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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죄선일보 > 월간 인물과사상이 파헤친 죄선일보 - 1998년4월호~2000년9월호


이 름 이현우
제 목 도올 김용옥의 친일파관 비판 (2)
도올 김용옥의 친일파관 비판 (2)
-윤수정 씨의 글을 읽고

이현우 │충북 충주시 연수동│

경어를 써서 한결 나긋한 느낌이 드는 반론인지라 나 역시 그런 말로 글을 써야겠지만 어미가 긴 존대를 쓰면 정작 내 할 말이 줄어드는 까닭에 그러지 못함을 먼저 이해하시기 바란다.

반론 속의 윤수정 씨는 사물의 단순한 흑백논리를 거부하는 진지한 성격의 소유자로 느껴진다. 실제 대부분의 인간사는 참이냐 거짓이냐 하는 진위만으로 설명하기에는 꽤 복잡한 양상을 띠기 마련이다. 그래서 독자에 따라 윤수정 씨의 글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게 읽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글에 약간의 불편함을 느꼈는데 그건 아마도 윤수정 씨의 친일파에 대한 확고하지 못한, 미안한 말이지만 조금 오락가락하는 관념과 태도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일례로, 친일파에 대한 처벌은 당연하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사회에서 흔히 통용되는 ‘친일파’라는 개념과는 전혀 무관한 노인의 예를 들며 논지를 흐리는 것과 같은 개념적인 혼란 같은 경우다. 독립지사를 지켜주지 못한 그 노인은 친일파가 아니니 그런 류의 사람들이 다칠까 저어하는 마음은 접어두셔도 좋다. 하지만 ‘옆집 남자가 나라를 되찾기 위해 끌려갔던 것처럼, 그도 가정을 위해 침묵했다’는 식의 비유는 곤란하다. 그렇게 얘기하면 친일파들도 제 몸과 가정을 위해 일제의 주구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선을 넘은 도올의 친일파관

윤수정 씨는 내 글에 대해 기본적으로 동의하지만 나로부터 혹독히 비판받은 도올의 입장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며, 그에 대한 해명과 내가 모르는 의미 맥락을 짚어 준다. 그러나 그런 해명이 단지, ‘도올이 그런 사람일 거라는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다거나’, “오해일 겁니다”라는 식의 윤수정 씨의 기대에 얹힌 부인으로만 들리는 까닭에 나는 내 입장을 재고하고 싶지가 않다. 내 비판은 엄연히 도올의 입에서 나온 말과 강의의 맥락 속에서 잡아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 비판을 약화시키려면 윤수정 씨 역시 직접적인 도올의 말을 통해 그렇지 않다는 근거를 보여주어야 효과적일 것이다. 그가 내뱉은 말의 의미를 축소한 채 막연한 자신의 심정적 옹호를 바닥에 깔고 시작하면 접점이 생기지 않는다.

도올의 주장이 단순히 피식민의 역사로 인한 자기 배반의 역사를 우리 모두 반성하자는 식의 일반론으로 끝났더라면 윤수정 씨가 옹호할 필요조차도 없었겠지만, 그는 그 선을 넘었다. 그는 식민통치의 부정적 잔영으로 얼룩진 현상은 보았으되, 그에 대한 유일한 치료책이었던 친일 세력의 청산에는 무심하며 오히려 적대적으로까지 보이는 발언을 했다. 윤수정 씨는 그토록 중요한 문제에 주석을 달지 않는 소홀함이 불안했다지만 그는 이미 주석을 달아주었다. 이광수와 서정주의 친일 전력을 문제삼는 논의를 하찮고 우습게 여기는 그의 냉소적 태도 이상으로 좋은 주석은 없기 때문이다.

