓아낸다면 이 나라는 위대한 나라가 될 것이다.”(「조선일보」, 99년 7월 15일자, 9면)

「뉴스위크 한국판」 99년 7월 21일자는 웨이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들은 묘한 콤비를 이룬다. 벤추라는 프로 레슬러 출신인 반면 웨이커는 명문가 출신으로 한 제약업체의 상속자다. 지난달 벤추라와 웨이커는 뉴욕 맨해튼에서 3시간 동안 머리를 맞댔다. 그들 사이에 더 강력한 제3당 건설에 대한 대화가 오갔다. 그들은 자신만만하고 오만한 성격, 기존 정치에 대한 환멸, 키 작은 약자를 옹호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거의 병적인 생각까지 공유하고 있다.…… 웨이커는 과거 공화당 소속 3선 상원의원으로 당 노선과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행동했다. 그는 워커게이트 사건 초기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사임을 촉구한 바 있다. 그는 ‘장애인법’ 등 입법 실적도 많다. 4선 도전에서 고배를 마신 웨이커는 코네티컷당 소속으로 코네티컷 주의회에 쉽게 진출했다. 그러나 때로 거만하기도 한 그는 쉽게 적을 만드는 성격이다. 게다가 인종 및 학교의 기도시간 같은 문제에 대해 매우 진보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대선에 임하는 벤추라의 자세는 아주 진지하고 심각하다. 그는 7월 23∼25일로 예정된 개혁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당원들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을 통해 당권 도전을 공식 선언했다. 벤추라는 플로리다주 개혁당을 이끌고 있는 잭 가건을 의장 후보로 지명하면서 자신의 지명이 관철되지 않으면 개혁당을 떠나겠다고 위협했다.

물론 벤추라의 위협은 지난 92, 96년에 이어 대권 3수를 노리고 있는 페로를 겨냥한 것이다. 벤추라는 당외 인사의 영입이 가능하도록 당헌을 개정할 것을 요구해 왔다. 부동산 재벌 도날드 트럼프와 공화당의 보수 강경파인 팻 부캐넌도 개혁당으로 옮겨 대선 출마를 노린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그러한 당헌 개정은 페로의 위치를 위협할 게 틀림없다.
개혁당이 왜 그렇게 인기가 높은 걸까? 지난 대선에서 페로가 9% 득표한 덕택으로 이번 2000년 대선에서 1천2백60만 달러 이상의 연방 선거 자금을 받게 된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미국 선거자금법은 5% 이상 득표한 후보의 정당에 선거자금을 지원한다). 그와 동시에 민주, 공화 양당의 구태 정치에 신물이 난 유권자들이 많다는 점도 또 다른 이유일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우리 언론에서도 개혁당에 관한 보도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7월 27일자 신문들은 <벤추라, 미 개혁당 장악>(경향), <미 개혁당 벤추라 전성시대>(한겨레), <미네소타 주지사 제시 벤추라 미 개혁당 당권 쟁취>(한국) 등의 제목으로 개혁당의 전당대회 결과를 보도하고 있다. 벤추라가 민 잭 가건이 페로가 지지한 패트리셔 벤저민을 213 대 135의 압도적인 표 차이로 누르고 신임 당의장에 선출됐다는 것이다.

레슬러 ·영화배우 출신의 시장

1951년 7월 15일 미네소타주 미네아폴리스에서 독일계와 슬로바키아계 가정에서 출생한 벤추라의 본명은 제임스 조지 제이너스다. 벤추라는 고교 졸업후 18세의 나이로 해군에 입대했는데, 해군 특수부대(SEAL)에 지원해 4년간 베트남에서 특수 임무를 수행했다. 주로 수중 폭파 요원으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벤추라는 73년에 제대해 22살의 늦은 나이에 대학에 들어갔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중퇴하고 말았다. 그는 이 직업, 저 직업을 전전하며 방황을 했으며, 캘리포니아에서 한동안 오토바이족으로 살기도 했다. 그 기간중 지금의 부인 테리를 만났다고 한다. 그는 또 한동안 록그룹 롤링 스톤스의 보디 가드로 일하기도 했다.

