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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죄선일보 > 월간 인물과사상이 파헤친 죄선일보 - 1998년4월호~2000년9월호


이 름 강준만
제 목 정운찬 한국 경제학자들의 무지 또는 탐욕
정운찬 한국 경제학자들의 무지 또는 탐욕

강준만


앨빈 토플러와 로버트 라이시

앨빈 토플러라는 미래학자가 있다. 나는 이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와는 다른 이유로 이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을 게다. 그러나 아무리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서도 배울 건 있다. 나는 토플러의 주장 가운데, 그가 경제학자들을 꾸짖는 걸 가장 좋아한다. 전부는 아닐 망정 대다수 경제학자들은 과학성과 전문성을 빙자한 편협성을 갖고 있다. 토플러는 무얼 꾸짖었던가?

토플러는 미국 대학에서 사용되는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학 교과서 중의 하나인 새뮤얼슨과 노드하우스 공저인 {경제학}의 최신판에는 눈을 피로하게 만드는 작은 활자로 28쪽이나 되는 긴 색인이 실려있지만, 이 색인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권력’이라는 단어가 없다는 걸 개탄한다. 도대체 권력을 언급조차 하지 않으면서 무슨 경제를 논하느냐는 것이다.

로버트 라이시라는 경제학자가 있다.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에서 노동장관을 지낸 걸로도 유명하지만, 민주당의 경제정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경제학자이다. 그러나 또다른 유명 경제학자인 폴 크루그먼은 라이시를 경제학자로 대접해주지 않는다. 라이시는 ‘정책기획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크루그먼의 저서 {폴 크루그먼의 경제학의 향연}(부키, 1997)에는 라이시에 대한 혹독한 비판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그러나 라이시가 어떤 사람들로부터 어떤 욕을 먹건 그에게서도 배울 건 있으리라.

나는 라이시가 경제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경제학을 공부하는 것 만으론 부족하다며 법학과 정치학을 동시에 공부한 걸 높게 평가한다. 바로 이것 때문에 라이시는 크루그먼과 같은 경제학자들로부터 비아냥의 대상이 되고 있긴 하지만, 나는 경제학자들이 학제적 연구에 더욱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오히려 라이시에게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미국 이야기만 할 거 뭐 있나. 한국 이야기를 해보자. 지금도 여전히 그런 점이 있지만, 과거 정권들에서 대학 교수 출신으로 정관계 진출이 가장 활발한 분야는 경제학이었다. 그걸 보자면 한국의 경제학자들은 ‘권력’이라든가 ‘정치’에 대해 탁월한 감각을 갖고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지금 그런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정관계 진출을 한사코 마다하면서 국익(國益)과 사회정의 실현을 위해 사회 참여를 열심히 하는 경제학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나는 이들의 무지 또는 탐욕을 지적하려고 한다.

언론의 ‘이용’에만 미쳐있는 경제학자들

경제에 있어서 언론은 매우 중요하다. 언론이 정부의 경제정책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거니와 언론 본연의 ‘감시 기능’을 통해 경제에 관한 경고를 할 수도 있다. IMF 사태도 언론이 제 기능만 했다면 사정은 좀 달라질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한국 언론의 경제 보도는 어떠한가?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문제가 대단히 심각하다’는 게 공통된 의견이다. 지금 나는 짐작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나의 자료 파일에 수북히 쌓인 자료들을 근거로 하는 말이다. 그건 언론인들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언론의 경제 보도와 논평이 안고 있는 문제는 사회적 의제로 떠오르지 않는다. 일반 대중의 손에까지 닿지 않는 언론비평지들에서 지적된 문제들도 총체적인 건 아니다. 심도 있는 거라고 보기도 어렵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언론의 경제 보도의 문제를 지적하는 경제학자가 전무하다는 점이다. 언론학자들이나 언론비평가들은 경제전문가가 아니라 경제보도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기 어렵다. 반면 경제를 잘 아는 경제학자가 경제보도의 문제를 거론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니 아주 쉬운 일이다. 그러니까 언론의 경제보도의 문제점은 경제학자들이 지적해줘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경제학자들은 오직 언론의 ‘이용’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 그들은 정부를 상대로만 게임을 하며 언론을 그 게임의 도구로만 보는 것이다. 속된 말로 이야기해서 그들은 언론플레이에만 미쳐 있는 것이다. 이는 진보적인 성향의 경제학자들이나 경영학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재벌개혁에 완강히 저항하는 극우 신문에 글을 기고하는 것에 대해서도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다. 차라리 이들이 철저하게 탈(`脫`) 정치화된 사람들이라면 이해가 가겠는데, 그것도 아니니 답답하다는 것이다.

