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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죄선일보 > 월간 인물과사상이 파헤친 죄선일보 - 1998년4월호~2000년9월호


이 름 강준만
제 목 이문열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문열을 어떻게 볼 것인가?

강준만


신문은 한국 문인(文人)들의 자궁(子宮)

언젠가 TV에서 소설가 이문열과 하일지가 바둑을 두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 장소가 아마도 이문열의 집이 아니었던가 싶다. 별걸 다 보여주는 TV 덕분에 나는 한동안 의아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일지가 이문열과 친하게 지내다니! {경마장 가는 길}과 {선택}의 만남이라, 적어도 문화적 취향상 두 사람이 전혀 안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곧 생각을 정리했다. 군사독재정권 옹호에 앞장선 사람과 민주화 투사라도 사적으론 얼마든지 친하게 지낼 수 있거니와 실제로 그런 사례들이 적지 않은데 그게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최근 이문열이 {아가}라는 작품을 냈다. 이문열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나는 이 작품을 둘러싸고 벌어진 상업주의적 판촉 전략에 혀를 내둘렀다. 아, 갈 데까지 갔구나! 그런 한탄이 내 입에서 절로 나왔다. 본인이 알고 있건 모르고 있건, 그 전략극의 조연으로 출연한 하일지에 대해서도 혀를 끌끌 찼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겠지만, 한국 근대문학의 역사는 한국 신문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나 같은 사람은 오늘날 한국 문인들이 신문에 대해 너무 비굴하게 군다고 호통을 치지만 문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의 나를 있게 해준 자궁(子宮)을 섬기는 걸 어찌 비굴 운운하는 단어로 매도할 수 있느냐는 게 그들의 생각일 것이다.

신문이 문학의 자궁이라 한들 사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신문은 문인들에 대한 소유 의식이 대단히 강하다. 얘네들을 우리가 발굴해 키웠다는 식으로 뻐기면서 그걸 사세(社勢) 과시의 목적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소유 의식에 따른 책임감이 강하다는 건 인정해줘야 할 것이다. 한 번 “우리 새끼”면 영원히 “우리 새끼”다. 키워주기로 맘먹은 이상 끝까지 밀어준다. 물론 이런 오기도 작용한다. “우리가 미는 데 안 크고 배겨?”

이문열의 정신 상태

이문열은 이미 클 대로 큰 문인이다. 어찌나 컸는지 정치판에서의 유혹도 끊이질 않거니와 대통령(김영삼)과 독대도 하고 칼국수도 몇 차례 얻어먹었을 정도로 대접을 받는 거물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정상에 올랐기 때문에 정상을 지켜야 한다는 부담감이 크다. 신문의 지원사격 없이 이문열이 현 위치를 고수할 수 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신문이 어느 날 갑자기 외면하면 천하의 이문열도 죽는다. 물론 완전히 죽지는 않을 것이다. 광고로 밀어붙여서라도 어느 정도 버티긴 할 것이다. 그러나 절대 오래 가진 못한다.

이문열이 무슨 작품만 냈다 하면 모든 신문들이 앞다투어 대서특필해댄다. 물론 {한겨레}까지도. {한겨레}는 참 공정하고 대범한 신문이다. 그러나 이문열의 이름값을 염두에 둔 계산도 작용했을 것이다. 이문열식의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성향을 가진 신인 작가를 {한겨레}가 크게 다뤄주는 건 본 적이 없으니, 그리 봐야 할 것이다.

어찌됐건 이문열에겐 기존의 이름값이 있기 때문에 신문들 스스로 ‘이문열 판매’에 앞장선다고 보는 건 타당한 진단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문열엔 못 미칠 망정 이문열에 근접하는 이름값을 가진 모든 문인들이 이문열처럼 신문들로부터 화려한 대접을 받는 건 아니라는 걸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우리는 여기서 이문열이 대(對) 언론 처세에 대단히 능하다는 걸 인정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마땅치 않은 사람이라도 장점은 장점대로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 이문열의 술 실력 대단하다. 폭탄주는 기본이다. 그거 한국에선 대단히 중요한 능력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게다가 그는 옛날의 대인 비슷한 사람이다. 그래서 아이 놈이 설치는 꼴을 죽어도 못 본다. 민주주의? 아무래도 그에겐 그게 참으로 가소롭고 흉칙한 소리인 것 같다. 드러내놓고 왕정체제나 군사독재정권 시절로 돌아가자고 주장하진 않으니 다행이긴 하지만, 정치인들간의 설전(舌戰)을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놈’ 대 ‘점잖은 어른’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평가하는 그의 정신 상태를 민주주의적인 것이며 서기 2000년에 어울리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의 정신 상태를 말해주는 그의 말을 들어보자.

