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안티조선 커뮤니티 우리모두 - 조금씩.. 천천히.. 하지만 악랄하게.. 또박또박..
관리자 메일  |   사이트맵  |   연결고리  |   관리 원칙   
공지사항
안티조선 우리모두 종료 예...
우리모두 사이트 종료 관...
제발 이상한 공지사항좀 ...
우리모두 후원
[2020년] 우리모두 은행 1...
[2020년] 우리모두 은행 1...
[2020년] 우리모두 은행 1...
쟁점토론 베스트
 안티조선 우리모두 종료 예정 안내 (~'21.01.15)
 우리모두 사이트 종료 관련 논의 진행 중입니다.
 미디어법과 다수결
 광복절 앞날 읽은 신채호의 글
 8개의 나라중 5는 같은 편 3은 다른편.
 균형이 다시 무너졌군. 간신히 잡아 논건데,
 바뀌고 바뀌고.. 또 바뀌는군..
 악인은 너무나 쉽게 생겨나고.. 착한 사람은 쉽게 생...
 태평성대에 관하여
 음 ...이 냥반도 군대 안갔어?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는 한국의 노동자들 혹은 노동단체...
 세상 참 불공평하지 -박재범을 보며
 천재면 뭐하나?
 궤변론자 최장집
 국정원고소사건 환영!!

접속
통계
오늘 105
전체 7093012
HOME > 죄선일보 > 월간 인물과사상이 파헤친 죄선일보 - 1998년4월호~2000년9월호


이 름 송기도
제 목 21세기 칠레의 조타수, 라고스 대통령
21세기 칠레의 조타수, 라고스 대통령

송기도 │전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반복되는 역사(`?`)와 ‘역사의 심판’

칠레 역사상 처음으로 치러진 2000년 1월 16일의 대통령 결선투표에서 라고스(Ricardo Lagos) 후보가 51.32%를 얻어 48.68%를 얻은 라빈(Joaquin Lavin)을 어렵게 제치고 21세기의 칠레를 이끌어갈 새로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에 앞서 시행된 작년 12월 12일 대통령 선거에서 피노체트를 지지하는 보수 우익연합의 라빈 후보는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사회당의 라고스 후보와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백중세를 보였다. 라고스 후보가 47.96%를 얻어 47.52%를 얻은 라빈 후보를 0.4%차로 앞섰지만, 과반을 넘지 못해 2000년이 시작되자마자 결선투표를 치르게 된 것이다. 이 같은 선거결과는 라고스 후보가 5% 이상의 차이로 쉽게 승리할 것이라는 모든 여론조사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선거승리를 축하하는 ‘소란’이 칠레 전역에서 밤새 계속됐다.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거리를 꽉 메운 자동차는 경적을 울리며 라고스의 당선을 환호했다. 대통령궁 앞의 광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리고 공동 집권여당인 기독민주당(PDC) 당사 앞에서는 신나는 라틴 음악이 연주되고 수천 명의 사람들이 춤을 추며 승리를 만끽했다. 이 같은 집단적 환희의 기쁨은 12년 전인 1988년 10월 피노체트의 영구집권을 위한 국민투표가 부결되었을 때 이후 처음이었다.

이로써 아옌데 대통령 이후 27년 만에 또다른 사회주의자인 라고스가 대통령 관저인 모네다궁(Palacio de Moneda)을 차지하게 되었다. 2000년 3월 11일에 역사적인 정권교체가 이루어질 것이다. 마치 30년 전 기독민주당의 프레이 대통령(Eduardo Frei)이 사회당의 아옌데(Salvador Allende) 대통령에게 대통령기를 넘겨주었던 것처럼, 기독민주당의 현 프레이(Eduardo Frei)대통령이 사회당의 라고스에게 대통령기를 넘겨줄 것이다. 우연의 일치이다. 그리고 아옌데 정부를 유혈 쿠데타로 무너뜨린 ‘인간 도살자’ 피노체트가 이제 30년의 시간이 흘러 아옌데의 후계자인 라고스에 의해 단죄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라고스의 승리는 사회당의 ‘단순한’ 승리가 아니라, 지난 10년 동안 서서히 진행된 민주화의 결과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1989년 민주화 이후 지속되고 있는 좌파와 중도파 정당의 연합인 ‘민주연합’(Concertacio´n)의 승리인 것이다. 그리고 이번 선거는 민주화 이후 치러진 세 번째 대통령 선거이지만, 피노체트가 없는 상황에서 치러진 첫 번째 선거이기도 하다. 어쨌든 이로써 칠레 정치는 민주화를 위한 커다란 걸음을 한발 더 내딛었다.

