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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죄선일보 > 월간 인물과사상이 파헤친 죄선일보 - 1998년4월호~2000년9월호


이 름 지유철
제 목 연정희를 위한 변명
지 유 철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간사|


내가 월간 {인물과사상}에 애정을 가지는 이유는 단순하다. 인물과사상이 좋은 것은 상업 언론과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별화는 내가 애정을 갖는 진짜 이유가 아니다. 나는 인물과사상의 차별화된 목소리가 일부 잘난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란 사실에 안도한다. 아니, 매력을 느낀다. 전문직에 종사하는 유명 독자와, 이름과 주소 외에 더 이상 내놓을 게 없는 평범한 독자의 글이 조화를 이루면서 만들어내는 하모니에 감동을 받는 것이다. 나는 내용에서보다 이런 편집 철학에서 인물과사상이 꿈꾸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를 읽는다. ‘성역과 금기에 도전’하는 진짜 이유를 깨닫게 된다.

소심한 성격 때문에 나는 늘 예의 바르고 조심스런 글만을 써 왔다. 이런 내게 강준만의 당당한 글쓰기는 당혹 그 자체이자 또 하나의 ‘유혹’이었다. 지금부터 써 내려가려는 글에서 나는 당당하게 한 사람을 두둔하려고 한다. 강준만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지난 6월 초순은 내가 소속한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도 다른 시민단체와 연대해서 김태정 법무부 장관의 퇴진 운동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고급옷 로비’ 사건의 진실은 그게 아니었다. 내 입장은 몹시 난처했다. 그러나 그토록 민감한 사안에 섣불리 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게는 확신이 필요했다. 전해들은 이야기만으로 ‘왕따’를 자초하거나 목을 걸 수는 없었으니까. 내 두 눈과 귀로 고급옷 로비 사건의 진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이런 내 심경을 나는 산정현 교회 김관선 목사에게 말씀드렸다. 그처럼 민감한 시기에 나 같은 사람을 만나 줄 리 만무하다는 내 판단을 뒤집고 예상보다 빨리 회신이 왔다. 그렇게 해서 나는 연정희씨와 직접 대면할 수 있었고.

첫 만남은 6월 3일 오후에 3시간 가량 김 장관 집에서 가졌고, 두번째 만남은 같은 달 21일 산정현 교회에서 2시간 가량 가졌다. 그러니까 이 글은 내가 직접 만난 연정희에 관한 증언이다. 나 또한 겨우 두 번 만난 사람에 대하여 이렇게 위험부담이 큰 글을 쓴다는 것이 편치는 않다. 그러나 연정희씨를 매우 잘 아는 사람으로 이 글을 쓴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가 아닐까. 내가 연씨를 너무 잘 안다는 이유를 들어 십중팔구, 객관성을 의심할 테니까 말이다.

장관으로 임명될 때까지 김 전장관과 연정희씨는 내 삶과는 거의 무관했다. 교회에서 얼굴을 보는 정도가 우리 인연의 전부였다. 그러다 장관 임명이 있었고, 고급옷 로비 파동이 일파만파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내가 들었던 연정희와는 너무 다른 이야기들이 언론을 통해 매일 같이 터져 나왔다. 수구세력을 대변하는 언론은 물론 「한겨레」나 「시사저널」같은 진보적인 매체들마저도 연정희씨를 사치하고 뇌물을 즐기는 인간으로 몰아세웠다. 워낙 언론과 야당, 그리고 시민단체의 입장이 단호했기 때문에 나도 약간은 혼란스러웠다. 내가 가진 정보가 잘못된 것인가?

이제까지 한겨레에 대한 나의 신뢰는 매우 높은 것이었다. 고급옷 로비 사건 이전까지 한겨레는 이런 나의 신뢰를 저버린 적이 없었다. 그러나 고급옷 로비 사건을 보도하면서는 예전의 한겨레가 아니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된다. 헤드라인이 무척 자극적인 해설기사였다. 누가 보아도 연정희씨나 김태정 장관이 한 말을 인용하여 크게 뽑아낸 것 같은 편집이었다. 그러나 본문을 읽고 또 읽어보아도 그런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나는 그 날의 해설 기사를 통하여 언론이 김태정과 연정희를 잡기로 작심했다는 강한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었음은 KBS 출입기자들의 증언에서 입증되었다.

내가 지향했던 신앙과 삶은 적어도 높고 귀하신 분들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분들과 무관하다 말할 수는 없겠지만. 나의 관심은 낮고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그것은 내가 한쪽 자리를 지키고 있는 기윤실(공동실무책임자 손봉호)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아무런 대비 없이 현재 뉴스의 진원지 중 하나인 장관집을 방문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사건’이었다. 만남이 진행된 지 오래지 않아 김 장관의 맏딸 화정씨(27)가 외출에서 돌아와 그 자리에 합석했다. 결혼을 두 주간쯤 남겨 두었던 그녀가 고통스럽게 털어놓은 것은 이야기는 예상밖에도 시민단체와 관련된 이야기였다.

