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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죄선일보 > 월간 인물과사상이 파헤친 죄선일보 - 1998년4월호~2000년9월호


이 름 강준만
제 목 임지현 교수의 반론에 답한다
강준만



'사회적 악역(惡役)'에 대한 회의

이 글은 월간 {인물과 사상} 2000년 3월호에 실린 임지현 교수의 <두더지의 슬픈 초상--강준만 교수에게 답함>이라는 글에 대한 저의 답입니다. 우선 답을 주신 임 교수께 감사드립니다. 임교수께서 화가 많이 나신 것 같아 송구스러운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제가 나름대로 독한 마음을 먹고 스스로 '사회적 악역(惡役)'을 자임한지 오래됐습니다만, 늘 마음은 편치 않고 임교수의 경우처럼 분노의 화살이 돌아오면 늘 마음이 흔들리는 것도 사실입니다.

누군가 저의 '사회적 악역'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를 사회적 차원에서 해주시면 저도 고칠 건 고치고 하겠습니다만, 저에 대해 분노하는 분들은 저에 대해 백지(白紙) 상태인 채로 그냥 화만 내시니 저로선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물론 임교수도 예외는 아니십니다. 그러니 저로선 원초적인 송구스러움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면서도 저의 '사회적 악역'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해하여 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이제부터 제 답을 시작하겠습니다.


어깨 건드렸다고 '도둑놈'이라니

저는 2월호에 쓴 <임지현: 당신의 {조선일보}관이 '일상적 파시즘'이다>는 글에서 임 교수가 {조선일보}에 기고한 두 편의 글을 소개한 다음 "그런 자신감 때문이었을까? 드디어 우리의 임 교수는 {조선일보} 편집국으로까지 진출하신다...."라고 말했습니다. 임 교수는 이 부분을 인용한 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글이 의도하는 바는 분명한 것처럼 보인다. 임지현이 조선일보에 글을 두어 편 써서, 조선일보에 포섭되어 '드디어' 편집국까지 진출했다는 인상을 주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강교수 자신이 썼다시피, 강연은 시론과 게바라에 대한 글 사이에 있었던 일이다. 글쓴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날짜를 정확히 챙겨준 강교수가 갑자기 그 날자를 혼동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요컨대 그는 게바라에 대한 '이 글이 게재된 다음', '드디어'라는 표현을 자의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사건이 일어난 순서에 대한 착각을 독자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논지를 정당화하기 위해 드디어 독자들에게 그러한 착각을 심어주는 데 성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비평자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양식을 어긴 것은 분명하다. 물론 그것이 사건의 순서를 뒤바꾸어 놓음으로써 과장의 효과를 노린 것은 분명하지만, 사실 자체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강연내용을 소개하면서, 이번에는 의도적 생략을 통해 사실 자체를 왜곡시킨다....

임교수의 말씀을 듣고보니, 제가 매끄럽지 못한 작은 실수를 저질렀더군요.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일까요? 저는 임교수의 글을 읽는 순간 임교수에 대해 미안한 마음보다는 화가 더 났으니 말입니다. 제가 타락한 걸까요? 독자들께서 판단해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출근시 복잡한 길에서 제가 실수로 옆사람 어깨를 건드렸습니다. 당연히 미안하지요. 그래서 사과를 드리려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제가 어깨를 건드린 사람이 갑자기 제 멱살을 잡더니 "야, 이 도둑놈아!"라고 외치는 겁니다. 제가 그 사람의 지갑을 훔치려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 얼굴을 보았더니 평소 저와 사이가 좋지 않은 Y였습니다. Y는 그 건을 저에 대한 보복의 기회로 이용하려 한 걸까요? 그러니까 사람들 많은 곳에서 개망신을 한번 주겠다는 걸까요? 아니면 정말 Y는 제가 그의 지갑을 훔치려 했다고 믿은 걸까요? 그 어느 경우이든 제가 Y에 대해 미안한 마음은 사라지고 화를 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거,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Y의 행동이 어떠했건 제가 Y의 어깨를 건드린 실수가 완전히 면책되는 건 아닙니다. 저는 그 어떤 상황에서건 일단 미안하다는 사과는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강준만은 임지현을 바보로 보았나?

저의 실수에 대해 임교수께 사과드립니다. 독자들께도 사과드립니다. 그러나 제가 도둑놈은 아니라는 항변은 당당하게 드려야 되겠습니다. 임 교수께서는 제가 날짜를 정확히 챙겼기 때문에 제가 날자를 혼동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일종의 '음모론'을 내놓으셨습니다만, 그건 도무지 말이 안되네요. 그럴려면 아예 날자를 틀리게 써버리면 될 것 아닙니까.

저는 날자 혼동이 중요한 문제라고 보지도 않습니다. 글을 한편 쓰고 편집국까지 진출하건 두편 쓰고 편집국까지 진출하건 그게 무어 그리 큰 차이란 말입니까? 제가 "그런 자신감" 대신에 "그런 종류의 자신감"이라고만 표현했어도 이렇게까지 호들갑을 떨 생각을 하셨겠습니까?

어찌됐건 임교수가 의심하셨다시피, 독자들은 저의 '음모' 또는 '어설픈 수법'에 속아넘어갈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임 교수까지 속일 수 있단 말씀이신가요? 제가 이렇게 사과를 드려야 할 이런 사태가 올 수도 있다는 걸 전혀 예상치 않고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말인가요? 제가 임 교수를 바보로 보았단 말입니까? 아니면 이렇게 사과를 드릴 것까지 예상했지만 그래도 결과적으론 '남는 장사'일거라는 생각을 제가 했을 거라는 말씀이신가요?

임지현 교수께서 잘 지적해주셨다시피, 그것이 음모였건 실수였건 제가 얻은 건 기껏해야 '과장의 효과'일 뿐입니다. 사실 자체가 부정되는 건 아니지요. 임교수를 흡족하게 해드리기 위해선 저는 이렇게 썼어야 했습니다. "평소 그런 종류의 자신감에 충만해 있었던 걸까? 우리의 임 교수는 '체 게바라 예찬'을 하기 전에 이미 드디어 {조선일보} 편집국으로까지 진출하신 바 있습니다." 제가 실수를 한 부분을 이 글로 대체한다고 해서 무어 그리 큰 차이가 있겠습니까?

제가 볼 때엔 임 교수께서도 그리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만, 그 건을 최대한 이용해야겠다는 욕심을 부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의 반론 가능성을 인정하는 척 하면서 '의도적 생략'이라는 문제로 연결시킴으로써 그 가능성을 부정하고자 하는 수법을 쓴 게 그러합니다. 그러나 저는 '의도적 생략'은 당연하거니와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 대해선 곧 자세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강준만은 왜 '드디어' 를 사용했나?

