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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죄선일보 > 월간 인물과사상이 파헤친 죄선일보 - 1998년4월호~2000년9월호


이 름 강준만
제 목 총선시민연대와 {조선일보} ]
총선시민연대와 {조선일보}

강준만


참여연대는 왜 {조선일보} 앞에선 ‘순한 양’이 되나?

참여연대 김기식 정책실장은 {한겨레 21} 1999년 12월 16일자 <김규항·김어준의 쾌도난담>에 초청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김 실장은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를 많이 했다. 한 가지만 여기에 인용해보기로 하자.

김규항: 이른바 최장집 사태 때 조선일보에 보도자료 보내지 말기 운동이 있었죠. 강준만 선생이 참여연대를 포함해 메이저 3개 단체가 협조 안 했다고 심하게 비판한 적이 있는데 그때 입장은 뭐였나요.

김기식: 사실은 공대위 참여단체의 동의없이 일방적으로 발표된 거예요. 절차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그건 부차적으로 하더라도 조선일보를 조선일보적 방식으로 대응하면 안된다는 게 우리의 입장이에요. 조선일보는 사실보도나 언론이 가져야 할 균형도 없이 자기 입장만 가지고 취사선택해서 죽일 놈 죽이고 살릴 놈 살린단 말예요. 똑같은 이야기죠. 이쪽 진영이 그쪽 방식으로 해서는 안된다는 거죠. 그런 점에서 문제를 제기한 거고.

죄송하지만, 김기식 실장의 답에서 거짓의 냄새가 풀풀 풍긴다. 앞으로 이 사람이 하는 말을 믿어도 될까? 그런 의문이 든다. 우선 참여단체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발표된 거였다는 점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 우리 솔직히 이야기하자. 내가 듣기론 참여연대가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애썼다던데, 진실을 말씀하시기 바란다. 회의에 나오라고 해도 바쁘다고 나오지도 않고, 그러지 않았던가?

니가 뭘 아느냐고? 훌륭한 증인이 한 분 계시다. 한일장신대 김동민 교수는 월간 {열린전북} 2000년 2월호에 기고한 <아직도 조선일보를 보십니까?>라는 제목의 글에서 김 실장의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격했다.

“내가 공대위 집행위원으로 참여해서 아는데, 공식적으로 회의 소집을 알리고 논의해서 결정한 일인데 이렇게 둘러대도 되는 일인가? 참여연대는 애초에 조선일보에 맞서는 일에는 소극적이었다. 이름만 걸어놓았지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 참여연대의 입장을 전혀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김 실장의 표현 그대로 해서 참여연대는 조선일보가 취사선택해서 살릴 놈 만들어준 덕에 컸다. 조선일보를 따돌리기가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걸 이렇게 돌려서 표현했을 것이다. 참여연대가 공대위의 조선일보 거부운동에 협조하지 않은 사이에 조선일보는 보다 더 신경을 써서 참여연대 기사를 부각시켜주는 것으로 화답하고 회유했다. 그러면 이걸로 은덕을 갚은 것으로 치면 되지 않을까? 참여연대는 사사로운 정리에 얽매여 대의를 그르치지 않기를 바란다.”

{조선일보}를 조선일보적 방식으로 대응하면 안 된다는 게 참여연대의 입장이었다니 그건 더욱 기가 막히다. 참여연대는 대(`對`) 정권 시위는 자주 하던데 그건 무슨 방식인가? ‘최장집 사건’과 관련하여 누가 참여연대에게 시위를 해 달라고 했나? {조선일보}에 대해서만 보도자료, 기고, 인터뷰 중단을 하는 게 조선일보적 방식이란 말인가?