야당이나 언론이 무슨 말을 하든, 그것은 그래도 참을 수 있었어요. 가장 억울하고 견딜 수 없었던 것은, 그래서 하루를 통곡케 만든 것은 시민단체의 반응이었어요. 저의 부모님의 지난 30년 동안의 공직 생활은 시민단체의 비난을 받을 만큼 비도덕적인 것이 아니었어요. 우리 엄마가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나요!

뿌듯함보다는 무거운 책임감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절규에 가까운 이 한 마디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결코 이 글을 쓰지 않았을 지 모른다. 물론 상황의 변화도 용기를 내어 이 글을 쓰게 하는 데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 김 장관의 퇴진으로 이케하라 마모루처럼 “맞아 죽을 각오를” 할 필요가 사라졌고, 시사저널의 보도로 세상에 알려진 KBS 법조팀장 황상무 기자의 “마녀 사냥은 실화였다”는 양심선언, 그리고 같은 언론사 사내 PC 통신의 검찰 출입 기자(용태영)의 글도 용기를 주었다. 그렇다해도 시민단체의 간사라는 딱지를 달고 공개적으로 연정희를 두둔하기엔 제거해야 할 지뢰가 너무 많이 깔려있었다. 그러나 써야 했다. 그게 누구든 한 사람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이 내가 소속한 단체의 존재 이유가 아니던가.

화정씨의 주례를 맡았던 목사도 김 장관과 연정희씨에게 묻기 힘든 이야기가 있었다고 한다. 사위가 어떤 직업을 가졌느냐에 대한 질문이었다.

“집사님, 사위가 뭐 하는 사람이지요? 검사인가요?”
“군인이예요 육군 중위지요.”
김 목사의 질문은 이어진다.
“그러면 판검사나 의사와 같은 전문 직종을 가진 사람들이 하는 의무복무겠군요?”
“아니에요, 목사님. 직업군인입니다.”

이런 사실을 나는 결혼 당일에야 알았다. 사위 집안도 결코 특별하지 않았다. 평범 그 자체인 소박한 목사 집안이었으니까. 가문이 번듯(?)한 것도, 판검사도 아닌 청년을 사람 좋다는 이유만으로 김 전장관이 사위로 흔쾌히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그 사실을 결혼식을 취재하면서 알게 된 기자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결혼식장에는 진풍경이 또 하나 있었다. 장관집의 결혼식에 어울리지 않는, 누가봐도 촌티가 뚝뚝 떨어지는 아줌마들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연정희씨는 두 번째 인터뷰때, 그들은 자기가 단골로 다닌 남대문 시장의 아줌마들이라 했다. 자신이 초대했노라고 했다. 결혼식 당일날 아침에 부랴부랴 결혼식장을 물어 온 검찰의 핵심 인물들이 있었던 사실과 비교하면, 그건 실로 파격이었다. 그런 점을 알고 나니 신랑과 신부가 제주도로 신혼 여행지를 간다는 사실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결혼식이었다.

그 부모에 그 자식이라 해야 하나. 내가 확인한 바로 김 장관이 연정희씨를 인생의 반려자로 삼은 것은 딸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런 이야기가 조심스럽긴 하지만, 연정희씨는 대학 2년 중퇴다. 아버지가 경영하던 두 개의 금광이 도산하면서 기울던 가세는 마침내 아버지가 별세하던 고 2때 완전히 추락했다. 그 이후 연씨는 친척집을 떠도는 미운 오리새끼였다고 한다. 그는 고 3때 서울대 법대를 고학생으로 졸업한 김 전장관을 만났다. 많은 판검사들이 돈 많은 처가집의 신세를 톡톡히 보던 그 시절 김 전장관은 사랑만으로 연정희를 택했다. 물론 시댁의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교외의 한적한 곳에서 조용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시댁의 반대는 저들의 고된 인생살이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검사 초임시절에 전전했던 춘천과 남원지청에서 연정희씨는 연탄가스 중독으로 두 번이나 겨우 목숨을 건졌다. 이미 다른 매체를 통해 보도된 것이긴 하지만 연정희씨는 남원에서 있을 때 서울의 검찰총장 집에 인사차 들렀다가, 정확히 말해 계속 지방으로만 돈 남편을 대신하여 서울 발령을 부탁하기 위해 들렀다가 파출부로 오해받고 이틀이나 말없이 파출부를 하기도 했다. 서울에 올라 와 남부지청에 근무할 때라던가. 13평 연립에서 교통 경찰과 삯바늘질을 하는 여자, 그리고 초등학교 선생님을 이웃으로 살았다고 한다. 이런 일화도 있다. 막내딸이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보낼 때의 일이라고 한다. 자녀들에게 어딜 가든지 아빠가 검사라는 말을 입밖에 내지 못하도록 가르쳤기 때문에 룸메이트가 아버지가 한국에서 검사라고 공공연하게 밝히는 것에 막내딸이 충격을 받았다는 것. 그 뿐 아니라 그 아이의 어머니가 자주 찾아와서는 냉장고에 먹을 것을 가득 채워주고, 그 아이가 풍족한 용돈을 쓰는 것을 보면서는 생각했다는 것이다.