저는 제가 길을 걷다가 Y의 어깨를 건드린 장소가 과연 출근시 복잡한 길이었는지, 이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임교수는 '드디어'라는 표현에 상당히 기분이 상하신 것 같습니다만, 저는 임교수의 반론을 읽고서 그 표현은 매우 적합했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옥의 티'는 있었지만요.

저는 임교수가 '드디어' {조선일보}의 '글로벌 에티켓' 운동에 뛰어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건 근거 없이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가 주창하는 '일상적 파시즘'론은 모든 걸 '에티켓'의 문제로 환원시켜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건 서구적 시민사회의 개인주의 덕목까지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에티켓'이죠.  

또 저는 임 교수가 '드디어' {조선일보}보다는 {한겨레}가 더 나쁜 신문이라는 주장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 역시 근거 없이 하는 말이 아닙니다. 임교수는 {민족주의는 반역이다}의 서문에서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이 부족하다는 소리를 간혹 들을 때가 있다. 더러는 민족 허무주의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엔 '민족 허무주의'라기보다는 '진보 허무주의'입니다. '진보 허무주의자'에겐 {조선일보}와 {한겨레}가 똑같은 신문이되 {한겨레}의 문제가 눈에 더 크게 들어오는 법이랍니다.

또 저는 임교수가 '드디어' "극우파를 재평가하자"는 주장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 역시 근거 없이 하는 말이 아닙니다. 임교수는 '정치경제적 파시즘'이 '일상적 파시즘'을 확대재생산하는 건 보지 않고, 오직 '일상적 파시즘'과의 전쟁만을 선포하고 있거니와 그 전쟁을 위해선 극우파의 힘을 빌릴 수도 있다는 매우 위험한 생각을 갖고 있는 분입니다.


임지현의 위험한 '자기 중심주의'

여기서 잠시 제가 {조선일보}에 글을 기고하는 좌파, 진보적, 자유주의적 지식인에 대해 시비를 거는 행위에 대한 정당성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군요. 저의 시비거는 행위를 지지하는 사람들조차 그 깊은 의미를 아직 모르고 계신 분들이 많은 것 같은데 이번 기회에 확실히 알아 두시기 바랍니다.

'이론'이라니까 좀 거창한 것 같긴 합니다만, 저의 행위는 '빙산의 일각' 이론에 근거한 것입니다. 어느 특정 신문에 글을 기고했다고 비판을 하다니, 그게 말이 되느냐? 그렇게 쉽게 이야기하시면 안됩니다. 어느 지식인이 무슨 친인척 관계도 아닌데 설날에 전두환씨 집을 찾아가 세배를 드렸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걸 제가 비판합니다. 어느 특정인의 집에 찾아가 세배를 했다고 비판을 하다니, 그게 말이 되느냐?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 행위는 그 지식인에 대해 의외로 많은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세배나 칼럼 기고는 그 지식인이 어떤 사람인지 그 실체를 알 수 있는 아주 좋은 지표가 되는 거지요.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건 제가 {조선일보}에 글을 기고하는 좌파, 진보적, 자유주의적 지식인에 대해 비판을 할 때엔 그 지식인이라는 빙산의 전모를 파악한 다음 그 일각에 대해서만 비판을 한다는 점입니다. 저는 임교수에 대해 "임지현은 큰 일 낼 사람"이라느니 "더 큰 일 내기 전에 따끔하게 손을 봐야겠다"느니 하는 표현을 사용했고, 임교수는 그런 표현에 대해 분노하고 있습니다. 저의 거친 표현에 대한 비판은 제가 얼마든지 감수하겠습니다만, 전 임교수의 반론을 읽고서 저의 그런 판단이 옳았다는 걸 재확인했습니다. 저는 '큰 일 낼 사람'이라는 저의 확신을 다른 말로 어찌 표현 할 수 있는 것인지 그걸 알지 못합니다.

임교수는 정말 큰 일 낼 사람입니다. 이제 곧 하나씩 반론을 드리겠습니다만,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그의 생각이 '좌파'라고 하는 비교적 신뢰도 높은 브랜드를 달고 젊은 학생들 사이에 널리 퍼져나간다고 생각하면 끔찍합니다. 그건 막아야지요.  

임교수의 가장 위험한 점은 '자기 중심주의'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저에 대해 '나 중심주의'라는 말을 합니다. 제가 글에 '나'를 즐겨 쓰거니와 혼자 뛰는 걸 가리켜 하는 말일 겁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그건 개인의 행태와 관련된 것일 뿐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 저는 '나 중심주의'와는 거리가 멉니다. 진정한 '나 중심주의'는 탈이념적이고 탈정치적인 것이지요. 저는 임교수의 사회관이 바로 '나 중심주의' 또는 '자기 중심주의'의 전형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신세대들의 경우야 그게 미덕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회참여를 적극적으로 하겠다는 좌파 지식인이 그런 성향을 갖고 있다면 그건 대단히 위험합니다.

'자기 중심주의'는 비단 임교수만 갖고 있는 건 아닙니다. 이건 한국 사회의 진보 및 개혁 진영에 만연돼 있는 고질병입니다. 이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을 하되 꼭 내가 중심이 되어서 좋은 일을 해야겠다는 겁니다. 그런 사고방식은 필연적으로 매명주의(賣名主義)로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매명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증상은 언론에 대해 무한대의 관용과 애정을 베푸는 겁니다. 물론 극우 신문도 포함되지요. 왜냐구요? 언론은 매명의 유일한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분들의 순수성을 의심해선 안됩니다. 다 좋은 뜻으로 그런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그런 좋은 뜻의 총합은 나라 망치기 십상이라는 게 그간 제가 해온 주장의 핵심이지요.

임교수의 '자기 중심주의'는 중증(重症)입니다. 그는 {조선일보}에 대한 문제의식마저도 '패거리 의식'으로 매도하는 개성을 자신만만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는 곧 '드디어' 시민운동단체들의 '낙천.낙선운동'마저도 '패거리주의'로 매도할 지도 모르겠군요. 그의 그런 놀라운 개성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가 역설하는 '일상적 파시즘'론에 내재돼 있는 것입니다.