그에 앞서 도올은 같은 날, 자기 어머니의 위대성을 역설하면서 그 어머니가 가정사만이 아니라 사회적 활동에 나섰더라면 아마 ‘김활란 여사 같은 분’이 되었을 거라는 말을 했다. 존경하는 사람을 비슷한 누군가와 비교할 때는 자신의 선호도에 걸맞는 사람에게 하는 게 흔하듯, 도올이 자신의 위대한 어머니를 김활란과 비교하는 걸 보면 그의 김활란`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일제 말에 창씨명 야마기 가쓰란(天城活蘭)으로 행세하던 김활란이 누구인가? 이름에서부터 천부적 친일 의지를 짐작하겠지만, 돌베개의 {친일파99인} 2권에 너무도 잘 나타나 있는 그의 반민족적 죄상을 읽고 나면 이전에 알던 그에 대한 찬사와 거품성 평가에 피가 끓는 걸 느낄 정도로 철저한 골수 친일파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도올은 김활란의 이름을 자신의 위대한 어머니의 비교태로써 혀끝에 올리는 데 일말의 주저가 없다. 알면서 그랬다면 그의 친일파에 대한 인식의 불철저성이 얼마인지 가히 짐작할 일이며, 몰랐다면 여태까지의 강의에서 그랬던 것과 같은 고금동서의 철학과 사상, 역사에 무불통지(無不通知)한 것처럼 구는 강의 태도부터 바로잡을 일이다. 정사(正邪)가 확연한 가치 판단에 써먹지 못하는 철학과 사상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 확연한 주석을 윤수정 씨가 놓친 것은 도올에 대한 지나친 신뢰에서 비롯된 순간적인 분별의 결여 때문이 아닌가 한다. 아끼는 마음이 너무 간절하면 남들에게는 쉽게 보이는 티도 쉬이 볼 수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경전의 각 구절마다 산만할 정도의 곁가지 해석을 늘어놓는 도올이 소홀하다 싶을 정도로 그렇게 간략하게 언급하고 넘어간다는 자체가 친일파에 대한 인식의 불철저성을 보여주는 반증은 아닐까. 일제가 오늘날까지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는 근원인 친일파 문제에 대한 관(觀)이 부족했던 것이다.

만약 그것이 윤수정 씨의 바람대로 도올의 표현의 잘못에서 비롯된 오해라면 어떤 식이든지 그에 대한 해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 글 이후에도 그에 대한 해명이나 반박이 있었다는 말은 들은 바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 같은 조짐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녹지 보존을 위해 용산 미군은 주둔해야 한다?

윤수정 씨는 내 글에 기본적으로는 동의하면서도 그 강의가 ‘동서양 사상 전체를 아우르는 노자에 대한 강의’이기 때문에 반감을 느꼈다는데 나는 얼른 접수가 안 된다. 동서양 전체의 사상과 철학을 이야기하면 시비선악이 없다는 것인가. 내가 본 그 강의는 노자라는 화두 하나를 실마리로 그의 박학다식 속에 비장된 갖가지 지식을 풀어내는 지식의 향연과 같은 유희적 성격을 띠어 왔다. 도올은 그 무대에서 거의 안 건드리는 분야가 없이 아는 척 했고 역사적 사건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도 자신의 말이 낳는 시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게 당연하다.

그런 강의를 그냥 한번 철학가가 되어 들어보자니 이게 무슨 말인가. 그가 강의에서 무슨 실수나 악수를 두어도 그냥 노자 철학이니까 덮어두고 넘어가자는 게 아니라면 그런 반감은 좀 궁색해 보인다. 게다가 도올은 재롱만 부리는 단순한 광대가 아니다. 강의 중간중간 카메라에 비친, 새로운 지식에 홀린 듯, 맛이 간 듯한 일부 청강생들의 표정이 나는 범상해 보이지 않는다. 그 중 태반은 도올에게서 엄청난 진리를 깨우친 듯 몰입된 표정들이다. 그런 그들을 두고서도 아무런 가치 판단 없이 그냥 강의를 지켜만 보자는 건 무리가 아닐까.

