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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죄선일보 > 월간 인물과사상이 파헤친 죄선일보 - 1998년4월호~2000년9월호


이 름 강준만
제 목 유석춘 : “{중앙일보}의 앞잡이”인가?
유석춘
“{중앙일보}의 앞잡이”인가?

강준만


함성득이 보장한 유석춘의 소신

{중앙일보} 1999년 12월 27일자 7면엔 아주 재미있는 칼럼 하나가 실려 있다. ‘옴부즈맨 칼럼’인데 연세대 사회학과 유석춘 교수가 쓴 것이다. 유 교수는 지난 4·13 총선을 앞두고 시민단체들이 벌인 ‘낙천·낙선운동’에 대한 반대 활동을 열심히 한 학자다.

무슨 ‘대통령학’인지 뭔지를 한다면서 최근 {조선일보}, {주간조선}, {월간조선}과 아예 직통 핫라인을 가설한 것인지 이 매체들에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는 고려대 함성득 교수는 “많은 지식인들이 시민단체들의 낙선운동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말을 하지 않는 것은 그랬다가는 시민단체들로부터 반개혁적이라는 비판을 받을까 두렵기 때문”이라는 명언(?)을 한 바 있다.

함성득, 참 재미있는 사람이다. 앞으로 주목할 만한 ‘연구 대상’이다. ‘낙천·낙선운동’에 결사 반대하는 소신도 돋보이거니와 무슨 ‘대통령학’ 강좌의 강사를 외부에서 초빙한다며 조갑제 {월간조선} 부장과 김창기 {조선일보} 정치부장 대우를 강사로 모시는 등 아이디어가 아주 기발하다. 그의 선의(善意)야 어찌됐건, 언론플레이의 귀재(鬼才)라고나 할까?

어찌됐건, 함 교수의 주장에 따르자면, 유 교수는 분명히 강한 소신을 갖고 있는 학자다. 물론 나는 그의 소신을 존중한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이 자리는 유 교수를 비판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다. 오히려 그를 옹호해주기 위한 자리다. 물론 옹호를 위해 비판이 어느 정도 수반되겠지만, 그거야 치러야 할 최소한의 비용으로 보아야지 어떡하겠는가.

‘낙선운동 딴지걸기 나선 유석춘 교수’

유 교수가 쓴 재미있는 칼럼 이야기를 하기 전에, ‘낙천·낙선운동’에 대한 그의 맹활약을 소개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신문모니터분과가 {말}지 2000년 3월호에 기고한 <조선·중앙·동아 낙선운동 딴지걸기 총출동>이라는 글 가운데 ‘낙선운동 딴지걸기 나선 유석춘 교수’라는 소제목하의 글을 인용하기로 한다.

유석춘 연세대 교수가 {동아일보} 2월 8일자에 쓴 칼럼 <앞길 험난한 낙선운동>은 더욱 가관이다. 이 칼럼을 읽다보면 이 글에 등장하는 표현대로 그 내용이나 논리가 ‘엉망진창’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우선 그는 “선거현장에서 심각한 물리적 충돌의 개연성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만약 사태가 폭력의 행사로까지 비화된다면 선거판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으로 치달을 것”이라면서 근거없는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유 교수는 나아가 “‘사회발전을 위해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과 ‘사회발전을 위해 강원도가 단결해야 한다’는 주장 가운데 어느 것이 그른가. 절대적인 기준은 절대로 찾을 수 없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두 주장 가운데 옳고 그른 것을 도리어 왜 찾을 수 없는지 그에게 묻고 싶다. 아울러 앞의 두 가지 사례를 비교의 대상으로 거론한 것 자체도 이해하기 어렵다. 다만 ‘단결해야 한다’는 담론이 망국병인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방향으로 치달아서는 안 된다는 것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유 교수는 또 낙천자 명단 발표가 여당에 일방적으로 유리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 근거로 명단에 오른 여당 의원은 언제라도 다른 요직에 오를 수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러나 냉철하게 따지면 유 교수가 우려하는 ‘낙천자 요직 발탁’은 낙천자 명단 발표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굳이 그것이 우려된다면 여당 프리미엄이라는 관행을 타파하면 된다. 그것이 낙선운동을 중단해야 하는 이유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근거만으로 “시민단체와 여당이 담합했다는 야당의 의혹이 제기되는 까닭”이라고 지적한 것은 너무 궁색한 논리가 아닐 수 없다. “시민단체는 되고 이익단체는 안 된다는 논리 또한 설득력이 없다” “누가 시민단체의 역할을 부여했는가” 등 유 교수의 반문은 사회학 교수답지 않은 질문이다. 그는 시민단체와 이익단체의 차이도 모르고 있었던 것일까. 더욱이 이 정도로 엉망진창인(?) 사회현상을 열거했으면 대안에 대해서도 한마디 정도는 제시하는 것이 사회학자의 도리가 아닐까. 그러나 이 칼럼은 ‘아, 걱정된다’는 말로 끝맺고 있을 따름이다. 정말이지 한국 사회의 미래가 걱정된다.