언론이 범하기 쉬운 실수 중의 하나가 어른과 아이 싸움 붙여놓고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놈한테 점잖은 어른이 욕보는 꼴을 재미있어하며 구경하는 일이다. 꼭 합당한 예가 될는지는 모르지만 3일자 정치면 이인제 대(對) 김종필 식(式)의 기사가 그런 느낌을 주었다. 그를 지지하고 말고에 관계없이 김종필씨는 어제 그제까지 공동 여당의 당수로 이인제씨가 경의를 표해야 하는 입장에 있었고, 정치적으로는 공동여당의 국무총리로 행정을 총괄했던 대선배가 된다. 그런 사람을 하루아침에 ‘지는 해’로 격하시킨 말의 야박함도 그렇지만, 스스로를 ‘뜨는 해’로 추켜올리는 기고만장은 아무리 잘 보아주려 해도 ‘버르장머리 없는…’이란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3)

사실 그건 이문열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요즘 새까만 ‘아이놈’들이 달려들어 이문열의 심기가 이만저만 불편한 게 아니다. 어느 기자가 “한번 정색을 하고 본격 토론에 나설 생각은 없습니까?”라고 묻자 이문열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는가? 정말 버르장머리 없는 대답을 했다. 이문열의 답이다.

검도 5단과 초단이 맞붙으면 5단이 쉽게 이길 것 같죠? 그러나 검도 전문가들의 얘기는 그게 아닙니다. 아무리 고수라 해도 상대가 허깨비가 아닌 이상 자기 팔 하나는 내줄 각오를 해야 상대를 꺾을 수 있다는 겁니다. 자기가 멀쩡하기를 바라고서는 절대로 상대를 못 벤다는 얘기죠. 싸움을 걸어오는 쪽의 의도가 바로 그겁니다. 어떻게든 고수를 한번 흠집내보겠다, 고수와 맞붙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나도 좀 튀어보자, 재수 좋으면 고수를 넘어뜨릴 수도 있다

…… 이거 아닙니까? 싸움을 걸어오는 저의가 순수하지도 않고, 형식이나 법도에도 맞지 않은 데 뭣하러 맞섭니까? 그것도 쓰러뜨려 봐야 별로 영광스럽지도 않을 상대방을 놓고 말입니다.

이건 이문열의 ‘권력중독증’이 얼마나 중증(重症)인지 그걸 말해주는 걸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오만방자, 바로 그것이다. 소설만 1천만 권을 팔아치운 나에게, “우리나라 한 가구당 내 소설이 한권씩 돌아갈 만큼 널리 읽혔다는 점에서 감회가 깊”은 나에게, 책 몇 만 권도 팔아본 적이 없는 아이 놈들이 어딜 감히 대드느냐는 것일까?

혀를 끌끌 차지 않을 수 없다. 이문열에 대해 혀를 끌끌 차는 게 아니다. 이런 정신 상태를 가진 사람에게 한 나라의 문화적 리더십을 부여하고 그걸 장삿속으로만 이용하기에만 바쁜 이 나라의 모든 언론매체들에 대해 혀를 끌끌 차는 거다. 구한말에 태어났어도 수구적이라는 소리를 듣기에 딱 알맞을 인물이 서기 2000년에도 이렇게 설쳐댈 수 있다는 게 신기하지 않은가?

이문열과 {조선일보}의 관계

그러나 너무 걱정하지는 마시라. 이문열이 늘 그렇게 나이라거나 책 많이 판 기록만 따지고 사는 건 아니다. 비교적 자기 배짱에 맞는 사람이 어린놈한테 당할 때 분노하는 것일 뿐 자기가 이념적 또는 정치적으로 싫어하는 사람이 어린놈한테 당하면 흐뭇해하는 사람이다. 이젠 ‘쓰리세븐’으로 불리는 3김이 전두환 ‘아이놈’한테 호되게 당했었는데도 그는 전두환을 조선의 세조쯤 되는 인물로 평가하는 왕정파인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누가 자길 건드리면 자기가 ‘아이놈’의 처지인데도 어른의 멱살 잡는 짓도 서슴지 않는다. 1991년 문학평론가인 서울대 교수 김윤식이 이문열에 대해 비판을 하자 이문열 ‘아이놈’은 자기보다 나이가 열 두 살이나 많은 김윤식 ‘어른’의 ‘파탄’을 선언하는 참으로 ‘버르장머리 없는’ 짓을 저질렀던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물을 게다. 아니 그렇게 버르장머리 없는 이문열 ‘아이놈’이 어떻게 그렇게 사교(社交)에 능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하나도 놀랄 것 없다. 우리 인간이란 게 워낙 비굴한 존재들이어서 권력 관계에 대단히 민감하다. 옛날의 대인 비슷한 사람이 어디 다른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거나 민주적이어서 대접을 받나? 그게 아니다. 사람을 거느리는 실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 점에서 이문열의 능력이 탁월하다는 말이다. 그는 “자신의 핏줄에 대한 한없는 자부”와 “선민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수많은 당편이들을 돌보려 무진 애를 쓴다.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게 돼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문열이 그런 인간적 흡인력으로만 버티고 있는 건 아니다. 이문열을 이데올로기적 보배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은 ‘이문열의 판매촉진’에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즉, 그들에겐 이문열이 이용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들이 누군가? 대표적인 집단 하나를 꼽으라면 그건 바로 {조선일보}다. {조선일보}의 입장에선 이문열이 적자(嫡子)는 아니다. 이문열은 {동아일보}라는 자궁에서 태어난 자식이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성향으로 보아선 이문열이야말로 {조선일보}가 가장 아끼는 자식이다.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변경’을 보면 이문열이 자세히 보인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자신을 월북자의 아들 즉 빨갱이로 보는 사회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 월북한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들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들어차 있을 것이다. …… 그의 무의식은 ‘빨갱이의 자식’이라는 말을 피하기 위한 긴장과 불안으로 점철된 것이리라.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남한의 반공 이데올로기에 무조건 찬성하고 그에 발맞추어 모범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열등의식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하일지의 이문열 옹호

