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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죄선일보 > 월간 인물과사상이 파헤친 죄선일보 - 1998년4월호~2000년9월호


이 름 강준만
제 목 김용옥을 어떻게 볼 것인가? (2)
김용옥을 어떻게 볼 것인가? (2)

강준만



강준만의 일관되지 못한 김용옥 비판?

강준만 님이 지적하신 김용옥의 잘못된 부분은 사실 무크지 {인물과 사상} 3호에 실린 강준만 님의 글 <‘위선적 언어’에 도전하는 김용옥의 화려한 투쟁>에서도 이미 대체적으로 언급되었던 것들이다. 그런데 무크지에서는 김용옥에 대한 ‘옹호’에 무게 중심이 있었던 반면 이번 글에서는 ‘비판’에 무게 중심이 실리고 있다. 어떻게 2년 반 만에 한 인물에 대한 평가가 그렇게 달라질 수 있는가? …… 지금의 강준만 님의 김용옥 비판이 그 타당성을 보장받으려면 그 사이 김용옥에게 그만큼의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이 설득력 있게 제시되어야 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필자는 김용옥이 지난 2년 6개월 동안 그렇게 질적으로 바뀐 모습을 보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필자는 강준만 님의 이번 평가가 무크지에서의 평가와 서로 상충된다고 주장한다. 바뀐 건 김용옥이 아니라 오히려 강준만 님 자신의 판단 기준이지 않은가 의심이 든다는 얘기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철학과 석사과정에서 연구하고 계시는 채석용 님은 지난 4월호에 기고하신 <강준만 님의 일관되지 못한 김용옥 비판>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위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채석용 님의 글은 제가 3월호에 쓴 <김용옥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제목의 글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해주신 것입니다. 채석용 님께 깊이 감사드리면서 제 답을 말씀드려 볼까 합니다.

채석용 님은 양자택일을 요구하셨는데, 전 그게 불만입니다. 김용옥이 달라졌느냐, 아니면 강준만이 달라졌느냐? 그런 물음을 던져놓고 답을 찾으시는 게 과연 온당한가 하는 것이 제 답의 핵심입니다. 채석용 님이 잘 지적하셨다시피, 제가 쓴 두 개의 글의 차이는 ‘무게 중심’일 뿐입니다. 총론과 각론의 차이라고 해도 좋겠지요. 어떤 인물에 대해 총론 차원에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안에 대해 논할 때엔 그 인물의 장점만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고 단점만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이야기들이 상호 상충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대중적 지지도의 상승’과 거품의 정체

채석용 님은 왜 무게 중심을 이동시켰느냐는 질문을 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채석용 님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해주셨습니다. 그 부분을 인용해볼까요?

좀더 거친 표현을 쓴다면 강준만 님은 김용옥의 철학자로서의 그릇을 너무 모르고 계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대중적 지지도가 지나치게 커져가는 것을 우려하고 한사코 그를 엔터테이너로서만 머물게 하려고 애쓰게 되는 거다. 대중적 지지도가 낮았을 때는 까짓 눈감아 줄 수도 있었던 김용옥의 그릇이 이제 대중적 지지도가 높아감으로써 우려의 대상으로 변해버리게 된 것이다. 결국 강준만 님의 김용옥에 대한 태도의 변화 이유는 바로 이것, ‘대중적 지지도의 상승’에서 찾을 수 있다 하겠다. 2년 전과 지금 사이에 달라진 것은 이것밖에 없다. 그런데 강준만 님은 그렇게 김용옥에 대한 대중적 지지도가 높아지는 것이 못마땅하다. 대중적 지지도가 낮을 때는 소수의 사람들한테 엔터테이너로서만 인식되었을 텐데 이제 대중적 지지도가 높아감에 따라 주제넘게도 민족의 장래 운운하는 철학자로서 행세하려 하니 문제라고 생각하게 된 거다.