“내 친구의 아빠는 우리 아버지와 다른 검사인가보다.”
방학으로 귀국했던 막내가 마침 검찰의 인사 이동이 TV에 보도되는 것을 보다가 깜짝 놀라더라는 것. 그 뉴스에 친구 아버지가 검사장으로 승진·발령되었다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 보도 후에 모녀가 끌어안고 통곡한 이야기를 여기에 길게 쓸 필요는 없으리라고 본다.

다시 맏딸의 결혼식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취재 경쟁을 벌이던 기자들이 신랑이 육군 중위라는 사실 만큼이나 신선하게 받아들인 일이 있었다. 교회당을 종횡무진(?) 누비며 밝은 미소로 카메라를 눌러대는 둘째, 엄마 아빠에게 계속 옷매무시를 만져줄 뿐 아니라 취재 경쟁으로 힘들어 하는 큰 언니를 격려하는 셋째를 기자들이 보았던 것이다. 어쨌든 그 수모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자녀들을 길러낸 김 전장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사실 연정희씨를 만나기 전까지 이 나라 장관들과 차관들의 생활이 어떤지를 몰랐다. 아직도 나는 불과 얼마전인 차관시절까지 김 전장관이 1천5백만 원의 빛을 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그 빚은 3년 동안의 대검 특수부장과 중수부장을 거치면서 김 전장관이 후배 검사들을 걷어 먹이느라고 생긴 것이라고 들었다. 두 자리를 끝낸 김 전장관이 내민 것은 5백만 원짜리 마이너스 통장 7개였다고 한다. 대한민국 최고의 특권 신분을 가지고 그렇게 어려운 생활을 하는 그에게 유혹이 없었을 리 만무했다. 연정희씨는 평생 먹고 살고도 남을 만큼의 뇌물로 수사검사의 장이었던 김 전장관을 회유하려 했던 일화를 들려 주었다. 그 유혹 앞에서 단호하게 돌아설 때 느꼈던 ‘희열’이 일생에 가장 보람된 순간이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는 감동이 있는 대화였다. 5시간이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만나 이야기를 나눠 본 연정희씨는 그렇게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아니 감동을 줄 수 있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다. 이번 사건이 터지고나서야 김 목사가 털어 놓은 이야기가 있다. 성경의 가르침대로 오른손이 하는 구제를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연정희씨의 일화이다. 교회에 등록을 하고 지난 2년 동안 연정희씨는 명절 때마다 조용히 찾아와 두 개의 두툼한 봉투를 내밀었다는 것이다. 하나는 교회 내에 있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또 하나는 지역 사회의 어려운 이웃을 위해. 김 목사는 그 봉투 이야기를 교회의 그 어느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

연정희씨는 고급옷 로비 사건이 터지기 얼마전까지 대중사우나를 일주일에 두 세 번씩 가던 여자이다. 가서는 타고난 성품 때문에 손님들이 아무렇게나 버리고 간 수건이나 물건들을 스스로 챙기다가 주인 아주머니로부터 오해받는 적이 많았던 여인이다. 그 사우나에서 만났던 주인을 비롯한 이웃 사람들마저도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그가 누군지를 알았다는 것이다. 장관집에서 처음 만난 연정희씨는 결코 멋쟁이가 아니었다. 그는 목이 아프다고 2,000원짜리 스카프를 하고 있었고, 그가 입은 옷은 남대문 시장에서 3만∼4만원 주고 산 것이었다. 그가 가진 가방이나 목걸이도 평범한 서민들이 으레 그러듯 외국 유명 브랜드의 모조품이라고 들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날 입었던 치마는 평범한 아줌마의 치마였고, 그 치마에는 무늬가 아닌 게 분명한, 작은 얼룩이 있었다. 그런 옷을 입고 손님을 접대하는 연정희씨를 보면서 나는 그것을 쇼라고 판단할 만한 아무런 근거도 찾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만남엔 카메라도 기자도, 그리고 국민도 없었으니까.

