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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죄선일보 > 월간 인물과사상이 파헤친 죄선일보 - 1998년4월호~2000년9월호


이 름 송기도
제 목 마치(Macchi)대통령과 새로운’ 파라과이
송 기 도 전북대 정외과 교수


파라과이 사람들은 1999년 3월 마지막 한 주를 가슴 조이며 긴장 속에서 보냈다. 파라과이의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여 있었던 것이다. 금방이라도 한바탕 비바람이 몰아치고 천둥과 소나기가 쏟아질 것처럼 하늘에 시커먼 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모두들 하늘을 쳐다보며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먹구름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맑은 하늘이 나타났다. 모두들 먹구름을 몰아낸 시원한 바람을 한껏 들이키며 환호성을 질렀다.

작년 8월 15일 꾸바스(Raul Cubas Grau)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파라과이 정국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그만큼 정치인들간의 대립이 격화돼 왔다. 꾸바스 대통령과 그의 ‘정치적 대부’인 오비에도(Lino Carlos Oviedo) 전 참모총장을 한쪽으로 하고, 아르가냐(Luis Maria Argana) 부통령과 와스모시(Juan Carlos Wasmosy) 전 대통령을 다른 쪽으로 하는 ‘힘 겨루기’가 벌어진 것이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군과 시민의 대결이었다. 이 같은 대결은 99년 3월 23일 아침 출근하던 아르가냐 부통령이 시내 한복판에서 암살됨으로써 폭발하고 말았다.

암살 배후로 꾸바스 대통령과 오비에도 장군을 지목한 국민들은 봉기했다. 의회는 꾸바스 대통령 탄핵안을 찬성 49표, 반대 24표로 전격 통과시켰다. 그리고 수도인 아순시온(Asunci뾫)에서는 지지자들간의 유혈충돌이 발생하였다. 그 과정에서 6명의 시민이 총격으로 사망하고 200여 명의 시민이 부상을 입었다. 시위대의 숫자는 갈수록 늘어났으며, 시위는 더욱 격화되고 있었다.

3월 27일 새벽 아순시온 북쪽 50㎞에서 수천 명의 군 병력과 십여 대의 탱크가 수도를 향해 진입하고 있었다. 쿠데타를 우려한 상원은 군이 대통령의 명령을 따르지 말 것을 요구하였다.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파라과이는 내전발발 일보직전에 있었다. 아무도 결과가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어둠의 긴 터널을 뚫고 희망이 보였다. 시민의 끈질긴 저항과 의회의 발빠른 조치들, 대법원과 교회의 선언, 그리고 브라질과 미국 등 외국 정부의 압력에 굴복한 꾸바스 대통령과 오비에도 장군이 각각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로 정치적 망명을 한 것이다. 마치 86년 필리핀에서 피플스 파워로 상징되는 정치변혁이 일어났던 것처럼 남미의 파라과이에서 현직 대통령과 군부가 ‘민중의 힘’에 의해 굴복하고 권좌에서 물러났다.

이는 1811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후 지금까지의 파라과이 정치사를 돌이켜볼 때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됐던 일이었다. 항시 힘을 앞세운 군부와 기득권을 가진 정치권력에 국민들은 ‘복종’만을 강요당하고 살아 왔던 것이다. 지난 180년간 파라과이에는 하나의 기본 법칙이 있었는데, 군부에 대해 칭찬할 말이 없으면 입 다물고 있으라는 것이었다. 국민들은 이를 ‘니엠보타비’(원주민 언어로 ‘바보행세’라는 뜻)라고 말해왔다.  

그런데 국민들이 자신의 힘으로 정권을 바꾼 것이다. 지난 일주일간의 소요사태를 끝내고 파라과이는 비로소 민주화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됐다. 파라과이의 21세기가 새롭게 열린 것이다.

파라과이 ‘아르하나’ 부통령?

우리 나라로부터 지구 정반대쪽에 있는 남미 파라과이에서 엄청난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다. 당연히 우리 나라 언론들도 ‘파라과이의 봄’을 보도하는데 그리 인색하지 않았다.