‘좌익이 우익을 연좌제로 공격한다’?

나는 한국 사회의 미래가 걱정되기보다는 유석춘 교수의 장래가 걱정되지만, 그런 한가로운 걱정을 할 시간이 없는 게 유감이다.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월간조선} 2000년 3월호에 실린 <보수 시민운동 단체 결집: 보수 이론가·행동파·젊은층이 거대한 네트워크 형성중>이라는 기사 내용이 재미있어 그 일부를 소개하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 물론 유 교수에 관한 부분이다. 이 기사는 유 교수를 ‘보수 이론가’로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학계에서 보수주의로 분류되는 그룹은 학술 계간지 {전통과 현대}의 동인들이다. {전통과 현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사람은 연세대 함재봉(정치외교학과), 유석춘(사회학) 교수, 고려대 정외과 김병국(41) 교수, 용인대 중국학과 장현근(37) 교수 등이다. 이들은 좌파로부터 보수 우파라는 공격을 받았다. 이 때문인지 일부 동인은 보수적 성향으로 분류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청와대 정무수석과 공보처장관을 역임한 유혁인(1999년 별세)씨의 아들 유석춘 교수는 자신의 이론이 집안 환경에 영향을 받았다는 말을 듣기 싫어한다. 학자를 비판하려면 논거를 따져 비판해야지 누구의 아들이니까 매도해버리는 풍토는 잘못 되었다고 말했다. 아버지의 이력은 대학 시절 유교수에게 고민을 안겨주었다고 한다. 유신 반대 데모가 한창이던 1975년에 서울대에 입학한 그는 “다른 학생들은 다 박정희 대통령을 욕하는데 왜 우리 아버지는 그 밑에서 일할까”라는 문제로 고민했다. 운동권을 기웃거려보기도 하고 시위대의 뒷줄에 서보기도 했지만 고민은 해소되지 않았다. 대학 2학년 때 군에 자원 입대한 그는 군대에서 현실을 알았고, 제대 후 공부에 몰두할 수 있었다. 유교수는 “누구의 아들이니까 하는 식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연좌제가 연상된다”며 “지금은 좌익이 우익을 오히려 연좌제로 공격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고 말했다.

내가 이 글을 재미있게 읽은 건 ‘도둑이 제발 저린 심정’ 때문이라고나 할까? 나는 {인물과 사상 9}에 <‘아시아적 가치’의 한국적 오용과 남용: 부친 함병춘의 유업 이어받은 연세대 교수 함재봉>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이 글 역시 일종의 ‘연좌제’에 의한 비판이었을까? 사실 나는 그 글을 쓰기 전에 그런 고민을 적잖이 했었다. 그러나 내가 내린 결론은 결코 ‘연좌제’에 의한 비판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왜 그런가? 단지 함재봉 교수의 부친이 군사독재정권에서 고위직을 지냈다고 해서 그걸 함재봉 교수의 주장과 연결시키려 든다면 그건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종류의 비판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러나 함 교수 부친의 경우 뚜렷한 소신과 이론을 공개적으로 발표하면서 군사독재정권을 공격적으로 옹호했던 분이다. 그리고 그 주장은 오늘날 함재봉 교수의 주장과 거의 똑같다. 이걸 어찌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알기론 함 교수나 유 교수 모두 부친들의 활동에 대해 긍지를 갖고 있을 게다. ‘연좌제’에 의한 비판이란 것은 그들이 부친의 과거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경우에나 적용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연좌제’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그것도 의심스럽다. 그건 이문열 씨에게 물어봐야 실감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부친의 과거로 인해 피눈물을 한번이라도 토한 적이 있느냐 이 말이다. 오히려 군사독재정권의 옹호자였던 {조선일보}의 활약에서 엿보이듯, 두 교수의 부친들의 명성은 한국 사회의 주류로서 여전히 대접받고 있는 게 아니냐 이 말이다.