나는 그간 이 문제를 여러 차례 지적해왔지만, 이들은 계속 들은 척도 않는다. 나를 미친놈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자기 이름 날리는 데에 정신이 팔려 그런 사람의 경우 ‘탐욕’을 문제삼아야 할 것이고, 좋은 뜻을 갖고 있지만 정말 뭘 몰라서 그러는 거라면 ‘무지’를 문제삼아야 할 것이다. 나는 앞으로 이들에 대한 실명 비판을 계속할 것이다. 우선 첫 번째 손님으로 서울대 경제학부 정운찬 교수를 모신다.

정운찬이 준 ‘신선한 충격’

정운찬 교수는 활발한 기고 활동으로 오래전부터 경제학자들 가운데선 비교적 대중적 지명도가 높았지만, 그가 언론매체들의 화려한 각광을 받게 된 건 1998년 3월 한국은행 총재직을 고사했다는 것이 널리 알려지면서부터였다. 이건 경제학자들의 정관계 진출이 지나치게 활발한 한국적 풍토에선 보기 드문 미담(`美`談`)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그의 인기가 어떠했는지 3개 시사주간지의 기사 일부를 인용하도록 한다.

서울대 사회과학관 636호에는 전화벨이 끊이질 않았다. 이 방 주인 경제학과 정운찬(50) 교수는 2`∼3분마다 걸려오는 전화를 받느라 말을 잇지 못했다. 결국 전화 받기를 포기하고야 제대로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정 교수는 최근 새 정부의 한국은행 총재직 제의를 거절해 화제를 모았다. 상아탑을 뛰쳐나와 권력을 좇는 것을 당연시 하는 그동안의 교수 사회 풍토에서 보면 ‘이단아’가 아닐 수 없다. 그런 그를 지난 3월 6일 오전 연구실에서 만났다.

전화는 주로 “우울한 세상에 신선한 충격이다” “앞으로 계속 그렇게 살아달라”는 등 통쾌함을 토로하거나 격려하는 내용들이었다. …… “저는 학교에서 후학들을 키우며 ‘건설적 비판’을 통해 한국은행과 새 정권의 개혁을 돕는 길을 찾을 생각입니다.” 이번 개혁이 실패하면 한국에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그는 벌써부터 개혁에 저항하는 수구세력들의 발호를 지적했다. “이미 외국 언론은 한국의 개혁 실패를 우려하고 있습니다. 요즘 한나라당 행태가 재벌의 조종에 따른 것이라고 일본 아사히신문이 지적했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새 정부 개혁에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썼습니다.” 한국 교수사회의 ‘원칙과 자존심’을 지켜나가겠다는 정교수의 향후 활동이 주목된다.

그가 문민정부 이후 끊임없이 정치권으로부터 짝사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정교수가 한 번도 ‘외도’를 한 적이 없는, 가장 평판좋은 경제학자라는 점이다. 한국은행 조사부를 거쳐 미국에 유학해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줄곧 학교에만 머물러 왔다. …… 경제학자로서는 드물게, 87년 서울대에서 호헌 철폐 서명을 주도한 전력도 있다. “정교수는 마치 예전의 조순 교수가 그랬던 것처럼, 그의 세대를 대표하는 경제학자라는 짐을 짊어지고 있는 셈입니다.” 민간 경제연구소에 근무하는 한 후배 경제학자의 말이다.