당선이 확정된 직후 라고스의 첫 번째 성명은 “오늘밤 이 자리에 함께 있어 줘 고맙습니다. ‘칠레 자존심의 대표’이신 오르뗀시아 부시 여사(아옌데 전대통령 미망인), 이 자리에 함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우리는 승리했습니다”로 시작되었다. 이후 그의 연설은 “피노체트에게 심판을!”이라고 외치는 군중의 함성으로 수차례 중단되었다.

피노체트의 간담을 서늘케 한 ‘라고스의 손가락’

라고스는 1938년 3월 2일 산티아고시 중산계층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무척 귀한 아들이었다. 지금도 살아 계신 103살의 어머니가 42살에 어렵게 얻은 아이였으니 어떠했겠는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외아들이 가지는 ‘교만함’이 몸에 잔뜩 배어 있다. 이젠 우리 나라도 자녀수가 적어 외아들을 당연한 것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지만, 20∼30년 전만해도 외아들은 조금 과장해서 이야기하면 장가들기도 쉽지 않았다. 부모가 지나치게 ‘애지중지’ 키우다보니 교만하고 자신만을 위하고 남을 배려하지 않는 성격이라는 것이 외아들에 대한 일반적 판단이었다. 그러니 누가 시집가려고 했겠는가?

국립학교(Instituto Nacional) 학창 시절 라고스의 별명은 ‘홀쭉이’(Flaco)였다. 몹시 마른 학생이었나 본데 45년이 지난 지금도 마른 모습이긴 마찬가지다. 라고스는 웅변을 잘하고 영리하며, 성적도 뛰어난 ‘팔방미인’이었다.

1955년 칠레대학교(Universidad de Chile) 법대에 입학한 라고스는 학생운동을 열정적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법대 학생회장이었고, 정치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학교를 졸업한 22살의 라고스는 우익 사업가의 딸인 베버(Carmen Weber)와 결혼했다. 그리고 장학금을 받아 미국 듀크대학으로 유학하여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했다.

베버와의 사이에 두 아이를 두었지만 결혼 생활은 순탄치 못해 미국에서 귀국하자마자 바로 헤어지고 말았다. 결혼 6년 만의 일이었다. 라고스의 생애에서 가장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그때 현 부인인 루이사(Luisa Dura´n)를 만나게 되었고 서로를 이해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결합하였다.

사람들에 대해 신랄한 비판으로 유명한 평론가인 모레이라(Ivan Moreira)조차도 “영리하고 민첩한 그리고 능력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할 만큼 라고스는 인정을 받고 있었다. 미국에서 귀국한 라고스는 칠레대학 경제학과에서 강의를 하였으며, 대학 부설연구소인 ‘정치·행정·경제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였다.

세계 최초로 선거를 통해 집권한 사회당 정권인 아옌데 정부하에서 라고스는 ‘중남미 사회과학 대학’사무총장으로 또 ‘중남미 사회과학위원회’ 국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1973년 아옌데 대통령에 의해 소련 대사로 지명됐으나, 의회의 동의를 기다리는 동안 피노체트에 의한 쿠데타가 발생해 임지로 떠나기는커녕 의회의 동의도 받지 못하고 말았다.

라고스는 1974년 국제기구 직원 자격으로 피노체트의 마수를 피해 칠레를 빠져나갈 수가 있었다. 아르헨티나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한 라고스는 노스캐롤라인 대학교에서 객원교수로 머물러 있으면서 조국 칠레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1978년 귀국한 라고스는 새로운 사회주의 노선을 표명하고 기독민주당(PDC)에 접근하였다. 중도파인 기독민주당은 좌파인 사회당(Unidad Popular)과 전통적으로 라이벌 관계에 있었다. 아윌린 대통령은 당시 기독민주당의 당수로 피노체트의 쿠데타를 사후에 지지했었다. 따라서 좌파인 라고스의 입장에서는 기독민주당과 철천지 원수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피노체트의 독재를 종식시키기 위해 야당이 힘을 합쳐야 했다.

