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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죄선일보 > 월간 인물과사상이 파헤친 죄선일보 - 1998년4월호~2000년9월호


이 름 고은광순
제 목 어둠의 세력이 지배하는 사회
어둠의 세력이 지배하는 사회

고은광순∥호주제폐지를 위한 시민의 모임 운영위원∥


내가 내년 말까지 머무를 예정인 이곳 벨링햄은 미국 서북쪽 끝머리에 있는 인구 6만의 작은 도시이다. 5월 마지막 주 월요일이 공휴일(메모리얼 데이)이기 때문에 토·일·월 사흘을 놀게 되는 틈을 타서 이곳에서는 해마다 ski to sea 축제가 열린다. 토요일의 다채로운 퍼레이드에 이어 일요일에는 도시 가까이에 있는 베이커산에서 크로스컨트리 스키를 시작으로 다운 힐 스키·평지 자전거·산악 자전거·달리기·카누(2인)에 이어 카약으로 마무리를 짓는 경기가 벌어지는데, 청년·장년·노년·남녀 구별 없는 8인 1조 400팀 3,200명의 선수가 출전했다고 하니 이들을 비롯해서 가히 시 전체가 주말을 함께 활기차게 즐기는 셈이다.

그들을 보면서 천상병 시인의 시 {귀천}에 나오는 ‘아름다운 소풍’이라는 단어가 문득 생각났다.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어둠의 세력’

한때 FBI가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니그로’라고 꼬리표를 달았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생일이 주마다 차이는 있지만 10여 년 전부터 공휴일로 지정되었다는 것을 미국에 와서야 알았다. 무의식 속에 혹은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이야 아직 남아 있겠지만 어찌되었건 이제 법적인, 제도적인 인종차별은 ‘불법’이 되었다. 미국의 어느 위대한 대통령의 생일도 공휴일로 지정된 경우가 없는 것을 생각한다면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생일을 공휴일로 정한 것은 내게 대단한 놀라움을 주었다. 죽은 날이 아니라 생일을 말이다.

한국의 명절풍습 등을 전해들은 이곳 사람들로부터 “한국 사람은 왜 죽은 자에 대해 그렇게 ‘집착’하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새삼 생각해 보았다. 1년에 두 번의 연휴인 설과 추석에 우리는 죽은 자들을 위한 제사의식을 치른다. 그날뿐인가. 1년에 열 두 번도 넘게 남편 집안의 죽은 조상을 위한 제사상을 차려야 하는 종갓집 맏며느리도 적지 않을 뿐더러 얼마 전에는 제사지낼 떡시루에 김이 안 올라 목을 매었다는 조선 여자를 칭송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호주제폐지운동과 부모성함께쓰기를 하면서 부계혈통제를 부모양계혈통제로 바꾸어 남녀평등을 이루자고 하면 대개의 한국 남성들은 대뜸 제사를 내세워 반대를 한다. ‘부모양계를 인정하면 도대체 복잡해서 제사를 어떻게 지내라는 말이냐, 도대체 조상을 뭘로 아느냐?’

족보, 가문, 제사 등은 수천 년 전 중국의 지배세력이 타계급과의 차별화를 통해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정치적 전략으로 만들어졌던 것으로, 이를 도입하였던 조선조에서도 일부의 사대부들에게만 허용하였던, 감히 인구 대다수를 차지했던 ‘상것’들은 흉내내어서는 안 되었던 귀족문화였다. 그러나 그런 가부장문화는 철저히 여성을 ‘도구’로 전제하지 않고서는 성립할 수 없는 것이어서 이미 앞서가는 나라들에서는 사라진 지 오래이며 그 본원지인 중국에서조차 사망 1주기만을 간단히 추모하는 정도로 변화되었다.

그러나 남자만이 씨앗을 가지고 있으므로 남자의 혈통만이 소중하며 여성은 아들을 생산할 ‘의무’가 있고 가정에서 그렇듯이 사회에서도 남자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가부장제는 한국 사회에서 호주제, 부계성만 사용하도록 하는 민법, 제사의식 등을 통해 생생하게 살아 남아 있다. 봉건왕조 사회는 시민사회로 바뀌었음에도 봉건왕조의 가부장적 가족관계는 한국 사회에 그대로 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일년에 3만 명의 여태아를 감별 후에 낙태하는 것도 알고 보면 가부장제라는 ‘어둠의 세력’이 죽은 자의 힘까지도 방패삼아 한국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집식구의 제삿날, 친정부모의 생일이나 친정조카 돌잔치에 가는 며느리를 보신 적이 있는가?