사실 이문열이 그렇게 열내가면서까지 “총선연대 시민단체의 활동을 보면 자꾸 홍위병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라는 극언을 할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도대체 그가 무엇이 모자라고 무엇이 아쉬워서 그런 극언을 해야 한단 말인가? 튀기 위해서? 그럴 필요가 있나? 예전의 영광이 그리워서? 그런 것 같지도 않다. 그의 사부(師父)라 할 {조선일보}의 시각과 주장에 발맞추어 모범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열등의식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조선일보}는 자기편에 대해선 결코 배은망덕한 집단이 아니다. 그렇게 기특한 이문열의 신작 {아가}를 다른 신문들처럼 그냥 대서특필만 해주는 걸로는 모자라다는 생각을 왜 하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조선일보} 2000년 3월 27일자, 28일자, 30일자에 걸쳐 황종연의 <이문열 소설 ‘아가’를 읽고>, 이문열의 <‘아가’에 관한 논의를 보며>, 하일지의 <소설 ‘아가’ 논쟁을 보고>라는 세 편의 글이 실리게 되었을 것이다.

나는 황종연과 이문열의 글에 대해선 길게 말하고 싶지 않다. 저질 쇼를 보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오해 없길 바란다. 황종연과 이문열의 글이 저질 쇼라는 게 아니다. “논쟁? 우리가 손대면 무엇이든 논쟁이 되고 우리가 외면하면 논쟁은 없는 거야”라는 식의 {조선일보} 특유의 오만과 그에 따른 기만성이 저질 쇼를 방불케 한다는 말이다. {조선일보}의 그런 수법을 하루 이틀 보아온 게 아니라 열낼 일도 없다.

내가 재미있게 읽은 건 하일지의 글이다. 어떡하다가 하일지가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안타까움이 뒤범벅이 된 그런 재미라고나 할까? 하일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문열씨의 신작소설 ‘아가’를 둘러싸고 이어지는 비평가들의 비판을 지켜보면서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어 이 글을 쓴다. …… 내가 진실로 걱정하는 것은 이문열씨가 아니라 80년대식 미신에서 아직도 벗어날 줄을 모르는 우리 비평계라는 것을 밝혀둔다. 이제 문제의 작품 ‘아가’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이 작품은 소설문학이 지향하는 예술적 핵심에 가장 근접해 있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 이런 문학적 성취를 외면한 채 오랜 타성적 잣대에 의해 이 작품을 난도질한다면 우리 문학은 또다시 시대를 역류할 것이다. …… 내가 굳이 황 교수의 지적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그런 문제라면 왜 하필 이 작품에만 그토록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는가 하는 점이다.

…… 선입견을 버리고 이 작품을 읽어본다면 이문열만한 대가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문학적 성취가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비평’을 ‘난도질’이라니

{조선일보}를 아예 상종하지 않는 독자들은 하일지의 이 글만 읽고선 황종연이라는 분이 이문열 대가를 혹독하게 비판한 것으로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과연 그런가? 천만의 말씀이다. 나는 황종연이 동국대 교수라는 좋은 직업을 갖고 있으면서 무엇이 아쉬워 이 짜여진 냄새를 풀풀 풍기는 각본에 들러리로 등장하였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그의 글은 대부분이 작품 해설일 뿐 애써 ‘비판적’이라고 볼 수 있는 대목은 다음과 같은 것뿐이다.

“현대성의 경험에 대한 이 결연한 적대는 아쉽게도 공동체에 대한 물음의 의의를 적잖게 반감시킨다. 현대성을 단지 타락의 전일화 과정에 불과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아무래도 협량한 생각이다. 현대사회는 동족부락처럼 특수한 연고로 구성된 공동체를 파괴한 대신에 보다 보편적인 인간 상호간의 인정과 제휴의 가능성을 산출하고 있진 않을까. 특수한 연고에서 풀려난 개인들의 자기창조적 욕망과 그로부터 나오는 새로운 공동체의 희망을 염두에 두지 않는 역사적 기억은 그 기억의 주체를 위한 심리적 보상에 머물기 쉽다. 남성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의존하고 있는 그 당편이의 이야기는 전통적 권위에 집착하는 남성 무의식의 팬터지로 읽힐 소지마저 있다.”