1986년 9월 칠레 남부를 방문 중이던 피노체트를 암살하려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와 관련돼 라고스는 즉각 체포됐고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게 됐다. 폴리처 기자가 쓴 {라고스의 책}(El Libro de Lagos)에 의하면, 그날 밤 라고스는 부인과 함께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갑자기 3∼4명의 정복 경찰이 기관총을 들고 방에 들어왔다. “무슨 권리로 안방까지 들어오나?”라고 소리치자, 그 중 한 명이 “경찰서로 가주셔야 겠습니다. 그리고 원하시면 내일 법원에 신고하세요”라고 답했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피노체트의 무지막지한 비밀 ‘정치경찰’(CNI)이 아니라 일반 경찰들이었다. 경제학과 제자였던 한 경찰이 ‘정치경찰’의 명단에 라고스의 이름이 있는 것을 보고 현장으로 먼저 나갔던 것이다. 명단에 있던 4명의 다른 사람은 그날 밤 모두 살해되었다. 한마디로 라고스는 아직 죽을 운명이 아니었나보다. 마치 김대중 대통령이 야당지도자 시절 일본에서 정보부원에 의해 강제로 배에 실려올 때 살해 위험을 넘긴 것처럼…….

1988년 4월 25일 야당 정치지도자로서 라고스의 이미지가 전국에 확실하게 방영되었다. 당시 피노체트는 영구집권을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하기 위해 유화적 제스처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전국을 향해}(De cara al pais)라는 전국적으로 시청률이 높은 시사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하였고 같이 출연한 라고스는 검지손가락으로 피노체트를 가리키며 10월에 있을 국민투표를 통해 영구집권을 획책한다고 비난했다. 피노체트를 가리켰던 ‘라고스의 손가락’(El dedo de Lagos)은 유명한 정치적 사건이 돼버렸다. 생각해 보라. 15년이 넘도록 천여 명의 사람을 죽여 ‘인간 도살자’라는 악명을 떨치며 철권통치를 해 온 독재자에게 전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손가락질을 해댔으니 …… 대단한 배짱 아닌가? 피노체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사건이었지만, 이를 지켜본 국민들의 가슴은 한여름 폭포수 같이 시원한 사건이었다.

세 번의 도전과 ‘어려운’ 승리

1987년 ‘민주주의를 위한 정당’(Partido Por la Democaracia)을 창당한 라고스는 이후 모든 재야 세력의 힘을 합쳐 ‘민주연합’을 이뤄내는 데 주요 역할을 했다. 피노체트의 국민투표에 반대하기 위해 ‘NO 세력’을 결집하였다. 1988년 10월 5일 당연히 이길 것으로 생각한 피노체트의 국민투표는 54.68%의 반대로 부결되고 말았다. 피노체트는 자신의 실수를 한탄하며 땅을 쳤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전혀 생각지도 않은 일이었다. 칠레 정치사에서 정치권이 이렇게 단결된 적은 처음이었다.

이후 피노체트의 17년 독재를 마감하기 위해 벌어진 1989년 12월의 선거에서 라고스는 아윌린(Patrcio Aylwin) 기독민주당 후보에게 대통령 후보를 양보했다. 기독민주당과 사회당이 주축이 된 ‘민주연합’을 결성해 야당 단일후보를 내세운 것이다. 그리고 1993년에는 ‘민주연합’의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는 당내 예비선거에서 프레이 기독민주당 후보에게 패하였다.

그리고 1999년 5월 ‘민주연합’내 경선에서 기독민주당의 잘디바르 후보를 손쉽게 물리치고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아옌데 이후 최초의 사회당 후보였다. 그러나 그는 단지 사회당만의 후보가 아니라 집권여당, 지난 10년 동안 국민의 압도적 지지로 정권을 담당해 온 ‘국민연합’의 대통령 후보였다. 게다가 각종 여론조사는 우익후보인 라빈을 많은 차이로 앞서고 있었다. 꿈 같은 시절이었다. 라고스는 이미 대통령궁에 반쯤 들어와 있었다.

당시 자신감에 넘쳐있던 라고스는 “민중연합(Unidad Popular)과 ‘민주연합’(Concertacio´n) 은 다르지만, 나는 아옌데주의자이다”, “라빈은 피노체트 추종자이다. 그는 피노체트 정권에 참여했던 사람들로 둘러싸고 있다”라는 등의 원칙적인 발언을 거침없이 했다.

