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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죄선일보 > 월간 인물과사상이 파헤친 죄선일보 - 1998년4월호~2000년9월호


이 름 임지현
제 목 두더지의 슬픈 초상 강준만 교수에게 답함
두더지의 슬픈 초상 강준만 교수에게 답함

임지현 │서울시 성동구 왕십리│


‘인물’도 아니고 ‘사상’도 없는 사람을 {인물과 사상}에서 다루어준 데 대해, 우선은 겸연쩍은 마음이 앞선다.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동지의 우정어린 고언”을 해준 강준만 교수에게도 어쨌거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강 교수의 동지애적 비판이 어떤 것인지 일반화할 만큼 그의 글들을 읽은 바는 없다. 한두 번 흘낏 그의 글 편을 본 기억이 있고, 대개는 신문기사나 사람들에게 그의 작업을 전해들었을 뿐이다. {조선일보}로 상징되는 극우 언론권력이나 서울대 특권주의에 대한 그의 신랄한 비판은 충분히 그 사회적 역할을 인정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 자체에 대한 상대적 무관심은 일차적으로 내 지적 게으름의 탓이다. 그렇지만 제목만 일별해도 대개 그 내용을 짐작케 해주는 강 교수가 지닌 단순논리의 미덕도 그에 대한 내 게으름을 부추긴 면이 있다.

누군가 귀뜸을 해주어 뒤늦게나마 <당신의 『조선일보관』이 ‘일상적 파시즘’이다>라는 그의 글을 구하게 되었다. 우선 내 자신을 다룬 것이기에 비교적 꼼꼼하게 읽었다. 무늬만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간혹 아내에게 듣던 터라, 내 안의 파시즘에 대한 강 교수의 날카로운 지적을 기대한 면도 있었다. 그런데 그의 글을 읽고 나서는 실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실망감은 내 개인에 대한 강 교수의 비판이 갖는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일반적인 작업 자체에 대한 신뢰도의 문제와도 선이 닿는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황하게 반론을 쓸 필요는 느끼지 않는다. 이런 식의 논쟁은 소모적일 뿐 아니라, 또 조잡한 논지에 대한 답도 어떤 식으로든 조잡함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비판이 가진 몇 가지 심각한 문제에 대해서는 그를 위해서도 또 나를 위해서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판의 대상이 동지든 적이든, 모든 비판에는 상식적인 규범이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사실에 입각한 비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의적 왜곡에 의한 것이든 생략에 의한 것이든, 일그러진 사실을 근거로 한 비판은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해석이 자의적인 것인가의 여부는 그 다음의 문제이다. 그런데 나에 대한 강 교수의 비판은 기본적으로 왜곡된 사실에 입각해 있다. {조선일보}의 주필이 외국 신문의 기사를 왜곡해서 쓴 것은 그의 영어 실력이 모자라기 때문이라는 변명도 가능하겠지만, 강 교수의 한국어 해독 능력에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자신의 단순논리에 꿰어 맞추기 위해 고의로 사실을 왜곡하고 생략했다는 의심을 떨구기 어렵다. 그의 다른 글들을 읽지 못한 나로서는, 그것이 강 교수의 글쓰기가 갖는 일반적인 특징인지 여부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단지, 이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나타난 현상이라고 믿고 싶을 뿐이다.

먼저 사실의 문제를 지적하겠다. 강 교수는 먼저 1999년 5월 11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내 시론 <탈민족 민족주의>와 12월 18일자 같은 신문에 게재한 <체 게바라에게> 편지를 언급하고 나름대로 독특한 해석을 시도한다. 이어서 “임지현은 큰 일 낼 사람”이라는 소제목 아래 다음과 같이 자신의 논지를 전개한다.

그런 자신감 때문이었을까? 드디어 우리의 임 교수는 {조선일보} 편집국으로까지 진출하신다. 그는 99년 10월 27일 ‘편집국 실무 스터디’ 연사로 초청받아 {조선일보} 기자들을 상대로 ‘조선일보 문화면에 대한 비평’이라는 주제의 강연을 하셨다. 똑같은 말이라도 어디에서 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법인데, 그는 유감스럽게도 {한겨레}에 가서 하면 적합할 말을 {조선일보} 사람들에게 했다.