임교수의 '일상적 파시즘'론은 놀랍게도 박정희 부활을 꿈꾸는 일단의 극우 지식인들의 주장과 동전의 양면 관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임교수가 즐겨 쓰는 표현을 사용해 말하자면, 둘은 겉으로는 다른 것 같지만 똑같은 '코드'를 공유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둘 다 '문화결정론'에 푹 빠져 있습니다.

연고주의나 패거리주의는 제쳐 놓더라도 장유유서(長幼有序)와 효(孝)를 중시하는 한국 특유의 문화가 어디 하루 아침에 극복될 수 있겠습니까? 정치경제적 개혁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인내심을 갖고 대처해야지요. 그러나 극우 지식인들은 한국 문화의 그런 특성을 이야기하면서 '박정희는 옳았다'고 주장하지요. 임교수는 결코 그렇게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는 한국 문화의 그런 특성을 이야기하면서 '정치경제적 개혁은 하나마나다''좌파는 없다''다 똑같은 놈들이다'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이게 바로 큰 일 낼 주장이란 말입니다.

이 이야기를 계속해 볼까요? 그러기엔 지면의 한계가 있는데다 지금 이 지면은 {조선일보} 이야기를 하는 자리니까 좀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미 <한국의 극우와 일부 좌파는 어떻게 '내통'하나?: 임지현의 '일상적 파시즘'론은 '진보 허무주의'다>라는 긴 글을 써 놓았습니다. 그 원고는 월간 {인물과 사상} 5월호나 단행본 {인물과 사상} 제14권에 싣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절대 근거없이 함부로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드디어' 건은 그리 이해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조선일보'의 패권을 전제로 한 비판

이제부터 임지현 교수께서 하신 말씀 순서대로 하나씩 차분하게 재반론을 드릴까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임 교수가 심각하게 문제삼은 건 저의 '의도적 생략'입니다. 즉, 임 교수는 조선일보사에서의 강연에서 이승복 사건과 관련해 조선일보를 비판했으며 그것이 제가 인용했던 {조선일보사보}에도 실렸는데 왜 그걸 빠트렸느냐는 겁니다. 임 교수는 그 이유가 간단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임지현이 극우 헤게모니라는 현실을 외면하고 강화했다는 강교수의 논지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내용들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게 아닙니다. 지금 임 교수는 한가지 중요한 점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임 교수가 {조선일보} 지면에 무슨 내용의 글을 쓰고 조선일보 사람들을 상대로 무슨 말을 했느냐 하는 건 2차적인 것입니다. 1차적인 건 명색이 '좌파'라는 지식인이 조선일보를 상종할 만한 가치가 있는 집단으로 보았다는 점입니다.

조선일보 사람들이 임 교수의 비판에 공감해 "이승복 사건의 경우엔 우리가 너무했구나. 맞아. 앞으로 우리 이건 좀 조심하자"는 생각을 했다고 합시다. 그건 조선일보의 극우 헤게모니를 정교화하고 세련되게 만들어주는 결과밖에 가져오질 못합니다. 그건 마치 유신 또는 5공에 참여한 지식인이 그 안에서 아무리 비판을 해대도 그건 유신과 5공을 더 든든하게 만들어주는 효과밖에 가져오지 못하는 이치와 똑같은 것입니다. 비판을 하건 무엇을 하건 참여 자체가 잘못됐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임교수의 비판은 조선일보의 패권을 전제로 한 비판이라는 겁니다.

사실 문제의 핵심은 임 교수가 조선일보를 유신이나 5공에 비유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점이겠죠. 그렇습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임 교수는 "강교수의 단세포적 사고방식에서는 조선일보에 글을 썼다는 것이 곧 극우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것이라는 논리적 비약이 손쉽게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셨겠지요? 그쵸?
그러나 과연 제 생각이 '단세포적 사고방식'으로 매도되어도 되는 걸까요?

임 교수께선 {신문과 방송} 99년 12월호에 게재된, 임 교수가 참여한 언론 문제에 대한 좌담 내용을 자신의 논지를 뒷받침하는 용도로 거론하고 계십니다만, 저는 그걸 오히려 임교수의 위와 같은 주장에 반하는 증거로 받아 들였습니다. 제가 가장 감명깊게 읽은 부분은 임교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인구나 전반적인 크기로 볼 때 우리나라 일간지들이 유럽의 신문들에 비해 발행부수가 엄청나게 많은데, 그런 상황은 역으로 뒤집어보면 일간지들이 우리 사회에 가지는 영향력이 유럽 사회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중략) 결과적으로 언론이 우리 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공룡이 돼버렸습니다. 금력이나 사주의 압력을 현재의 언론사 구조내에서 스스로 개혁할 수 있을까요. 저는 상당히 비관적이거든요. 오히려 해결책은 언론 자체에서 구하기보다는 시민사회의 권력에 대한 견제기능 나아가서는 언론에 대한 견제기능, 이러한 것들이 강화되는 방법밖에 없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자율개혁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은 판명이 났고 그래서 언론을 규제할 수 있는 감시 기구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시민사회 힘으로 언론을 한번 개혁(해)보자는 그런 생각도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실천' 은 의외로 단순하다

정말 가슴에 와 닿는 이야기입니다. 임교수는 그밖에도 "기자 사회가 너무 관료화되어 있기 때문에 사주에게 종속되는 것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언론의 위상을 다시 자리매김하는 그런 작업이 학계에서 이뤄져야 되는 것은 아닌지요""언론의 본격적인 개혁에 대한 근본적인 결을 바꾸는 방식의 다양한 사고와 개혁안 같은 것들이 여기저기에서부터 나와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등과 같은 아름다운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이건 무얼 말합니까? 임 교수가 한국언론의 문제를 전혀 모르고 있는 건 아니라는 걸 말해주는 거지요. 임교수께서 잘 지적해주셨다시피, 금력이나 사주의 압력을 현재의 언론사 구조내에서 스스로 개혁하는 건 거의 불가능합니다. 임교수께서 잘 지적해주셨다시피, 기자 사회가 사주에게 종속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조선일보에 아무리 좋은 글을 쓰고 조선일보 사람들에게 아무리 좋은 비판을 해줘도 그게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조선일보 장사에 '포섭'되는 결과만을 낳을 뿐이라는 거죠.

임교수는 "조선일보만 문제냐?"라는 말씀을 하실 수 있겠습니다. 적어도 '좌파'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조선일보만 문제다"라는 게 제 답입니다. 저는 그간 이 이야기를 몇 년째 몇권의 책 분량으로 이야기해 왔습니다. 그러나 임교수같은 분은 "제목만 일별해도 대개 그 내용을 짐작케 해주는 강교수가 지닌 단순논리의 미덕"에 대해 저항감을 느껴 제 글을 읽지 않습니다.