정운찬은 화려한 ‘뉴스메이커’

적어도 그때부터 정 교수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뉴스가 되었다. 언론매체들이 중시하는 ‘뉴스 가치’에 관한 한 그는 단연 독보적인 존재이다. 그 어떤 경제학자도 감히 정 교수의 위치에 필적하지 못한다. 이제 나는 그런 사례들을 몇 가지 열거하겠다.

그 전에 내가 그렇게 하고자 하는 뜻을 독자들이 확실하게 아시면 좋겠다.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언론매체의 접근과 이용에 있어서 한국만큼 교수(물론 주로 서울대를 비롯한 유명대학 교수)의 지위가 높은 나라는 이 세계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정 교수의 경우엔 더 말해 무엇하랴. 무슨 말인고 하니, 정 교수는 굳이 {조선일보}에 글을 기고하지 않더라도 다른 신문들이 그의 글을 쌍수를 들어 환영할 매우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말이다. 정 교수의 ‘뉴스 가치’가 어떠한지 몇 개의 기사를 인용하기로 한다.

정운찬(서울대) 교수는 김대중시대의 케인스인가---. 1930년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미국 대공황을 타개해나갈 때 당대의 영국 경제학자 존 케인스는 루스벨트의 ‘공공사업을 통한 실업구제책’을 보고 36년 ‘일반이론’이라는 저서로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었다. 두 사람은 편지를 교환하는 등 교분을 나눴다. 정교수는 김대중대통령과 특별한 연을 맺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DJ 경제정책’을 자신의 학문적 경험을 토대로 적극 뒷받침하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다. 지난 13일 재경부 연찬회에서는 사무관급 이상을 상대로 ‘정부의 적절한 시장개입론’을 대담하게 펼쳐 보였다.

빅딜과 관련해 갈수록 오해가 커지고 있는 세간의 궁금증이 하나 있다. “김대중 대통령과 박태준 자민련 총재로 대표되는 정치권 인사들에게 빅딜의 당위성을 역설한 이론가와 설계자는 누구인가.” 만일 현 정부가 빅딜 구상이라는 충격적 조처를 오래 전부터 추진해 왔다면, 정치권 인사만으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 정권의 예처럼 외부 전문가 집단이 참여한 것이 아닐까. 정운찬 교수(서울대·경제학)를 그 대표적 인물로 지목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빅딜 구상이 구체화하던 시점에 공교롭게도 그가 이와 관련해 공개 발언을 두 차례 했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의 현실과 개혁방향 등을 놓고 강봉균 청와대 경제수석과 정운찬 서울대 교수가 일대 논전을 벌였다. 이들은 24일 사단법인 나라발전연구회 주최로 열린 ‘국제통화기금 1년의 점검과 우리의 대응전략’에 관한 연구포럼에서 주제발표자와 토론자로 만나 몇 가지 핵심적인 문제들을 놓고 팽팽한 접전을 벌였다.

재벌개혁을 놓고 강봉균 청와대 경제수석과 일전을 치렀던 정운찬 서울대 교수가 이번에는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과 논쟁을 벌였다. 정교수와 이위원장은 26일 KBS 제1라디오의 한 프로그램에 차례로 출연, 정교수는 ‘재벌개혁이 너무 늦다’고 비판했고 이위원장은 ‘야생마 길들이기론’을 펴며 5대 그룹 구조조정이 곧 가시화될 것이라고 응수했다.