케네디 2세가 사망했을 때에도 한국의 ‘어둠의 세력’들은 온갖 언론을 통해 케네디 가문의 대가 끊겼다고 가족관계를 도표로 그려가며 호들갑을 떨었었다. 그러나 정작 미국인들이나 미국언론은 케네디 가문의 대가 끊겼다고 야단 떨지 않았다. ‘어둠의 세력’은 아들의 아들로 대가 이어진다는 ‘촌스러운 잣대’를 가지고 있지만 아들의 아들을 통해 대가 이어진다는 가부장적 사고를 하는 바보들은 지구촌에 많지 않기 때문이다. ‘아들을 통해 대를 이어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강박감은 한국에서만 아직도 대단한 기세를 떨치고 있다.

미국의 대학생들에게 Family Tree(가계)를 그려보라고 했더니 당연히 자신을 시작으로 해서 부모 양계를 그려 올려간다. 자기에게 인디안 피가 섞였는지, 아프리카인 피가 섞였는지, 유대인 피가 섞였는지, 자기의 뿌리가 누구인지 알고 싶으면 당연히 부모양계를 거슬러 올라가며 확인해야 하는 것이지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턱도 닿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누구나 아는 사실이 아닌가 말이다.

이 상식이 한국에서는 통하지 않고 있다. ‘어둠의 세력’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가부장제 수호에 열심이신 동덕여대의 조준화 정주학회 회장은 틈만 나면 “미국에도 족보가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미국인의 족보란, 일부 부지런한 사람들이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만드는 것으로 자기를 중심으로 밑에서 위로 부모양계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므로 한국의 하향식 가부장적 족보와는 전혀 딴판의 물건이라는 것을 알아주시기 바란다).

개발에 비해서 성차별이 가장 심한 나라

가부장제라는 어둠의 세력이 한국 사회를 어떻게 간섭하고 있는지 구체적인 증거가 있다. 우선 UN이 발표한 ’98년도 인간개발지수를 살펴보자.

각국의 교육수준, 국민소득 등을 통계로 인간능력의 개발정도를 평가하는 HDI(Human Development Index)에서 한국은 0.894라는 점수로 전체 조사대상국가 174개국 중에서 30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여성의 의회의석 점유율, 관리직·전문직 비율, 소득에 있어서 여성의 역할비율 등을 근거로 정치·경제분야에서 여성이 얼마만큼 권한을 행사하는가를 보여주는 GEM(Gender Empowerment Measure)의 점수는 0.292로 대상국가 102개국 중에서 83위를 차지했다.

GEM에서 가장 낮은 점수를 받는 나라는 0.121의 나이제르, 그리고 모리타니아, 파키스탄, 토고,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요르단, 수단, 인디아, 감비아, 알제리아, 아랍에미리트, 기니아, 말라위, 이집트, 이란, 카메룬, 터어키, 스리랑카 순으로 한국을 바짝 ‘추격’하고 있다. 이 나라들은 주로 아프리카나 중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종교의 이름으로 일부다처를 허용하는 등의 가부장적인 사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에 부모양계혈통제를 택하고 있는 나라들은 스웨덴(0.790/1위)을 필두로 노르웨이(0.790/2위), 덴마크(0.739/3위) 등 모두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는 이 보고서에서 한국의 인간개발 점수(0.894)와 여성권한척도 점수(0.292)의 차이가 지구촌에서 가장 크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이 개발에 비해서 성차별이 상대적으로 가장 심한 나라라는 말이다. 이 지구촌에서!

가부장제라는 어둠의 세력은 결혼한 여성을 남편(집안)에 법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종속시키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남존여비라는 파쇼적 의식을 표면적으로나 잠재적으로 유도하며 이는 종종 거친 언어와 난폭한 행동을 부추기기 마련이다.