좌파로부터 공격받았다는 것도 괜한 소리다. 한국의 좌파들은 자기들 이야기하기나 바쁠 뿐 극우파에 대해 관심도 없거니와 또 어떤 면에선 극우파와 화기애애하게 지내는 집단이다. {전통과 현대}에 대한 비판은 내가 가장 왕성하게 했던 셈인데, 유감스럽게도 나는 좌파가 아니다. 좌파는 {전통과 현대}의 동인들을 보수 우파라고 공격하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그 동인들 가운데 일부는 극우파라고 생각한다.

나는 유 교수에 대해선 그의 부친의 이름을 거론할 뜻이 전혀 없다. 함재봉 교수의 경우와는 좀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있을 수 있다는 걸 미리 말씀드리고 싶다. 만약 {전통과 현대}의 핵심 멤버들이 거의 다 과거 군사독재정권 치하에서 권력 또는 금력을 누린 집안 출신이라면 이건 개인 차원이 아니라 소집단 차원에서는 문제 제기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건 사회과학적 연구에서 매우 정당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라는 걸 유 교수가 모를 리 없다. 그러나 나는 아직 그렇게 말할 증거도 갖고 있지 않거니와 그걸 조사해볼 뜻도 없다. 나는 지금까지 “지금은 좌익이 우익을 오히려 연좌제로 공격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는 유 교수의 엉뚱한 발언에 대해 답을 드리고자 했을 뿐이다.

유석춘은 억울하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유석춘 교수가 쓴 ‘옴부즈맨 칼럼’은 세계 신문사상 이런 일이 있었으며 앞으로 또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우 진기한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유 교수가 칼럼에 자세히 설명했기 때문에 그걸 인용해보기로 하자.

이번으로 도합 세 번째 중앙일보 옴부즈맨 칼럼을 쓴다. 일간지에 칼럼을 쓰는 일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기에, 지난 9월말 한 달에 한 번 이 난의 필자가 돼 달라는 중앙일보의 권유를 별 생각없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경험은 이러한 나의 결정이 매우 순진하고 경솔한 판단이었음을 뼈아프게 깨닫게 하고 있다. 언론에 대한 평가를 공개적으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하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무서운 일인가를 직접 체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쓴 두 번의 칼럼은 모두 최소한 겉으로는 중앙일보의 보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11월 1일에는 ‘언론장악’ 문건의 공개와 관련해 중앙일보가 ‘객관적인 보도’를 하고 있다고 썼고, 11월 29일에는 옷 사건의 파장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중앙일보가 ‘상대적으로 보수적이고 신중한 보도’를 하고 있다고 썼기 때문이다.

이 두 번의 평가 덕택에 나는 주변사람들로부터 ‘언제부터 중앙일보의 앞잡이가 됐느냐’는 진담반 농담반의 힐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이러한 주위의 평가에 대해 일일이 항변하기도 어렵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싶어 지금까지는 ‘잘 보여야 또 쓰게 해주기 때문’이라며 대충 얼버무렸다.

그러나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어 나름대로 정리된 입장을 표명하지 않을 수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됐다. 다름 아닌 중앙일보 내부의 반응이다. 특히 옴부즈맨 칼럼을 담당하는 기자는 내용이 너무 긍정적이라 불필요한 오해를 산다며 보다 비판적으로 써달라는 요청을 했다. 이 대목에서 몇 가지 억울한 생각이 드는 부분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지금까지 쓴 두 번의 칼럼은 모두 중앙일보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내용뿐이었던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유석춘의 슬픈 짝사랑?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유석춘 교수가 억울해 하는 심정에 십분 공감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건 괜히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다. 의외로 많은 교수들이 ‘잘 보여야 또 쓰게 해주기 때문’에 신문의 비위를 맞추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유 교수는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는 나 못지 않게 강한 정치적 편견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물론 나완 정반대 편에 서 있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던가?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유 교수가 {중앙일보}의 비위를 맞추고자 했던 게 아니라 오히려 {중앙일보}의 ‘옴부즈맨 칼럼’을 이용해 자신의 정견(政見)을 발표하려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진단이 오히려 유 교수에게 더 누가 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나의 진단이 진실에 더 가까운 것이라는 데엔 유 교수도 기꺼이 동의하시리라 믿는다. 어찌됐건 독자들을 위해 유 교수의 이야기를 마저 소개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우선, 첫 번째 칼럼은 중앙일보가 동료 신문으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있는 사실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따라서 주의깊은 독자라면 왜 그런 일이 발생했을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두 번째 칼럼도 사려깊은 독자라면 중앙일보가 일간지의 생명인 ‘여론의 선도’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음을 우회적으로 지적한 내용임을 얼마든지 간파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왜 ‘간접화법’으로만 중앙일보를 비판하는가. 통상 옴부즈맨 칼럼은 공개적이고 직설적인 방법으로 신문의 내용을 비판하는 마당이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한 판단을 두고 나로서는 가장 많은 고민을 했다. 특히 사장의 구속을 전후한 중앙일보 사태의 파장과 올해 후반기 혼미스러운 정국의 전개가 서로 맞물려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며 나는 칼럼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언론 본연의 기능을 보호’하는 내용을 써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런 까닭에 보기에 따라서는 ‘중앙일보의 앞잡이’와 같은 내용을 기고하게 된 것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나의 칼럼이 ‘중앙일보의 앞잡이’로 평가된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외부의 뜨내기 필자임에도 불구하고 언론 본연의 기능을 보호하는 일에 지나친 관심을 기울인 짝사랑이 만들어낸 슬픈 현실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우리가 정말 경계해야 할 일은 무관심이지 짝사랑은 아니다.

