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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죄선일보 > 월간 인물과사상이 파헤친 죄선일보 - 1998년4월호~2000년9월호


이 름 강준만
제 목 ‘침묵의 카르텔’을 깨자
김대중 정부의 자화자찬

한동안 일부 언론은 김대중 정부의 홍보 행위에 대해 비판을 했다. 자화자찬(自畵自讚) 일변도의 홍보를 비판한 것이니 홍보 감각에 대한 비판이라고 보는 게 옳겠다. 홍보를 웬만큼 아는 사람이라면 자화자찬을 하진 않는다. 역효과가 난다고 믿기 때문이다. 오히려 스스로 문제점을 밝히면서 그에 대한 대응 논리를 펴거나 진실된 호소를 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요즘 사람들이 얼마나 세련되고 영악해졌는데 자화자찬식 홍보에 넘어 가겠는가?

그러나 김대중 정부를 포함해 역대 정부의 홍보 감각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구태의연하고 낙후된 모습을 보여 왔다. 왜 그럴까? 정부 내에 감각이 뛰어난 인재가 없기 때문일까? 그렇진 않을 것이다. 문제는 홍보의 대상을 잘못 설정했기 때문이다. 정부 홍보의 주요 대상은 국민이 아니다. 윗사람이다. 대통령 이하 고위 공직자들이라는 말이다. 홍보 실무자는 그들을 흡족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홍보의 주된 기능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언론은 어떠한가? 언론에겐 그렇게 스스로 ‘알아서 기는’문화가 없을까? 우리 언론엔 일선 기자가 다뤄선 안될 수많은 성역과 금기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 성역과 금기를 명문화한 적은 없다. 어떤 사안에 대해 윗선에서 구체적인 제재가 가해질 경우 그 경험을 근거로 기자들 사이에서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통용되는 법칙 아닌 법칙일 뿐이다. 양심적인 기자들의 경우 때론 그 법칙에 도전하고 싶기도 하지만 그게 너무 어렵고 피곤한 일이어서 스스로 알아서 자기 검열을 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그러니까 무사안일주의(無事安逸主義)가 가세하는 것이다.

우리 신문들이 그런 식으로 굳게 지키고 있는 한 가지 불문율은 신문사 상호간 비판을 금기시하는 것이다. 비판만 금기시하는 게 아니다. 아예 사실 보도조차 금기시한다. 어떤 신문사에 무슨 일이 있건 모든 걸 1단 기사 수준에서 처리한다. 일종의 동업자 의리라고나 할까? 그러나 어떤 신문사에 아무리 좋은 일이 있어도 그것 역시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 걸 보면 그건 반쪽짜리 의리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동업자 의리를 가리켜 흔히 ‘침묵의 카르텔’이라고 한다.

정부와 신문은 결단을 내려라

신문은 우리 사회의 중요한 제도다. 입법, 사법, 행정에 이은 제4부라고 하질 않는가. 입법, 사법, 행정은 신문의 감시를 받는다. 그러나 놀랍게도 제4부라는 신문은 그 누구의 감시도 받지 않는다. 아니 감시는커녕 신문에 관한 이야기조차 거론되지 않는다. 물론 신문 비판을 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신문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은 매체들을 통해 하기 때문에 그 영향력은 미미하다.

이건 결코 복잡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이념, 성향, 취향과도 무관한 문제다. 매우 단순한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과 관련된 문제다. ‘침묵의 카르텔’을 깨는 것은 모든 국민이 100% 합의할 수 있는 문제인 것이다. 그 어떤 신문사도 감히 공개적으로 반대할 리 만무하다. 그런데 그 간단한 원칙이 지켜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자화자찬만을 홍보라고 믿는 정부나 ‘침묵의 카르텔’을 고수하는 신문이나 다를 게 전혀 없다. 서로 닮은 꼴이다. ‘알아서 기는’ 문화와 습관적인 무사안일주의가 빚어낸 코미디다. 나는 정부와 신문 모두에게 간곡히 호소하고 싶다. 그 근거없는 미신을 깨주시라. 그 미신을 깨는 건 정부에게도 좋고 신문에게도 좋다. 나라를 위해 좋다는 건 두말할 나위도 없다.