이 글이 의도하는 바는 분명한 것처럼 보인다. 임지현이 {조선일보}에 글을 두어 편 써서, {조선일보}에 포섭되어 ‘드디어’ 편집국까지 진출했다는 인상을 주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강 교수 자신이 썼다시피, 강연은 시론과 게바라에 대한 글 사이에 있었던 일이다. 글쓴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날짜를 정확히 챙겨준 강 교수가 갑자기 그 날짜를 혼동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요컨대 그는 게바라에 대한 “이 글이 게재된 다음”, “드디어”라는 표현을 자의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사건이 일어난 순서에 대한 착각을 독자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논지를 정당화하기 위해 드디어 독자들에게 그러한 착각을 심어주는 데 성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비평자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양식을 어긴 것은 분명하다. 물론 그것이 사건의 순서를 뒤바꾸어 놓음으로써 과장의 효과를 노린 것은 분명하지만, 사실 자체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강연 내용을 소개하면서, 이번에는 의도적 생략을 통해 사실 자체를 왜곡시킨다. 앞으로는 좌와 우의 대립보다는 ‘열린 집단’과 ‘닫힌 집단’간의 대립이 문제의 초점이 될 것이라는 강연 서두를 인용한 강 교수는 그것을 근거로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극우 헤게모니라고 하는 현실을 외면한 채 한가롭게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고 있다”고 결론짓는다. {조선일보}나 {한겨레}가 정치적 명분이나 표방하는 이념은 다르지만 밑에 흐르는 정서는 보수적이라는 점에서 사실상 같다는 나의 주장에 원론적으로 동의한다는 전제가 있기는 하지만, 요컨대 {조선일보}에서 그런 식의 발언을 한다는 것은 결국 극우 헤게모니를 묵인하는 결과가 아니냐는 게 강 교수의 논지인 듯싶다.

강 교수는 아마도 그 강연내용을 10월 27일자 조선일보 사보에서 보았을 것이다. 많이 축약되고 다소 완곡한 어법으로 다듬어지기는 했지만, 강 교수가 보았음에 틀림없는 그 사보에는 내 강연의 요점들이 대체로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는 서론만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또 정작 {조선일보}에 대해서 비판한 본론 부분에서는 최장집 교수 건만을 인용하고 있다. 강 교수가 인용했다시피 최장집 사건에 대한 {조선일보}의 보도 태도에서 내가 문제삼는 것은 “정치논리로 학문의 논리를 뒤엎었다는 것이다.” 진보적인 신문이 보수인사의 입각을 비판하듯이, 보수 신문도 진보인사의 입각을 비판할 수는 있다. 또 권력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지식인의 경우 좌든 우든 언론의 검증 대상이 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므로 검증작업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조선일보}가 그 과정에서 학자로서의 최 교수가 쓴 논문의 이적성을 표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정치논리를 학문의 자유에 우선했다는 점에서, 조선일보사는 스스로 자랑하듯이 결코 건강한 보수는 아니라는 것이 내가 강연한 내용이었다. {조선일보}가 건강한 보수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그러한 사고방식을 청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조선일보}에 대해서 열려 있고 리버럴한 입장을 가지라고 주문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비판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조선일보}의 가장 큰 문제점은 최장집 사건보다도 이승복 사건에 대한 보도 태도에서 단적으로 드러났다는 것이 당시의 내 판단이었다. 그 강연에서도 나는 이 문제를 가장 길게 또 집중적으로 거론했다. 사보에서도 비교적 상세히 전한 이 문제를 강 교수는 왜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 것일까? 강 교수의 {조선일보} 비판과는 질이 다르기 때문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임지현이 극우 헤게모니라는 현실을 외면하고 강화했다는 강 교수의 논지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이미 그 글을 읽어 본 또다시 읽는다 해도 이해하기 싫어할 강 교수가 아니라, 다른 독자들을 위해 잠깐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그보다는 이승복 사건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국민학교 어린애가 ‘공산당은 싫어요’ 했다는 데 이것은 현대사의 비극이다. 어린아이가 뭘 알기로서니 공산당이 싫다고 외쳤는가. …… 소련의 스탈린 체제에서 자기 아버지를 고발한 (어린이와) 무엇이 다른가. 이데올로기의 희생자가 아니냐.