정확한 날짜는 기억을 못하지만 12월의 어느 날 강의에서 도올은 용산의 미군 주둔 문제를 건드린 적이 있었다. 노자의 허(虛)의 여백 개념과 모든 공간을 꽉꽉 채우려고만 드는 개발 위주의 정책을 대비해 그 무식함을 나무라며 이어진 언급이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심한 배신감을 느꼈는데, 그 요지는 미군의 주둔으로 용산이 개발되지 않아 녹지가 보존되어 서울의 폐 역할을 하고 있으며, 미군이 철수하면 그 곳은 개발될 것이며 이를 방지하기 위해선 미군이 계속 주둔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군의 주둔으로 미개발된 녹지가 생산하는 환경 물질과, 그들이 아무 규제 없이 내뿜고 흘려 보내는 공해 물질의 총량을 상각해 보지 않아 환경적으로 얻고 잃는 게 얼마인지 가늠하긴 어려웠지만 나는 그에게 무지 큰 실망을 했다.

선진국 진입을 읊어대는 엄연한 주권국의 심장부라 할 도읍지 한복판에, 자주 국방의 의지와 역부족을 여실히 자인하는 외국 군대를 주둔시키고, 한술 더 떠 그 비위를 맞추려 치외법권까지 허락하고 속앓이하는 이 기막힌 현실을 모르쇠하고, 단지 그 몇 뙈기 안 되는 녹지가 주는 그늘이나 산소 몇 리터로 주권국의 체모 구겨짐은 돌아보지 않는 그 단순한 배짱에 나는 혀를 내둘렀던 것이다. 그에게는 민족의 자긍이라는 명제가 용산 미군 주둔지의 녹지 환경보다도 하찮은 것이었을까. 그의 친일파관도 이런 사고 행태와 무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진정으로 도올을 위한다면 그와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런 실수들을 그냥 덮어두어서는 안 된다. 그를 아낄수록 채찍질해 갈고 다듬어주는 게 진정 그를 위하고 이 사회를 위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구체적이고 사회적인 행위로써의 자기 배반

윤수정 씨는 내가 말하는 자기 배반의 의미가 “보편적 정의에 대한 배반과 동일”해 보인다며(이런 의미 파악이 정확한 것도 아니지만), 자신의 의미는 “자기가 자기 스스로를 속이고 비겁하게 만”드는 것으로 내 뜻과 다르다고 말하고 있는데, 거기에 무슨 차이가 있다는 것인가. 윤수정 씨가 “자기 스스로를 속이고 비겁하게 만”든다는 말을 쓸 때,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기준과 비겁하게 만들지 않는 척도는 양심, 올바름, 당당함, 두려움에 맞서는 용기 같은 게 될 수밖에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일제에 대한 자기 배반이란 곧, 조선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당당하지 못하고,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갖가지 압박과 위해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며, 조센징은 엽전이요 팽이라는 허위를 당당히 허위라고 말하지 못하는 비겁과 나약을 말하는데, 윤수정 씨의 배반은 이로부터 무엇이 다른가. 자신의 인간다움과 제 겨레의 존귀함을 인정하지 않는 제국의 무자비함 앞에서 살아남기 위해 정도의 차이는 있을 망정 고개를 숙이고 그 통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그 모습이 바로 내가 말하는 자기 배반의 실상이다.

그렇지만 나의 그 배반에 대한 반성은, 그 자신만이 통렬히 느낄 수 있는 통증과 같은 무엇이라 무게를 달고 차이를 설정할 수 없을 거라는 윤수정 씨의 생각과는 진로가 다르다. 만약 그 자기 배반이 일본 식민 통치에 대해 개개인이 굴욕을 느끼고 안 느끼는 심리상의 차이로만 끝났다면 그 반성이 지극히 개인적일 수 있겠지만, 일제를 수용하고 적응하는 과정에서 보인 기본적인 태도의 차이가 같은 민족 구성원에 대한 일상적인 가해와 피해를 낳은 구체적이고 사회적인 행위로 갈려나갔다면 그 행위에 상응하는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

이런 내 주장의 성격에 대한 불충분한 이해 때문에, 윤수정 씨는 지극히 공적이고 집단적인 반성의 문제를 “처벌자의 마음”이라며 사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의 반성으로만 생각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도올이 식민 잔재를 청산하는데 우리 모두 반성하자고 말할 때 그것이 개개인의 반성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인가. 그에 대한 반성이 윤수정 씨의 말처럼 지극히 개별적이고 사적인 성질의 것이라면, 지금 대한민국에 반성을 해야 할 사람은 그때 청년기 이상을 거친 노인들 뿐으로, 대부분이 해방 이후의 세대인 우리에게 무슨 반성거리가 있을 것인가. 도올의 반성이 식민 잔재의 청산을 향한 것이 분명하다면 어떻게든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형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윤수정 씨가 말하는 그런 개별적 반성도모이다 보면 약간의 변화로 나타날 수 있겠지만 응집력을 갖지 못하는 각자의 개별적 반성에 큰 혁신을 기대할 수는 없다.