75년 벤추라는 어렸을 때부터의 꿈이기도 했던 프로 레슬러로 변신했다. 그러나 워낙 늦은 나이에 입문했기 때문에 그의 레슬링 솜씨는 보잘 것 없었다. ‘치고 도망가기’와 못된 악한 노릇을 하는 게 그의 주 특기였다.

물론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벤추라는 자신만의 독특한 ‘무기’를 또 하나 개발했는데, 그건 바로 ‘이빨’이었다. 이빨로 물어 뜯어서 무기라는 게 아니다. 그는 말로 한 몫보는 기술을 터득한 것이다. 그는 탁월한 쇼맨십과 관중 선동의 재능을 보여 카리스마가 있는 레슬러로 인기를 누렸다. 특히 시합전 기자회견 솜씨가 일품이었다. 프로 레슬러들의 기자회견이라는 건 상대편을 어떻게 요리하겠다는 따위의 무시무시한 겁을 줌으로써 관중을 불러 모으는 일종의 쇼라고 할 수 있는데, 벤추라는 바로 그런 면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던 것이다.

벤추라의 말 솜씨를 눈여겨 본 프로모터의 권유로 그는 85년부터 레슬링 경기의 해설자로도 활약했다. 그의 레슬링 경기 해설은 큰 인기를 누려 그는 86년부터는 아예 전업 해설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의 유명세는 할리우드에까지 영향을 미쳐 벤추라는 87년 처음으로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와 함께 「프레데터」라는 영화에 출연하게 되었다. 그는 슈왈츠제네거와 친해져 또 같이 그 해에 「러닝맨」에도 출연했다. 영화배우로 변신한 벤추라는 91년엔 B급 영화의 주연을 맡기도 했지만 큰 재미를 보지는 못했다.

그런 가운데 벤추라는 지방정치에 서서히 발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그는 평소부터 지방정치에 많은 문제가 있다는 걸 느껴왔다고 한다. 그는 90년 가을부터 자신이 사는 동네인 미네아폴리스 근교의 브루클린 파크의 시 의회 회의에 정기적으로 참관하며 훈수를 두기 시작했다. 그가 시정에 대해 비판을 퍼붓자 시 의원들은 “그러면 네가 시장을 해봐”라고 비아냥댔다고 한다. 시 의원들은 ‘설마’ 했을 것이다. 그러나 벤추라는 그 해 11월 실제로 시장 선거에 출마해 18년간 장기집권을 해온 현직 시장을 물리치고 시장에 당선됐다. 그는 시장으로 4년간 재임했지만 자신의 무능력 때문인지 아니면 의회의 비협조 때문인지 이렇다 할 업적을 남기진 못했다.

벤추라는 시장 재임중에도 레슬링에 관여하고 영화에도 출연했는데, 영화의 대표작은 93년 실베스터 스탤론의 영화 「데몰리션맨」이었다. 벤추라는 시장 임기가 끝나자 미네소타 라디오 방송의 아침 토크쇼 사회자로 활약했으며, 96년엔 인기 TV 시리즈인 「X 파일」에 출연하기도 했고 97년엔 다시 슈왈츠제네거와 같이 「배트맨과 로빈」이라는 영화에 출연했다. 또 97년에 라디오 스포츠 토크쇼의 사회자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98년 주지사 선거에 출마했던 것이다.

주지사에 당선된 ‘떡대’

벤추라는 프로 레슬러로 활약하던 시절 ‘떡대’(the Body)라는 별명을 얻었다. 키 196㎝, 몸무게 118㎏의 거구에 어울림직한 별명이다. 그런 ‘떡대’가 주지사에 당선됐으니 미국이 발칵 뒤집힌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닐 게다. 98년 11월 3일 실시된 미국 중간선거의 최대 이변은 벤추라의 주지사 당선이었다는 건 두말 하면 잔소리다.