하일지와 이문열이 본격적인 반론의 대상으로 삼고자 했던 건 황종연의 글이 아니다. 하일지는 ‘비평가들의 비판’이라 했고 이문열은 자신의 반론에서 구체적으로 “다른 일간지를 통해 일기 시작한 ‘아가’에 관한 논의”라고 밝히면서 반론을 제기했다. 그건 아마도 {중앙일보} 2000년 3월 27일자 14면에 실린 <이문열 신작 ‘아가’ 속의 여성관 논란>이란 기사를 말하는 것일 터이다.

내가 하일지의 글에서 재미있게 읽은 부분은 그의 ‘능청’이다. ‘난도질’이라는 표현도 기가 막히거니와 “그런 문제라면 왜 하필 이 작품에만 그토록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는가”라는 항변은 더욱 기가 막힌다. 그러니까 하일지는 아예 모든 신문들이 이문열의 {아가}를 기사로 다루지 말고 무시하는 것이 좋겠다는 뜻인가? 아니면 기사로 다룰려면 이문열이라는 대가에 대해 자기처럼 무조건 예찬을 해야 한다는 뜻인가?

이문열 문학의 상업주의

하일지, 참 재미있는 분이다. 신문에 실리는 ‘비평’이란 그것이 좋건 나쁘건 모든 문인들이 바라마지 않을 최상의 홍보 수단이겠건만, 하일지는 그 ‘비평’을 가리켜 ‘난도질’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그 ‘용기’는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이문열과 바둑을 두면서 생긴 ‘용기’인가? “왜 하필 이 작품”? 하긴 이문열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그게 영 불만인데, 이문열을 좋아하는 하일지도 그게 영 불만인 듯하니, 그것 참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보기엔 하일지의 사진 얼굴이 너무 근엄하다. 하일지로 말하자면, 평소 국내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정도로 문학 상업주의에 대해 저주에 가까운 독설을 퍼부어 온 인물이다. 나는 하일지가 이문열, 아니면 적어도 이문열 소설을 내는 출판사(민음사)의 상업주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조선일보}에 하일지의 글을 포함한 세 편의 글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곧장 총천연색 대형 광고로 이 신문 저 신문의 지면을 도배질하다시피 하는 물량 공세를 펴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그렇게 물량 공세를 펼 수 없는 출판사들과 작가들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굶어 죽으란 말인가? 아니면 억울하면 출세하란 말인가?

이문열은 {아가}의 부제를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로 달았고 광고 카피는 본문에서 발췌했다는 <만일 그녀를 만나거든 내가 울고 있다고 전해다오>라는 유행가 가사 비슷한 문장을 크게 박아놓았던데, 이게 과연 소설의 내용과 들어맞는 부제이며 카피인지도 묻고 싶다. 아무리 20대 여성들이 베스트셀러 만들어주는 봉이라지만, “소설문학이 지향하는 예술적 핵심에 가장 근접해 있다는” 작품을 두고 그런 식으로 손님 끌고 판매촉진해도 되는 것인지 묻고 싶다.

상업주의에 왕따당하는 문학

내가 다른 사람 같으면 묻지도 않는다. 하일지가 누구인가? 그는 {뉴스메이커} 1999년 11월 4일자 12면에 쓴 <상업주의에 왕따 당하는 예술>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분이다.

“20세기 대중의 존재를 가장 발빠르게 이용한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상업주의였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으레 장사꾼들이 설치듯이 대중사회에 번식하기 시작한 것은 상업주의였다. 후대 역사가들은 어떻게 정리할지 모르지만 20세기 말의 상업주의는 참으로 지독했다. 금세기 최대의 탕아였던 공산주의를 굴복시켰던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장사만 된다면 사람의 영혼마저도 팔아막을 것 같았다. 대중을 하나로 결집시켰던 언론마저도 급기야는 상업주의의 시녀로 전락하고 말았으니 이제 개인은 상업주의의 괴력 앞에 완전히 노출되고 말았다. …… 우리나라에서는 적어도 30년 이내에는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의 상업주의는 문학을, 예술을 초토화시켜버렸기 때문이다. 평론가들은 끼리끼리 모여 자신이 소속된 출판사의 영업을 위해 봉사하고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는 작가가 있으면 가차없이 왕따시켰다. 이런 야만적 풍토 속에 예술이 꽃피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상업주의의 창궐 속에서 어떻게 예술을 지켜내는가 하는 것은 다음 세기 우리의 과제다.”