사실 이거 의외로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대단히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저는 그게 한국 '강단 좌파'들의 가장 큰 고질병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어려운 '코드' 찾는 작업도 소중하지만,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 가운데엔 의외로 단순한 게 많으며 오직 실천만이 문제일 뿐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그들은 왜 인정하지 않는 걸까요? 공부하는 재미 때문일까요? 아니면 학계와 언론으로부터 인정받는 재미때문일까요? 제가 그래서 '지적 유희'라는 말을 쓰는 게 아닙니까.

임교수와 저의 생각은 여전히 다른 길을 달리고 있겠습니다만, 임교수가 문제삼으신 '의도적 생략' 문제는 이 정도면 납득이 되었으리라 믿고 싶습니다. 제가 이승복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생략한 건 분명하지만, 임교수가 생각하는 그런 이유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거 인용하면서 임 교수를 더 조롱할 수도 있었겠지만, <임지현: 당신의 {조선일보}관이 '일상적 파시즘'이다>는 글은 70매(200자 원고) 분량으로서 결코 짧은 글은 아니었습니다. 제한된 지면에 임교수가 조선일보사에 가서 한 말 가운데 가장 문제되는 것 두가지만 지적한 걸로 충분했다는 뜻입니다.

아니 지면이 남아 돌아도 그 이야긴 할 필요도 없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임교수는 {조선일보} 사람들을 상대로 {조선일보}나 {한겨레}나 똑같이 보수적이라며 양비론을 편데다 {조선일보}가 최장집 사건을 "보다 열려있고 리버럴한 입장을 가지고 다루었다면 좋았을 것이다"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말씀을 하신 분입니다. 그 어리석음에 대해 비판을 하는데 그래도 임교수가 이승복 사건과 관련해 {조선일보}를 비판했으니 정상을 참작해서 봐줘야 한다는 겁니까?

혹 정반대 생각은 안해보셨습니까? 이승복 이야기 건은 "{조선일보}를 그렇게 잘 아는 사람이 {조선일보} 찾아가서 그런 짓을 하느냐"고 저로부터 더 욕먹어 마땅한 건수였습니다. 그렇게 욕하지 않았다고 제가 엄청난 왜곡을 저지른 것처럼 제 멱살까지 잡는 호들갑을 떠는 게 과연 온당하냐 이 말입니다. 그것 참 별 일 다 보겠습니다.


임지현의 반론, 핵심은 무엇인가

임지현 교수께서 {조선일보}에 기고한 <탈민족 민족주의>라는 글과 관련하여 하신 말씀은 임교수께서 지나친 피해의식을 갖고 계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제가 "시론의 그 주장이 조선일보의 극우적 국가주의에 동조한다는 것" 쪽으로 생각하는 듯 하며, "만약 그렇다면, 남의 글을 읽는데 좀더 고민하고, 독해력과 이해력을 다듬을 필요가 있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가요? 그러니까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해주신 충고는 저에게 해당되는 게 아니겠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임 교수의 글이 "{조선일보}의 극우 이데올로기와 아무런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한 건 그 정도는 얼마든지 {조선일보}가 수용할 수 있다는 걸 말씀드린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설마 아니 임교수께서는 {조선일보}가 어떤 주장이든 다 {조선일보}에 실어줄 것이라고 믿을 만큼 순진하신 건 아니겠지요? 체 게바라에 대해 쓰신 글도 그렇습니다. 임교수는 "게바라를 팔아먹은 건 나다"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자신의 주체성을 강조하시지만, 그건 마치 유신에 참여한 어느 지식인이 자신의 참여가 스스로 내린 판단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좀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입니다. 저는 임교수의 다음과 같은 말씀에 주목합니다. 사실 바로 이 부분이 임교수의 반론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게바라를 통해 보수적이기 십상인 조선일보 독자들의 냉전의식에 조그만 틈이라도 벌릴 수 있다면, 그것은 내 의무인 것이다. 시론의 경우에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강교수는 조선일보의 의도 파악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임지현도 생각을 하고 나름대로 의도를 갖고 글을 쓴다는 생각은 미처 못한 모양이다. (중략) 내가 그 글을 통해 조선일보 독자의 일부를 전유할 수 있다면, 그 손익계산서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나는 공인으로서의 내 글쓰기에 대한 사회적 책임감은 느끼지만, 그 때문에 조선일보의 독자가 늘고 또 그 때문에 조선일보가 번성할 만큼 내 글이 대단하다고 믿는 과대망상증 환자는 아니다.

단 그 글쓰기를 통해 조선일보 독자의 일부라도 전유할 수 있다면, 끼리끼리 밖에서 비판하고 돌려보며 자족하는 것보다는 그것이야말로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적 책무를 짊어지는 것이라 생각할 뿐이다. 내가 강교수의 그 패거리 의식에 거리를 두는 것도 그 때문이다. 조선일보에 글을 썼는가의 여부가 강교수의 판단기준이라면, 어떤 과정을 통해 어떤 글을 썼는가가 내 판단기준이다.

이건 임교수가 하신 말씀이지만, 임교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겁니다. 실제로 그간 {조선일보}에 글을 쓴 많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이와 유사한 논리를 전개했습니다. 저는 그게 아니라고 여러 차례 말씀드렸습니다만, 임교수는 아직 그걸 전혀 모르시는 것 같으니 어쩔 수 없이 다시 반복해 말씀드려야겠군요. 아니 이미 앞서 다 말씀드렸지요. 또 한번 정리해 말씀드리겠다는 겁니다.


왜 신문에만 특권을 부여하는가?

제가 가장 궁금하게 생각하는 건 왜 임교수를 포함한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신문에 대해 그런 터무니없는 특권을 부여하느냐 하는 겁니다. 정권에 문제가 많으면 선거로 갈아 치웁니다. 그런 식으로 국회의원도 갈아 치웁니다. 아니 법을 어겨 감옥에 갈 각오까지 하면서 국회의원을 갈아 치우겠다는 사람들도 아주 많지요. 기업이 악덕기업이라면 불매운동을 통해 본때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신문만은 예외입니다. 가치 판단의 성역으로 모십니다. 신문을 상수도나 하수도로 보는 걸까요? 신문이란 대중을 만날 수 있는 통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히틀러가 한국에서 부활해 신문을 내더라도 그 신문에 글을 써야지요. 아니 파시스트 독자들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서라도 그 신문에 더 열심히 글을 써야지요.