선거 직전에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벤추라의 지지율은 민주 공화 양당 후보에 한참 뒤져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선거 결과에 더욱 경악했다. 98년 6월 7%에 불과했던 벤추라의 지지율은 선거 나흘전인 10월 29일 23%까지 올라가긴 했지만 민주당의 휴버트 험프리 3세(34%)나 공화당의 놈 콜맨(33%)에 비해서는 여전히 10% 포이트 이상 뒤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37%의 지지율로 1등을 차지했으니 이 어찌 이변이 아니랴.

개표 방송을 진행하면서 CBS-TV 앵커 댄 래더는 “위싱턴 사람들은 피델 카스트로가 하마를 타고서 중서부 초원을 달린다 해도 이보다는 덜 놀랄 것”이라고 논평했다. 세상의 그런 시각을 의식한 탓인지 벤추라는 승리가 확정된 후 NBC-TV의 뉴스 앵커 톰 브로코와의 인터뷰에서 이제는 ‘몸’(the Body)이 아닌 ‘정신’(the Mind)으로 알려지고 싶다고 말했다.

벤추라는 주지사가 된 다음에도 예전 시장을 할 때에도 그랬던 것처럼 레슬링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고 있다. 그는 8월 22일에 열리는 세계레슬링연맹(WWF)전에 1일 심판으로 참가한다고 한다. 심판료로 받는 10만 달러는 자선단체 기부와 장학금으로 쓰겠다고 밝혔다. 그래도 일각에서 주지사가 그게 뭐하는 짓이냐는 비난이 끊이지 않자 그는 “주지사는 재미 좀 볼 수 없다는 법이 어디 있느냐. 경기 당일은 일요일이라 업무를 보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세상을 경악케 한 벤추라의 승인(勝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동아일보」 홍은택 워싱턴 특파원은 99년 6월 30일자 A6면에 쓴 기사에서 벤추라의 승리를 ‘사이버 정치’의 승리라고 부르면서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벤추라는 선거 사흘전 ‘주지사를 향한 72시간의 최종 질주’ 캠페인을 펼쳤다. 주 전역에서 자신의 지지 결의대회를 동시다발적으로 개최한 것. 이 행사를 위해 벤추라는 자신의 웹사이트(www.jesseventura.org)를 통해 조직한 하이테크 신경망 ‘JesseNet’를 가동했다.
하이테크 신경망을 통해 이미 확보한 3,000명의 지지자들에게 E메일을 보내 결의대회 개최소식을 전했다. 불과 몇 분만에 연락이 완료됐다. 물론 연락을 위한 중간조직도 필요 없었다. 메일을 받은 지지자들은 즉각 지역별 지지결의대회를 준비했다.

이같은 움직임이 지역언론의 큰 주목을 끌어 선거막판 사흘 동안 유권자들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덕분에 벤추라는 불과 1만 달러를 손에 쥐고 단기필마로 출마한 선거에서 대역전극을 이뤄냈다.

승리의 일등공신인 웹사이트에 지출된 비용은 불과 600달러(약 72만원). 웹사이트를 통해 벤추라 인형을 팔고 하루 평균 1,500달러의 정치자금을 모았으며 지지자들과 의견을 주고 받을 수 있게 해준 것을 고려하면 이 돈 또한 지출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벤추라가 이길 수 있었던 요인 가운데는 미네소타주가 전자민주주의를 위한 사회간접자본이 발달한 곳이라는 점도 포함된다. 94년에 생긴 ‘미네소타 E-Democracy’ 웹사이트는 세계 최초로 후보들과 그들의 공약을 소개하고 온라인 후보 토론회를 개최했다. 벤추라는 양당 후보 위주로 보도하는 기존 언론과는 달리 이 웹사이트에서는 똑같은 후보의 한 명으로서 대접받았다. 벤추라는 ‘공평한’ 기회를 활용, 토론회에서 다른 후보들을 압도해 지지기반을 넓힐 수 있었다.