제 생각에 딱 맞는 분석은 아닙니다만, 거의 근접한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좀더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단지 ‘지지도의 상승’만이 문제가 아니라 ‘지지의 성격 변화’가 제가 우려를 하게 된 더 큰 이유입니다. 그러나 채석용 님은 그렇게 말씀하시고선 곧장 반격을 가하셨기 때문에 그걸 마저 인용해놓고 나서 제 말씀을 드려볼까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강준만 님의 착각이요 사태 왜곡이다. 2년 반 이전의 김용옥의 지지자들이 오히려 지금의 김용옥 지지자들보다 더 깊이 있게 김용옥을 철학자로서 인식했었다. 지금의 김용옥이 2년 반 전의 김용옥보다 더 엔터테이너로서의 이미지가 강하다는 얘기다. 강준만 님 지적대로라면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김용옥의 이미지가 엔터테이너로서의 이미지에 적합한 상황이다. 2년 반 전, 지금보다 훨씬 소수의 지지자들한테 김용옥은 엔터테이너이기 이전에 철학자였다. 그때보다 더 엔터테이너로서의 모습을 많이 보이고 있는 지금의 김용옥에 대해 좀더 엔터테이너로서만 충실하라고 주문하다니 이거 지나친 현실 왜곡이지 않은가? 강준만 님은 김용옥을 둘러싼 거품을 비판한다고 했는데 도대체 그 거품의 정체가 무어라고 생각하시는가? 그게 정말 김용옥을 과분하게 철학자로서 대접하려는 거품이라고 생각하시는가? 천만의 말씀! 오히려 지금 김용옥을 둘러싼 거품은 그를 너무 엔터테이너로서만 바라보기 때문에 생기는 그런 거품이다. 강연 이전에 독자층들만을 대상으로 할 때와 달리 지금 시청자층을 대상으로 할 때는 지나치게 엔터테이너로서의 모습만 부각되어 그 점이 바로 문제가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강준만 님은 더욱 더 엔터테이너가 되라고 주장하시다니 마치 아픈 데 한 대 더 때리려는 심술이 작동하신 것은 아닌가 의심스럽다.

위대한 철학자가 노상 방뇨를 한다면?

전 채석용 님의 이 말씀에 모든 답이 들어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와 채석용 님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 차이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채석용 님은 김용옥의 철학을 이해하고 김용옥을 ‘최고의 철학자’로 생각하는 김용옥 전문가입니다. 저는 김용옥의 철학을 모릅니다. 따라서 그가 ‘최고의 철학자’인지 아닌지 그것도 전혀 모릅니다. 김용옥의 철학을 이해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왜 김용옥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가?

그리 물으시면 제가 그간 해온 모든 인물 비평의 근거가 다 무너집니다. 제가 자주 드렸던 말씀을 상기해 주십시오. 저는 지식인의 저널리즘 행위 또는 대중매체 이용 행태와 그 내용에 대해서만 이야기해 왔습니다. 그래서 철학자도 건드리고 국문학자도 건드리고 경제학자도 건드리고 정치학자도 건드리고 소설가도 건드려 왔습니다. 제가 아무리 그 분야에 대해 문외한일망정 그들이 대중매체를 통해 일반 대중을 상대로 생산해내는 현실참여적 글과 말에 대해서는 평가할 자격과 능력이 저에게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도 저의 그런 믿음이 타당하며 그런 믿음에 근거한 저의 시도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채석용 님은 제가 “김용옥의 철학자로서의 그릇을 너무 모르고” 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저의 김용옥 비판에 문제가 있다는 식의 논리 전개엔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제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자 했던 건 심오한 철학의 세계가 아닙니다. 위대한 철학자가 노상 방뇨를 했을 때 그걸 비판하는 건 위대한 철학의 이해 여부와는 무관한 것이며 오히려 위대한 철학자이기 때문에 더욱 호된 비판을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그건 마치 대통령 김대중의 어떤 행위를 비판하는 사람에게 “당신 김대중의 심오한 정치 철학을 이해해?”라고 물을 필요가 전혀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김용옥이 노상 방뇨를 했다는 게 아닙니다. 제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자 했던 건 김용옥의 심오한 철학 세계와 전혀 무관하며 그 어떤 관계를 가질 필요도 없다는 걸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저와 채석용 님 가운데 김용옥의 저널리즘 행위와 대중매체 이용에 대한 평가와 관련하여 그 누군가 강한 선입관을 갖고 있다면 그건 김용옥을 ‘최고의 철학자’로 존경하는 채석용 님이지 저는 아닐 겁니다.