‘옴부즈맨 칼럼’을 빙자한 정치 공세

다시 묻자. 유석춘 교수는 ‘중앙일보의 앞잡이’였나? 천만의 말씀이다. {중앙일보}가 ‘유석춘의 앞잡이’였다면 또 모를까. 유 교수가 문제의 두 ‘옴부즈맨 칼럼’에서 도대체 무슨 주장을 한 건가? 1999년 11월 29일자 ‘옴부즈맨 칼럼’부터 먼저 살펴보자. <돋보이는 ‘옷사건’ 보도>라는 제목의 이 칼럼은 {중앙일보}의 문제를 몇 가지 지적하긴 했다. 광고의 양, 기형적 광고, 사회면의 위축과 이와 관련된 편집의 문제를 지적했다. 모두 다 타당한 지적이긴 하되, 양적으로건 질적으로건 이러한 지적은 {중앙일보}에 대한 일련의 극찬에 비추어 보면 그야말로 ‘새 발의 피’다. 10여 군데가 눈에 띈다. 칭찬의 표현 방식만 인용해보자.

“언론 본연의 자세에 충실하려는 모습은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다른 신문과의 차별성을 확보했다는 생각이 든다. …… 기획력이 돋보이는 기사였다. …… 균형을 잃지 않으면서도 쟁점의 핵심을 꿰뚫으며 여론을 선도했다. …… 문제점을 정확하게 짚었다. …… 문제점을 깊이있게 지적했다. …… 국민감정을 가려운 부분을 정확하게 긁어주었다고 본다. …… 눈에 띄는 기획작품을 보이고 있다. …… 적극적인 시도로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 시의적절하게 발굴한 유익한 보도였다고 생각한다.”

{중앙일보}가 그렇게 좋은 신문이란 말인가? 나는 유 교수의 그런 판단은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정작 문제가 되는 건 99년 11월 1일자 칼럼이다. 그는 <‘왕따’ 당하며 객관적 보도>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지난 주는 분명 중앙일보의 지면이 상대적으로 돋보이는 주였다. 사건의 한쪽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객관성을 유지한 보도를 저버리지 않았고, 동시에 사건의 의미와 배후, 그리고 앞으로의 파장 등을 입체적으로 분석하는 기사를 폭넓게 제공했기 때문이다. 객관성을 유지한 보도의 예로는 26일 정형근 의원과 이강래 전 수석을 각각 인터뷰한 기사와 27, 28, 29일 여야의 입장을 정리하고 문건의 유출 배경을 설명한 종합면 등이다. 심층적이고 입체적인 기사의 예는 ‘언론장악 시나리오 의혹’을 분석한 26일의 종합면, 닉슨의 경우와 대비시킨 27일 김영희 대기자의 칼럼, 29일자 ‘언론장악문건 미스터리’를 설명한 종합면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지난 주 사설은 계속해 이번 사건의 전개와 관련된 중요 쟁점을 당사자의 입장에서라기 보다 국민의 입장에서 해명을 요구하고 있어 독자의 공감을 끌어냈다고 보인다. …… 앞으로도 중앙일보가 지난 주와 같이 의연한 보도태도를 계속 유지해 ‘왕따’에서 ‘중앙’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설 수 있길 기대해본다.