최근 정운찬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가 ‘정부주도하의 과감한 경제개혁’을 촉구하는 글을 발표, 학계와 재계에 논쟁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정교수는 최근 발간된 무크지 「당대비평」 5호에 기고한 ‘한국자본주의의 전환을 위한 제언’이란 글에서 ‘개혁지향적 인물들로 강력한 경제팀을 구성해 국세청 검찰 공정위 금융감독위 등의 협조를 받아 강력한 재벌정책을 구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벌 비판론자인 정운찬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가 대우그룹이 운영하는 대우재단 이사직을 고사한 것으로 9일 밝혀졌다. 대우재단은 지난달 16일 정 교수를 임기 2년의 신임이사로 선임했다는 내용을 언론을 통해 공개한 바 있다. 정 교수는 이날 “당초 대우재단이 학계를 지원하기 위해 설립한 대우학술협의회 이사직을 맡으라는 줄 알았으나 이사회장에 가서 대우재단 이사로 내정된 것을 알았다”며 “참석자들의 입장을 감안, 그 자리에서 고사하지는 못하고 나중에 이사취임동의서 제출을 거절했다”고 말했다. 정교수는 “대우학술협의회가 과거 자신이 회원인 경제사상연구회를 지원해준데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한다”면서도 “재단측이 이사 선임 사실을 언론에 알려 홍보용으로 활용한 점은 불쾌한 일”이라고 말했다. 대우재단측 관계자는 최근 정교수에게 사전동의없이 보도자료까지 배포한데 대해 사과했으나 정교수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운찬은 ‘대표적인 반(`反`) 재벌 경제학자’

이 정도면 정 교수가 대단히 화려한 ‘뉴스메이커’라는 데에 기꺼이 동의하실 거다. 무크지에 글 하나 써도 그게 곧장 뉴스가 되는데, 책을 내면 어떻겠는가. 그가 책을 내면 출판 뉴스가 아니라 경제 뉴스로 다뤄진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기사를 보자.

“대우사태로 은행들이 다시 부실화될 우려가 있는 가운데 금융 시스템 전체의 안정을 위한 제도적인 접근방법을 제시한 서울대 경제학부 정운찬 교수의 ‘예금보험론’이 다시 관심을 끌고 있다. 정 교수는 ‘경영에 실패한 개별은행은 도산해야하고, 정책당국은 다만 개별 은행의 부실이 전체 산업으로 전염되는 것을 방지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소액예금자를 보호하기 위한 예금보험제도를 확립, 자본주의 금융시장이 가지는 내재적 불완전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예금인출사태’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막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가 한국은행 총재가 되었다 해도 지금처럼 언론매체의 각광을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정 교수에 대한 언론매체의 각광은 다른 이유들도 있겠지만 우선적으론  한은총재직을 고사한 그의 ‘참신성’에서 연유된 것 같다. 예컨대, 정 교수는 1997년에 {한국경제 죽어야 산다}(백산서당)는 제목의 책을 냈는데, 이 책에 대한 서평에서 {서울경제신문} 이백만 정경부장은 정 교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칭찬을 하였다.

“정교수는 김대중 대통령 취임후 청와대로부터 한국은행 총재를 맡아달라는 제의를 정중하게 거절했다. 중앙은행 총재를 맡을 만한 준비가 안됐고 학자로서 상아탑을 계속 지키겠다는 게 그의 변이다. 정교수는 6공시절에도 청와대로부터 금융통화운영위원(차관급) 자리를 권유받았으나 줄곧 금융위원의 상근화를 주장한 학자가 비상근직(현재는 상근직)을 수락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정교수의 경제이론에 반대하는 학자들도 그의 논리적 일관성과 처신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고 있다. 경제에는 단절이 없다는 점에서 정교수의 칼럼집은 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점을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데 필요한 길잡이로 손색이 없다.”

아예 이 서평에서 지적된 정 교수의 재벌관도 소개하는 게 좋겠다. 정 교수가 {조선일보}에 글을 기고해선 안 된다는 나의 주장은 부분적으론 {조선일보}가 재벌개혁에 완강히 저항하는 신문이라는 점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 교수의 재벌관은 어떠한가?