도대체 임교수를 포함한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왜 신문에 대해 그런 어처구니없는 특권을 부여하는 걸까요? 잘 생각해 보십시오. 금방 답이 나옵니다. 지식인이란 게 별 게 아니고 '글 장사꾼'입니다. 글을 누구에게 팝니까? 신문과 잡지지요. 이왕이면 힘센 데에 팔아야지요. 극우 신문? 그건 중요치 않습니다. 그게 1등이라는 게 중요합니다. 그 유혹 앞에서 글 장사꾼들은 맥없이 무너지는 겁니다. 그런 행위에 대한 명분과 이론 만드는 거야 일도 아니지요.

지금 제가 임교수를 모독하고 있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걸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임교수가 "히트를 쳤다"는 제 표현을 문제삼은 것에 대해 여기서 잠시 답을 드리고 가야겠습니다. {관악문화}라고 하는 아주 좋은 무크지가 있습니다. 서울대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간행물이지요. 저는 1999년호에 실린, 최현씨가 쓴 <'광란'의 충격, 전환의 계기가 될 것인가: 99년 서울대 총학생회 선거를 바라보며>라는 글을 읽다가 93쪽에 있는 각주 6번에 빨간 줄을 그었습니다. 제가 볼 때엔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더라구요. 운동권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을 갖고 있는 세력들이 운동권에 대한 적의를 표현하는 네가지 이유입니다.

"첫째, 어려운 말로 자기들만 우월하다고 한다. 둘째, 대중문화를 너무 무시한다. 셋째, 자기 앞가림 못하면서 사회적 연대, 투쟁만을 애기한다. 넷째, 시대에 뒤떨어졌다."

저는 운동권에 대해 전혀 적대적이지 않지만, 이 네가지 이유 가운데 첫째와 둘째 이유는 운동권이 귀담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둘 가운데 제가 더욱 공감하는 건 두 번 째 이유입니다. 임교수는 따님과 함께 윤도현 밴드의 공연장도 찾는 성의를 보이신 분이니 대중문화를 너무 무시하지는 않는 것 같아 보입니다만, '체 게바라론'에서 보여주신 바와 같이 시장(市場)에 대한 적대감은 대단한 것 같습니다. 제가 강단 좌파들로부터 많은 욕을 먹는 이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게 바로 그들의 시장에 대한 적대감 때문입니다. 저는 이른바 '개혁 상업주의'를 노골적으로 표방한 놈이니 그들이 보기에 얼마나 상스럽고 천박해 보이겠습니까?

그런데 저는 운동권이건 임교수건 그 적대감을 재고(再考)해야 한다는 조언을 감히 드리고 싶습니다. 순수, 순결, 청결에 너무 집착하지 말자는 겁니다. 파시스트들이 가장 애호하는 단어가 순수, 순결, 청결 등의 단어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고 싶군요. 아니 집착하는 건 좋은데 확실하게 언행일치 할 자신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건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필연적으로 위선과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나저나 시장에 대한 적대감의 관점에서 보자면, {조선일보}에 대해선 저와 임교수의 입장이 뒤바뀐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어찌됐건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건 제가 "히트를 쳤다"는 표현을 쓴 건 임교수께서 의심하는 것처럼 그렇게 나쁜 뜻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임교수가 비아냥 댄 부분을 인용해볼까요?

"'히트를 쳤다'는 표현을 연이어 재차 강조함으로써 강교수는 자신의 의식 깊숙이 내면화된 상업주의를 은연중에 드러냈는데, 사실 조선일보의 상업주의는 그의 골목 상업주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하다. 대규모 할인매장에 대해 구멍가게 주인이 두려움을 느끼듯이, 조선일보의 상업주의에 그가 느끼는 두려움은 충분히 이해할 만 하다. 그러나 나는 히트를 치기 위해 책을 쓸 만큼 상업적인 감각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 한 마디로 강교수 같은 '인물'이 못된다."

정말 심하시군요. '히트'라는 말 한마디에 그렇게까지 파르르 떨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저는 {조선일보}의 행태와 연결시키려는 뜻에서 사용한 표현일 뿐인데 말입니다. 혹 {민족주의는 반역이다}는 선정적인 제목 때문에 괜히 도둑이 제 발 저려서 과민 반응하신 건 아닙니까? 하긴 어느 서평자는 {한국 인문학의 서양 콤플렉스}라는 책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임교수의 책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한마디 했더군요.

"먼저 이 책의 제목을 보고 책을 샀다가는 배신감을 느끼기 쉽다는 것을 이야기해야겠다. ... 인문학의 '서양 콤플렉스'란 제목은 이 책에 실린 글 중 '가장 선정적인' 주제를 골라 붙인 거다. 지난번 임지현 교수의 '민족주의는 반역이다'에 이어, 인문사회과학 서적마저 이래야 하는가라는 아쉬움이, 또다시 드는 장면이다."

그러나 안심하십시오. 저는 결코 아쉬워 하지 않습니다. 책 제목을 그렇게 야하게 붙이지 않았더라면 그 책이 어떻게 '히트'를 칠 수 있었겠습니까? 비꼬는 게 아닙니다. 저는 그런 종류의 선정주의는 당당하게 구사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저는 임교수의 그런 시도에 절대적인 지지를 보냅니다.

제가 지금 이 이야기를 끼워넣은 건 임교수가 앞서 제가 쓴 "글 장사꾼"이라는 표현에 대해 보이실 격한 반응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저나 임교수나 우리 모두 백남준씨처럼 "예술은 순 사기야. 나 고등 사기꾼이라구" 라는 식으로 말할 수 있는 여유를 좀 가지면 안될까요? 지나친 경건주의도 임교수가 비판해마지 않는 '일상적 파시즘'의 산물은 아닐는지요.

좌파들은 상업성을 무슨 악마의 단어나 되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어대지만 그건 대중성과 동전의 양면 관계를 이루는 겁니다. 사실 제가 볼 때엔 '기생(寄生) 상업주의'가 더 나쁜 겁니다. 내 손엔 절대 때 안 묻히고 거대 극우 신문의 상업주의에 편승해 아름다운 이야기를 널리 전파시키자는 게 '기생 상업주의'지요. {조선일보}의 상업주의에 대해 제가 두려움을 느낀다구요? 그 이유에 대해선 견해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만, 일단 그 진단을 그대로 수용하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조선일보}의 상업주의에 대해 경외감을 느끼거나 그것에 굴복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임교수는 자꾸 "게바라를 팔아먹은 건 나다"라느니 "조선일보에 글을 썼는가의 여부가 강교수의 판단기준이라면, 어떤 과정을 통해 어떤 글을 썼는가가 내 판단기준이다"라면서 '나'를 강조해대시는데, 그거 듣기에 민망합니다. {조선일보}에 뭐든지 다 팔아먹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건 TV 방송사들이 제공하는 제한된 메뉴 가운데 골라먹을 수밖에 없는 시청자가 자신이 방송의 주체임을 역설하는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허풍에 지나지 않습니다. 임교수께서 자신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메뉴란 게 이미 다 {조선일보}의 밥상에 차려져 있는 거란 걸 아셔야 합니다. 노회하고 영악한 {조선일보}라는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임교수의 모습은 보기에 안타깝습니다.