그런데 파라과이는 어떤 나라일까? 한반도의 2배(40만6천7백52㎢) 면적에 약 5백만의 인구가 사는 파라과이는 지리적으로 우리 나라에서 가장 멀리 있는 국가다. 우리와 낮과 밤이 다르고 여름과 겨울이 뒤바뀌어 있는 나라이다. 그러나 파라과이는 지리적으로만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생각’에서도 멀리 있는 나라이다.

파라과이의 최근세사는 스트로에스너(Alfredo Stroessner) 장군의 35년 독재로 얼룩져있다. 54년 5월 4일 스트로에스너 장군은 쿠데타를 성공시켜 정권을 잡고 이후 5년마다 집권당인 꼴로라도 당의 후보로 선거를 치러 여덟 번이나 대통령을 역임했다. 칠레의 피노체트와 함께 ‘철권’을 휘두르며 남미에서 악명을 날렸다. 게다가 피노체트는 20년도 권좌에 있지 못했지만 스트로에스너는 35년이나 권력을 휘둘렀다. 모든 것이 그의 말대로 움직였던 것이다. 현재 40년째 집권하고 있는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에 의해 얼마 전 기록이 깨어지기 전까지 중남미 최장기 독재자였다.

그런데 80년대 중반 불어온 민주화의 열풍이 파라과이에도 불어 닥치더니 89년 2월 로드리게스 당시 육군 중장이 군사 쿠데타를 성공시켜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무늬만 변화’였지 실질적인 커다란 변화는 없었다. 하긴 35년이나 지속된 1인 통치가 갑작스럽게야 변할 수 있겠는가?

쿠데타 과정에서 로드리게스 장군의 최 측근으로 활동한 오비에도 중령은 한 손에 수류탄을 들고 다른 손에는 권총을 들고 지하 벙커에 숨어서 저항하던 스트로에스너를 체포하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과감하고 용맹스러운 그러나 한편으로는 ‘거친’ 장교였다. 아마 5·16 쿠데타 때 박정희 소장 옆에 수류탄을 가슴에 달고 한강을 건넌 차지철 대위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이후 오비에도는 군 사령관이 됐고 파라과이 정치 권력의 ‘실세’로 정치에 깊숙이 개입했다. 그리고 자신이 멀잖아 대통령이 될 것임을 공공연하게 말할 정도였다.
93년 5월 시행된 선거는 파라과이 최초의 자유, 공정선거였다. 그 선거에서 오비에도는 스트로에스너 추종자인 아르가냐를 견제하기 위해 와스모시를 지원했다.

제1차 대결 ─ 와스모시 대통령과 오비에도 참모총장의 대결

와스모시 대통령은 93년 5월 선거에서 승리해 최초의 민간정부를 구성했으나 오비에도 육군 참모총장이 이끄는 군부의 보이지 않는 영향력 등으로 국정 운영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오비에도 장군은 98년 대통령선거에 집권 꼴로라도 당의 후보로 나설 야심을 공공연하게 보이며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다.

이에 96년 4월 와스모시 대통령은 군부 실력자인 오비에도 장군에게 전역을 명령했다. 그러나 오비에도 장군은 퇴역 명령에 불복하고 휘하 병력과 함께 자신의 군 부대로 들어가 오히려 대통령의 사임을 촉구하며 정부와 대치했다. 이로 인해 정국에 긴장이 야기되었다. 이 과정에서 쿠데타 위협을 느낀 와스모시 대통령은 어쩔 수 없이 오비에도 장군에게 국방장관직을 약속하고 사태를 수습하였다.

그러나 거리로 쏟아져 나온 학생 시민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히자 와스모시 대통령은 “국민의 의사가 여하한 나의 약속보다 우위에 설 것”이라며 장관 임명을 번복했다. 오비에도에 대한 국민의 강경한 저항을 배경으로 대통령은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파라과이에 민주화의 바람이 처음으로 불어온 것이다.  

국민의 저항에 일단 후퇴한 오비에도는 꼴로라도 당내에 자신의 계파를 결성하고 98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그리고 97년 9월 꼴로라도 당내 대통령후보 경선에서 아르가냐 당 총재를 물리치고 당선됐다. 문제가 더욱 복잡해 진 것이다.

