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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죄선일보 > 월간 인물과사상이 파헤친 죄선일보 - 1998년4월호~2000년9월호


이 름 위택환
제 목 거꾸로 선 역사바로세우기 - 희비 엇갈린 양 김씨
떠오르는 백범 김구

세기말 광복절도 멀지 않았다. 해방 후 처음으로 명실상부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했다는 새 정부는 역사바로세우기와 민족정기에 대해 역대 어느 정권보다도 적잖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 와중에 올 들어 어느 때 보다도 부각되는 인물이 있다. 바로 백범 김구다. 때마침 올해는 그가 흉탄에 맞아 숨진 지 50주년 되는 해라서 백범기념관, 백범전집, 백범 기념주화 등 온 나라가 온통 백범메뉴로 도배질을 해대고 있는 느낌이다.

최근 들어 언론매체에 ‘백범기념관 건립에 온 국민의 참여를 호소합니다’라는 광고가 빈번히 실린 것도 그 중 하나였다. 백범기념관 건립위원회(위원장 이수성)명의로 돼 있는 이 광고에는 국민의 이름으로 기념관 건립을 촉구하는 각계 인사들의 명단이 지면을 메웠다. 그 속에는 한국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 부문에 걸쳐 내로라 하는 주류인사들이 총망라돼 있었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마침내 하나됨을 위하여?

그런데 이들 인사의 면면을 보면 타협의 여지는 고사하고 같은 하늘 아래서는 도저히 함께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으니 이게 어찌된 일일까? 백범이 지향했던 나라는 국민이 주인되는 나라였다. 역대 대한민국 정부들 또한 임정의 정통성을 잇는다고 표방해 왔다. 그런데 백범기념관 건립위원회가 떡 하니 고문으로 위촉한 사람 가운데는 세 사람의 전직대통령을 비롯해 이 땅의 민주화와는 거리가 먼 사람 투성이다.

지도위원의 반열에 올라있는 정래혁 전 국회의장을 보자. 정씨는 일본육사를 졸업(58기)하고 일본군 소좌에 올랐던 인물이다. 해방 후 그는 미 군정청 근무, 경찰, 5·16 쿠데타 참여, 상공장관, 국방장관 등 출세가도를 달려왔다. 신군부 집권 후에도 민정당 대표위원, 국회의장을 역임하는 놀라운 능력과 수완을 발휘했다. 높은 자리만으로는 불만족스러웠던지 엄청난 재산까지 모았다가 문형태 의원의 투서로 완전히 추락했던 장본인이다.

5공화국 당시 뻔질나게 청와대에 밥 먹으러 드나들었던 관제 야당(민주한국당) 총재 유치송씨도 보인다. 당시 언론은 청와대의 점심식사를 대화와 타협의 정치라고 평가했었다.

일제시대 고등문관 시험을 거쳐 식민지 관리를 했던 채문식, 이항령, 신현확씨도 등장한다. 반면 이들과는 완전히 컬러가 다른 독립투사 이강훈씨 김준엽씨, 사학자 강만길씨도 보인다. 적잖게 친일행각을 벌였던 자칭 민족지 동아 조선의 사주도 등장한다. 독립투사와 친일행위자를 이토록 오묘하고도 조화롭게 배치한 재주가 놀라울 따름이다.

이수성 기념사업회장은 백범기념관 건립사업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지난해 6월 백범 선생의 아드님인 김신(金信) 장군의 부탁으로 기념사업회장을 맡아 일을 시작했다. 백범기념관은 단순한 숭모의 차원을 넘어 인의 사랑 자비의 백범사상을 온 국민에게 전파하고 실천하자는 것이다. 당파와 이기주의를 넘어 백범 정신을 되살리는 일이다 보니 반대하는 사람은 없다. 올 정월 초하룻날 전직 대통령 네 분을 찾아가 기념관 건립 취지를 말씀드렸더니 모두 흔쾌하게 고문직을 수락했다. 4월에 김대중 대통령을 명예위원장으로 추대해 기념관건립위원회를 발족했다.(「동아일보」, 99년 6월 26일자)

당파와 이기주의를 넘자는 이수성 회장의 말은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이를 위해선 당리당략과 자신의 이익에만 골몰했던 당사자들의 과거 잘못에 대한 뼈아픈 반성과 사과가 전제돼야 한다. 친일협력자까지 참여한 것은 김구에 대한 모독이다.