또한 우리는 '나'의 주체성 회복에 있어서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사회적 차원의 오만은 개인적 차원의 오만보다 훨씬 더 위험한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 차원에서 때로 오만할 망정 저의 오만함은 사회를 바라보는 저의 시각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임교수의 경우엔 나의 주체성만 보장되는 한 사회적으로 무슨 일인들 다 할 수 있다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언론에 대한 지식인의 편의주의적 사고

어, 이야기가 자꾸 이상한 쪽으로 빠지네. 죄송합니다. 제가 인격 수양이 덜 된 탓이겠지요. 다시 원위치하겠습니다. 제가 드리고자 했던 말씀은 저나 임교수나 모든 지식인들은 '글 장사꾼'으로서 언론에 대해 자기 편의주의적인 사고를 할 위험이 있다는 거였습니다. 임교수께서는 "나는 공인으로서의 내 글쓰기에 대한 사회적 책임감은 느끼지만, 그 때문에 조선일보의 독자가 늘고 또 그 때문에 조선일보가 번성할 만큼 내 글이 대단하다고 믿는 과대망상증 환자는 아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이것 역시 지극히 자기 편의주의적인 말씀이십니다. 제가 보기엔 겸손이 아니라 대단히 무책임한 말씀이십니다. 이 세상에 그렇게 대단한 힘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나 하나쯤이야" 하는 생각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책임한가 하는 걸 잘 아실 분이 어쩌자고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지 당혹스럽습니다. 더욱 당혹스러운 건 다음과 같이 이어지는 임교수의 말씀이었습니다.

자신의 판단 기준과 다르다고 해서 사실을 왜곡하고 추측하며 논리의 비약과 강변을 통해 파시즘으로 몰아 붙이는 지적 폭력은, 강교수가 조선일보를 너무 꼼꼼히 읽다보니 그 논리에 동화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강교수가 조선일보라는 신문 자체를 이데올로기화함으로써 저지르는 오류이기도 하다. 그 결과 강교수는 극우 헤게모니와 그 상징으로서의 조선일보라는 본말을 전도시킨다. 조선일보에 실린 글은 모두 극우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것이고, 인물과 사상이나 진보적 신문에 실린 글은 모두 극우 헤게모니를 파괴하는 것이라는 원시적인 이분법이 가능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것은 다시 비난받아야 할 것은 극우파와 그 일당들뿐이고, 우리 선량한 시민들과 진보인사들은 모두 피해자라는 자기기만적 진단을 낳는다. 그것은 파시즘의 진정한 청산을 가로막는 국민적 변명의 기제이며, 진보가 보수화되는 기점이 된다. 자기 자신을 절대적 정의라고 착각하는 좌파들이 흔히 갖기 쉬운 도덕적 순수주의의 폐단이기도 하다. 파시스트들이 가장 애호하는 단어가 순수, 순결, 청결 등의 단어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고 싶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내가 나쁜 놈"이라는 생각을 여러 번 했습니다. 우리 시대의 '탁월한 지성'으로 제 뇌리에 기억돼 마땅할 임교수로 하여금 이런 준비 안된, 성급한 글까지 쓰게 만든 게 제 탓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저를 너무 모르시는군요. 그간 제 글을 구경 한번도 안해보셨죠? 저는 좌파가 아니랍니다. 그리고 "우리 선량한 시민들과 진보인사들은 모두 피해자라는 자기기만적 진단"에 대해 저만큼 강한 비판을 꾸준히 해온 사람이 저 말고 누가 또 있을까요? 임교수께서는 번지수를 전혀 잘못 찾으셨습니다.

게다가 임교수의 위 주장은 글자 몇 개만 바꾸면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운동'에 흠집을 내려고 애쓰는 일부 정치인들과 일부 신문들의 성명서로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논리는 그럴 듯 하지만 상황 인식 수준이 빈약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조선일보}는 극우 헤게모니의 상징 이상이라는 것도 말씀드리고 싶군요. "일간지들이 우리 사회에 가지는 영향력이 유럽 사회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라느니 "언론이 우리 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공룡이 돼버렸습니다"라고 아름다운 말씀을 하신 분이 그렇게 미친 척 하시면 어떡합니까? 장소 따라 말을 달리 하는 건 정치인의 덕목일 수는 있어도 지식인의 덕목은 아닐 겁니다.

     한국과 유럽의 상황 비교

이번엔 한국과 유럽을 비교하신 것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까요? 저는 이 부분에서도 재미있는 현상을 한가지 발견했습니다. 한가지 똑같은 사실을 놓고서도 임교수와 제가 해석하는 게 전혀 다르다는 겁니다. 이미 앞서도 나타난 문제이지요. 임교수의 말씀을 인용하겠습니다.

자신의 판단 기준을 강요하기 위해 강교수는 또 유럽의 예까지 그럴 듯하게 들이민다. 내 친구들은 유럽의 좌파들이 극우 신문에 글을 기고하느냐는 것이다. 물론 안 한다. 그는 다시 묻는다. 그런데 너는 왜 하는가? 이것이 강교수가 가하는 비판의 핵심이다. 조선일보에 실린 내 글에 대한 그의 비판적 분석(?)이 억지로만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실은 수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비판의 핵심은 유럽의 좌파들은 안 그런데, 한국의 좌파인 너는 왜 그런가이다. 그럴 듯한 비교이다. 그런데 강교수는 자신의 행태 비교가 사회적 기반에 대한 비교를 무시하고 있다는 점을 놓치고 있다.