사회적 영향력이 문제다

저는 채석용 님이 “착각이요 사태 왜곡”이라고 주장하신 내용도 채석용 님이 이른바 ‘전문가의 함정’에 빠져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고 있습니다. 김용옥을 잘 이해하는 전문가들을 놓고 보자면 채석용 님의 말씀은 설득력이 대단히 높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전문가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닙니다. 제가 관심을 갖는 건 일반 대중입니다.

채석용 님은 “지금 김용옥을 둘러싼 거품은 그를 너무 엔터테이너로서만 바라보기 때문에 생기는 그런 거품”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만, 그건 정확한 표현은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 김용옥을 둘러싼 거품은 그의 엔터테이너로서의 천부적 재능에 의해 형성된 그런 거품”이라고 말하는 게 더 옳지 않을까요? 저는 그런 거품 속에서 민족의 나아갈 길이 역설되는 건 곤란하다는 걸 지적하고자 했던 겁니다.

지난 2년 반 동안 김용옥이 무엇이 달라졌단 말인가? 그리 묻지 마시고 “그 동안 김용옥의 저널리즘 행위와 대중매체 이용에 있어서 무엇이 달라졌는가?”라고 물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김용옥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이번 EBS 특강은 그가 지난 1997년 5, 6월에 했던 SBS {명의특강--성과 건강}과는 종류가 좀 다른 것이다. {명의특강}은 그야말로 엔터테인먼트였기에 김용옥 씨가 ‘좌삼삼 우삼삼’이니 하는 ‘약 장수’ 개그로 인기를 누려도 문제삼을 게 없었던 반면, 이번엔 김씨가 “우리 민족의 가치관과 나아갈 길”까지 역설하는, 엄청난 무리를 저지르고 있어 좀 달리 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분명히 말하건대, 그에겐 그럴 ‘도덕적’ 자격이 없다! 그러한 자격 문제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김용옥 씨의 치기(稚氣)가, 진중권 씨로부터 온갖 욕을 먹어야 했을 정도로 그의 치기에 너그러웠던 나 같은 사람조차 더 이상 인내하기 어려운 수준으로까지 악화되었다는 점이다. {문화일보} 김종락 기자와의 싸움은 그것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주었다. …… 나를 놀라게 만든 건 이 싸움을 둘러싸고 네티즌들의 반응이 양분되는 양상을 보이긴 했지만 김용옥 씨를 옹호하는 쪽이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사실이었다. 이건 곤란하다. 아니 위험하다.

이 정도의 설명으로도 부족하다는 말씀이신가요? 채석용 님은 “그러한 문제점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지적되어 오던 것들이다”고 말씀하시지만, 김용옥의 문제가 그의 책에서 나타나는 것과 TV 그리고 그걸 대서특필 해대는 신문에서 나타나는 것과는 전혀 다르지요. 제가 그래서 ‘전문가의 함정’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자꾸 김용옥이라는 ‘본질’에만 집착하지 마시고 그가 행사하는 사회적 영향력과 그 성격의 차원에서 한번 봐주십사 하는 겁니다.

‘훌륭한 철학자’라는 면죄부

채석용 님과 저 사이엔 ‘철학자’와 ‘엔터테이너’의 정의를 둘러싼 혼선도 있는 것 같습니다. 채석용 님은 “대중적 지지도가 낮을 때는 소수의 사람들한테 엔터테이너로서만 인식되었을 텐데 이제 대중적 지지도가 높아감에 따라 주제넘게도 민족의 장래 운운하는 철학자로서 행세하려 하니 문제라고 생각하게 된 거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엔터테이너’와 ‘철학자’를 대비시키신 거죠? 그러나 제 뜻은 그게 아닙니다. 철학자이면서 엔터테이너일 수 있는 것이지 그게 왜 그렇게 마주보아야 하나요?