벤추라의 성공적인 E-캠페인 사례는 E-Politics 시대에는 기존 정치집단에 가담하지 않은 돈 없는 후보도 당선의 영광을 누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벤추라의 이데올로기는 ‘솔직’?

그러나 아무나 사이버 정치를 한다고 해서 주지사에 당선될 수 있는 건 아닐 게다. 사이버 정치의 혜택이 없었다면 벤추라의 승리는 불가능했겠지만, 그것 이외에도 벤추라 특유의 그 무엇이 있었기에 그의 승리가 가능했던 것임에 틀림없다. 그게 무얼까?

그건 기존 정치판에 대한 유권자들의 염증에 불을 지른 벤추라의 탁월한 선동 솜씨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전 레슬링 시합을 할 때에 관중을 선동하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 선동을 하기 위해선 기존 정치인들과는 다른 그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그게 무얼까?

그건 바로 허세를 부리지 않는 솔직함이었다. 사실 일반적인 기준으로 보자면 그의 솔직함은 과잉이다. 그는 올 봄 자신이 출연했던 영화 「프레데터」에서 자신의 주요 대사였던 ‘나는 피를 흘릴 시간이 없다’는 말을 제목으로 삼은 자서전을 냈는데, 이 자서전 역시 솔직 그 자체다. 「조선일보」(99년 5월 18일자) 윤희영 기자가 보도한 바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16세때 고교 친구들과의 내기에서 이기기 위해 동정(童貞)을 버렸으며, 마리화나와 스테로이드를 사용한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해군 복무 시절엔 네바다 외곽 창녀촌에서 화대 대신 기관총 탄창으로 만든 벨트를 주자 오히려 상대가 10달러를 쥐어 줬다고 말했다. 그는 또 베트남전에 참전해 동남아에서 17개월간 복무하는 동안엔 전투보다 술 파티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면서, 지금껏 내의를 입지 않는 것은 당시 술집에서 탁자에 올라가 몸매를 자랑하면서 습관이 됐다고 술회했다.

벤추라는 선거에 임해서도 자신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직업 정치인이 아니라는 걸 강조했으며 이익집단의 앞잡이가 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선거 공약도 간단명료하게 ‘솔직한 주지사’였다. 그의 솔직함은 젊은이들 사이에 높은 인기를 누렸다. 그는 기자들의 질문 가운데 모르는 게 있으면 솔직하게 ‘모른다’고 대답하곤 했는데 그것마저도 인기를 얻는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말은 바로 하자. 주지사 선거에 출마한 사람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최소한의 상식이란 게 있을 게다. 솔직히 벤추라는 그 점에 있어선 상당히 무식하다. 논리적 일관성도 없어 정치적 성향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낙태와 동성애에 찬성하는 동시에 개인의 총기 소지에 대해서도 찬성한다. 자기 스스로 재정적인 면에선 보수적이라고 말하면서도 브루클린 파크의 시장 시절 해마다 세금을 올린 이력을 갖고 있다.

벤추라의 정치 노선은 굳이 좋게 말하자면 중도주의다. 그는 “이념에 치우친 기존 양당정치 사이의 빈 공간”을 뚫는 게 자신의 입지라며 민주당이건 공화당이건 국민에게 유리하다면 누구와도 타협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의 내각은 정파를 초월한 전문가·개혁 인사로 구성됐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의 인기가 기존의 양당제 정치 구도에 변화를 몰고 오는 기폭제가 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주목한다. 또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외견상의 파격 이외에 그가 기존 정치의 대안으로 제시하는 내용이 별 게 없으며, 그가 누리고 있는 인기는 재미를 좇는 언론이 만들어낸 일시적 현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중앙일보」, 99년 7월 19일자, 10면)