하기사 안중근의사 숭모회장, 이준열사 기념사업회장을 친일파였던 윤치영씨가 했고, 충무공기념사업회장도 친일시인 이은상씨가 했으니까 선례도 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추락한 김민수 서울대 전교수

백범 김구 서거 50주년을 빙자해 온 나라가 찧고 까부는 동안 국립 서울대학교에선 백범이 들으면 놀라 무덤 속에서 뛰어나올 만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96년 10월 17일 서울대 미대 김민수 교수(金玟秀, 산업디자인학과·디자인이론)는 미술대학 부설 조형연구소가 주최한 「한국현대미술교육과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1946∼1960」이라는 학술심포지엄에서 연구논문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디자인/공예 교육 50년사: 1946∼1990년>을 발표했다. 발표과정에서 이 논문에 대한 학문적인 문제나 이의제기는 없었다. 그러나 심포지엄이 끝난 후 미술대학 내의 일부 교수들이 일부 내용을 문제삼기 시작했다.

문제의 발단이 된 것은 발표된 논문의 내용 가운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초기 교수진의 몇몇 교수(장발 장우성 노수현)들이 친일활동에 가담했던 사실이 있다고 밝힌 기존의 연구 결과 <1940년대 초반 친일 미술의 군국주의적 경향성>를 각주에서 재인용한 부분이었다.문제가 된 발표논문 38쪽의 각주에서 전남대 이태호 교수의 연구결과를 인용해 김 교수가 언급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친일관련 인용에 대해 미대 학장과 일부 교수는 문제를 제기했고 그가 재직하고 있는 산업디자인과로까지 번졌다. 문제상황이 계속되면서 96년 11월 19일 미대학장 윤명로 교수로부터 호출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김 교수는 동양화과와 조소과 교수들이 연대서명으로 진상규명과 해명을 요구한 사실을 전해들었다. 이들은 다음날 미대 전체 교수회의에서 열릴 청문회식 회의에서 문제의 부분을 삭제한다고 약속만 하면 더 이상 문제삼지 않겠다고 했다. 다음날 교수회의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해명을 했다.

만일 미술대학이 서울대학교 내의 다른 학문분야와 수평적 위상의 학문분야로 생각하신다면, 학술 심포지엄에서 공적으로 다루어진 내용에 대해 일부 교수님들의 사적인 견해의 요청에 따라 이런 자리가 마련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학술 심포지엄의 목적은 상식적으로 공적인 논의를 위해 마련된 장이고, 사적인 감정을 갖고 연구한 내용을 발표한 자리도 아닙니다. 또한 학술 논문이 누군가의 마음에 흡족하게 하기 위해 준비되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만족스러운 내용만을 발표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 그렇게 했다면 그것이야말로 비 학술적인 것이며, 듣기 싫은 말은 다 빼고 좋은 말만 쓴다는 것이 무슨 학술적 가치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논문 쓰라고 저에게 요청했던 것이라면 애초에 준비도 하지 않았거니와 그렇게 오랜 시간 공들여 준비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학문하는 사람의 양심상 그렇게 할 수도 없거니와 저는 이 학교의 졸업생으로서 이 학교에서 그렇게 배우지도 않았습니다. 서울대학교 교훈이 말하는 “진리는 나의 빛”이란 학문이 진실에 보다 가까이 도달하기 위한 노력이라는 것 아닐까요? 선생님들께서 그렇게 저를 가르치지 않으셨던가요?