유럽을 기준으로 삼는 단순한 행태 비교를 강교수의 오리엔탈리즘이라고 쉽게 단정하지는 않겠다. 지적하고 싶은 것은, 시민사회의 기반이 단단한 유럽에서는 어떤 극우 신문도 매우 제한된 영향력만을 가진다는 점이다. 오히려 좌파 신문이 지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유럽의 좌파들은 고민할 필요가 없다. (중략) 그런데 만약 유럽에서 좌파신문이 존재하지 않으며 어떤 극우신문이 조선일보와 같은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고, 또 좌파들에게 면을 제공하지 않다면 유럽의 좌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반응은 다양할 것이다. 상황이 꼭 같지는 않지만, 20세기 초 부르주아 국가의 의회 선거에 참여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전개된 좌파들의 논쟁이 추측의 실마리를 제공해 줄 수 있다. 독일의 사회민주당은 참여파와 거부파로 나뉘었지만, 결국 선거에 참여했다. 물론 참여파의 논지도 다양했다.

특히 돋보이는 것은, 승리를 확신할 수는 없지만 부르주아들이 사회주의 선전을 할 수 있는 연단을 주겠다는 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논리였다. 선거참여가 부르주아의 놀음에 끼어서 한몫 챙기겠다는 것이라며, 알량한 도덕적 순수주의를 내세워 끝까지 선거를 거부하는 강교수 같은 사람들에게 당시 룩셈부르크가 한 말이 있다: 세상에 원칙에 매달리는 것보다 쉬운 일이 어디 있는가?

임교수님, 너무 하십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웬 말입니까? 그게 아닙니다. 제가 다시 차분하게 설명드리겠습니다. "너의 유럽 좌파 친구들은 안 하는데, 너는 왜 하는가?"는 제가 임교수를 조롱한 것이지 제 비판의 핵심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조롱도 탄탄한 논리에 근거한 것이라는 말씀을 드려야겠군요. 저는 오히려 한국이 유럽의 상황과 비슷하다면, 임교수가 그 어떤 극우신문에 글을 기고해도 이의를 제기할 생각이 없습니다. 아니 저부터 아예 극우신문을 건드리지도 않을 겁니다. 그러나 그 경우엔 제가 등을 떠 밀어도 임교수께서 그 극우신문에 글을 쓰지 않으실 겁니다. 왜냐구요? 영향력이 약해 매명(賣名)에 도움이 안되기 떄문이지요.

제 문제의식은 한국과 유럽이 아무리 다를 망정, 어떻게 {조선일보}라는 극우신문이 1등 신문이 되어 한국 사회의 여론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게 한국의 수준이고 현실이다, 그렇게 말해버리면 간단하긴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 안되지요. 정치는 안 그런가요? 정치가 아무리 엉망일 망정 그게 한국의 수준이고 현실인데 시민운동은 무엇때문에 한답니까? 제 주장은, {조선일보}라는 극우신문이 1등 신문 노릇을 할 수 있는 데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건 한국의 거의 모든 지식인과 시민단체들이 신문을 몰가치적인 언론플레이의 도구로만 이용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리고 임교수께서 룩셈부르크까지 동원하시면서 전개한 논리는 제가 {조선일보} 뿐만 아니라 {동아일보}와 {중앙일보}를 포함한 모든 보수 신문에도 글을 쓰면 안된다고 주장했을 때에나 어울리는 말입니다. {조선일보} 아니면 도무지 대중을 만날 길이 없습니까? 그리고 언론개혁도 하자면서요? 앞서 제가 인용한, {신문과 방송} 좌담에서 하신 말씀은 괜한 말씀이었습니까? 왜 언행일치를 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조선일보}에게 극우에 어울리는 제몫만 찾아주면 그로 인한 한국 언론의 변화는 엄청나게 큽니다. 무엇보다도 {조선일보}처럼 극우적으로 놀면 안되겠구나 하는 교훈을 가끔 극우적으로 노는 {동아일보}와 {중앙일보}에게 확실하게 줄 수 있다는 거지요. 저는 이 건에 대해선 임교수께서 저는 괜찮으니 룩셈부르크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혀 엉뚱한 데에 이름을 팔아 죄송하다구요.

오리엔탈리즘이요? 쉽게 단정하지는 않겠다니 다행이긴 합니다만, 그 단어의 뜻을 제대로 알고 쓰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임교수의 '일상적 파시즘'론이야말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생각은 한번도 안해보셨습니까? 모든 걸 서구적 시민사회의 개인주의 덕목이라는 잣대로 재단하는 임교수의 '일상적 파시즘'론에 따르자면, 이슬람 문명권은 천하의 미개하고 야만적인 집단이 되고 말지요. 겸허한 마음을 갖고 에드워드 사이드의 책들을 꼼꼼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조선일보}와 {한겨레}의 비교

제 주장이 '억지'로만 느껴지신다고 그러셨는데, 저는 임교수가 {한겨레}와 관련하여 하신 말씀이야말로 억지 가운데 억지라고 생각합니다. 도대체 다음과 같은 말씀을 어찌 이해해야 할까요?

그렇다면 한국에는 진보적인 좌파 신문이 있는가? 한겨레신문이 현실 정치의 문제에서 진일보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틀림없지만, 나는 그것을 좌파 신문이라 평가하지는 않는다. 간헐적으로 보여주는 진보적 성향에도 불구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우파적 민족주의 경향도 심심치않게 찾아 볼 수 있다. 김지하의 상고사 찾기운동을 지지하는 논설위원의 주장이 논단에 버젓이 게재되는가 하면, 옷 로비 사건 보도태도 등에서는 사실상 극히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나는 좌파라면서, 그런 한겨레신문에도 글을 썼다. 강교수는 왜 그 점은 비판하지 않는가? 사실 강교수의 논리대로라면, 조선일보에 실린 글이 모두 극우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것인 만큼 한겨레신문에 실린 글은 모두 진보 성향을 강화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조잡한 '지면 결정론'은 언론학자로서의 강교수의 인식지평을 좁힐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건강한 균형감각을 훼손시킬 수밖에 없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십니다. 그러나 비아냥은 삼가고 요점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조선일보}와 {한겨레}를 그렇게 단순 비교하시면 안됩니다. 알고서 하시는 말씀인지 모르고서 하시는 말씀인지 의아하긴 합니다만, 그러시면 아니 되는 이유를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패권을 쥔 집단과 패권에 도전하는 집단 사이엔 큰 힘의 격차와 속성의 차이가 있다는 걸 감안하셔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죠. 보수 집권정당이 운동권 출신을 영입하면 그건 수혈이 됩니다만, 어떤 운동단체가 운동노선에 반하는 어떤 제도권 유력 인물을 영입하였을 경우 그건 수혈이 아니라 타락이 되지요.