지금 우리 사회는 극심한 신뢰의 위기를 겪고 있다. 말값이 똥값이 된 지 오래다. 국민 대다수가 ‘넘겨 짚기’엔 도사가 됐다. 정부가 무슨 발표를 하면 그 이면을 생각하고 신문을 읽어도 행간의 숨은 뜻을 캐내기에 바쁘다. 신문은 정론(正論)이라는 전통적인 기능을 점점 상실해가고 있다. 편집술이 메시지를 대체하고 있고 독자들 또한 정론과는 전혀 무관한 기준에 따라 신문을 선택한다. 이대로 좋은가? 좋지 않다. 정부와 신문 모두 결단을 내려주기를 촉구한다.

정진석 교수의 주장

그게 어디 촉구한다고 될 일인가? 그리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게다. 맞다. 어찌해야 할 것인가? 우선 잡지가 그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의 잡지들은 거의 대부분 거대 일간지들의 눈치를 보며 그 체제에 기생하려고 든다. 바로 이게 문제의 핵심이다.

잡지가 ‘침묵의 카르텔’ 체제를 깨야 한다는 주장은 이미 오래전부터 제기된 것이다. 특히 한국외국어대 신문방송학과 정진석 교수가 그러한 주장에 앞장섰다. 정 교수가 실천까지 했느냐 하는 건 별개의 문제로 치자. 그가 ‘침묵의 카르텔’ 체제와 관련해 했던 주장들만 음미해보자. 그는 「월간조선」 1984년 9월호에 기고한 옴부즈맨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미국에 있는 통일교계 신문의 현황은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본 실태’를 강조하라고 주문하는 월간조선이 정작 우리 나라 언론에 대해서는 그러한 시도를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월간조선의 모체인 조선일보까지를 취재의 도마 위에 올려 놓기는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언론의 자유란 스스로에게도 냉혹하고 객관적일 수 있어야 하며 그러한 자세는 통일교가 「워싱턴 타임즈」에 대해 편집권의 독립을 보장한다고 약속한 것이 사실인가 아닌가를 따질 것이라면, 월간조선도 독자적인 편집권을 갖고 조선일보를 포함한 우리 나라 언론에 대해서 근원적인 비판을 가할 수 있어야 할 것이라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정 교수는 월간조선 92년 10월호에 기고한 옴부즈맨 칼럼에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언론은 사회를 감시할 의무와 기능을 지니고 있다. 그러면 언론을 감시할 기능을 지닌 것은 무엇인가. 언론 스스로의 윤리 의식과 언론에 대한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자세일 것이다. 또 언론에 대한 상호 감시와 비판이 활성화되어야 할 것이다. 신문을 비판하고 감시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매체는 잡지다.

정 교수는 월간조선 92년 12월호에 기고한 옴부즈맨 칼럼에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몇 차례 지적한 일이 있었지만 우리 나라에는 언론에 대한 비판 기사가 부족한 형편이다. 오히려 일제시대에 발행된 언론전문잡지 「철필」, 「호외」, 또는 일반 종합잡지 「개벽」, 「비판」같은 잡지에 실린 언론비판 기사는 지금보다 훨씬 활기가 있고 정곡을 찌른 것들이 많았다. 자유당 시대에는 여당지와 야당지가 논지를 달리하여 서로 비판하였으며 학자와 문인들도 진지한 논전을 벌이는 경우가 흔히 있었다. 그런데 60년대 이후 언론의 획일화 현상이 나타나면서 언론매체 간의 상호비판이 사라지게 되었다. 언론이 제도권의 영향을 너무 강하게 받았으므로 동병상련으로 서로의 비판을 삼가게 되었고 일종의 공범의식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과거에 비해 언론의 자유가 월등히 신장되었고 언론매체도 다양화 되었다. 활발한 상호비판과 자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정 교수는 월간조선 93년 5월호에 기고한 옴부즈맨 칼럼에선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의 언론은 달라져야 한다는 소리가 높다.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누가 그것을 주도할 것인가.…… 타율에 의한 ‘자율 정화’는 성공을 거둘 수 없었으며 그러기에 오늘날 여전히 언론계의 정화가 필요하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남은 방법은 언론이 언론을 비판하는 길 뿐이다. 일본에서는 언론이 언론을 직접 감시하는 체제가 되어 있기 때문에 언론이 깨끗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잡지 매체가 언론의 감시자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언론이 언론을 두려워해야 진정한 자율 정화는 이루어질 것이다.