이에 와스모시 대통령은 군부의 협조를 얻어 오비에도를 특별군법회의에 군사반란죄로 전격 기소하고 10년 형을 언도하여 대통령 후보 자격을 박탈했다. 따라서 꼴로라도 당 규약에 의거해 오비에도의 러닝 메이트인 꾸바스 부통령 후보가 대통령 후보로 교체되고, 부통령 후보는 아르가냐 당총재가 됐다. 그리고 실시된 총선에서 꾸바스 후보는 53%의 득표로 당선됐다. 대통령과 오비에도 장군간의 숨가쁜 대결은 결국 오비에도의 승리로 마감되는 듯했다.

제2차 대결 ─ 꾸바스 대통령과 아르가냐 부통령의 대결

98년 8월 15일 대통령에 취임한 꾸바스는 3일 후인 8월 18일 대통령 명령으로 지난 96년 4월 쿠데타 기도혐의로 10년 형을 선고받은 오비에도 장군을 석방했다. 그러나 의회는 이 같은 대통령 명령이 헌법을 유린한 것이라며 대법원에 헌법소원을 냈다. 9월 대법원은 오비에도의 유죄를 확인했다. 그러나 11월 9일 꾸바스 대통령은 96년 쿠데타에 가담한 이유로 전역 조치됐던 200여 명의 장교들을 다시 원대 복귀시키도록 명령했다. 12월 2일 대법원은 대통령 명령이 헌법을 유린했다고 판결하고 오비에도 장군을 다시 수감토록 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대법원의 판결을 무시했다. 이같은 정부의 태도를 ‘폭군과 독재’의 행태라며 비난한 의회는 정부에게 대법원의 판결을 존중할 것을 요구했다.

오비에도 장군은 결코 감옥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임을 천명하고 정치적 욕심을 감추지 않았다. 99년 2월 5일 대법원은 72시간 내에 대법원의 판결을 이행할 것을 대통령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꾸바스 대통령은 대법원이 정부를 붕괴시키려 한다고 비난했다. 2월 11일 상하 양원 합동의회는 대통령 탄핵을 결정했다. 3월 2일에는 교회가 의회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3월 14일에는 오비에도의 추종자들이 꼴로라도 당 본부를 점거했다. 그리고 3월 23일 아르가냐 부통령이 암살됐다.

대법원장, 외무장관을 역임한 아르가냐 부통령은 꼴로라도 당 소속이면서도 대통령 탄핵 운동을 주도하는 등 꾸바스 대통령과 제1의 정적이었다. 따라서 꾸바스 대통령과 오비에도 장군이 암살을 배후 조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1만이 넘는 시위대가 의사당을 에워싸고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했다. 이때 일단의 꾸바스 지지자들이 시위대에 총격을 가해 6명이 숨지고 20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리고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돼 갔다. 이에 대한 항의로 마르살 칠레 주재 파라과이 대사가 3월 27일 사표를 제출했다. 그리고 주 프랑스, 주 우루과이, 주 유엔 대사 등의 사표가 잇따랐다.

‘행운아’ 마치(Macchi) 대통령

마치 상원의장은 3월 28일 밤 소집된 상하 양원 임시의회에서 취임선서를 한 뒤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하루 아침에 파라과이의 대통령이 된 마치(Luis Angel Gonz lez Macchi) 상원의장은 권력 서열 3위였다. 말이 좋아서 권력 서열 3위이지 실제로 권력의 정상에 서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부통령이 권력계승하기도 얼마나 어려운가? 하물며 서열 3위는 꿈도 꾸지 말아야 할 자리인 것이다. 그런데 일주일동안 파라과이에 불어닥친 ‘정치 광풍’의 소용돌이 속에서 대통령이 사임하고 부통령이 암살되는 바람에 갑작스럽게 대통령에 오르는 ‘행운’을 잡았다.

물론 ‘행운’은 갑작스럽게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마치 상원의장은 아르가냐 부통령 피살사건으로 소요사태가 발생하자 대통령의 사임을 강력히 촉구하고 상원에서 대통령의 탄핵을 주도하면서 소신있는 정치인으로 부각됐다.

그는 93년 하원의원에 당선돼 뒤늦게 정계에 입문했으나, 98년 5월 선거에서 상원의원으로 피선, 상원의장이 됐다. 그러나 이때까지 정치적으로 활발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집권여당의 주류인 아르가냐 계파에 소속돼 활동했으며, 상원의장으로 선출될 때까지도 커다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가 법무장관을 지낸 사울 곤잘레스의 아들이라는 점을 더 기억했을 정도였다.