그렇기 때문에 만일 이번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내용에 문제가 있다면 동일한 학술발표의 형식을 통해 논의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정상적인 학문하는 자세라고 봅니다. 내년도 조형연구소 심포지엄에서 이 문제를 주제로 삼아 저의 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신 분들께서 직접 연구하신 내용을 근거로 반박하시고 다시 일깨워주실 부분이 있으면 그 때 그 자리에서 지적하시는 것이 합당한 일이라고 봅니다. 이것이 제가 아는 학문의 상식적인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제가 더 이상 이 자리에서 말씀드릴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회의가 몇몇 교수님들의 요청에 따라 마련된 것이니 만큼 이 회의는 지금부터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부터 녹음을 하겠습니다. 이런 자리를 마련하라는 요청이 있으셨을 때는 뚜렷한 주장과 내용이 있으셨을테니까 나중의 역사기록을 위해서라도 녹음을 하는 것이 제게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나중에 이런 말했다 안했다를 가지고 또 다시 문제될 수 있으니까 학술발표에서 다루어진 내용을 갖고 이런 회의가 열렸다는 사실을 후대에 남기기 위해 녹음을 해야겠습니다.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막상 김 교수가 녹음을 하려하자 그토록 격렬하게 문제를 제기했던 교수들은 갑자기 잠잠해졌다고 한다. 아무런 토론이나 이의제기 없이 간담회는 끝났다.

해명에도 불구하고 97년 7월 말 결국 김 교수는 재임용 불가 판정을 받았다. 재임용 심사에서 제출한 논문 <시각예술의 측면에서 본 李箱詩의 혁명성>이 부적합 판정을 받은 것이다.
7월 22일 그는 대학측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그는 너무나도 억울했지만 처음부터 언론이나 법에 호소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한마디로 낯뜨겁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서울대에 대해 누가 될까 해서였다고 한다. 진정서에는 고민의 흔적이 역력하다.

본 교수는 이상과 같이 그 동안의 과정을 돌이켜 볼 때, 최근 미술대학 인사위원회에서 본 교수에 대해 취한 결정에는 어떤 의혹이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의혹은 앞서 언급했던 학술 연구와 발표에서 비롯된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고 판단되며, 이 문제를 인사 행정에 반영한 조치로 판단될 수 있는 소지가 무척 많다고 생각됩니다. 본 교수는 이러한 내용이 혹시라도 외부 언론에 알려져 그 동안 서울대학교가 한국 최고의 학문과 지성의 전당으로서 쌓아온 명예에 조금이라도 누가 끼쳐질까 염려스럽습니다. 이에 본 교수는 다음과 같이 본 교수에게 내려진 결정에 대해 신중한 재심의 기회를 주시기를 간곡히 요청 드리는 바입니다.

8월24일 재차 소집된 대학 본부 인사위원회는 미대 인사위원회에 재심사해 줄 것을 요구했다. 김 교수는 구제되는 듯했다. 그러나 미대 인사위원회는 또 다시 논문에 대해 부적격 판정 내렸다. 8월 31일 열린 본부 인사위원회에서 그는 최종적으로 탈락했다. 재임용 불가결정과 관련, 서울대 미대는 “인사는 대학의 고유권한으로 구체적인 내용을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총장앞으로 보낸 탄원서에서 “자신의 연구저작물의 어떤 부분이 얼마나 부실한지를 알 권리가 있다”며 “그래야만 서울대를 떠난다 해도 미흡한 부분을 보완해 향후 연구방향을 바로 세워 학문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탈락사유를 밝혀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같은 호소도 허사였다. 9월1일자로 공식적으로 교수직위를 상실한 것이다. 단 한 차례도 소명기회도 없었다. 법정에서조차 재판관이 사형수에게 사형선고를 언도할 때도 할말이 없냐 라고 묻는데 자신에게는 그것마저도 없었다는 것이다. 재임용 대상 42명 가운데 그만 유일하게 미끄러졌다. 9월 9일 ‘임용기간 만료’라는 서울대측의 전보 한 통이 그의 집에 배달됐다.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김 교수는 이에 불복, 2학기 디자인학부 전공 필수과목인 디자인사와 대학본부 측에서 폐강 조치한 교양과목인 디자인과 생활수업을 그대로 강행했다. 디자인학부 학생들도 김 교수의 재임용 탈락 철회 서명작업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도저히 대화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절감한 그는 법에 호소하기로 하고 99년 1월 11일 서울대 총장을 상대로 교수재임용 거부처분 취소청구 소송을 서울 행정법원에 냈다. 김 교수는 소장에서 “재임용에 필요한 연구 실적물보다 4배나 많은 8편의 논문을 냈으며 적지 않은 대학에서 교재로 쓰이고 있는 산업디자인 관련 저술을 냈는데도 ‘연구실적 평가미달’이라는 이유로 교수 재임용 대상에서 제외한 것은 재량권 남용”이라며 “이는 지난 96년 교내 심포지엄에서 미대 원로들의 친일행적을 지적한데 따른 보복성 조처로 여겨진다”고 주장했다.