이승복 사건에 대한 이 인용문에서 보듯이, 조선일보사 한복판에서 내가 지적한 {조선일보}의 문제점은 냉전적 사고에서 나온 그들의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이었다. 이승복 관련 보도의 밑에 깔린 논리는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를 고발하게 했던 스탈린식 전체주의의 논리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 내 지적이었다. 당시 그 기사를 보도했던 것으로 추측되는 한 논설위원이 오보가 아니라 사실이었다며 여러 차례 강한 이의를 제기했지만, 나는 사실 여부를 떠나서 그 기사의 밑에 흐르는 논리의 문제점을 재삼 지적했다. 만약 사실이라면 10살짜리 어린이가 죽음을 무릅쓰고 반공 이데올로기를 수호했던 그 끔찍한 체제가 문제이며, 또 사실이 아니라면 그러한 죽음을 비극으로 느끼지 못하고 신화화시켰던 그 의식의 냉전논리를 문제삼았던 것이다. 혹 극우 반공의식을 스탈린과 비교하는 것이 불경죄라고 강 교수가 생각했다면, 그것은 다른 문제이다. 강 교수식 표현을 패러디 한다면, 강 교수는 “능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최장집 보도 건보다는 이승복 보도가 {조선일보}의 문제점을 더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생각해왔다. 최장집 보도 건에 대한 기존의 비판은 핵심을 벗어났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혹 그것도 {조선일보}의 극우 이데올로기와 양립하는 것이라 강변한다면, 더 이상 말은 필요 없겠다. {조선일보}에 대한 비판은 강 교수처럼 끼리끼리 밖에서만 해야 하고, 조선일보사 사람들이 듣는 데서 하면 안 되는가?

신문방송학과 교수이기 때문에, 강 교수는 아마도 {신문과 방송}이라는 잡지를 볼 것이다. {조선일보}에서의 강연이 있은 직후, 이 잡지에서 한국 언론 문제에 대한 좌담에 참가할 것을 요청한 적이 있다. 조선일보사에 대한 강연에 참가했던 언론재단의 한 인사가 내 비판에 주목하여, 비전문가로서의 의견을 들어보자고 편집자에게 제안했다는 것이다. 결국 영문도 모른 채 좌담에 임하기는 했다. 강 교수도 알 만한 언론개혁시민연대의 실무자와 진보적인 신문방송 학자가 함께 했다. 도대체 이런 이야기를 쓴다는 것이 주접스럽기 짝이 없지만, 그 강연의 내용을 판단할 수 있는 간접적인 증거이기에 여타 독자들을 위해 첨부해둔다.

요컨대 강 교수의 단세포적 사고방식에서는 {조선일보}에 글을 썼다는 것이 곧 극우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것이라는 논리적 비약이 손쉽게 이루어진다. 글에 대한 분석보다는 글을 썼다는 사실 자체가 곧 임지현의 조선일보‘관’으로 이어지고, 그래서 나의 조선일보관은 곧 일상적 파시즘이 되며, 그래서 다시 내가 제기한 일상적 파시즘론은 “극우 헤게모니를 깨는 걸 방해하는 일종의 총체적 대안”으로 의심받는다. 그러므로 내 글에 대한 강 교수의 해석이 {조선일보}에 글을 썼다는 사실로부터 연역적으로 추론되었다고 해서,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단순하다는 것은 참 편한 것이다. 동시에 매우 위험한 것이다. 자신의 단순함이 지닌 위험성을 모를 정도로 단순하다는 것이 문제이다.

길게 부언하지는 않겠지만, 해석의 문제도 잠깐 짚고 넘어가야겠다. 강 교수는 내가 쓴 시론 <탈민족 민족주의>가 “임교수의 주장은 조갑제 씨의 주장에 평소 반하는 바가 있지만 …… 조갑제 씨를 비판한 것도 아닌데다 오히려 정부를 비판하고 있어서 {조선일보}의 극우 이데올로기와 아무런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조선일보}가 혈통적 민족주의를 비판하고 외국인 노동자들을 대접하고 인간적인 삶을 지향하는 시민적 공동체로 나아가자는 나의 주장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강 교수의 주장대로라면, {조선일보}가 내 주장에 동조한다는 이야기인가. 그렇다면 나는 시론 하나로 강 교수가 몇 년 동안 작업한 것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는 이야기인가. 아니면 시론의 그 주장이 {조선일보}의 극우적 국가주의에 동조한다는 것인가. 강 교수는 후자 쪽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만약 그렇다면, 남의 글을 읽는 데 좀더 고민하고, 독해력과 이해력을 다듬을 필요가 있다.