정말 아름답고도 두려운 말씀이다. 한국 문학계의 추악상을 고발한 하일지의 용기가 아름다운 반면, 그 추악상은 두렵기까지 하다는 말이다. 특히 “평론가들은 끼리끼리 모여 자신이 소속된 출판사의 영업을 위해 봉사”한다는 대목이 가장 두렵게 느껴진다. 물론 나는 하일지가 민음사에서 자신의 소설들을 냈다고 해서 그가 같은 ‘민음사파(派)’라 할 이문열을 옹호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묻고 싶은 것은 민음사의 경우 1966년 이래로 지난 삼십 수년 간 한국 출판문화 발전에 엄청나게 기여한 걸 모른 바는 아니지만, 최근 몇 년 간 덩치가 크다는 장점을 이용해 대규모 광고 물량 공세로 밀어붙이는 판매 수법이 하일지가 개탄해마지 않는 상업주의가 아니고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 같으면 이렇게 묻지도 않는다. 하일지가 누구인가? 그는 {조선일보} 1999년 11월 6일자 6면에 쓴 <대중에 버림받은 예술>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뇌세포는 상업주의에 의해 점령당해버렸다”고 개탄하신 분이다. 그래서 하일지는 이제 새 천년을 맞아 그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이문열과 민음사의 상업주의엔 눈을 감겠다는 것인가?

이문열의 ‘심층적 상업주의’

아니 하일지에게만 물을 게 뭐 있나? 이문열도 누구 못지 않게 상업주의를 개탄하는 인물이니, 이문열에게도 물어야겠다. 우리는 흔히 좀도둑만을 도둑이라고 생각하고 고위 인사가 높은 자리에 앉아 부당하게 그러나 점잖게 부를 축적하는 건 도둑질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또 사이비 기자라고 하면 지방의 작은 신문에서나 나올 수 있는 것이고 서울의 거대 일간지들에선 나올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잘 생각해보시기 바란다.

문학 상업주의에 대한 비판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문열의 상업주의가 비판의 대상으로 잘 떠오르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상업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까지 공범으로 연루된 이른바 ‘심층적 상업주의’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명민한 머리를 가진 이문열이 그걸 모를 리 없다. 이문열은 자신의 이중성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겐 한 가지 편리한 정당화 기제가 있는데, 그건 바로 그의 ‘위선적 구조의 순기능’에 대한 신념이다. 어디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볼까? 그는 {동아일보}에 실린, 한국 사회의 위선을 비판한 마광수의 글이 “사회 일반의 동의에 바탕을 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문명이나 문화라고 부르는 것에 본질적으로 내재된 위선적 구조와 그 위선적 구조의 순기능에 대해 조금이라도 유의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논지에 선뜻 동의하기는 어려울 성싶다. 위선의 굴레에 갇혀 있는 것이 하필 성 표현뿐이겠는가. 폭력과 잔혹 취향, 물신숭배 등 엄연한 우리 본성의 일부이면서도 그런 위선적인 굴레에 갇혀 있는 열정과 욕구들이 얼마나 많은가. 어쩌면 모든 법과 윤리가 바로 그 위선적 구조에 의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런 경우는 마교수의 개인적인 신조의 진술이며 동아일보의 견해와는 다를 수도 있음이 밝혀져야 한다.”

어련하실까. 마광수로 말하자면 이문열이 평소 “이 나라에서 글쓰는 사람들 중에 가장 못마땅해하는 사람들 중에 하나”인데다 이문열로서는 “그가 어떤 공인된 절차를 거쳐 우리 소설 문단에 데뷔했는지 기억나지 않기 때문”에 마광수를 소설가로 부를 수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문열! 참으로 진기한 연구대상이다. 그는 과연 20세기의 인물일까? 어떤 주장에 대해 “사회일반의 동의에 바탕”을 두었는지 그거나 따지고, 소설가는 “공인된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의 화석(化石)화된 두뇌가 이 나라의 작은 영역에서나마 문화적 리더십을 행사한다고 생각하면 이 나라의 문화가 과연 어찌될 것인지 가슴이 아프다.

이문열이 말하는 ‘위선적 구조의 순기능’은 일리 있는 말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마광수가 말하는 위선이 과연 이문열이 말하는 위선과 같은 차원의 것이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더 중요한 건 이문열이 자신의 상업주의에 대해서도 그렇게 자기 편리한 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더 이상 이문열을 괴롭히지 말라

이문열은 <‘아가’에 관한 논의를 보며>라는 글에서 지면의 반 이상을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에 할애했다. “대단찮은 작가 아무개가 한국 페미니즘 운동의 주적으로 선정되었다면 그것도 나름으로는 영광스러운 것이겠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제발 바라건대 그 영광을 사양하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나도 이문열의 불만에 동의한다. 나 역시 이문열의 말마따나 일부 사람들이 페미니즘의 잣대로 이문열의 소설을 평가하는 게 “고약하게 느껴”진다. 물론 불만의 이유는 각자 다르겠지만, 불만스럽다는 점에선 같다는 말이다.