친일문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지난 98년 9월20일 방영된 MBC 「시사매거진 2580」 <재임용의 칼>에서 부수언 서울대 미대 학장은 김 교수의 친일언급부분은 재임용탈락과 연관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문제는 제가 확답을 할 수 있는데, 그 문제하고 이건 아무 상관이 없어요. 제가 그 인사위원회를 주도했고, 이건 제가 기관장의 명예를 걸고 말씀을 드릴 수가 있는데, 그 (논문)문제하고 이건 (재임용 심사는)별개의 사안으로 저희도 이해하고 있고, 그렇게 진행이 됐어요.

미대측의 말마따나 친일문제는 그의 해직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을지도 모른다. 친일언급 부분은 그의 논문가운데 일부이며 김 교수 자신 또한 친일문제를 언급하기 위한 목적으로 논문을 발표한 것도 아니었다. 설사 친일문제 언급이 불이익을 받은 원인이라 할지라도 친일 때문에 불이익을 줬다고 어느 누가 공개적으로 얘기하겠는가. 아무리 친일행위에 대한 단죄가 유야무야 되고 행위자들이 활개를 쳐도 드러내놓고 친일이 떳떳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선배교수에 대한 김 교수의 친일행위 언급이 미대내에서 숱한 비난과 논란에 부딪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김교수의 논문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디자인/공예 교육 50년사: 1946∼1990년>는 서울대 미대 학술지 「조형」지(97년초 발간)에 수록되지 못했다. 장시간에 걸쳐 연구한 논문을 발표했지만 그는 심포지엄 참석자로서도 기록조차 안됐다. 서울대 조형연구소(소장 한윤성)는 미게재 이유로 ‘연구주제를 1946∼60년으로 한정하기로 했으나 96년도까지 포함됐으며 문제의 친일행위 지적부분이 아직까지 학술적으로 정립되어 있지 않고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점 등을 들고 있다. 이처럼 친일문제 언급은 김 교수의 처지를 어렵게 만드는데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연구 기간을 96년도까지 확대한 것은 연구성과로 인정될 문제지 연구 오류로 간주될 수 없다며 반박하고 있다. 연구를 많이 한 것도 문제냐는 것이다. 덧붙여 당시 심포지엄에 같이 참여한 정형민 교수(동양화과)의 발표논문도 80년대까지 세 시기로 나눠 조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교수의 논문은 아무런 문제없이 「조형」지에 게재됐다. 한 마디로 논리와 원칙이 결여됐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김 교수는 이태호 교수에 의해 밝혀진 사실이 ‘학술적으로 정립되지 않은 것’이라면, 그렇지 않다는 근거를 ‘충분한 학술적인 자료’를 통해 자신에게 제시해달라고 미대 측에 요청했다. 이에 대해 미대측의 답변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자랑스런 서울대인으로 둔갑한 친일 미술인

서울대는 96년 10월 15일 개교 50주년을 맞아 ‘자랑스런 서울대인’으로 장발씨 등 5명을 선정했다. 김민수 교수의 발표논문으로 미대가 한창 떠들썩했던 시기다. 서울대는 그가 해방 이후 1946년 서울대 교수로 초빙돼 예술대학 미술학부를 설립하고 초대 미술대학장 등을 역임하면서 화가로서 뿐만 아니라 교육자로서도 탁월한 업적을 남긴 한국 화단의 선각자라고 추겨 세웠다. 이날 기념식에는 이수성 국무총리, 안병영 교육부장관 등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총출동 했다. 한술 더 떠 그의 업적을 기린다며 서울대 미대 교수들과 동문들은 장발의 동상을 세웠다. 동상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쓰여져 있다. 자랑스런 기록이라니까 밝혀둔다.