또 정 교수는 좥조선일보좦 97년 4월 7일자 5면에 기고한 <‘신문의 날’ 아침에>라는 제목의 칼럼에선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과거와는 달리 언론의 자유가 거의 제한없이 보장된 오늘날 언론은 무한경쟁의 궤도를 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거기에는 어떤 견제 세력도 없는 상황이다.…… 언론은 그 엄청난 영향력을 과소평가하거나 망각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언론은 이 나라의 어느 분야건 비판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언론은 누구의 견제를 받는가.

실명 비판이 필요하다

정 교수가 제기한 소송에 대비하느라 그가 과거에 썼던 모든 글들을 다시 검토하는 과정에서 공감이 가는 부분이라 여기에 인용했다. 정 교수와 나는 조선일보에 대한 생각은 서로 다를망정 원론적인 차원에선 기존의 ‘침묵의 카르텔’ 체제가 깨져야 한다는 데엔 100% 같은 생각일 거다. 아니 모든 언론학자들의 생각이 같을 것이고 모든 국민의 생각 또한 같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모든 국민이 원하는 일이 도무지 이루어지질 않는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우리는 여기서 문제는 언론에게만 있지 않다는 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문화에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 우리는 아무리 사회 정의를 위해 자기를 희생해가면서까지 큰 기여를 했어도 이른바 ‘내부 고발자’를 마냥 좋게만 보지 않는다. 우리 국민 모두는 자신이 속한 집단에선 다 ‘마피아’의 일원이 된다.

실명 비판? 어림도 없는 소리다. 지금 한국 사회에선 실명 비판의 선구자(!)라 할 강준만이라는 사람을 둘러 싸고 엄청난 오해가 한 가지 빚어지고 있다. 그건 실명 비판의 문제를 강준만의 문제로 오해하는 것이다. 물론 다분히 의도적인 오해다. 강준만을 죽임으로써 실명 비판의 싹을 아예 밟아버리려는 작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런 것 있지 않은가. 나는 나름대로 꽤 양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낯선 사람이 나타나 “너희들 사기치지마!”라고 고래고래 소리지른다. 그런 인간을 죽이진 못하더라도 아주 이상한 놈으로 만들어버려야만 내가 다시 양심적인 사람으로 복원될 수 있다. 그렇잖은가?

강준만이가 반성과 사과를 하기에 좀 달라지는 줄 알았더니 인간되려면 아직도 멀었다고? 사람들은 아직 내가 무얼 두려워하는지 잘 모른다. 나는 남들의 평가나 비판을 두려워하진 않는다. 그건 오래전부터 각오한 것이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내가 나 자신을 속이는 거다. 나는 그런 자기 기만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앞으로 계속 수시로 반성과 사과를 할 것이다. 행여 상습범이라고 욕하지는 마시라. 나를 지키기 위해선 그건 꼭 필요하다.

내 언어가 상스럽다고 말한다. 맞다. 세상은 어떤가? 언어는 세상을 좀 반영해주는 게 좋다는 게 내 생각이다. 세상은 개판 5분전인데 아름답고 정중한 언어로만 이야길 하겠다? 그것도 좋은 일이긴 하지만,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해서 욕하지는 말자. 한국의 언론계와 지식계를 거의 질식시키고 있는 ‘침묵의 카르텔’ 체제를 깨는 데 있어서 강준만의 언어는 너무 온건하거니와 비굴하기까지 하다. 그런데도 강준만의 언어가 사납고 상스럽다고 욕하는 건 그건 그 만큼 이 사회가 ‘침묵의 카르텔’ 체제에 중독됐다는 걸 의미할 뿐이다.


퍼 가실 분은 참고하세요. 이 글의 주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neo.urimodu.com/bbs/zboard.php?id=choisun_insa&page=1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319

2002/06/27 (14:41:28)    IP Address : 147.46.116.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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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    강 고수님 너무 많이 반성하지 마 황연숙 2002/06/27 1131
311    대도들과의 축배 서석권 2002/06/27 800
310    독자들께 드립니다 위택환 2002/06/27 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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