도대체 왜들 그러는가? 당신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선택}이라는 소설이 그렇게 많이 팔릴 수 있었겠는가? 왜 당신들은 이문열의 소설을 많이 팔아주지 못해 안달하는가? 이문열은 페미니즘의 잣대로 판단해야 할 문인이 아니다. 그는 상업주의의 잣대로 판단해야 할 문인인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엔 언론과 문학의 유착이라고 하는 이른바 문언유착(文言癒着)의 잣대로 평가해야 할 문인인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이여, 더 이상 이문열을 괴롭히지 말라. 그는 세상으로부터 조용히 잊혀지고 싶어 안달하는데 왜 그를 자꾸 세상으로 불러내 못살게 구는가?

이문열 님께 사과드린다

이문열 님은 내 글의 내용에 앞서 내 글의 스타일에 대해 큰 거부감을 느끼실 게 틀림없다. 대단히 버르장머리 없는 스타일이라고 생각하실 게 틀림없다. 그러나 나는 이문열 님의 글쓰기 스타일을 존중하는 만큼 내 스타일도 존중받고 싶다. 너무 한 가지 법칙만 고집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갑자기 ‘님’을 붙이며 말투가 달라진 건 이문열 님께 한 가지 사과드릴 일이 있어서다. ‘사과’만큼은 이문열 님도 수용하실 수 있는 스타일로 드리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서다. 독자님들의 너그러운 이해를 바라마지 않는다.

나는 월간 {인물과 사상} 2000년 4월호에 쓴 <이문열과 ‘젖소 부인’의 관계 (2)>에서 “최근 이문열의 부악문원에 지원자가 미달한 것도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일이다. 이문열은 두렵다”라고 말한 바 있다. 나는 언론 보도에 근거해 이렇게 말했던 것인데, 그 보도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이문열 님은 최근 어느 인터뷰에서 “정말 미달이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답하셨다.

“첫해는 150명, 지난해에는 78명이 지원했습니다. 두 번 모두 언론에서 관심있게 보도해줘 일반의 관심도 컸죠. 그런데 올해는 계간 문예지 세곳에 광고만 내고 매스컴 홍보에는 신경을 못썼습니다. 그랬더니 지원자가 20명밖에 안되더라구요. 숫자가 너무 양에 안 차 문학담당 기자들한테 한탄을 좀 했더니, 다들 나를 도와주자는 생각에서 기사를 써주었습니다. 그런데 일부 신문이 ‘미달’이라는 제목에다 내가 파리채를 든 그림까지 싣는 바람에 내가 좀 우습게 됐습니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전후 안 따져보고 ‘이제 이문열이도 끝날 때가 된 모양’이라며 그 보도를 악용하더군요. 정원 미달이라는 얘기는 사실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 매스컴의 영향력이 큽디다. 이틀만에 70명이 새로 지원해 왔길래, 당초 계획했던 5명보다 한 사람을 더 뽑았습니다.”

나는 이문열 님이 내 글을 읽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문열 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나 역시 결과적으로 그 문제의 보도를 ‘악용’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점 이문열 님께, 그리고 독자들께 깊이 사과드린다. 설사 ‘미달’이 사실이었다 하더라도 그걸 근거로 이문열 님이 끝날 때가 된 것처럼 보는 건 온당치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이문열 님의 수명은 아마도 {조선일보}와 ‘박정희 신드롬’의 운명과 같이 할 게 틀림없다. 아직 {조선일보}의 위세가 등등하거니와 박정희의 인기는 더욱 높아지고 있는데, 이문열 님만 홀로 외롭게 끝날 리 만무하다. 이문열 님이 하루빨리 끝나기를 바란 나의 강한 욕심이 그런 무리한 주장을 하게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부끄럽다.

나는 내가 이문열 님을 싫어하는 걸 부인하지 않는다. 그냥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무지무지 싫어한다. 내가 이문열 님을 싫어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그 분을 싫어하는 이유와는 좀 다르다. 이념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앞에선 진보적인 척하면서 뒤에선 엉뚱한 짓 하는 ‘진보 사기꾼’들에 비해 이문열 님을 훨씬 더 높게 평가한다. 페미니즘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앞에선 진보적인 척하면서 뒤에선 여성을 차별하는 ‘진보 사기꾼’들에 비해 이문열 님을 훨씬 더 높게 평가한다. 비교적이건 절대적이건 내가 도저히 높게 평가할 수 없는 건 이문열 님의 권위주의다.