그러나 1999년 12월 12일의 선거결과는 라고스 진영에 찬물을 끼얹었다. 쉽게 승리할 것이라는 예상을 벗어나 라빈과의 표 차이가 0.4%에 불과하였다. 선거에 질 수도 있는 것이었다. 결선투표를 앞두고 선거전략의 대대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중도표와 여성표를 의식해 기독민주당의 알베아르 전 법무장관을 선대위원장으로 기용하였다. 표현도 원칙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훨씬 부드럽게 하였으며, 또 많은 공약을 제시하였다. 라고스는 “아옌데 정권시절은 과거지사일뿐”이라며 결별을 선언하고 자신을 개량 사회주의자로 불렀다. 그는 “집권하더라도 마르크스·레닌주의 스타일로 절대 되돌아 가지 않겠다”며 “세계화 시대를 맞아 국제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선 이념 대결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리고 전국을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이를 두고, 야당은 라고스가 라빈을 흉내내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이 같은 새로운 전략 변화는 라고스에게 정말로 ‘어려운 승리’를 안겨주었는데, 1997년 12월 김대중 대통령이 4수 끝에 어렵게 승리한 것과 비슷하다.

칠레 정치의 시한폭탄, 피노체트와 군부

결선투표를 5일 앞둔 2000년 1월 11일, 84세의 피노체트가 건강상의 이유로 풀려나게 되었다. 그러나 결선투표를 앞둔 두 후보 모두 피노체트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이는 득보다 실이 많기 때문이었다. 라고스는 ‘급진 사회주의자’의 등장을 우려하는 유권자들의 시선을 의식했고, 피노체트 시절 고위관리를 지냈던 라빈은 극우보수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피노체트를 언급하는 것을 피했다. 그런 상황에서 영국 정부가 1월 10일 피노체트 구금을 해제하기로 발표한 것이다. 이에 라고스는 대통령이 되면 사법부의 의견을 받아들여 피노체트를 법정에 세우겠다고 밝혔다.

라고스는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고 있는 셈이다. 피노체트를 공격하는 것은 마치 그림자와 싸우는 것과 같다. 칠레의 반절이 어느 정도 피노체트를 인정하고 있는 상황에서, 영국의 병상에 누워있는 늙고 지친 84세의 노인을 더 이상 공격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되어버렸다. 더구나 현재의 프레이 정부는 피노체트에 대한 판결을 내려야 할 곳은 칠레 법정이라고 주장하고 석방을 요구했었다.

대통령 당선자인 라고스가 해결해야 할 첫 번째 중요한 일은 무엇보다도 군부의 신뢰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민주연합’의 한 고위간부는 “우리가 신중하게 처신해야 하며, 그들(군부)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정치인들이 군부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는 이유는 두말할 것 없이 군부가 1973년 아옌데 사회주의 정권을 무력으로 파괴하고 지난 27년 동안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을 철저히 탄압해왔기 때문이다.

더구나 라고스는 선거 직후 각 군 참모총장을 대통령이 다시 임명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사실 대다수 민주국가에서 군 총사령관은 대통령이고 또 고위장교에 대한 임명권은 당연히 대통령이 갖고 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인데 칠레에서는 지난 10년간 예외였다. 1988년 국민투표에서 진 피노체트는 철저한 퇴진 준비를 했다. 약속대로 대통령직은 내놓지만 군부를 완전히 장악하여 실제 권력을 행사하기 위한 준비를 한 것이다. 한 예로 1989년 국군조직법을 통해 대통령이 군부의 기득권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군부가 ‘국가안전보장회의’를 통해 주요 국가 정책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으며, 육·해·공군과 경찰군 사령관에 대한 대통령의 임명권을 제한하였다. 따라서 헌법상 군 인사권은 군 총사령관에게 있었다. 대통령이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아옌데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라고스를 군부는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군부의 태도는 선거직후 잘 나타났다.

군이 대통령 당선자인 라고스를 방문한 것은 선거가 끝난 뒤인 일주일이나 지나서였다. 피노체트의 후계자인 이주리에따(Ricardo Izurieta) 총사령관의 예방에 이어 아란시비아 해군참모총장과 리오스 공군참모총장의 방문이 이어졌다. 물론 민주사회에서는 군사령관이 대통령 당선자를 방문하는 것 자체도 크게 바람직한 일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칠레는 군부의 영향이 막강한 곳이지 않는가?