한갓 바람일 뿐인 친일파 처벌

덧붙이자면 처벌을 염두에 두지 않는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반성은 사실 효과가 없다는 점이다. 이익을 좇아 행하는 악한 행위에 처벌 없는 반성이 무슨 위협이 될 것인가. 나는 지금이라도 가능하다면 친일파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지길 바라지만 그렇다고 저번 글에서 당장 친일파들을 처벌하자고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도올이 친일파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동렬에 놓는 무분별함과 그것이 낳을 부정적 결과를 역사를 통해 짚었을 뿐이다. 패배주의 같지만 대한민국은 이제 그에 대한 처벌이라는 정의가 행해지기에는 너무 비틀리게 자리가 잡혔고, 이제 와서 할 수 있는 최선이란 역사적·민족적 죄인들에 대한 올바른 평가와 기록을 남겨 후세에 허울이나마 이정표를 세워두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윤수정 씨는 친일파 처벌에는 누구든 찬성일 것이라면서도, 누가 처벌을 집행하든 민족 일반의 일치된 정서를 획득할 때에만 의미가 있다고 여겨진다는데 좀 정리가 필요한 말 같다. 친일파 처벌에 누구든 찬성한다면 그것은 이미 민족의 일치된 정서를 획득했다고 봐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논리적 연결을 떠나 친일파 처벌에 누구든 찬성한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라 한갓 바람일 것이다.

원로 교수의 친일 행각을 비판해 재임용에 탈락된 후 지리한 투쟁 끝에 겨우 복직 판결이 났지만, 항소하겠다며 학교측이 생떼를 쓰는 서울대 미대 김민수 교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대한민국은 아직도 친일파가 정치·사회적 권력에 주춧돌을 놓고 지붕을 얹은 후 그 낡고 때묻은 이엉을 한번도 새 이엉으로 갈지 못해 곳곳에 비가 새는 누수(漏水)공화국이며, 그럴 가능성도 없겠지만 친일파 문제가 단순한 진상규명과 평가 문제가 아닌 처벌이란 주제로 부상할 경우, 그 후예들의 반발은 막강할 것이다. 언론, 정계, 재계, 학계, 예술계 할 것 없이 그들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드무니까 말이다.

그러면 이를 해결할 세력은 이로부터 자유로운 다수의 민중이 되어야겠는데 이도 만만치가 않다. 연로한 세대들은 해방 후 친일파 문제를 해결하려던 지사들이 어떻게 제거되었는지 잘 알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이 문제를 회피하려는 습성이 있고, 그렇지 않은 세대들은 친일파가 완전히 장악한 제도와 교육 아래 이에 대한 문제 의식이 없이 성장한 탓에 실상을 잘 모를 뿐더러 알아도 무심하다. 그래서 친일파 문제는 사실 국민들의 각성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일제에 대한 철저한 의미 규정 없는 친일파 처벌은 소수의 구호와 절규로 끝날 수도 있다는 주장 역시 우리의 현실에 대한 적실한 진단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친일파를 청산 못한 것은 의미 규정의 실패 때문이 아니다. 의미는 확실한데 그것이 현실에 제대로 먹혀들게 하는 데 필요한 물리적 힘이 모자랐고 지금도 딸리는 것이다. 그 출발점에는 당연히 미국의 패권주의와 분단 현실이 도사리고 있었고, 그 후로는 권력의 중추를 장악한 친일파들의 생존 역량이 그만큼 강했다고 할 수 있다. 부수적으로 도올같이 알 만한 지식인들이 친일파들의 현실적 영향력을 두려워해 이를 묵인하고 때론 그들과 뇌동한 것도 국민들의 역사 의식을 흐려 놓은 또다른 원인이 되었다.