“정교수는 대표적인 반(`反`)재벌주의 경제학자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재벌이란 무엇인가>라는 칼럼(95년 12월)은 그의 재벌관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정교수는 이 칼럼을 통해 재벌의 포로가 되어 버린 한국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지적한 뒤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재벌개혁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정교수는 ‘힘이 한 군데(재벌)로 몰리면, 권력의 분산과 견제와 균형을 전제로 하는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경제적, 나아가서는 정치적 민주주의를 위해서라도 재벌개편위원회(가칭)를 만들어 나라의 균형을 잡을 것을 긴급 제안한다’고 밝혔다.”

재벌관을 이야기 한 김에 정 교수의 1999년 저서 {한국경제 아직도 멀었다}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뉴스메이커} 박성휴 기자는 이 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금방 숨이 넘어갈 듯 할딱거릴 땐 ‘죽어야 산다’고 타는 장작에 기름을 붓더니 고비를 넘기고 숨을 돌리려고 하니깐 ‘(살려면) 아직도 멀었다’며 찬물을 끼얹는다. 서울대 경제학부 정운찬 교수는 그런 사람이다. 97년 말 IMF 환란 직후 {한국경제 죽어야 산다}를 펴냈던 그가 최근 {한국경제 아직도 멀었다}를 내놓았다. {…죽어야…}가 IMF 사태를 초래한 한국 경제의 문제점을 지적했다면 {…아직도…}는 경제 주권 상실이란 치욕을 당하고서도 개혁을 머뭇거리는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 정 교수는 IMF 사태 이후에도 재벌의 행태는 전혀 변함이 없다고 맹비난했다. 경쟁력 강화 대신 여전히 살찌우기에 급급하고 계륵이 된 부실 기업을 정리하기보다는 ‘같이 죽자’며 은행을 협박하는 물귀신 작전을 쓰고 있다. 정부가 빅딜하라며 으름장을 놓아도 고민하는 모습만 보일 뿐 속으론 ‘정권은 유한하고 재벌은 영원하다’고 뇌까리고 있다.”

‘탈(`脫`) 정치’, ‘탈(`脫`) 여론’ 경제가 가능한가?

이제 핵심적인 이야기로 들어가자. 정 교수가 {조선일보}에 글을 기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니 반대로 묻는 게 더 상식적인 질문이 될지도 모르겠다. 정 교수가 {조선일보}에 글을 기고하면 안 된다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이미 한두 가지 중요한 이유를 밝혔지만 다시 정리해 말씀드리겠다.

{조선일보}는 재벌개혁에 반대하는 신문이다. 재벌개혁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정 교수로서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조선일보}에 글을 기고하고 싶은 욕심을 가질 수 있겠다. 그러나 그런 욕심은 정 교수의 글이 {조선일보}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꿀 가능성이 있을 때에나 의미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제로다. 여기서 경제학자들은 순진한 척해선 안 된다.

{조선일보}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재벌개혁을 반대한다고 외칠 만큼 미련하진 않다. 정 교수와 같은 사람의 글을 게재함으로써 적당히 공정한 척 냄새를 피우면서 그렇게 해서 얻은 독자들의 신뢰를 근거로 결정적인 경우에 이르러 재벌개혁에 타격을 입히고자 하는 것이다. 재벌개혁 문제를 색깔론으로까지 몰고 가는 {조선일보}의 작태를 보지 않았는가.
정 교수가 정녕 재벌개혁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다면 언론매체들이 탐을 내는 자신의 높은 ‘뉴스 가치’ 또는 ‘상품성’을 다른 방식으로 이용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조선일보}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재벌개혁에 대해 열려있는 신문들만을 상대로 해 그 신문들의 힘을 키워주는 것이다.

비단 재벌개혁 문제만이 아니다. 자신이 경제학자라는 이유만으로 재벌개혁과 극우주의를 별개의 문제로 보려는 건 온당치 않다. {조선일보}는 그 극우주의 하나만으로도 사회정의를 추구하는 모든 경제학자들이 아예 상대를 하지 말아야 할 신문인 것이다.