{조선일보} 독자와 {한겨레} 독자들은 각기 그 신문을 구독하는 이유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큰 흐름만을 말씀드린다면, {조선일보} 독자들은 그 신문이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이라는 이유로 그 신문을 보지만 {한겨레} 독자들은 특정한 가치지향성 때문에 그 신문을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조선일보}의 경우엔 자기들과 색깔이 다른 사람을 지면에 팔 때엔 '포용'이 되지만 {한겨레}의 경우엔 그렇게 하면 '변절'이 되는 거지요.

임교수같은 분이야 {한겨레}의 색깔과는 다르다지만 그게 무슨 큰 문제가 되겠습니까? 예컨대, 정형근의 극우적인 주장을 {한겨레}가 무슨 논쟁 형식이 아닌 '시론' 필자로 모시면 {한겨레} 독자들이 절대 가만 있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조선일보}의 경우엔 임교수와 같은 좌파에게 지면을 주면 {조선일보} 독자들은 그럴 겁니다. "누가 이 신문을 극우라고 그래?" 지금 제가 괜한 말 하는 것 같습니까? {조선일보} 2000년 2월 21일자 1면에 실린 사고(社告)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더군요.

"조선일보 독자들은 정치적으로 치우치지 않았으며, 경제적으로 정당하고, 도덕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늘 젊은 호흡과 정신을 간직하고 계신 분들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지금 {조선일보}가 개그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실제로 {조선일보} 독자들의 대다수가 그런 생각을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게 어찌하여 가능합니까? 바로 임교수와 같은 좌파들 덕분입니다. 자신의 매명(賣名)에 환장했거나 언론에 대해 백치(白痴)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한국의 진보적, 자유주의적 지식인들 덕분입니다.

실천은 의외로 단순하다

임지현교수께서 구 소련의 보건장관 세마쉬코의 말씀을 해주신 건 '동구권 전문가'로서의 임교수의 해박한 지식을 슬쩍 과시하신 걸로 이해하겠습니다. 저에 대해 모욕적이긴 하지만, 저는 그 정도는 얼마든지 웃으면서 수용할 수 있습니다. 제가 말을 워낙 거칠게 하니까 자업자득으로 받아 들여야지요.

말을 함부로 한 것에 대해선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참 버릇이 무섭네요. 안 그럴려고 애를 쓰는데도 그게 잘 안 고쳐집니다. '분노에 의한 글쓰기'의 가장 큰 문제가 바로 그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의 '터무니없는 오만'을 지적하신 것도 흔쾌히 수긍하겠습니다. 제가 옳건 그르건, 이런 일이라는 게 '오만' 없인 할 수 없는 일이거든요. 그러나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갖고 있는 유형의 오만보다는 임교수가 갖고 계신 유형의 오만이 훨신 더 위험한 것이라는 걸 잊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이유에 대해선 견해 차가 있겠습니다만, 저를 두더지에 비유하신 것에도 공감합니다. 그러나 "그러면 임교수는 포클레인인가?" 하는 생각에 자꾸 웃음이 나오는군요. 하긴 임교수는 2백만부 짜리 {조선일보}를 이용하실 수 있는 분이고 저는 1만부 짜리 그것도 한달에 한번 나오는 {인물과 사상}에만 대고 떠들어대니 대략 6천배라고 힘의 차이를 생각하면 그 비유가 그럴 듯 하긴 합니다. 웃자고 하는 소리니 그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고 발끈하진 마십시오. 하하하.

저의 두더지같은 모습에서 비애를 느끼셨다는데, 사실 저도 제 모습에서 비애를 느낍니다. 좌파도 아닌데다 평소 이기주의자를 자처하는 제가 왜 이런 짓을 해야하는지 말입니다. 저도 적당한 수준에서 언론비판하면서 매명(賣名)을 했더라면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 받으면서 재미를 볼 수 있었을텐데 말입니다. 왜 멀쩡한 사람에게 시비를 걸어 '두더지' 소리까지 들어야 하는 걸까요?

임지현 교수께서야 저의 "의식 깊숙이 내면화된 상업주의"를 지적하셨으니, 돈 벌려고 그런 것 아니냐는 의심을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사실 그게 바로 제가 비애를 느끼는 가장 큰 이유랍니다. 이 월간 {인물과 사상} 자세히 한번 뜯어 보십시오. 광고 없이 돈버는 잡지 있다는 말씀 들어보셨습니까? 이 잡지는 아예 광고 영업도 하지 않는 잡지입니다. 또 독선(獨善)이라고 꾸짖을까봐 염려됩니다만, 감히 대한민국에서 가장 윤리적이고 깨끗한 잡지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가격도 한번 보세요. 남을 게 없답니다.

언론플레이도 아예 하질 않습니다. 신문들이 인터뷰를 하자고 해도 제가 도망다닙니다. 제가 심혈을 기울여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언론과 지식인의 관계'이기 때문에 저는 그런 비판의 정당성을 위해서라도 어떤 좋은 뜻이건 저 자신이 언론에 의해 부각되는 건 피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홍보 기회를 스스로 마다하다니 이 세상에 무슨 이 따위 상업주의가 있을까요?

지금 적자가 계속 누적돼 가고 있는데, 나중에 저 파산하기라도 하면 그때 가서 제 상업주의 욕했던 사람들이 동정이나 해 줄까요?  "개자식 한탕 해처먹으려다가 잘됐네. 쌤통"이라고 그러진 않을까요? 심지어 저를 잘 알 만한 주변 동료까지 농담이 아니라 진담으로 제 앞에서 제가 무슨 큰 돈이나 버는 것처럼 말하길래 제가 그 자리에서 화를 벌컥 낸 적도 있었답니다. 비애지요. 처절한 비애지요. 그래서 한국 지식인은 너나 할 것 없이 자기들의 언로(言路)를 스스로 만들어 볼 생각은 않고 거대 극우신문에까지 기생(寄生)하려 드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신파조 신세 타령 그만 하라구요? 그래야지요. 임교수님이 제게 주신 고언(苦言)은 다 동의는 못하더라도 제가 늘 유념하겠습니다. <한국의 극우와 일부 좌파는 어떻게 '내통'하나?: 임지현의 '일상적 파시즘'론은 '진보 허무주의'다>라는 글에서 다시 만나뵙겠습니다. 끝으로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께 앞서 드린 말씀을 다시 반복해 드리고 싶군요. 제발 단순한 걸 너무 경멸하지 말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실천은 의외로 단순한 게 아닐까요?


퍼 가실 분은 참고하세요. 이 글의 주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neo.urimodu.com/bbs/zboard.php?id=choisun_insa&page=4&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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