이 같은 군부의 태도는 지난 1993년과 비교가 된다. 당시 군 총사령관이었던 피노체트는 프레이 기독민주당 대통령 당선자를 당선 다음날 일곱 명의 장성을 대동하고 당선자의 집으로 직접 방문했다. 그리고 같은 날 해군과 공군, 경찰군 참모총장의 방문이 뒤따랐다. 이 같은 군부의 태도에 대해 라고스측은 “외부의 압력없이, 군수뇌부를 만난 것은 군과 시민간의 관계가 정상적임을 보여준다”고 말했으나 웬지 씁쓰름하다.

라고스 정권 탄생의 의미

라고스 정권의 탄생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첫째, 칠레 정치사상 선거를 통해 두 번째 사회주의 정권이 탄생했다는 점이다. 1970년 세계 최초로 선거를 통해 집권한 사회주의 정권인 아옌데 정권은 ‘인간 도살자’라는 악명을 떨친 피노체트의 1973년 무자비한 유혈쿠데타에 의해 무너졌다. 이후 칠레 국민들은 18년 동안 피노체트의 철권통치에 숨죽이고 살아야 했다. 그러나 피노체트가 물러난 지 10년 만에 다시 사회당 주도의 정권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아옌데 정부하에서 칠레 대표단의 일원으로 유엔 등 국제기구에서 경제전문가로 활동하고, 또 피노체트의 독재에 저항해 반정부 활동을 하다 투옥됐던 라고스가 대통령이 된 것이다.

둘째, 라고스 정권은 공동여당인 기독교 민주당과 한층 막강해진 우익 야당, 두 협상파트너를 상대로 정국을 이끌어 가며 정치적 어려움을 극복해가야 할 것이다. 라고스는 과거 아옌데가 그랬던 것처럼 분명한 정치적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다른 당의 협조가 없이는 그의 정책을 실현시킬 수 없는 상황이다. 라고스는 51.31%의지지를 얻어 승리하였다. 그러나 우익의 지지도 예상을 넘어 48.69%에 달했으며, 이는 칠레정치사에서 우익이 얻은 최고의 득표였다. 게다가 라고스는 2차 결선투표까지 치러야 했다. 또한 라고스는 1990년부터 계속되어 온 수적으로 훨씬 많은 기독민주당과의 공조를 지속시켜야 할 것이다.

또한 공산주의자들도 라고스의 승리에 일정부분 기여했다. 라고스가 결선투표에서 새롭게 얻은 15만 표 중 많은 부분은 1차 투표에서 공산당에 투표했던 23만 표에서 유입된 것이다.
세째, 라고스의 당선은 중남미에 불고있는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새로운 변화를 확인해주는 것이었다. 80년대 들어서면서 대부분의 중남미 국가들은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Neo-liberalism) 경제정책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수용했다. 민영화와 해외자본의 국내 유치, 그리고 구조조정을 통한 경쟁력 향상을 최우선으로 한 신자유주의 정책은 국내 경제의 활성화와 성장은 가져왔다. 그러나 국내적으로 소득 분배가 더 악화되어 중산층이 몰락해갔으며 실업자가 양산되었고 또 수많은 국부가 외부로 유출되었다.

1999년 2월 베네수엘라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바탕으로 출범한 유고 차베스 정권은 지난 40년간 베네수엘라 정치를 번갈아 가며 전담해왔던 민주행동당과 COPEI의 자유주의 경제정책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었다. 그리고 작년 10월 아르헨티나의 데 라 루아 대통령은 페론주의자인 까를로스 메넴에 의해 지난 10년간 추진됐던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에 반발한 국민들의 지지로 쉽게 당선되었다.

‘시카고 보이스’라고 불리우는 피노체트 정권하의 경제관료들은 프리드만 교수의 통화주의에 기초한 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칠레 경제에 적용해 부분적인 성공을 달성했다. 그리고 90년 민주화 이후 들어선 아윌린 정부와 프레이 정부는 자유주의 경제정책을 그대로 답습했다. 연평균 7%의 경제 성장과 한자리수의 낮은 인플레를 보였던 칠레 경제는 지난 20여 년간 중남미의 발전 모델이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성장률이 떨어지고 실업률이 급증하면서 칠레 경제는 침체에 빠졌다. 그리고 국민들은 이 같은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반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네째, 1년 이상 영국에 구속되어 있는 피노체트는 라고스가 이끄는 사회당 주도의 정권하에서 법정에 서게 될 것이다. 이는 역사의 아리러니라고 할 수 있다. 피노체트의 심판은 국제적으로도 인권 문제와 관련되어 커다란 관심을 끌었다. 어쨌든 이번 선거 기간 동안 지난 98년 11월부터 영국에 구속돼 있는 피노체트 석방 문제는 ‘뜨거운 감자’였다. 사실 라고스가 1차 투표에서 고전한 것은 일정부분 피노체트 문제가 불거져 나옴으로써 비롯된 것이었다. 결선투표를 5일 앞두고 발표된 영국 정부의 피노체트 석방에 대해 두 후보 모두 언급을 자제했다. 그리고 라고스 후보는 피노체트가 칠레 법정에서 사법판결을 받아야함을 분명히 했다.