경제에 있어서 ‘탈(脫) 정치’, ‘탈(脫) 여론’이 가능한가? 그게 가능하지 않다는 건 정 교수 자신이 더 잘 아실 것이다. 그렇다면 일개 신문이 재벌개혁을 가능케 할 수도 있고 불가능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점에까지 눈을 돌려야 할 것이다. 나는 여기서 정 교수를 위해 내가 {권력과 리더쉽 2}에 썼던 <폴 크루그먼: 경제는 언론플레이가 아니다>의 일부를 인용해야겠다. “{월 스트리트 저널}의 농간”과 “「침묵의 카르텔」을 깨자”는 소제목하의 글이 바로 그것이다.

{월 스트리트 저널}의 농간

크루그먼의 주장을 어떻게 생각하건 그의 책은 영향력 있는 일개 신문 하나가 일국의 경제 정책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잘 보여주고 있다.

크루그먼은 레이건 행정부의 이념적 토대가 되었던 공급 측면의 경제학을 비판하면서 1980년에 이르러 전통적인 자유주의 신문은 지루하면서도 감각적이 된 반면 보수주의 신문은 노골적이고 공격적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특히 {월 스트리트 저널}의 사설이 급진적인 우파 경제학의 온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사설을 담당했던 로버트 바틀리는 {저널}지가 경제 현안에 대해선 신중하거나 공정해서는 안 될 것임을 분명히 하였으며 그가 믿고 있는 것에 대해 적극적인 캠페인을 전개했다고 한다.

크루그먼은 바틀리의 그러한 캠페인이 “1970년대에 걸쳐 한 줌에 불과하던 우상 파괴적인 경제학자들의 사상을 ‘공급 측면’의 경제학이라고 알려지게 된 주요 이데올로기로 격상시켜 냈던 것”이라고 말한다. 바틀리 주변에 모여 있던 몇몇 공급 중시론자들은 “처음에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경제 신문을, 그리고 다음에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의 경제 정책을 조종하게 되었다”는 게 크루그먼이 내린 결론이다.

크루그먼의 주장을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 사회에서 언론매체와 지식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극심한 수요와 공급의 괴리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크루그먼은 {팝 인터내셔널리즘}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런 글을 쓸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글을 발표할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 1993년 하반기에 몇 번의 좋은 기회가 생겼다.”

크루그먼은 그런 기회를 일일이 열거하고 있다. 이건 무얼 말하는가? 크루그먼처럼 잘 나가는 지식인도 자신의 글을 발표할 수 있는 매체를 잡는 데에 늘 신경을 써야 한다는 말이다. 지면은 한정돼 있는데 글을 싣고 싶다는 지식인들은 흘러 넘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식인은 언론의 비위를 맞추지 않을 수 없다. 크루그먼은 {경제학의 향연}에서 자신과 {뉴욕 타임스}지 사이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992년 나는 {뉴욕타임즈}에 기고문을 쓰면서 생산성 향상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그 때 내가 상대하였던 편집 차장은 나에게 미국이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기 위해’ 생산적일 필요가 있다는 점을 ‘설명’해야 한다고 고집하였다. 그는 그런 문구가 추가되지 않는다면 나의 글을 싣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래야만 생산성의 중요성을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꼭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크루그먼이 왜 그렇게 언론을 등에 업고 대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제전문가들에 대해 비판적인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미국이나 한국이나 모두 ‘간판’이 좋고 사교를 잘하고 언론플레이를 잘하는 지식인이 큰 대중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한국의 경우가 훨씬 더 심하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더욱 언론과 지식인들 사이에 ‘실명 비판’이 필요한 게 아닐까?

‘침묵의 카르텔’을 깨자

크루그먼이 지적한 {월 스트리트 저널}의 농간에 대해 ‘정말 그랬을까?’라고 의심할 필요는 없다. 이미 우리 나라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공정한 신문은 바로 {한겨레}다. 이건 내 평가가 아니다. 언론학자들과 문인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여러 번 확인된 사실이다. {한겨레}는 진보적 관점에서 잘못된 것에 대해 반격만 가할 뿐 주요 현안에 대해 공격적인 캠페인을 벌이는 경우는 드물다.