나는 이문열 님의 권위주의에 소름이 끼친다. 그는 정말 옛날의 대인 같은 분이다. 구한말의 양반도 아니다. 조선조 성종 때의 양반들도 그랬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나는 이문열 님이 문화권력을 누리기에 망정이지 이런 분이 만약 정치권력이나 경제권력을 잡았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하고 생각하면 숨이 턱 막혀온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가 문화권력으로 머무르는 게 불행 중 다행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다행이라고 감격할 수만은 없는 일 아닌가. 나는 앞으로 계속 이문열 님의 권위주의를 비판할 것이다. 그 분이 자신의 권위주의를 자기 자신에게만 국한시키면 모르겠는데, 그 권위주의 철학으로 계속 사회에 대해 발언을 하시기 때문이다. 나의 이문열 님 비판은 인신공격이 아니라 탈권위주의적인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하는 나의 공적 의무임을 이해하여 주시기 바란다. 그러나 나는 야비한 수법은 쓰지 않는다. 앞서 드린 사과는 나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온 것이다. 이문열 님과 독자님들 모두 나의 사과를 흔쾌히 받아주시기를 바란다.

문학평론가 김명인의 평가에 대해

글을 다 끝냈는데, 월간 {말} 2000년 5월호에 실린, 문학평론가 김명인의 <싸움꾼 이문열 문학으로 돌아오다?>라는 제목의 글에 약간 시비를 걸 게 있어 한마디 더 보태야겠다. 김명인은 이문열과 그의 논쟁자는 ‘적대적 의존관계’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겸손의 말로 자신을 낮추는 시늉을 할지라도 자신이 쓴 작품을 통해 타자들을 자신의 정신적 노예로 복속시키고자 하는 욕망이야말로 작가들이 기를 쓰고 작품을 쓰는 진짜 동기이다. 이미 수십만에서 때로는 백만 명에까지도 이르는 고정 독자들을 ‘거느리게 된’ 이문열은 바로 그런 점에서 성공한 작가이다. 그가 새로운 작품을 출간하면 매스컴은 바로 그 수십만 명의 노예들이 지닌 구매력 때문에 그 작품을 크게 다루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은 다시 작가 이문열의 성가를 높이는 결과로 이어져 다시 다음 작품의 판매를 자극한다. 다시 수많은 노예들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 사태는 이문열의 작품에 대해 시비를 거는 것이 곧 그 시비를 거는 자의 인정 투쟁의 격을 높이는 결과가 되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설혹 둘 사이에는 승패가 나지 않더라도 그 싸움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수의 노예들을 획득할 수 있게 된다. 이문열을 건드리는 것은 어찌 되었든 ‘남는 장사’가 된다. 이렇게 되면 이문열과 그의 적대적 논쟁자 간에는 일종의 기묘한 의존관계가 성립한다. 이문열은 논쟁적인 작품을 생산한다, 논쟁자가 여기에 시비를 건다, 논쟁이 이어진다, 매스컴을 통해 관심이 집중된다, 이문열의 작품은 판매 부수가 늘고 시비를 건 논쟁자의 이름이나 쟁점 자체가 널리 알려진다. 원래 논쟁의 의미와 상관없이 결과적으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매우 날카로운 분석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긴 그래서 나오는 말이 “클려면 거물을 씹어라”라는 말일 게다. 이문열도, 또 김용옥도, 자신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 그런 말을 자주 한다. 이문열은 위선이 강해 간접적으로 그런 말을 하고 김용옥은 노골적으로 그런 말을 하는 차이는 있지만, 이들이 공통적으로 즐겨 하는 말의 메시지는 똑같다. “너 튀어보려고 나 씹는 거지?”

그러니까 김명인의 날카로운 분석은 결과적으로 이문열과 김용옥의 그런 오만방자한 태도가 정당하다는 걸 뒷받침해준 셈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있다. 김명인의 이 글도 예외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즉, 김명인이 이미 큰 인물이긴 하지만 더 크기 위해 김명인보다 더 큰 이문열을 주제로 삼아 이 글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김명인의 기분이 어떨까? 좋진 않을 게다. 더 큰 문제는 모든 비평 행위라는 게 김명인의 그 날카로운 분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거다. 어디 비평만 그러나? 모든 언론 행위가 다 그런다. 고위급 인사 비판과 말단 공무원 비판 가운데 어느 신문이 고위급 인사 비판에만 주력한다면 그 신문은 크기 위해 그러는 건가?

비평 또는 비판의 본질이라는 게 뭔가? 그건 원래 큰 놈, 잘 나가는 놈을 씹는 거다. 왜? 그 놈들에게 큰 힘과 영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 놈들을 씹어서 씹는 놈의 위치가 덩달아 올라가는 효과가 있다 해도 그건 지엽적인 문제인 것이지 본질적인 문제는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단지 ‘남는 장사’를 위해 큰 놈을 씹는 것과 그런 장삿속 없이 큰 놈에게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큰 놈을 씹는 걸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김명인은 이 점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어야 했다. 자기에게 부메랑이 될 수 있는 발언을 해놓고 그게 무슨 대단한 발견이라도 되는 양 그걸로 끝낸 건 유감이다. 물론 나는 심정적으론 김명인의 분석에 절대적으로 동의한다. 내가 앞서 이문열을 페미니즘의 잣대로 평가하지 말라고 한 것도 괜히 이문열 장사시켜주지 말라는 뜻에서 한 말이다. 비판을 하는 사람이 재미보는 것도 그렇다. 학계에서도 보면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까지는 거물들을 열심히 씹어대다가 지가 좀 나이 들면 아예 비판을 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수두룩하게 많다. 아니 거의 대부분이라고 봐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그런 분들 때문에 단 한 명이라도 선의의 피해자가 나와서는 안 될 것이다. 예컨대, 강준만과 같은 피해자가 나올 수 있지 않느냐 이 말이다.