일제가 패망하지 않았더라면 친일파는 일생 그 짓을 했을 것이다

도올이 지하의 독립투사들에 대해 언급한 바는 듣기에 따라 찬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하는 그의 말투와 태도에서 독립투사들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나 존경을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윤수정 씨가 너무 ‘제 논에 물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 말이 동시에 친일파들에게 더할 수 없는 치욕이며 모멸이 될 거라는데, 그 정도가 친일파들에게 치욕과 모멸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좀 거품 같다. 수천만의 군중 앞에서 얼굴에 침을 뱉고 뺨이나 때린다면 모를까, 그런 정도의 애매한 말 한마디가 무슨 치욕이 되겠는가. 그 정도로 치욕을 느낄 인간들이면 애초 친일도 안 했을 것이다.

윤수정 씨는 이광수와 서정주에 대한 주변의 논의를 들어 친일파 문제에도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다고 보는데 나는 이것만은 의견의 다양성 문제일 수 없다고 본다. 그들이 행한 행위는 여러 말이 필요 없다. 그들은 분명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강한 외세에 민족을 팔았으며, 일제가 패망하지 않았더라면 일생 그 짓을 했을 것이다. 그것은 동족에 대한 씻을 수 없는 배반이다.

해방 후 그들의 일관된 부정적 행적은 그에 대한 확증을 깊게 한다. 외세에 짓밟혀 신음하는 동족의 어깨를 짓누르고 물어뜯은 그들을 두고 나올 수 있는 다양한 의견이란, 기껏해야 처벌 정도를 놓고 나눌 수 있는 형량의 문제일 뿐 유죄냐 무죄냐 하는 차원의 논의가 될 수 없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릴 수는 없듯, 이에서 벗어난 논의는 옳지 못하다. 친일에 적극 앞장섰던 상당수 매국노들이 독립투사로 둔갑하여 훈장과 연금을 받고 죽어서는, 일생을 헌신했던 진짜 투사들과 일렬로 양지 바른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헌화·분향을 받는 이 대한민국의 현실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오죽하면 그런 쓰레기들이 묻히는 곳에 뼈를 묻을 수 없노라고 없는 형편에도 국립묘지 안장을 거부한 분들이 있었을까.

마지막으로 나도 이 논의와 무관한 사족을 하나 덧붙이고 싶다. 도올의 국사 선생 얘기에 감동 받았다는 얘길 듣고 동호인으로서(차츰 비판적으로 변하고 있지만) 정보의 공유 차원에서 말씀드리는 건데, 도올의 강의를 감상할 때 그 자신의 과거와 관계된 부분은 어느 정도 걸러서 받아들이는 게 좋을 거란 점이다. 그가 말하는 이삼십 년 전의 도올의 멋진 모습은 거의 대부분 지금의 그의 사상과 관념이 현재의 위상에 걸맞게 윤색한 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 참도올이 아닌 허상일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의 초기의 책과 최근의 언행들을 비교해 보면 그가 얼마나 쉽게 과거의 자신을 잊고 좌충우돌하는지 알 수 있다. 그의 거대한 자기 도취에서 비롯된 ‘구라’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에게 휘둘리기 쉽다.

사실 요즘 강의가 거듭될수록 나는 그에게 실망해 가고 있다. 내가 책 속의 허상을 본 것인가. 역시 말은 정제가 가능한 글과 달라서일까. 어디로 튈지 모르는 거듭되는 자충수를 보며 좀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오늘 이 글을 쓰면서 얼핏 본 강의에서도 그는 계속 자화자찬과 자기를 씹어대는 언론을 싸잡아서 욕만 하고 있다. 언론사 사주들에 휘둘리는 머슴인 기자들의 구조적 모순은 내버려둔 채 그 못난 자질만 탓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박수만 치는 청중들. 아아, 도올학 어떻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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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9    송복 조갑제를 능가하는 ‘극우 코미디’ 강준만 2002/06/28 1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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