그게 김 실장의 진심이라면 김 실장 정말 큰 일 낼 사람이다. 김 실장은 모든 소비자운동에 반대하나? 소비자운동의 가장 강력한 운동 방식이 ‘불매운동’일 터인데, 그건 잘못된 방식이란 말인가? 아니 그 이전에 누가 참여연대에게 {조선일보} 불매운동에 참여하라고 했나? 보도자료 안 보내고 기고와 인터뷰 좀 하지 말아 달라는 게 조선일보식 방식이라고? 김 실장은 구차한 변명을 넘어서 언론운동 단체들을 모독하는 발언을 한 것이다. 정권을 비판할 때엔 사납기 짝이 없는 참여연대가 왜 {조선일보}에 대해선 그렇게 양처럼 순한 자세를 보이고 또 그 순한 자세를 정당화하기 위해 억지 논리를 전개하는지 통탄할 노릇이다.
김기식 실장은 {조선일보} 1999년 11월 30일자 30면 인터뷰에서 “한번 시작하면 누가 알아주든 아니든 끝장을 보는 게 참여연대의 행동원칙”이라고 했다. 누가 그걸 가리켜 조선일보적 방식이라고 그러면 김 실장의 기분이 어떻겠는가? 좌경세력 뿌리 뽑는 일에 있어서 한번 시작하면 누가 알아주든 아니든 끝장을 보는 게 {조선일보}의 원칙이라는 건 천하가 다 아는 사실 아닌가 말이다. 그래서 참여연대의 그런 원칙을 조선일보적 방식이라고 그러면 김 실장은 동의할 수 있겠느냐 이 말이다. 긴 말 않겠다. 나는 괜찮으니, 김 실장은 그 발언에 대해 언론운동 단체들에게 사과하기 바란다.

낙천·낙선운동이라는 축제(`祝`祭`)

위 이야기의 대부분은 내가 {인물과 사상} 제13권에 쓴 <언론의 등에 업힌 한국의 시민운동: 참여연대에게 묻는다>라는 글에서 가져온 것이다. 아주 조금 덧붙이고 손을 보긴 했지만, 거의 같은 이야기다. 언젠가 그러지 않겠다고 큰소리 쳐놓곤 왜 한번 써먹은 원고를 재탕해 먹는가? 그리 추궁할 독자가 전혀 없진 않을 게다. 그러나 이제 곧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을 이해하시리라 믿는다. 아무려면 내가 할 말이 없어서 써먹은 원고 재탕해 먹겠는가?

참여연대 김기식 정책실장을 다시 이 자리에 모신 건 참여연대를 포함한 총선시민연대에게 다시 한번 호소, 아니 읍소(`泣`訴`)하기 위해서다. 분노어린 읍소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조선일보적 방식이다. 나는 제 아무리 숭고한 명분이라도 그 방식만큼은 피하고 싶었으며 그렇게 해왔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너무 온건하다. 실제로 나는 나의 지나친 온건성으로 인해 사적(`私`的`)으로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한다. 내가 김기식 실장의 발언에 열(`熱`)받은 이유를 이제 독자들은 확실하게 이해하실 거다.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한, 온건한 방식을 가리켜 ‘조선일보적 방식’이라고? 글로 옮기질 못해서 그렇지, 정말 입에서 마구 욕이 튀어나온다.

한동안 TV에서 김기식 실장의 얼굴을 원없이 구경했다.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대상자 명단 발표 덕분이다. 세계 방송사상 4개 TV 방송사가 동시에 시민운동 단체의 발표 실황을 생중계한 경우가 있었을까? 내가 모든 나라의 방송 역사를 다 조사한 건 아니라 장담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그런 경우는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총선시민연대의 활동을 지지한다. 뜨겁게 지지한다. 그러나 가슴 한구석 약간 불편한 건 있다. 내가 불편해 하는 건 ‘축제(`祝`祭`) 이후’의 후유증이다. 총선시민연대의 이번 운동은 국민의 정치 혐오주의와 정치 비판을 주식(`主`食`)으로 삼는 언론의 식성(`食`性`)을 이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거품’이 무지하게 많다는 뜻이다. 물론 ‘거품’을 이용해 큰 일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매사엔 음양이 있기 마련이어서 그 시도가 실패로 돌아갈 경우엔 후유증이 없을까?

또 하나 불편하기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조선일보 제몫 찾아주기>를 ‘조선일보적 방식’이라고 비판했던 김기식 실장과 참여연대의 이중성이다. 김기식 실장은 “자기 입장만 가지고 취사선택해서 죽일 놈 죽이고 살릴 놈 살리는” 방식은 안 된다고 말한 바 있다. 지금 총선시민연대가 하는 방식은 그 방식이 아닌가? 총선시민연대의 입장은 정의(`正`義`)이기 때문에 달리 보아야 한다고? <조선일보 제몫 찾아주기>의 입장은 불의(`不`義`)였나?