내가 시론에서 조갑제 씨를 거명하여 비판하지 않았다고 해서, {조선일보}의 편집 방향 또는 조갑제 씨의 극우적 민족주의와 내 주장 사이에 아무런 갈등이 없다고 진짜로 믿을 만큼 강 교수가 무식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민족주의에 대한 내 글에 감명 받아 강연에서 길게 인용까지 한 강 교수가 조갑제 씨의 민족관에도 깊은 감명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또 이 추측을 근거로 강 교수에게 “당신의 민족관이 일상적 파시즘이다”라고 강변하고 싶지도 않다. 그가 강조하는 균형감각을 갖고 판단한다면, 강 교수가 조갑제 씨의 민족관에 동조하고 극우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사람이라고 규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강 교수가 그런다고 나까지 따라할 수는 없지 않은가.

강 교수의 무리한 논지는 아마도 내가 {조선일보}의 상업적 전술에 이용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에서 나온 것이라고 이해하겠다. 내 책 {민족주의는 반역이다}가 “지식계에서 꽤 히트를 쳤”고, 그래서 {조선일보}가 상업적으로 그것을 이용하려 했다는 것이 강 교수의 논지인 듯하다. “히트를 쳤다”는 표현을 연이어 재차 강조함으로써 강 교수는 자신의 의식 깊숙이 내면화된 상업주의를 은연중에 드러냈는데, 사실 {조선일보}의 상업주의는 그의 골목 상업주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하다. 대규모 할인매장에 대해 구멍가게 주인이 두려움을 느끼듯이, {조선일보}의 상업주의에 그가 느끼는 두려움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나는 히트를 치기 위해 책을 쓸 만큼 상업적인 감각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 한마디로 강 교수 같은 ‘인물’이 못 된다.

그러나, 상업주의적 표현을 용서한다면, 미안하지만 게바라를 팔아먹은 사람은 나다. {조선일보}에서 ‘아듀, 20세기’라는 시리즈의 혁명 편을 내게 청탁했을 때, 나는 체 게바라라면 쓰겠다는 단서를 붙였다. 게바라를 통해 보수적이기 십상인 {조선일보} 독자들의 냉전의식에 조그만 틈이라도 벌릴 수 있다면, 그것은 내 의무인 것이다. 시론의 경우에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강 교수는 {조선일보}의 의도 파악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임지현도 생각을 하고 나름대로 의도를 갖고 글을 쓴다는 생각은 미처 못한 모양이다. 적의 의도는 존중하면서 동지의 의도는 무시하는 것이 동지적 비판이라면, 동지보다는 차라리 적이 되는 편이 강 교수의 존중을 받는 길이겠다.

물론 강 교수의 논지를 빌면, 게바라를 팔아먹은 것은 궁극적으로 {조선일보}이다.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주체의 동기보다는 그 동기가 주어진 상황 속에서 굴절되어 나타나는 결과이다. “체 게바라:시장 자본주의`=`임지현:조선일보”라는 강 교수의 얼핏 이해하기 힘든 등식은 시장 자본주의가 게바라를 전유했듯이, {조선일보}가 임지현을 전유했다는 결과적 판단에서 나온 듯하다. 그러나 내가 그 글을 통해 {조선일보} 독자의 일부를 전유할 수 있다면, 그 손익계산서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나는 공인으로서의 내 글쓰기에 대한 사회적 책임감은 느끼지만, 그 때문에 {조선일보}의 독자가 늘고 또 그 때문에 {조선일보}가 번성할 만큼 내 글이 대단하다고 믿는 과대망상증 환자는 아니다. 단 그 글쓰기를 통해 {조선일보} 독자의 일부라도 전유할 수 있다면, 끼리끼리 밖에서 비판하고 돌려보며 자족하는 것보다는 그것이야말로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적 책무를 짊어지는 것이라 생각할 뿐이다. 내가 강 교수의 그 패거리 의식에 거리를 두는 것도 그 때문이다. {조선일보}에 글을 썼는가의 여부가 강 교수의 판단 기준이라면, 어떤 과정을 통해 어떤 글을 썼는가가 내 판단 기준이다.