채석용 님은 철학자는 무조건 민족의 장래에 대해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 누구든, 대한민국의 국민 모두가 민족의 장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는 있지요. 저는 저의 이념적, 정치적 성향에 근거해 주장을 하는 것일 뿐 다른 사람의 표현의 자유까지 억압해야 한다는 건 결코 아닙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파시스트도 자기 나름대로 민족의 장래에 대해 이야기할 권리는 있지요. 물론 저는 그 권리를 존중하겠습니다만, 저에게도 “당신에겐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어”라고 말할 권리쯤은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논쟁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런 차원에서 제 말씀을 이해해주신다면, 채석용 님이 잘 지적해주신 대로, “언제나 {조선일보}에 대해 문제의식이 없었”던 사람이 민족의 장래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건 좀 우습다는 거지요. 채석용 님께서도 “원칙적으로 김용옥의 지지자인 필자도 김용옥의 그러한 태도가 너무나도 밉고 안타깝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석용 님은 김용옥이 “여전히 훌륭한 철학자”이기 때문에 민족의 장래에 대해 말할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계십니다. 저와 채석용 님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민족의 장래와 관련하여 {조선일보}에 대한 문제의식이 전혀 없는 걸 가볍게 여겨도 되는 걸까요? 차라리 채석용 님이 {조선일보}의 민족관이나 대북관을 지지하신다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되는 겁니다. 각자 등을 맞대고 갈 길을 가면 되는 거지요. 그러나 제가 보기에 채석용 님은 {조선일보}의 민족관이나 대북관을 지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석용 님은 {조선일보}에 대해 문제의식이 전혀 없는 김용옥이 민족의 장래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는 ‘훌륭한 철학자’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김용옥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면서 그 밖의 다른 것들은 비교적 하찮은 것으로 보고자 하는 채석용 님의 포용력은 존중하겠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포용력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도 한번쯤 해주시기 바랍니다.

친일파를 옹호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친일파들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면서 그 밖의 다른 것들은 비교적 하찮은 것으로 본다는 걸 모르십니까? 국내외적으로 위대한 철학자들 가운데엔 파시즘을 적극 옹호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철학자로선 위대할지 모르지만 그 위대함이 민족 또는 인류가 나아갈 길을 역설할 수 있는 자격의 보증까지 의미하는 건 아닐 겁니다.

‘폭력적이고 극악하기까지 한 언사’?

제가 굳이 이해를 하자면, 김용옥은 수백 년 내지 수천 년 후를 내다보는 민족의 장래를 말한 거고 {조선일보}는 기껏해야 수십 년짜리 문제에 지나지 않으니 이해해 주자는 건가요? 죄송합니다만, 저는 그렇게 못하겠습니다. 과거 친일파들도 너무 멀리 내다봐서 친일을 했던 게 아닐까요? 그러고보니 김용옥이 친일파에 대해 문제의식이 전혀 없는 것도 너무 멀리 내다보기 때문에 그런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렇게 못한다고 해서 그게 무어 그리 큰 문제가 되겠습니까? 각자 자기 주장을 할 권리는 있는 거지요. 다만 다음과 같은 말씀은 오히려 채석용 님이 김용옥에 대한 존경과 애정에 치우친 나머지 저의 권리를 침해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살벌하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걸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군요.