다소의 부작용에도 개의치 않고 대의(`大`義`)를 위해 그토록 용감무쌍하게 행동하는 그들이 왜 {조선일보}에 대해선 그렇게 비굴하고 음흉하게 굴어야 했던 걸까? 나는 그것이 운동판에서 산전수전(`山`戰`水`戰`) 다 겪은 그들 나름대로의 전략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특정 신문을 상대로 싸워봐야 언론이 도무지 보도해주질 않는다. 그러니 일반 국민은 그런 운동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른다. 다른 경쟁지들이 속으로 고소해하는 맛에 보도해주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 신문들은 워낙 영악해서 {조선일보}를 겨누었던 칼이 곧 자기들에게로 날아올 것을 잘 알기에 기껏해야 한두 줄 써주는 것으로 끝낸다.

반면 정치와의 싸움은 100% 확실하게 되는 장사다. 물론 {조선일보}처럼 어떻게 해서든 총선시민연대의 활동에 흠집을 내려고 발버둥치는 신문도 있고 기회주의적으로 처신하는 신문들도 많지만 평소 정치에 대해 가래침을 뱉어온 국민들의 수가 워낙 많기 때문에 그 어떤 신문도 한편으론 씹어대더라도 계속 대서특필해 가면서 실황 중계를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운동하는 보람도 생기고 힘이 막 난다.

운동을 하려면 이렇게 해야지, 왜 되지도 않을 언론과의 싸움을 벌인단 말인가? 그리고 정치가 더 중요하지 언론이 더 중요하단 말인가? 정치가 확 바뀌면 언론도 바뀌게 돼 있는데, 언론 그것도 쪼잔하게 겨우 일개 신문과 싸우고 말고 할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연작이 봉황의 뜻을 어찌 알랴!

내 나름대로의 짐작이지만, 김기식 실장과 참여연대 사람들은 뭐 그런 생각을 했음직하다. 나는 그런 생각이 엄청난 착각이라고 보지만, 지금 그걸 지적하지는 않겠다. 축제엔 찬물을 끼얹는 법이 아니다. 지금은 총선시민연대의 활동에 뜨거운 지지를 보내야 할 때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게다.

‘음모론’의 주범은 {조선일보}다

정말 그러려고 했다. 그러나 {조선일보} 2000년 1월 26일자를 보고 생각이 확 바뀌었다. 총선시민연대의 대변인인 장원 씨가 칼럼을 기고했기 때문이다. 총선시민연대의 활동에 대한 정치권 일각(자민련)의 ‘음모론’을 반박하는 내용의 칼럼이다. 그런 성격의 칼럼이기 때문에 {조선일보}에 실어도 괜찮다는 생각을 한 걸까?

{한겨레} 손석춘 기자는 그 칼럼에 대해 “조선일보에 총선연대 쪽의 주장도 실린다고 혹 시민단체들이 방심한다면 순진한 착각이다”고 지적했지만, ‘순진한 착각’ 정도가 아니다. 답답하다. 정말 이렇게까지 어리석을 수 있을까? {조선일보}가 어떤 신문인지 아직도 모른단 말인가?

총선시민연대가 문제삼는 그 ‘음모론’의 원조가 누구인가? 바로 {조선일보}가 아닌가. 사설과 기사 이야기는 할 것도 없다. 이 신문의 주필(김대중)이라는 자가 쓴 칼럼도 보질 못했나? 그는 {조선일보} 2000년 1월 15일자에 쓴 <‘낙선운동’ 감상법>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낙선운동’을 각론적으로 관찰하면 거기에서 특정 정치세력의 결과적인 부상(`浮`上`)을 읽을 수 있다. (중략) 이런 현상으로부터 결과적으로, 그리고 상대적으로 이득을 보는 측은 대체로 보아 아직 ‘정치’에 물들지 않았거나 정치입문이 일천한 인물, 여러 측면에서 검증이 되지 않은 신인들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사람이 많이 집결돼 있다고 보이는 쪽은 국민회의와 통합해 집권여당으로 등장할 신당 즉 민주당이다. (중략) 낙선운동이 어느 정도 소기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면 이들은 시민운동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특정 정치세력의 후원자를 넘어 조정자로 변모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눈여겨 봐야 할 것이다. 어쩌면 앞으로 정당들이 이들의 눈치를 보는 상황으로 바뀔 수도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이들 자신이 바로 정치세력으로 탈바꿈하는 것도 예상할 수 있다.