이게 ‘옴부즈맨 칼럼’이란 말인가? 아니다. 그럴 순 없다. 당시 여론, 적어도 언론계의 여론은 김대중 정권에게도 의혹의 소지가 있지만 {중앙일보}의 지면 사유화가 너무 심하다며 {중앙일보}에게 큰 거부감을 느꼈던 것인데, 이게 도대체 웬 말인가. 이건 ‘옴부즈맨 칼럼’이 아니다. ‘옴부즈맨 칼럼’을 빙자한 정치 공세다.

김영희 대기자의 칼럼이 심층적이고 입체적이라고? 나는 월간 {인물과 사상} 2000년 1월호에 쓴 <{중앙일보} 김영희 상무: ‘대기자’라는 타이틀을 버려라!>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 칼럼과 김영희 씨가 국제언론인협회에 보낸 서신의 문제점을 자세히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유 교수는 언론에 대한 ‘짝사랑’이 너무 깊어 {중앙일보}의 문제는 전혀 보지 않으려 눈과 귀를 막고 일방적인 “{중앙일보} 찬가”만 불러댔으니 {중앙일보}인들 곤혹스럽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유석춘의 어리석은 짝사랑

만약 유석춘 교수가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살다가 한국에 온 지 몇 달 되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의 ‘짝사랑’은 이해될 수도 있다. 한국 언론이 어떤 언론인지 그가 그걸 잘 모를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한국 언론이 어떤 언론이냐에 따라 그의 ‘짝사랑’은 ‘어리석은 짝사랑’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유 교수는 김영삼 정권을 100% 좋아하거나 지지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1992년 대선에서 그의 선택은 김대중보다는 김영삼이었을 것이며, 김대중 정권보다는 김영삼 정권을 더 낫게 보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 점은 유 교수도 흔쾌히 동의하리라 믿는다.

내가 그런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한국 언론이 어떤 언론인지 그걸 현재 김대중 정권에 대해 온갖 독설을 퍼붓고 있는 김영삼 정권 실세들의 증언을 통해 알아보자는 뜻에서다. 권력과 언론의 갈등에서 권력은 무조간 악(惡)이고 언론은 무조건 선(善)인지 그 고정관념에 대해 재검토를 해보잔 말이다. {말}지 1999년 9월호에 실린 <족벌신문 사주집단, 그 허위의 가면을 벗긴다>라는 제목의 기사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언론을 포함한 기득권층은 많은 자금, 정보, 자료를 확보하고 있는 노회한 사람들로, 이들의 저항이 얼마나 무서운지 실감했다. 국민은 그런 사실을 모른 채 그들의 비판에 휩쓸렸다.” 김영삼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낸 박관용 의원(현 한나라당)이 지난 96년 6월 29일 한국정치학회 세미나에서 한 발언이다. 오인환 전 공보처장관도 97년 7월 한겨레 손석춘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비슷한 고백을 한 적이 있다. “언론을 개혁하기에는 상대의 힘이 너무 컸다. 정부가 반격을 받을 것이 명백했기에 뜻대로 할 수 없었다. …… (신한국당 의원들은) 막상 정간법을 만들자고 하면서도 ‘방울’을 달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정부 수립후 대통령과 임기를 함께 한 첫 장관이라는 기록을 남긴 ‘실세 장관’조차 언론과 정부의 관계를 ‘고양이와 쥐’에 비유한 것이다.

유석춘은 “{조선} {동아}의 앞잡이”도 아니다

유석춘 교수는 부디 <족벌신문 사주집단, 그 허위의 가면을 벗긴다>는 제목의 기사를 찾아서 나머지 이야기를 꼭 읽어보시기 바란다. 그들은 한국에서 가장 윤리적 수준이 낮은 집단이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아니 굳이 그런 이야기까지 할 필요도 없다.

유석춘 교수는 “옴부즈맨 칼럼을 담당하는 기자는 내용이 너무 긍정적이라 불필요한 오해를 산다며 보다 비판적으로 써달라는 요청을 했다”는 걸 밝히면서 억울하다고 주장하지만, 아무리 유 교수에게 좋고 숭고한 뜻이 있다 하더라도 ‘옴부즈맨 칼럼’은 어떠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규칙이 있는 법이다. 물론 유 교수가 그 규칙을 바꾸자고 논문을 쓸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논문도 쓰기 전에 직접 실천에 옮긴 건 너무 성급했다. 전혀 억울해 할 일이 아닌 것이다.