반면 우리 나라에서 신중성과 공정성을 내팽개치고 그 어떤 사상과 이익의 수호 또는 전파를 위해 가장 공격적인 캠페인을 전개하는 신문은 바로 {조선일보}다. 이 점이 중요하다. 사실 대중에 대한 영향력으로만 따지자면 TV가 신문보다 훨씬 강력하지만 TV는 매우 소심하고 소극적이라 권력의 특별한 부름에 응하지 않는 한 사회적 현안에 대해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이는 신문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소심하고 소극적인 신문들의 발행부수의 총합이 {조선일보} 발행부수의 몇 배가 된다 하더라도 그 영향력은 공격적인 {조선일보}의 영향력에 비해 떨어질 수 있다. 지난 대선 기간 중에 {중앙일보}가 {조선일보}가 92년 대선시 했던 못된 짓의 흉내를 내자 일각에서 {중앙일보}가 박력이 있어서 읽을 만하다는 말이 나왔다는 것도 결코 가볍게 흘려 넘길 일이 아니다. 신문시장에선 신중성과 공정성을 무시하는 ‘악화’가 신중성과 공정성을 존중하는 ‘양화’를 구축하게 돼 있다. 그간 {조선일보}는 이 점을 100% 활용해 한국 신문시장의 정상을 차지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이건 참으로 딜레마다. 모든 언론매체가 시장에서 살아남고 승리하기 위해 신중성과 공정성을 내던지고 각자의 편향성에 따라 공격적인 캠페인성 기사와 논평을 양산해낸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나 그렇다고 일부 언론매체만 계속 그런 재미(`?`)를 보게 해 여론 형성의 리더십을 행사하게 한다면 그건 더욱 큰 문제가 아닌가?

나는 차선의 선택으로 모든 언론매체들이 그간 상호 비판을 금기시해 온 이른바 ‘침묵의 카르텔’을 깨고 진정한 자유 경쟁에 임할 것을 촉구한다. 비판과 반론과 재반론을 무성하게 쏟아내자. 가면을 쓰고 외곽을 때리거나 외부 필자의 선별을 통해 음모적인 캠페인을 전개하는 짓을 당장 그만두자.

각자 정체를 정정당당하게 밝혀라. 엉뚱하게 박정희 미화를 하지 말고 유신시대가 그리우면 그립다고 말하라. 5공 인사들을 필자로 내세워 엉뚱한 소리하게 하지 말고 당당하게 5공 시절이 그리우면 그립다고 말하라. 그래야 본격적인 반격이 가능하고 뜨거운 논쟁이 불붙는다. 현 경제난국의 근본적인 원인도 논쟁의 부재에 있는 게 아니던가? 나라 망치는 ‘가면 무도회’는 이제 제발 그만 하자. ‘비판 실명제’와 그에 따른 치열한 논쟁과 책임 규명은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적 과업이다.

{조선일보}와의 정(`情`)을 끊어라

그런 내용이었다. 정 교수께서 공감하실 수 있는 내용일 것이라고 믿는다. 정 교수에게 간곡히 호소한다. 이 글의 무례함에 대한 비판은 달게 받겠다. 그러나 제발 공사(`公`私`)를 구분하시어 {조선일보}를 더 이상 상대하지 마시라는 나의 요청에 대한 생각은 꼭 밝혀 주시기 바란다.

정 교수는 이미 오래전부터 {조선일보}의 단골 기고자였다. 물론 다 좋은 내용의 칼럼이었다. 그러나 나는 최근 {조선일보} 1999년 11월 25일자 21면에 실린 <20세기 사상을 찾아서> 시리즈에 정 교수가 경제학자 존 메이나드 케인스에 관한 글을 기고한 것을 보고선 이제 더 이상 침묵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 교수도 처음엔 아주 좋은 뜻으로 {조선일보}에 기고를 했겠지만, 자꾸 기고를 하다보면 기고를 하는 신문과 정들기 마련이다. 그 글도 그래서 나왔을 게다.