벤추라의 인기는 기존 정치인들이 만들어 준 것

어찌됐건 미네소타 주민들은 주지사로 벤추라를 택했다. 물론 설마 벤추라가 당선될까 싶어서 장난으로 던진 표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장난으로 표를 던진 유권자들조차 벤추라의 솔직함에 높은 점수를 주었다는 건 분명하다. 벤추라가 얻은 지지는 ‘반사적 지지’의 의미가 강하다. 즉, 솔직하지 못한 기존 정치인들의 행태에 유권자들이 넌덜머리를 내고 있는 상황에서 벤추라의 솔직한 박력은 무식이라고 하는 약점을 커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는 말이다. 「한겨레」 정연주 특파원은 99년 1월 13일자 12면에 쓴 기사에서 벤추라가 인기를 누리는 비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네소타 정치」라는 소식지의 편집장인 DJ 리어리는 “벤추라의 강점은 기성 정치인과는 다른 새로운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벤추라도 주지사 당선 뒤 “정치인들은 국민들의 눈을 보고,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정치를 해야 한다. 그런데 정치인들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당파싸움만 계속한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정치도 ‘힘의 발레’인 프로 레슬링처럼 신나고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지론에 따라 그의 선거운동도 무척 재미가 있었다. 민주·공화당 후보들이 마치 내일 종말이라도 오는 것처럼 굳은 표정으로 서로를 비판·중상·모략하는 데 열을 올린 반면…… 그는 인형을 동원한 텔레비전 광고에다, 기지와 우스갯소리가 섞인 선거연설을 했다. 벤추라가 이처럼 미국 정치권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면서 미국언론의 관심을 집중적으로 받자, 미네소타를 찾는 관광객도 늘어나고 있다는 소식이다. “벤추라를 주지사로 뽑은 미네소타 주민들과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게 벤추라 신임 주지사의 말이다.

유권자들은 겉으로 내뱉는 말과는 달리 특권계급으로 변질된 정치인에 대해 강한 혐오감을 갖고 있다. 그런데 벤추라는 기존 정치인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관용차도 리무진이 아닌 대형 트럭이다. 이런 기행(奇行)마저도 사랑스럽다. 왜? 기존 정치인들에 대한 염증 때문이다. 99년 1월 16일에 열린 벤추라의 취임식도 벤추라가 누리는 인기의 비결이 무엇인지 그걸 잘 시사해주었다. 「대한매일」 최철호 워싱턴 특파원은 99년 1월 19일자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전한다.

우선 복장부터가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었다. 그는 당선 이후 애써 입어보이던 양복을 벗어던진 채 너덜너덜한 견장이 달린 가죽 조끼에 속에는 티셔츠를 받쳐 입었으며, 여기에 검은 색 선글라스를 낀 모습은 영락없는 레슬러 전성기때의 모습이었다. 그는 단상에 올라서자마자 양손을 번쩍 들어올리며 “여러분 여기 덩치가 돌아왔습니다. 자, 파티를 즐깁시다”라고 외쳤다. 취임식장은 이내 레슬링 특설무대가 돼버렸다. 덩치(the body)란 그가 레슬러 시절 인기를 구가할 때 불리던 별명. 부창부수라고 할까. 그의 아내 복장 역시 ‘검은색 가죽 투피스’였다. 취임식장에서는 점잖은 포도주 대신 맥주가 흘러 넘쳤고 참석한 사람들 역시 정장이 아닌 청바지 차림이 대부분이었다. 사람들은 행사에 참석하려고 10∼20달러 하는 입장표를 사기 위해 장사진을 쳤다는 후문이며 1만3천8백의 표가 모두 동이 났다.
그렇게 기행을 일삼으니 벤추라 자체가 늘 값 나가는 뉴스 이벤트일 수밖에 없다. 각종 매체의 인터뷰와 특집 기사는 말할 것도 없고 웬만한 TV 토크쇼는 벤추라를 섭외하느라 안달이다. 「중앙일보」 99년 7월 19일자 보도에 따르면, 그의 인기도는 득표율 37%의 두 배가 넘는 85%로 치솟고, 직무 수행에 대한 주민 만족도도 72%에 이른다. 캘리포니아 여론조사에선 그의 지명도가 현직 캘리포니아 주지사보다 높은 80%를 기록했다.