우석 장발 선생께서는 1901년에 나시어 1946년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 설립에 이바지 하셨고 초대 미술학부장에 선임되어 재임하시는 동안 미술대학 학풍을 세우고 체제를 다지는데 힘쓰셨다. 선생께서는 1953년 대학의 개편에 따라 미술대학 초대 학장에 취임하여 1961년까지 연임하시는 동안 이 나라 화단의 동량이 된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셨으며 미술대학 발전을 위해 혼신의 열정과 애정을 바치셨다. 선생의 공로를 기리고 후학들의 귀감으로 삼고자 서울대학교에서는 개교 50주년을 맞아 선생을 자랑스런 서울대인으로 선정하였다. 미술대학 교수들과 동문들은 선생의 공로와 학은을 기리기 위해 뜻을 모아 선생의 상을 세운다. 박세원은 앞면 글씨를 쓰고 최의순은 상을 제작하다. 1996년 12월10일.

여기서 잠시 ‘자랑스런 서울대인’이라는 장씨의 면면을 살펴보자. 그는 일제시대 조선미술가협회 서양화부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이 단체는 수 차례 전람회를 열어 그 수익금을 국방헌금으로 내는 등 친일행위에 앞장 서왔다. 또한 그는 ‘국가(일제)의 비상시국에 직면해 신체제 아래에서 일억 일심으로 미술가 일동도 궐기해 서로 단결을 굳게 하고 조선총력연맹에 협력해 직역봉공을 다하자’는 취지로 1941년 2월 22일 결성된 경성미술가 협회에 가입해 활동했다(「매일신보」, 1941년 2월23일자).

「서울대학교敎授民主化運動五十年史」도 장씨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으로 서술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교수 민주화운동 오십년사 발간위원회가 간행한 이 책에 나온 장씨의 모습은 ‘자랑스런 서울대인의 모습’과는 거리가 너무나도 멀다.

학생활동의 자주성을 침해하던 지나친 독선적 당국자를 규탄하기 위한 학생총회’가 1960년 5월 7일 개최되어 “과도한 간섭과 독선으로 학생의 인격과 자주성을 무시해 오던 현 학장 張勃 교수를 규탄하며 사퇴할 것을 학생총회의 명의로 결의하였다. ……무엇보다도 장발 학장의 퇴진문제가 중심이 되고 있었다. 화단의 분열과 파벌조성으로 인한 서울대 미대교수와 홍익대 교수들간의 대립은 학생들 사이에도 상호 경원시하는 풍토를 조성하였다. 학생들의 주장에서는 교수 임용에 있어서도 편견에 사로잡혀 진취적이고 다양한 화풍이 도입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우선 지적되고 있고, 학장의 독선적이고 고압적인 자세가 학생들의 창작능력을 배양시켜 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강조되었다.(제2장 4월혁명과 교수민주화운동, 41쪽)

문제는 이 책이 서울대 개교 50주년 사업의 일환으로 서울대측의 공식지원을 받아 97년 6월 출간됐다는 점이다(당시 선우중호 총장이 이 책의 발간사를 썼다). 이 책의 발간에 참여했던 김진균 교수(사회학과)는 위의 내용과 자랑스런 서울대인과는 거리가 멀지 않느냐는 물음에 “이미지상 안 맞고 모순된다”고 밝히고 있다.

세계가 인정하는‘서울대의 기준미달 논문’

서울대 미대 측이 공정을 기하기 위해 유례없이 3차까지 심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미달 판정을 받은 김 교수의 논문 <시각 예술의 측면에서 본 李箱 詩의 혁명성>에 대해 학술단체와 학계 인사들은 한결같이 그의 논문이 지닌 학술적 가치를 높이 인정하고 있다.

디자인, 미술, 건축학, 미학, 고고미술학, 문학 등 관련 학계는 김 교수의 논문이 폭넓은 학술이론을 소화시킨 탁월한 연구성과일 뿐만 아니라 디자인학계의 발전에 기여한 논문이라는 것이다.