나는 정 교수가 경제학자는 경제에 관한 이야기만 하면 되며 언론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버려 주시기 바란다. 물론 언론은 단지 이용의 대상일 뿐이라는 생각을 버려 주시라는 거다. 더 욕심을 부린다면, 정 교수를 따르는 그 수많은 후배와 제자들은 한국의 최고급 인력이라는 점에 주목하시어 그에 따른 사회적 사명을 갖고 언론의 경제보도를 전문적으로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비판하는 프로젝트를 주도해 주시길 간절히 바란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정 교수가 극우신문 {조선일보}의 경쟁력을 높여주는 도구로 이용된다는 건 통탄을 금치 못할 일이다. 그러나 그걸 ‘통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실 이게 더 통탄을 금치 못할 사실이다. 내가 주제넘게도 ‘경제학자 감시’에까지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나에 대해 너그러움을 가지실 필요는 없다. 마음껏 나를 욕하시라. 그러나 내가 제기한 문제만큼은 ‘개똥’이라 생각하지 마시고 한번쯤 진지하게 고민해주실 것을 당부드린다.

{조선일보}에 대한 백치(`白`痴`)같은 생각

글을 끝냈는데, 정 교수의 칼럼이 {조선일보}에 또 하나 올라와 그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조선일보} 2000년 1월 10일자 7면에 <‘제2의 위기’ 막으려면>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다. 이 칼럼은 모처럼 정치를 건드려 정 교수의 무지 또는 탐욕을 지적하기가 더 용이하게 생겼다. 이 칼럼의 마지막 부분을 인용한다.

“잃기는 쉬워도 얻기는 힘든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려면 획기적 조치가 필요하다. 대통령은 총선에 신경쓰기보다는 ‘죽으면 살리라’는 마음가짐으로 당보다는 국익을 위해 일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TV 회견으로 생산적 복지를 말하는 시혜자의 모습이 아니라 민생현장에서 국민의 목소리를 직접 들으려는 겸허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그리고 측근 참모들을 개혁적인 인사로 일신해야 한다. 그러면 다시 국민은 대통령 편이 되고, 경제정상화는 본 궤도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기득권층의 온갖 저항을 국민이 막아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제2의 위기가 오지 말란 보장이 없다. 대통령의 결단을 기대한다.”

정말 아름다운 말씀이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정 교수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기득권층의 온갖 저항을 국민이 막아준다고? 입에 침이나 바르고 그런 소릴 하는 건가? 정 교수는 기득권층의 가장 대표적인 집단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조선일보}라는 건 꿈에서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가? 무시 못할 규모의 국민의 눈을 {조선일보}가 지배하고 있는데, 무슨 수로 국민이 기득권층의 온갖 저항을 막아준단 말인가? 게다가 정 교수는 {조선일보}의 상품성을 높여주기 위해 한몫 단단히 거들고 있지 않은가? 그런 사람이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건가? 이건 순진한 건지 위선적인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측근 참모들을 개혁적인 인사로 일신하라고? 정 교수에게 묻겠다. {조선일보}는 김대중 정권은 말할 것도 없고 김영삼 정권 때부터 정관계에 진출한 개혁적인 인사에 대해선 집요한 색깔 공세를 취해 왔다. 정 교수는 단 한번이라도 그들을 위한 옹호를 해준 적이 있는가? 단 한번이라도 {조선일보}를 비판한 적이 있는가? 뭐라고? 나는 경제학자이기 때문에 그건 내 소관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일관성이나 지켜라. 당신 소관도 아닌 일에 대해 왜 이러쿵저러쿵 떠드는가? 정 교수는 {조선일보}에 대한 그 백치(白痴)같은 생각을 버리든가 아니면 위선(僞善)을 더 이상 저지르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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