미국에서 인기가 높으면 당연히 한국에서도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 된다. 우리 언론에서도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보도되고 있다. 벤추라는 전국주지사협의회 참석을 위해 워싱턴 정가에 등장했는데 중앙일보 장정훈 기자는 99년 2월 23일자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지난 1월 16일 취임한 벤추라는 20일 마침내 워싱턴 정가에 등장했다. 전국주지사협의회 참석을 위해서다. 그는 누구보다 많은 기자와 TV 카메라를 몰고 다닌다. 차기 대선 주자들이 오히려 찬밥 신세다. 오죽하면 “내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면 당선은 문제없다”고 콘소리를 칠까. 그의 독설은 거침이 없다. 그는 21일 백악관 만찬에서 “내가 섹스 스캔들에 휘말리면 스스로 사퇴한다. 미네소타 주민은 걱정 안해도 된다”고 기염을 토했다. 물론 클린턴 대통령을 꼬집은 말이다. 뉴욕주 상원의원 출마를 저울질하는 힐러리에 대해서는 “뉴욕에서 산 적도 없지 않느냐. 고향인 아칸소에서나 나가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벤추라의 주지사 활동 역시 기행의 연속이다. 최근에는 올 봄 미네소타를 방문하는 바츨라프 하벨 체코 대통령의 공식 환영만찬을 로큰롤 파티로 치르겠다고 발표했다. 성사되면 세계 최초다.

유권자를 속이는 건 유권자들 자신

나는 벤추라가 주지사로서 큰 업적을 이룰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기존 정치가 아무리 썩었어도 정치는 로큰롤이나 레슬링과는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가 로큰롤이나 레슬링처럼 이루어진다 해도 큰일 날 건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려면 기존 정치보다 더 못할까?

벤추라는 수많은 제시 벤추라들이 나와야 한다고 역설한다. 옳은 말씀이다. 그러나 벤추라든 개혁당의 그 어떤 후보든 기존의 양당 체제에 심각한 위협이 되진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대중이 기존 정치를 욕한다고 해서 그들이 변화를 염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건 큰 오산이다. 오늘날의 대중에게 정치는 ‘오락’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똑같은 시기에 한쪽에서는 미국인들의 정치 혐오증이 극에 달했다는 조사 결과가 나오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양당 구도를 선호한다는 조사 결과가 나온다.

「세계일보」 99년 7월 16일자 보도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현재 미국 경제가 잘 나가고 있기 때문에 현상 유지를 바라고 있으며 그 결과 새로운 정치 세력에 대한 기대감을 별로 갖지 않고 있다고 한다. 벤추라는 이미 그 점을 간파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에게 있어서 정치는 이미 오락이 아니었던가. 그가 행여 심각해지거나 근엄해지는 함정에 빠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왜 오락 제공의 차원에서나마 벤추라와 같은 인물을 구경할 수 없는 걸까? 우리 나라의 유권자들은 미국의 유권자들보다 훨씬 더 정치인들의 ‘솔직’에 굶주려 있는 게 아닐까?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 조만간 벤추라와 같은 인물이 나오는 걸 기대하긴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유권자들 스스로 솔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솔직하지 않으면서 정치인만 솔직해지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니 요구할 수는 있다 하더라도 표를 던지는 행위 자체가 솔직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런 요구가 어찌 실현될 수 있겠는가. 정치인이 유권자를 속이는 게 아니다. 한국 유권자들을 속이는 건 유권자들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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