마치는 1947년 12월 13일 아순시온에서 출생했으니 우리 나이로는 올해 53살이다. 미스 파라과이 출신인 수산나와 결혼, 두 딸을 두었다. 근사한 콧수염과 대머리에 큰 키의 마치 대통령은 국가대표 농구선수 출신답게 건장한 모습이다. 그리고 지금도 쉬는 시간이면 농구를 하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멋쟁이다.

그는 아순시온 국립대학에서 법학과 정치학을 공부했으며, 19살이던 66년 꼴로라도 당에 입당했다. 대학 졸업 후 스페인 마드리드 대학에 잠시 유학했으며, 귀국해서 노동부 산하 직업 알선 국가 기관에서 운영위원장으로 또 국장으로 18년 동안 일했다.

마치 대통령은 암살 당한 아르가냐 부통령의 계파에 속해 있었다. 따라서 이는 많은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그리고 지난 89년 권좌에서 축출당한 스트로에스너의 복귀에도 반대했다. 이것 또한 많은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어떤 의미에서 과거와의 단절을 쉽게 할 수 있는 정치인인 것이다.

취임식을 마친 마치 대통령은 거국내각을 구성하고 헌법을 성실히 준수할 것을 강조했다. “나는 누구에게도 빚진 것이 없다. 다만 꼴로라도 당과의 약속이 있을 뿐”이라고 천명했다.

마치 대통령과 파라과이의 미래

사실 파라과이의 정치투쟁은 형식적으로는 대통령인 꾸바스와 부통령인 아르가냐의 대결이었지만 실제적으로는 오비에도 장군 추종자와 아르가냐 부통령 추종세력 간의 싸움이었다. 세 사람의 불꽃튀는 싸움 끝에 아르가냐 부통령이 암살되고, 일주일 후 꾸바스 대통령과 오비에도 장군도 망명길에 올랐다. 그리고 마치 상원의장은 자연스럽게 권력의 공백을 차지해 대통령이 됐다.

마치 대통령의 첫번째 명령은 아르헨티나로 도피한 오비에도 전 장군을 소환, 엄중한 법의 심판을 받게 하는 것이었다. 이는 한편으로는 새 정부의 정통성과 관련되는 문제이기도 했다.

내전 직전까지 치달았던 정치적 위기가 극복되고 마치 대통령은 여야 모두가 참여하는 거국내각을 구성했다. 이같은 거국내각의 특징은 첫째 정부 여당내 독재자 스트로에스너의 추종자들이 많다는 것과 둘째 52년만에 처음으로 야당 정치인이 참여했다는 것이었다.
제2야당으로 사회민주당계열인 「국가 결합」을 창설한 까바예로 총재가 상공부장관에, 자유주의자인 사기에르가 외무장관에 임명되는 등 10개 장관직 중에서 4개 부처가 야당에 주어졌다.

동시에 여당 내에서는 오비에도 계파에 대한 정치적 숙청이 이뤄졌다. 2명의 의원이 자격을 상실했고, 세이파트 전 부의장은 구속됐다. 오비에도 석방을 판정했던 6명의 군장성이 강제 퇴역했으며 나시온(Naci뾫)지 뻬냐 주필과 나나와 방송 국장 등이 구속됐다.

비온 뒤 땅이 굳어지듯 파라과이는 민주주의를 위한 값진 경험을 했다. 지난 10년간 민주주의에 대한 경험, 특히 96년 오비에도 장군의 쿠데타 시도 때 보여준 국민들의 저항과 정치인들의 자신감은 조금씩 축적돼갔던 것이다. 그리고 99년 3월 말 국민의 승리를 가져오게 했다.

이제 마치 대통령은 ‘새롭게 된’ 과거와 미래를 무리없이 연결해야 할 것이다. 50년 만에 야당이 정권에 참여한 첫 걸음에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파라과이의 민주화는 되돌릴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이제 과거와 같은 독재국가로의 회귀는 불가능하게 됐다. 이것은 파라과이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남미국가 전체에 적용되는 말이 된 것이다. 21세기의 남미 정치는 마지막 남은 군사독재의 잔재를 청산하면서 기분 좋게 시작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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