{조선일보}는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이런 신문이다. {조선일보}는 수구기득권 세력의 ‘바이블’이다. 김대중이 노회하게 요리저리 빠져나갈 구멍을 찾으면서 말을 하긴 했지만 그 실질적인 메시지는 시민단체들에 대항해 수구기득권 세력이 총궐기해야 한다는 선동이 아니고 무엇이랴.

채 일주일도 안 돼 연세대의 극우 논객 송복 교수가 화답한다. 그가 {조선일보} 2000년 1월 21일자에 쓴 <‘불복종’도 법 테두리 안에서>라는 제목의 칼럼은 아예 시민단체들을 향해 “너희들 정부로부터 돈 받아 먹어서 그러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 시민단체들을 모독하는 발언을 거리낌없이 해대고 있다.

그 다음주엔 소설가 서정인 씨까지 가세한다. 그는 {조선일보} 2000년
1월 29일자에 <시민불복종>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다. 이 분은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려고 그러신 건지 종잡기 어렵지만 마지막에 한 다음과 같은 말은 송복 교수의 발언에 대한 지지 성명을 방불케 한다.

“요즘 한 시민단체가 시민 불복종 운동을 표방했다. 힘센 국회의원들을 낙천-낙선시키기 위해서다. 그것은 불복종보다 저항에 가깝다. 시민 불복종은 참고 견디는 비폭력 비협력 무저항주의이다. 국민저항권의 발동은 거의 혁명이다. 마지막 수단인 법을 포기하는 것은 혁명 말고 또 있는가?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어려움이 많겠지만, 문화 혁명이 안되기를 빌 뿐이다. 친위 쿠데타는 쿠데타가 갖는 모든 악덕들에다가 비열을 하나 더 가진다. 목숨을 걸지 않고 목숨을 거는 일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조선일보}는 그런 흠집내기를 시도하면서도 다른 지면에선 <정치신인의 좌절: “1억원 들고 덤빈 제가 정말 바보였어요”>(2000년 1월 27일자 31면)라는 따위의 ‘정치 개혁’ 캠페인을 전개해 어리석은 {조선일보} 독자들을 헷갈리게 만드는 신문이다. 그건 정치면에선 악랄한 매카시즘 수법을 동원하면서도 문화면에선 좌파 지식인을 팔아먹는 수법과 비슷한 수법인 것이다. 그 수법에 수많은 좌파 지식인들이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 적극적으로 놀아나고 있는데, 꼭 총선시민연대까지 이 절박한 상황에서조차 그렇게 놀아나야 되겠는가?
장원 씨와 총선시민연대는 이런 {조선일보}에 대해 더 이상 무슨 기대와 미련을 갖고 있는가? 당신들 정말 왜들 그렇게 어리석게 구는가? 당신들 반드시 땅을 치고 후회하게 돼 있다.

“아, 이 운동을 하기 전에 ‘조선일보 제몫 찾아주기’부터 먼저 했었어야 했는데! 조선일보 때문에 망했다!!”

얼마나 더 당해야 알겠는가?

박원순 총선시민연대 상임집행위원장은 “낙천·낙선운동의 궁극적 목적은 지역감정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조선일보}를 그대로 두고선 {조선일보}가 부추기는 지역감정 때문에 낙천·낙선운동은 좌초하게 돼 있다. 왜 그걸 모르시는 걸까?