이제 21세기의 칠레는 라고스가 이끄는 사회당 정부에 의해 이끌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아윌린과 프레이 정부에 의해 수행되었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은 부분적으로 수정될 것이다. 물론 미국을 의식하여 제한적이긴 하겠지만 새로운 변화가 나타날 것이고, 이는 베네수엘라, 아르헨티나 등 중남미 주요 국가들과의 연대를 통해 더욱 강화될지도 모른다.

21세기에는 미국에 대항하기 위한 중남미 국가들의 연대가 보다 공고화될 것이다. 우리도 이제 중남미를 미국을 통해 ‘접속’을 할 것이 아니라 직접 접촉을 강화함으로써 이들 지역에 우리의 영향력을 확대해 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 지역에서 퍼지고 있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을 우리는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

      


퍼 가실 분은 참고하세요. 이 글의 주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neo.urimodu.com/bbs/zboard.php?id=choisun_insa&page=6&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54

2002/06/28 (19:12:54)    IP Address : 165.132.120.202

488    예술과 외설에 대한 편견 최정아 2002/06/28 972
487    정운찬 한국 경제학자들의 무지 또는 탐욕 강준만 2002/06/28 909
   21세기 칠레의 조타수, 라고스 대통령 송기도 2002/06/28 879
485    출판동네이야기- 문제는 저작권이다 최성일 2002/06/28 731
484  [월간 인물과사상 2000년 2월호] 인물과사상사 2002/06/26 918
483    한국인의‘누이좋고 매부좋기’ 이데올로기 강준만 2002/06/28 1009
482    {시사인물사전}을 대학 신입생들에게 편집부 2002/06/28 834
481    임지현 당신의 {조선일보}관이‘일상적 파시즘’이다 강준만 2002/06/28 1145
480    {동아일보}와 어경택 논설실장을 해부한다 강준만 2002/06/28 942
479    기자의 주장을 진리로 둔갑시키지 마라 예병일 2002/06/28 863
478    선거와 지역감정 금병태 2002/06/28 825
477    정형근‘정의’를 지키는‘부산의 아들’ 강준만 2002/06/28 777
476    새천년의 정치의식 송기병 2002/06/28 877
475    김동민 교수의 <국가보안법 폐지운동 바람직한가?>를 읽고 이영직 2002/06/28 725
474    배복남 님께 1 정창호 2002/06/28 784
473    배복남 님께 2 인물과 사상 편집부 2002/06/28 830
472    강준만 님의 엘리트주의를 비판한다 박지훈 2002/06/28 843
471    ‘조선일보에 너그러운 분들’- 강준만 교수 최규정 2002/06/28 868
470    김대중 정권과 방송 강준만 2002/06/28 642
469    홍현성 선생님의 교육개혁안을 비판함 김영수 2002/06/28 1091
468    행정에 얽매인 교육 차병섭 2002/06/28 1039
467    ‘신장개업’과 ‘학교’ 서태원 2002/06/28 816
466    우리말살이 풍경 기호민 2002/06/28 836
465    독도는 뉘 땅인가? 전영일 2002/06/28 797
464    의약분업, 소비자의 이익에서 다시 보기 박형욱 2002/06/28 927
463    군경력가산점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 익명의 공무원 2002/06/28 934
462    차량소유자는 영원한 봉인가 홍경석 2002/06/28 1093
461    교통정책에 관한 한 가지 제언 박진영 2002/06/28 682
460    이도흠의 한국 대중문화와 미디어 읽기 이도흠 2002/06/28 1031
459    1999년 좋은 방송, 나쁜 방송 선정 민언련 방송모니터분 2002/06/28 920

[1][2][3][4][5] 6 [7][8][9][10]..[22] [NEXT]

Admin            
Copyright 1999-2021 Zeroboard / skin by WiZZ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