대중의 사랑을 받는 철학자로서 “우리 민족의 가치관과 나아갈 길”을 역설하지 말라는 충고를 받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비난에 해당한다. 김용옥의 주장에 대중이 귀를 기울이는 것을 위험하다고까지 경고하는 강준만 님의 주장을 접하고서 필자는 사실 할 말을 잃었다. 김용옥의 천재로서의 치기를 그토록 따뜻한 언어로 달래주었던 강준만 님이 어떻게 이토록 폭력적이고 극악하기까지 한 언사를 내뱉으실 수 있는지 필자의 눈이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죄송합니다. 저는 “폭력적이고 극악하기까지 한 언사”라는 말씀을 접하고서 그냥 껄껄 웃었습니다. 이거 너무 심한 것 아닙니까? 저에 대해 일종의 배신감을 느끼신 모양이죠? 아닌게 아니라 중간에 서기가 정말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채석용 님은 <김용옥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제 글에서 ‘폭력’과 ‘극악’을 발견하셨습니다만, 김용옥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 글에 여전히 흘러 넘치는 김용옥에 대한 저의 ‘따뜻한 언어’에 대해 펄펄 뛸 게 틀림없습니다. 특히 제가 비판한 S대 정치학과 모 교수가 펄펄 뛰겠지요. 어떻게 그렇게 김용옥에 대해 ‘따뜻한 언어’를 내뱉을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채석용 님. 전 김용옥의 모든 주장에 대중이 귀를 기울이는 게 위험하다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김용옥이 대중매체의 이용에 관한 한 그냥 지적 엔터테이너에만 머물러 준다면 그의 주장은 매우 유익하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러나 그가 아무리 이 나라 ‘최고의 철학자’일망정 봉건적·보수적 세계관에 봉사할 수 있는, ‘우리 민족의 가치관과 나아갈 길’에 대해 역설하고 대중이 그 역설에 귀를 기울이는 건 위험하다는 겁니다. 그게 그토록 폭력적이고 극악하기까지 한 언사란 말입니까? 부디 재고(再考)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김용옥 엔터테인먼트의 유사종교적(類似宗敎的) 성격

채석용 님과 무관하게 김용옥과 관련하여 제가 갖고 있는 한 가지 우려를 더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독자 이현우 님은 월간 {인물과 사상} 4월호에 쓴 <도올 김용옥의 친일파관 비판 (2)>에서 “강의 중간중간 카메라에 비친, 새로운 지식에 홀린 듯, 맛이 간 듯한 일부 청강생들의 표정이 나는 범상해 보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건 EBS-TV의 장삿속으로 인한 문제로도 볼 수 있겠습니다만, 제가 우려하는 건 그 ‘범상치 않음’이 낳는 파급 효과입니다.

김용옥의 지적 엔터테인먼트는 일종의 유사종교적(類似宗敎的)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김용옥이 그걸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그의 독특한 외모와 옷차림과 말투가 그 성격을 낳고 강화하는 데에 큰 몫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게 갑자기 생겨난 건 아니지요. 저는 그것까지도 그가 자기 분수만 지킨다면 엔터테인먼트로 못 봐줄 것 없다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이젠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이윤 추구에 목을 매달고 있는 신문들은 대세(大勢)를 쫓습니다. 저는 대세에 개의치 않습니다. 저는 대세를 거스를 때엔 거슬러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걸 실천에 옮깁니다. 제가 우려하는 건 신문들의 장삿속입니다. 신문들은 김용옥의 상품적 가치에만 주목하고 있습니다. 최근 나온 김용옥 관련 보도를 한번 보십시오. 김용옥의 불교 관련 이해가 정확하니 정확하지 않느니 하면서 신문들이 앞다투어 크게 보도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보도가 무의미하다는 게 아닙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건 김용옥과 관련하여 정작 제기되어야 할 문제로선 그건 부차적인 것이라는 겁니다. 적어도 대중을 상대로 하는 신문에서는 말입니다. 그런데 신문들이 왜 그러는 걸까요? 신문들도 이미 김용옥의 지적 엔터테인먼트가 갖고 있는 유사종교적 성격을 수용하고 그 규모를 장사에만 이용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거 이대로 좋습니까?

제발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만, 신문들은 대세가 아니다 싶으면 언젠간 무자비한 ‘김용옥 죽이기’에 나설지도 모릅니다. 아니 아예 외면해버리는 게 더 잔인한 처사이겠지요. 적어도 김용옥에 관한 한 저처럼 중간에 선 사람이 가장 정확하게 김용옥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을 한번쯤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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