“진위는 모르지만 낙선운동에 대한 DJ와 시민단체의 음모설이 돌면서 특정지역의 여론이 싸늘하게 식고 있다는 현지의 전언도 있다. 이래서야 낙선운동의 성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심하게 말하면 몇몇 의원 혼내주려다 지역감정만 부추겼다는 비난도 나올 수 있다. 지역감정의 폐해가 어제오늘의 문제는 아니지만 이 문제의 해소없이 낙선운동의 착근은 어렵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견해에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낙천·낙선운동이 지역감정이라는 벽까지 뛰어넘을 수 없다는 건 분명하다. 그런데 그 지역감정을 누가 부추기고 있느냐 이 말이다. 사람들은 곧장 ‘정치인들’이라는 모범답안을 제시하려 들겠지만, 언론의 비호 또는 묵인 또는 협조 없이 정치인들이 지역감정을 부추길 수는 없는 일이다.

왜 시민단체들은 언론, 특히 {조선일보}가 모든 문제의 핵이라는 걸 보지 않으려는 걸까? 이만저만 답답한 게 아니다. 뒤늦게나마 시민단체 내부에도 {조선일보} 문제를 제대로 꿰뚫어보는 사람이 생겨나는 건 불행 중 다행한 일이지만, 아직 멀었다.

“더도 말고 딱 10만부만 조선일보 불매운동을 벌이자.” 지난 24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언론회관에서 열린 공천반대인사 명단 공개 기자회견에서 박원순 총선시민연대 상임공동집행위원장이 하고 싶었던 말이다. 애초 박 위원장은 방송사에서 생중계한 기자회견에서 {조선일보} 취재기자를 지목해 회견장에서 나가줄 것을 요구하고 {조선일보} 10만부 불매운동을 제안하려 했으나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는 주위의 만류로 그만뒀다.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민언련. 이사장 성유보)이 ‘총선보도 어떻게 감시할 것인가’란 주제로 같은 날 오후에 연 포럼에서 박 위원장이 밝힌 뒷이야기다. 그는 “공천반대운동을 하며 조선일보의 보도태도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니,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그러면 언제가 때란 말인가? 지금은 때가 아닌 게 아니라, 때는 이미 오래 전에 도래했었다는 걸 아직도 모르겠단 말인가? 얼마나 더 당해야 알겠는가? 총선시민연대의 앞날이 정말 걱정된다.

총선시민연대의 잘못된 전략

총선시민연대의 활동에 뜨거운 지지와 존경을 보낸다. 그러나 그들의 성공, 아니 국민의 성공을 위해 한마디 고언(`苦`言`)을 드려야겠다.

총선시민연대의 이번 운동은 국민의 정치 혐오주의와 정치 비판을 주식(`主`食`)으로 삼는 언론의 식성(`食`性`)을 이용한 것이다. 그게 문제될 건 없다. 오히려 그 탁월한 전략에 박수를 보낸다. 문제는 그 전략의 이면(`裏`面`)에 있다.

시민운동 단체들이 오늘과 같은 날을 염두에 두고 그랬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간 그들은 언론을 몰가치적인 이용의 대상으로만 간주해왔다. 대(`對`) 정부, 대(`對`) 정치 투쟁엔 더할 나위 없이 사나운 모습을 보여온 시민단체조차 언론에 대해서만큼은 ‘순한 양’처럼 행동해 왔다. 또 시민공동대책위원회가 결성될 정도로 특정 신문의 행위가 사회적 문제가 되었을 때에도 이른바 ‘빅 3’ 시민단체들은 공대위의 결의 사항을 외면하고 그 문제의 신문과 밀월 관계를 계속 유지했다. 그 ‘빅 3’ 시민단체가 이번 ‘낙천·낙선운동’의 주역이라는 건 이 운동이 곧 처하게 될 지도 모를 비극적인 운명을 예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민련을 포함한 정치권 일각에선 총선시민연대의 활동에 대해 특정 정치 세력과의 결탁을 단언하는 ‘음모론’을 제기하고 있으며, 그 음모론은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효과를 내 이번 운동에 거대한 암초로 떠오르고 있다. 물론 총선시민연대는 그러한 음모론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분노에 앞서 그러한 음모론의 배후가 누구인가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바로 언론이다. 모든 언론이 아니라 어느 신문이다. 그 신문은 ‘낙천·낙선운동’에 대해 끊임없는 흠집내기를 시도하고 있으며, 교묘한 말장난을 통해 실질적으로 정치권 일각의 주장보다 더 과격한 음모론을 계속 생산해내고 있다.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는 지난 연말 “우리 사회가 왼쪽으로 가고 있다”며 “더이상 좌로 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김 명예총재의 그런 판단은 과연 무엇에 근거한 것일까? 그 주장은 평소 문제의 그 신문이 집요하게 해 온 주장임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정치인은 아무리 타락했어도 여론에 죽고 사는 동물이다. 어디 기댈만한 여론 부스러기조차 없는 상황에선 함부로 말을 하지 않는 법이다. 정치가 언론을 만드는 게 아니다. 언론이 정치를 만든다. 음모론도 그걸 받쳐줄 유력 신문이 있기 때문에 일부 정치인들의 입에서 용감하게 발설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 신문은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신문이라고 주장한다. 그걸 확인할 길은 없지만 그 신문이 정치인들이 가장 즐겨 찾는 신문 가운데 하나라는 건 분명하다. 정치인들은 보통사람들보다 훨씬 더 일개 유력지의 논조에 영향을 받는다는 걸 잊어선 안 될 것이다.