어찌됐건 유 교수가 ‘중앙일보의 앞잡이’가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 행여 유 교수에 대해 그런 오해를 했던 분들은 이제 그 오해를 거두어 주시기 바란다. 그런 오해는 평생 ‘소신’이란 건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것임을 유념해주시기 바란다.
유 교수가 {조선일보}에 잦은 기고를 한다고 해서 그를 ‘조선일보의 앞잡이’로 보는 것 또한 전혀 온당치 않다. 그는 {조선일보}와 배짱이 가장 잘 맞아 그 신문에 잦은 기고를 할 뿐이다.

{동아일보} 1998년 11월 12일자 C5면에 실린 <근대화 씨앗 뿌린 ‘문화 선각자’>라는 제목의 글을 읽은 분들은 유 교수가 ‘동아일보의 앞잡이’가 아닌가 하는 오해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글은 {문화민족주의자 김성수}라는 책에 대해 유 교수가 쓴 서평으로 인촌 김성수에 대한 극찬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말씀드리지만, 유 교수는 그 어느 신문의 앞잡이도 아니다. 유 교수가 그 글에서 말한 것처럼, 그 글은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부정하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예속과 굴종뿐”이라는 유 교수의 평소 소신의 산물일 뿐이다.

20세기 한국 역사의 일부를 부정하는 경향이 없지 않은 김대중 정권에 대해 유 교수가 문제의식과 반감을 갖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그의 그런 자유를 존중해줘야 한다. 다만 ‘옴부즈맨 칼럼’은 그 어떤 사정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쓰는 게 아니라는 따끔한 말씀을 한마디 보태는 건 무방할 것이다.


퍼 가실 분은 참고하세요. 이 글의 주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neo.urimodu.com/bbs/zboard.php?id=choisun_insa&page=3&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89

2002/06/28 (00:40:35)    IP Address : 211.195.124.241

578    왜 잘못을 시인할 줄 모르나 조용훈 2002/06/27 887
577  [월간 인물과사상 2000년 6월호] 인물과사상사 2002/06/26 1053
576    박원순 변호사님께 강준만 2002/06/28 976
575    유홍준과 오동명: 엉터리와 진짜 강준만 2002/06/28 1384
574    박노해 {조선일보}와 ‘논쟁’에 대하여 강준만 2002/06/28 1061
573    콩밭에 가 있는 사람들 고승원 2002/06/28 919
572    {전남일보} 편파보도와 신문의 개혁 임동욱 2002/06/28 769
571    부일시론 <지역당? 영남당!>을 쓴 뒤 내게 일어난 일들 노혜경 2002/06/28 846
570    영남인들에 대한 분노와 김대중의 어리석음 구본영 2002/06/28 917
569    조기숙 : 4·13 총선과 지역감정 강준만 2002/06/28 899
568    4·13 총선과 소설가 배수아의 고민 김동민 2002/06/28 860
567    이문열을 어떻게 볼 것인가? 강준만 2002/06/28 1206
566    엘리안 곤잘레스의 진실 송기도 2002/06/28 1017
565    송병락 서울대 부총장의 이상한 경제학 ② 강준만 2002/06/28 909
564    서울대 지방 이전? ‘말도 안 되는 헛소리’ 김완수 2002/06/28 948
563    과외(課外)에 관한 단상 기호민 2002/06/28 728
562    < TEPS 과연 무엇인가? > 그 후 성기완 2002/06/27 969
561    시간강사는 21세기 문명 시대의 야만이다 최영환 2002/06/27 980
560    <미국 멤피스시의 법정 풍경>을 읽고 김형수 2002/06/27 1041
559    좋아하는 대중문화, 소비로 말하자! 이시우 2002/06/27 896
558    "난(亂)" 유감 안한준 2002/06/27 866
557    방송개혁을 위한 5가지 제안 조흡 2002/06/27 926
556    ‘아름다운 책’과 ‘예쁜 책’ 이미영 2002/06/27 864
555    내가 좀처럼 납득하기 어려운 출판관련 기사 셋 최성일 2002/06/27 827
554  [월간 인물과사상 2000년 5월호] 인물과사상사 2002/06/26 1032
553    정권교체는 세상을 바꾸었는가? 강준만 2002/06/28 894
552    손학규와 최영희 정실주의는 안 된다 강준만 2002/06/28 1142
   유석춘 : “{중앙일보}의 앞잡이”인가? 강준만 2002/06/28 1176
550    김승수 교수에게 묻는다 김동민 2002/06/28 859
549    ‘특권 중독증’을 추방하자 강준만 2002/06/28 1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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