그런데 자신의 판단 기준과 다르다고 해서 사실을 왜곡하고 억지로 추측하며 논리의 비약과 강변을 통해 파시즘으로 몰아붙이는 지적 폭력은, 강 교수가 {조선일보}를 너무 꼼꼼히 읽다보니 그 논리에 동화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강 교수가 {조선일보}라는 신문 자체를 이데올로기화함으로써 저지르는 오류이기도 하다. 그 결과 강 교수는 극우 헤게모니와 그 상징으로서의 {조선일보}라는 본말을 전도시킨다. {조선일보}에 실린 글은 모두 극우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것이고, {인물과 사상}이나 진보적 신문에 실린 글은 모두 극우 헤게모니를 파괴하는 것이라는 원시적인 이분법이 가능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것은 다시 비난받아야 할 것은 극우파와 그 일당들뿐이고, 우리 선량한 시민들과 진보인사들은 모두 피해자라는 자기 기만적 진단을 낳는다. 그것은 파시즘의 진정한 청산을 가로막는 국민적 변명의 기제이며, 진보가 보수화되는 기점이 된다. 자기 자신을 절대적 정의라고 착각하는 좌파들이 흔히 갖기 쉬운 도덕적 순수주의의 폐단이기도 하다. 파시스트들이 가장 애호하는 단어가 순수, 순결, 청결 등의 단어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고 싶다.

자신의 판단 기준을 강요하기 위해 강 교수는 또 유럽의 예까지 그럴 듯하게 들이민다. 내 친구들인 유럽의 좌파들이 극우 신문에 글을 기고하느냐는 것이다. 물론 안 한다. 그는 다시 묻는다. 그런데 너는 왜 하는가? 이것이 강 교수가 가하는 비판의 핵심이다. {조선일보}에 실린 내 글에 대한 그의 비판적 분석(?)이 억지로만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실은 수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비판의 핵심은 유럽의 좌파들은 안 그런데, 한국의 좌파인 너는 왜 그런가이다. 그럴듯한 비교이다. 그런데 강 교수는 자신의 행태 비교가 사회적 기반에 대한 비교를 무시하고 있다는 점을 놓치고 있다. 유럽을 기준으로 삼는 단순한 행태 비교를 강 교수의 오리엔탈리즘이라고 쉽게 단정하지는 않겠다. 지적하고 싶은 것은, 시민사회의 기반이 단단한 유럽에서는 어떤 극우 신문도 매우 제한된 영향력만을 가진다는 점이다. 오히려 좌파 신문이 지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유럽의 좌파들은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한국에는 진보적인 좌파 신문이 있는가? {한겨레신문}이 현실 정치의 문제에서 진일보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틀림없지만, 나는 그것을 좌파 신문이라 평가하지는 않는다. 간헐적으로 보여주는 진보적 성향에도 불구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우파적 민족주의 경향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김지하의 상고사 찾기 운동을 지지하는 논설위원의 주장이 논단에 버젓이 게재되는가 하면, 옷 로비 사건 보도태도 등에서는 사실상 극히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나는 좌파라면서, 그런 {한겨레신문}에도 글을 썼다. 강 교수는 왜 그 점은 비판하지 않는가? 사실 강 교수의 논리대로라면, {조선일보}에 실린 글이 모두 극우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것인 만큼 {한겨레신문}에 실린 글은 모두 진보 성향을 강화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조잡한 ‘지면 결정론’은 언론학자로서의 강 교수의 인식지평을 좁힐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건강한 균형감각을 훼손시킬 수밖에 없다. 아마 강 교수는 ‘오버한다’는 표현을 자주 쓰는 모양인데, 내가 볼 때 강 교수는 결코 오버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것은 편협한 ‘지면 결정론’의 당연한 결과일 뿐이다. 따라서 그것은 ‘오버’하는 것이 아니라 강 교수의 본질이다.