사정이 그와 같은 바, 시민단체들이 그 신문과의 밀월 관계를 유지하면서 정치인들만을 상대로 개혁을 해보겠다는 건 매우 어리석은 생각이다. 더욱 심각한 건 지역감정이다. 모든 언론이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면서 정당한 응징을 가한다면 그 어떤 정치인도 감히 지역감정을 부추길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일부 신문은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걸로 상업적인 번영을 누리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과연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가? 언론이 정치를 지배하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

총선시민연대에게 호소한다. 때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라도 언론개혁운동을 병행하기 바란다. 언론을 바꾸지 않고선 정치개혁은 절대 불가능하다. 모든 언론을 상대로 싸울 필요는 없다. 총선시민연대의 활동에 대해 가장 적대적인 신문 하나만 골라 싸우면 된다. 그래야 기회주의적인 다른 신문들도 정신을 바짝 차릴 것이다.

만약 총선시민연대가 예전에 했던 방식대로 모든 언론을 다 껴안고서 가고자 한다면, 이 운동은 반드시 실패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지 않느니만 못한 후유증을 낳을 수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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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6/28 (19:27:57)    IP Address : 165.132.120.202

518    의약분업과 명분론 박형욱 2002/06/28 796
517    한 일본인의 교묘한 과거 합리화 전진식 2002/06/28 1128
516    구로다 가스히로의 글을 읽고 강훈 2002/06/28 857
515    강준만 님의 일관되지 못한 김용옥 비판 채석용 2002/06/28 1126
514    도올 김용옥의 친일파관 비판 (2) 이현우 2002/06/28 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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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6    부산 사람을 좋아하는 이유 이완근 2002/06/28 927
505    ‘언론권력’ 교체는 정말 불가능한가? 강준만 2002/06/28 783
504    실리지 못한 원고 ? ‘독자가 주체가 되는 책’! 편집부 2002/06/28 752
503  [월간 인물과사상 2000년 3월호] 인물과사상사 2002/06/26 925
502    {시사인물사전} 정기 독자 1천명에게 알립니다 편집부 2002/06/28 882
501    제2의 독자 배가 운동을 제안 드리며 편집부 2002/06/28 890
   총선시민연대와 {조선일보} ] 강준만 2002/06/28 837
499    송복 조갑제를 능가하는 ‘극우 코미디’ 강준만 2002/06/28 1060
498    {조선일보}와 법치주의 박형진 2002/06/28 836
497    총선연대가 성공하기 위한 필요조건 조 흡 2002/06/28 774
496    이현우 님의 글을 읽고 윤수정 2002/06/28 914
495    김용옥을 어떻게 볼 것인가? 강준만 2002/06/28 859
494    이진우‘전투적 자유주의’에 관하여 강준만 2002/06/28 881
493    두더지의 슬픈 초상 강준만 교수에게 답함 임지현 2002/06/28 1024
492    최규정 님과 박지훈 님의 반론에 답한다 강준만 2002/06/28 918
491    <의약분업, 소비자의 이익에서 다시 보기>를 읽고 백한주 2002/06/28 943
490    나의 교육개혁안 비판에 답함 홍현성 2002/06/28 1044
489    어느 개인주의 교사가 꿈꾸는 학교 김영수 2002/06/28 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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