나는 이미 앞서 던진 질문에 대해 답을 말했다. 답은 “지속성으로 평가해야 한다”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의 초기 비판 행위에 대해 “크기 위해 거물들을 물어뜯는다”고 했다. 나는 그때 속으로만 말했다. “두고 봐라, 이 XX들아, 내가 과연 그런 놈인가 아닌가.” 내 나이, 이제 40대 중반. 요즘 내가 씹어대는 사람들을 나이로 따져보면 나보다 어린 사람들이 훨씬 많다. 그 무슨 기준으로 보건 내가 더 ‘거물’이면 ‘거물’이지 그 반대는 아닌 사람들에게도 나는 왕성한 비판을 퍼붓고 있다. 이젠 나와 가까운, 그러나 인간은 약간 덜 된, 사람들은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준만아, 너 왜 자꾸 애들을 상대하냐? 너 아직도 철이 안 들었어?”

지속성으로 평가하기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고? 그러니까 내 이야기는 일단 선의(善意) 해석을 하면서 내용으로 평가해야지, 무조건 이문열과 같은 거물 씹으면 그게 무슨 장삿속으로 그러는 거라고 단정짓지는 말자는 말이다. 이문열이 무어 그리 대단한 거물이라고 그렇게 호들갑을 떨어야 한단 말인가?

작품 외적인 비평도 필요하다

나는 김명인이 {아가}에 대해 평가한 걸 보고 앞서 그의 날카로운 분석은 어디로 간 건지 적잖이 당황했다. 김명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이 소설이 “인간과 인간의 삶을 있는 그대로 구체적으로 그리는” 소설의 “미학적 아름다움”을 잘 구현하고 있다는 한 작가의 평가(하일지, 「소설 ‘아가’ 논쟁을 보고」, 조선일보, 2000.3.29.)에 동의한다. 이 점이야말로 이문열에게 가장 부족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아가}는 이문열 문학의 변화를 점칠 수 있게 하는 작품이 되고 있다. 이 작품을 마치 관행처럼 정치적·사회학적 논쟁의 대상으로 삼는 일은 이제 그쳤으면 한다. 어쩌면 고약한 싸움꾼 이문열이 문학으로 돌아오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그를 나는 기꺼이 맞으러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어이가 없다. 김명인의 ‘날카로운 분석’은 결국 이 말을 하기 위해 들러리로 내세운 거였단 말인가? 하일지의 글에서도 동의할 부분만 눈에 띄고 다른 건 전혀 보이지 않더란 말인가? 물론 나도 제발 {아가}를 마치 관행처럼 정치적·사회학적 논쟁의 대상으로 삼는 일은 이제 그쳤으면 한다. 그러나 그 이유는 김명인의 그것과는 다르다. 나는 순전히 그로 인해 이문열의 소설이 많이 팔리는, 그 고차원적 상술 메커니즘이 역겨워서 그런다.

내 글을 읽고 이문열의 {아가}를 꼭 사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반면 김명인의 글은 어떤가? 문학으로 돌아오는 이문열을 마중 나가겠다고? 그래서 {말}지 독자들에게 {아가} 한번 읽어보라고 권하는 건가?

분명히 말해두지만, 나는 이문열에 대한 김명인의 문학적 판단엔 시비를 걸 생각이 전혀 없다. 시비를 걸 만큼 내가 내 분수를 모르고 날뛰는 놈은 아니다. 내가 짜증이 나는 건 이문열을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문열과의 ‘적대적 의존관계’ 운운하면서 이문열 소설이 많이 팔리게 되는 메커니즘에 대해 비판적인(아니면 적어도 냉소적인) 분석을 시도했던 양반이 자기는 그 모든 메커니즘을 초월한 사람인 양 이문열의 장사에 도움이 될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해대는 게 웃긴다는 거다.

김명인의 뜻을 애써 선의로 해석하자면 이문열이든 그 누구든 그 어떤 파시스트든 문인의 경우 문학적으로만 판단하자는 주문인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작품 외적인, 상업주의의 관점에서도 이문열의 소설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건 나와 같은 사람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앞으로 이문열은 물론 진보적인 문인들의 장삿속, 특히 극우 언론과의 유착까지 파고 들 생각이므로 이문열은 너무 억울해 하지 말기를 바란다. 한국의 문단, 정치판보다 나을 게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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