그런데 만약 유럽에서 좌파 신문이 존재하지 않으며 어떤 극우 신문이 {조선일보}와 같은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고, 또 좌파들에게 면을 제공한다면 유럽의 좌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반응은 다양할 것이다. 상황이 꼭 같지는 않지만, 20세기 초 부르주아 국가의 의회선거에 참여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전개된 좌파들의 논쟁이 추측의 실마리를 제공해 줄 수 있다. 독일의 사회민주당은 참여파와 거부파로 나뉘었지만, 결국 선거에 참여했다. 물론 참여파의 논지도 다양했다. 특히 돋보이는 것은, 승리를 확신할 수는 없지만 부르주아들이 사회주의 선전을 할 수 있는 연단을 주겠다는 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논리였다. 선거참여가 부르주아의 놀음에 끼어서 한몫 챙기겠다는 것이라며, 알량한 도덕적 순수주의를 내세워 끝까지 선거를 거부하는 강 교수 같은 사람들에게 당시 룩셈부르크가 한 말이 있다. “세상에 원칙에 매달리는 것보다 쉬운 일이 어디 있는가?” {조선일보}에서 받은 원고료야말로 내가 극우 헤게모니를 도와서 한몫 챙긴 증거라고 주장한다면, “그래, 챙겼다”고 시인할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강 교수는 {조선일보}야말로 세상을 재는 모든 가치척도의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조선일보}의 논객들에게 반공이 ‘종족의 우상’이 되었듯이, 강 교수에게는 {조선일보}가 ‘종족의 우상’이 되어버렸다. 자신의 논지에 배치되는 일체의 것을 아예 외면해 버린다는 점에서, {조선일보}와 강 교수는 닮은꼴이다.

나는 강 교수의 비판을 읽으면서, 구 소련의 보건장관 세마쉬코가 1925년 이즈베스치아에 쓴 신랄한 서평을 내내 연상했다. 비판의 요점인즉, 여성의 멘스는 옛날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여성의 신체에 미친 영향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발정기에만 성적 충동을 갖는 동물과는 달리 인간만이 유독 항상적인 성적 충동을 갖는 것은, 시장경제가 발전함으로써 여성이 사유재산화 되고 따라서 남자주인의 성적 요구에 언제라도 응해야 했기 때문에 멘스를 정기적으로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시장경제가 발전하기 이전에는 인간도 다른 동물처럼 일년에 한번만 짝을 지었다는 그의 강변 앞에 논리적 토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나는 그 세마쉬코 장관이 자본주의를 거부했기 때문에 일년에 한번만 섹스를 했는지 더 자주 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강변이 스탈린주의의 문화적 토대가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강 교수의 어처구니없는 {조선일보} 환원론에서 불현듯 세마쉬코의 이 우스꽝스러운 자본주의 환원론을 떠올린 것은 왜일까? 모든 일이 다 그렇게 쉽게 환원된다면, 생각하고 싸우고 글을 쓸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세마쉬코의 글처럼 피식 웃고 지나치기에는, 한국 사회의 “성역과 금기에 도전한다”는 강 교수의 작업들이 가지는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살리기에는 강 교수의 언어나 논리가 너무 조폭하다. 사실의 왜곡이나 논리의 비약은 둘째치고, “임지현은 큰 일 낼 사람”, “더 큰 일 내기 전에 따끔하게 손을 봐야겠다”는 식의 표현 등은 강 교수야말로 이미 “큰 일 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또 도덕적 심판자연 하는 그의 글 도처에는 자신만이 절대정의를 갖고 있다고 착각하는 자의 터무니없는 오만이 깔려 있다. 강 교수는 내가 이야기하는 ‘일상적 파시즘’의 단맛에 톡톡히 재미를 본 것 같다. “이상하게도 체질적으로 ‘일상적 파시즘’에 대한 거부감을 갖고 태어났다”는 강 교수의 자가진단이 옳다면, 그의 언어 폭력은 유감스럽게도 {조선일보}와의 투쟁 과정에서 그가 파시즘적 체질로 거듭나는 데 성공했음을 잘 드러내주는 징표이다. {조선일보}와의 첨예한 투쟁의 최전선에서 싸우다 그리 되었으려니 하고, 안타까울 뿐이다.

{조선일보}라는 작은 잣대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대는 강 교수의 모습에서 나는 차라리 비애를 느꼈다. {두더지의 앞발}이라는 김명수 시인의 시가 있다. 강 교수를 바라보는 내 심정이 바로 그렇다.

낙화생 밭을 갈아엎다가 두더지 한 마리를 보았어요…/더욱 놀란 것은 앞발이었어요. 아주 억세고 커다랐어요/몸에 비해 어울리지 않게 발달해 있었어요/그건 어두운 땅밑에 살아 남기 위해, 그건 어두운 땅밑을 헤쳐 가기 위해/저절로 그렇게 되었으려니 생각했어요. 아주 커다랗고 쓸쓸해 보였어요./

내 마음도 아주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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