나는 그와 만나면서 다소 의외의 이야기를 들었다. 흠을 잡으려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는 이야기를 거침없이 털어놓는게 아닌가! 비록 일생 처음이란 단서를 달았지만 검사라는 아빠의 신분을 밝혀 시흥으로 전학해야 할 아이를 독산동으로 보냈다는 이야기, 그 문제의 코트를 돌려주는 과정에서 있었던 일을(법적으로 불리해 질 수도 있는 진술을) 여과 없이 하던 이야기, 이 사건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후배 남편을 보호하기 위해 수사를 받으면서 끝내 털어놓지 않았던 이야기, 밝히고 싶지 않은 어려웠던 시절에 대한 솔직한 진술 등은 연정희씨가 어떤 사람인지를 생각게 하기에 충분했다. 결혼 축의금을 한 푼도 받을 수 없다는 원칙을 놓고 맏딸과 벌였던 쉽지 않은 대화, 두 번 갔던 라스포사와 한 번 들렀던 앙드레김 이야기, 그리고 세간에 집중적인 미움을 사는 계기가 됐던 장관 부인들이 몰려다닌 일, 사직동팀에서 조사 받을 때 느꼈던 수모도 그랬다. 그러나 가장 인상깊었던 이야기는 찬송가의 후렴처럼 반복하던 이 말이었다.

저는 정말 지난 30년간의 공직 생활 동안 결코 떳떳하지 않은 생활을 한 적이 없어요. 숨도 한 번 크게 쉬지 못하고 살았고, 우리 나라와 달리 가장 성대한 미국 고등학교의 졸업식에 막내가 졸업을 할 때도 남편의 공직 생활에 누가 되거나 결격 사유가 될까봐 말 한번 더 못해보고 포기해야 했어요.

나의 전공은 음악이다. 그 중에서도 지휘다. 지휘자의 생명은 좋은 귀에 있다. 따라서 좋은 오디오는 필수다. 그러나 나는 80년대에 오디오를 가질 수가 없었다. 이 땅에서 나의 귀를 충족시켜 주는 오디오(5백만 원 정도)를 구입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었기 때문이었다. 94년이던가, 나는 그 고민을 끝내고 당시 내가 전세금으로 살던 집과 거의 맞먹는 오디오를 구입했다. 4백만 원이 조금 모자라는 가격이었다. 나는 그것을 사치가 아니라 전공자의 의무이자 권리로 이해했다. 만약 그래도 그것이 사치라고 우기고 그것을 비난한다면, 나는 그런 자유와 전공의 의무가 무시되는 검소한 지옥보다는 그런 자유와 전공이 존중되는 사치하는 나라에 살고 싶었다. 에세이스트 고종석이 말했던 것처럼 내가 바라는 세상은 「조선일보」가 해악을 준다하여 강제로 조선일보를 폐간시키는 획일화되고 전제화된 사회가 아니다. 국민들이 연정희씨가 IMF 시절에 모범을 보여야 할 고위공직자의 아내로서 고급옷 가게에 간 것을 놓고 혹독한 비판을 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첫 딸의 결혼 예복을 위해서 들렀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그 비판을 포기하지 않는 순결주의자들이 있음을 알고 있다. 솔직히 나는 그 순결주의가 무섭다. 그리고 저들의 이중잣대가 밉살스럽다. 내가 아는 한 연정희씨가 두 군데의 고급옷 가게에서 쓴 돈은 사치가 아니다. 결혼하는 딸아이의 옷 두 벌(한 벌은 물렸다), 그리고 평소 자기가 몇 년을 걸쳐 입고 싶었던 두 벌의 옷 값으로 그 정도를 들인 것이 사치라면 난 차라리 숨을 쉴 수 있는 사치공화국에서 살고 싶다. 내 이야기의 핵심은 ‘사치’라는 기준이 틀려먹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적용이 이중적임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이 글을 마쳐야 할 지금, 생각나는 말이 있다. 연정희씨를 처음으로 만나고 돌아 왔을 때 누군가가 내게 물었다. 어땠느냐고 말이다. 그때 나는 대답했다. 사람이 살고 있더라고, 그것이 나의 장관집 방문의 첫인상이었노라고. 내가 만난 연정희씨는 사람이었다. 겉멋이 더럽게 든 사치의 화신도 아니었다. 그의 자식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저들은 너무도 평범했다. 내가 연정희씨를 변호한 것은 그가 장관의 부인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나와 똑같은 사람이었고, 내 이웃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게 시민단체든 언론이든, 또는 정치든 인물과사상이든 모두가 자기의 영역에서 힘을 합쳐 억울한 사람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보통 사람을 행복을 가꾸고 지켜주는 일에 매진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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