이는 또한 남자들만의 술자리 문화, 매매춘 문화, 남녀차별, 성희롱과 성폭력 등의 저급한 문화뿐만 아니라 지연·학연·혈연으로 다져지는 형님·아우문화, 나이와 계급과 권력관계에 따라 순식간에 형성되는 상명하복의 위계질서문화, 모든 종류의 차별에 둔감한 유아적이고 이기적인 패거리문화를 낳는다. 어둠의 세력은 여성들만의 적이 아닌 것이다.

가부장제는 남성들의 영혼도 파괴시킨다

1863년,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을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사회는 그 후에도 100년 가까이나 ‘White Only(백인만 허용함)’ 간판을 내걸었었다. 그들의 인종차별이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만큼이나 유치하고 잔인하고 야만적인 것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면 ‘아들 우선’, ‘아버지 성씨만’, ‘남자의 조상만’을 내걸고 있는 한국의 가부장제 또한 얼마나 유치하고 잔인하고 야만적인 것인지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White Only’가 흑인뿐 아니라 백인들의 영혼도 타락시켰듯이 ‘남성 중심’이 여성뿐 아니라 남성들의 영혼도 파괴시킨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 아닌가.

여자들이 못나서 고부간의 갈등이 생기고 가정내 폭력이 생긴다고 윽박지를 일이 아니다. 컴컴한 룸싸롱에서 남의 눈치보며 주색을 즐길 일이 아니다. 살아있는 동안 남편과 시집식구들에게 수모를 겪었어도 죽어서 남편집안의 선산에 묻혔다고 박수를 칠 일이 아니다. 며느리의 며느리에게 죽은 후에 제삿밥 얻어먹을 걱정을 할 일이 아니다. 살아있는 동안 햇볕 아래 ‘아름다운 소풍’을 즐기고 싶지 않은가.

어둠의 세력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해야한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말대로 “사랑과 존중을 가지고 형제, 자매로 함께 사는 방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바보처럼 함께 망할 것”이므로.

어둠의 세력을 어떻게 몰아내느냐고? 당연히 호주제 폐지가 그 첫걸음이다. 그것은 ‘어둠의 세력’을 법적으로 지원해주고 있는 견고한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그 밖의 방법? {인물과 사상}의 독자들은 어떤 아이디어를 가지고 계신가?


퍼 가실 분은 참고하세요. 이 글의 주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neo.urimodu.com/bbs/zboard.php?id=choisun_insa&page=2&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49

2002/06/27 (23:05:02)    IP Address : 211.195.124.241

608    수학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 변정수 2002/06/27 1033
607  [월간 인물과사상 2000년 7월호] 인물과사상사 2002/06/26 1215
606    정형근 씨가 압승한 현실에 대한 짧은 생각 홍세화 2002/06/27 1250
605    비판에 관한 몇 가지 생각 강준만 2002/06/27 1013
604    김대중을 어떻게 볼 것인가? 강준만 2002/06/27 1162
603    한나라당내 개혁파 의원들과 {조선일보}에 드리는 편지 구교형 2002/06/27 1079
602    강 교수님과 {인물과 사상}에 드리는 글 박상희 2002/06/27 879
601    386세대의 허와 실 박주현 2002/06/27 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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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5    {말}과 {한겨레} 어디로 가야 하나? 강준만 2002/06/27 979
594    {조선일보}; 뻔뻔해야 성공한다 강준만 2002/06/27 1135
593    '오버'와 '가치판단' 신선우 2002/06/27 887
592    그녀는 어디에 있는가 아라 2002/06/27 1069
   어둠의 세력이 지배하는 사회 고은광순 2002/06/27 1010
590    전지현의 테크노 댄스와 카니발 조흡 2002/06/27 997
589    솔직(率直)함에 대한 오해 유승재 2002/06/27 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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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7    교보문고 비판에 대한 좀처럼 납득하기 어려운 재비판 최희경 2002/06/27 918
586    좀더 개성 있는 출판섹션을 보고 싶다 최성일 2002/06/27 879
585    그래서 언론개혁! 김현석 2002/06/27 792
584    강준만 교수는 먼저 자신을 팔아라! 미둥 2002/06/27 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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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0    5월 광주는 젊은 의원들의 음주를 허락한다 정계훈 2002/06/27 917
579    {조선일보}는 E-메일 서비스도 대단하더군요 정철웅 2002/06/27 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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