서울대 오종환 교수(인문대 미학과)도 “조형적 관점에서의 이상 시에 대한 탁월한 분석은 김 교수가 단순히 실용적인 디자인의 어떤 한 분야만을 아는 것이 아니라 폭넓은 철학적·미학적 이론들을 소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같은 대학 김영나 교수(인문대 미학과)도 “시를 그래픽한 시각 패턴으로 분석한 논문이며 문학작품 읽기의 새로운 시도”라고 평가하고 있다.

더욱이 부적합하다는 그의 논문은 세계적 디자인 학술지인 「Visible language」 2000년 봄호에 게재될 예정이다. 지난 6월 30일 일리노이 공과대학(IIT)의 디자인연구소(Institute of Design)측은 김 교수에게 “이상의 시에 대한 논의가 대단히 근거 있고 다다이즘의 원리에 대해 이상이 확장시킨 공헌도, 그리고 구체시(concrete poetry)와 비견해서 이상이 보여준 내용은 이상이 서구사회에 대단한 흥미와 이슈를 제기하는 시인임에 틀림없으며 이를 소개한 당신에게 감사드린다”고 논문게재 결정을 밝히고 있다.

참으로 이례적인 일이다. 그런데 이 못지 않은 이례적인 일이 또 있다. 그동안 교수가 수준미달이면 학교당국이 나서기도 전에 학생들이 몰아내는 게 다반사였다. 당사자가 물러갈 때까지 강의실 문을 폐쇄하든가, 강의불참으로 폐강을 유도하는 등 온갖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연적으로 퇴출시켰었다. 그런데 김 교수의 경우는 완전히 거꾸로다. 학교당국에서는 수 차례 연구실에서 퇴거할 것을 요구하고 전화선까지 끊었으나 학생들은 기물을 옮길 경우 가만있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그래서 그는 10개월이 넘도록 연구실에서 계속 연구하고 있다. 임대료도 안내면서. 학교측에서 ‘자격이 미달된다’고 해임한 교수를 감싸주고 있는 서울대학생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조선총독부는 사라졌어도 친일파는 건재하다

해방이후 한국사회는 일본에 대해 이를 갈아왔다. 적어도 겉으로는. 일부 일본인들이 망언을 한 마디라도 하면 ‘울고 싶었는데 뺨때려줬다는’식으로 온 나라와 국민이 들끓었다. 이와함께 일본은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다고 쉽게도 말해왔다.

그런데 정작 한국사회는 일본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역사불감증에 걸려 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런 점조차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완용의 후손이 잃어버린 조상의 땅을 찾는 나라, 친일부역자에게 국가유공자 표창을 주고 국립묘지에 안치하는 나라, 친일행위자 동상이 국립 서울대에 당당하게 서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반면 한 차례의 대화재를 치르면서도 국민의 고혈이 모여 독립기념관도 만들어졌다. 아울러 민족정기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외쳐지고 일제잔재 청산이라고 해서 죄없는 건물과 말뚝들은 천문학적인 재원을 낭비해가며 뽑혀지거나 철저히 파괴되고 있다. 대국민 홍보용 물적 식민지 청산은 그럴듯하게 이뤄져도 인적 청산은 전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해방이후 친일 반민족 행위로 처벌 받은 사람은 7명에 지나지 않았다. 사형은 단 한 사람조차도 없었다.

올해는 반민특위가 해체된지 50주년이 되는 해다. 그 이후 과거청산은 전혀 없었다. 이렇게 관대한(?) 사례는 동서고금, 세계역사를 뒤져보아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전무후무한 일이다. 김민수 교수의 해직은 20세기 마지막까지 친일문제 뿐만아니라 학문의 자유조차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한국사회의 이중성과 전근대성을 폭로한 세기말 최대의 코미디로 기록될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30년 전 쓴 저서 「내가 걷는 70년대」(범우사간, 1970)의 첫 머리에 인용했던 라스키의 말을 옮기면서 글을 맺는다.

역사는 모든 국민에게 기회를 준다. 그러나 이 기회를 선용하고 안하고는 그 국민의 자유다. 다만 기억할 것은 역사는 주어진 기회를 선용하지 않는 국민에 대해서는 무서운 보복을 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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