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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죄선일보 > 월간 인물과사상이 파헤친 죄선일보 - 1998년4월호~2000년9월호


이 름 이도흠
제 목 이도흠의 한국 대중문화와 미디어 읽기
이도흠의 한국 대중문화와 미디어 읽기

밀레니엄 축제는 환상조작이다

새 천년을 맞는 축제가 온 지구를 뒤흔들었다. 저 먼 남쪽의 아름다운 미항 시드니에서 솟아오른 축제의 불꽃은 극동아시아, 이집트, 빠리를 지나 뉴욕으로 이어지면서 지구촌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남태평양 키리바시에서 뜬 첫 해는 진정 새천년이 오는가 하며 조바심을 하던 이들의 가슴을 환한 빛으로 물들게 하였고 2000년 올림픽 개최지의 불꽃 축제는 온 인류가 새로운 세계를 향한 환희로 밀물지게 하였다. 극동아시아와 이집트에서 벌어진 축제는 새로운 세계가 과거와 현재,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의 공존에 바탕을 두어야 함을 새삼 되새기게 하였다면, 가지가지 불꽃으로 장식된 에펠탑의 로켓춤은 하이테크놀로지가 이끌 새로운 세계의 환영에 한껏 부풀게 하였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축제를 벌여야 하는가? 올해가 아니라 내년이 진정한 21세기 첫해라는 케케묵은 이야기는 꺼내지 말자. 우리는 이 시점에서 진정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그리 환희와 황홀감에 젖어야 하는가. 1999년 21월 31일 11시 59분 59초와 2000년 1월 1일 0시 0분 1초 사이에 달라진 것은 무엇인가. 새천년의 찬란한 햇빛이 어둠을 불사르듯 20세기의 모순과 부조리 또한 그렇게 삼켜버린 것인가? 그 햇빛과 함께 서울역 지하도의 노숙자도, 정치범과 양심수도, 탈북자와 북한과 소말리아의 굶주려 죽어 가는 어린이도, 공작 정치꾼과 고문기술자, 독재자와 군산복합체, 제국주의자와 신자유주의자, 악덕 자본가와 맹목적인 개발론자도 사라졌는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축복해야 하는가?

21세기, 달라진 것은 없다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사람은 그대로이며 산천도 그 모습이다. 전지구 차원의 환경위기, 빈부 갈등, 제국주의적 착취, 물화(`物`化`, reifi`-cation)와 소외, 위기와 불안의 일상화, 억압의 보편화, 과학과 이성의 도구화, 따뜻한 공동체의 해체 등 20세기의 모순은 여전하다. 아니 더욱 강화되고 있다.

민주주의와 민주주의적 가치는 여러 부문에서 후퇴하고 있다. ‘주술의 정원’으로부터, 무지몽매한 야만의 감옥으로부터 인류를 해방시켰던 이성의 빛은 도구화하여 오히려 인류를 옥죄고 있다. 정의, 평등, 이타(`利`他`) 등의 가치는 시장과 저질 대중문화의 늪에 급속히 침몰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공세로 중산층은 급속도로 해체되고 제3세계의 남은 자원이 미국의 손아귀로 넘어갔으며 가난한 나라, 가난한 국민은 더욱 빈곤의 굴레에서 허덕이고 있다. 미디어 제국주의는 정보고속도로를 타고 아무런 장애도 없이 전세계인의 사고와 취향을 하나로 통합시키고 있다. 야만적인 헤지 펀드는 제3세계의 그나마 남은 민족자본을 빛의 속도로 갈취하고 있다. 이에 저항해야 할 유일한 계층인 노동자 집단은 급속히 보수화하고 있다. 그들은 복지의 단물에, 대중조작과 대중문화의 길들임에 젖어 중산층으로 자신을 동일화하고 있으며, 심지어 그들 중 상당수는 소위 자본가적 노동자(capitalist worker)가 되어 증권 몇 장 가지고 있다고 복지보다 성장정책을 더 선호하는 것에서 보듯 자본가보다 더 자본가적인 가치를 지향하고 있다.

대한민국으로 와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옷 로비 사건이 한 해 내내 옷 바람을 일으키더니 공작정치와 고문정치의 대부가 폭로 몇 마디로 정국을 뒤흔들고 언론개혁의 물꼬를 막아버렸다. 관료, 언론, 사법부, 대학을 가리지 않는 총체적인 부패와 부조리, 지역주의, 패거리주의, 소모적인 정쟁, 정경유착은 여전하다. 게다가 20세기의 성과라 할 합리성과 휴머니즘의 원칙, 민주주의의 원칙과 절차는 아직도 요원한 과제이다. 아직도 멀쩡한 다리와 백화점이 무너질 정도로 비합리적인 사회인데 국가보안법 같은 인간의 존엄성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법과 제도가 위세를 떨치고 있다. 대통령을 비롯하여 국회의원과 관료층은 민주주의 원칙과 절차를 무시한 채 가진 자에게는 한량없는 특혜와 관용을 베풀고, 가지지 못한 자에게는 단호한 공권력의 힘을 과시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무엇이 그리 신나서 축제를 하고, 노숙자가 거리를 헤매고 저 너머에는 수천, 수만 명의 어린이들이 굶주려 죽어가고 있는데, ‘조잡의 극치’라는 표현이 그리 과언이 아닌 유치한 행사를 하는 데 수천 억을 쏟아 부어가며 호들갑을 떨었는가?

환상은 현실을 사라지게 한다

새천년 축제는 한 건을 크게 해서 광고료를 단단히 챙기려는 자본주의 미디어의 원초적 본능과 환희의 허영심과 향락을 통하여 소비를 촉진시키려는 자본가의 욕심, 축제의 열기 속에 현실의 모순을 은폐하려는 권력층의 음모가 맞아떨어져 빚어진 행사이다. 광화문에 상상 이상의 군중이 운집하여 자신을 밀치는 데까지 이르자 방송국 진행자는 비명을 질렀다. 그것은 방송이 차질을 빚은 데서 오는 직업의식에서 비롯한 비명 같지만 실은 시청률과 돈 다발을 떠올리는 즐거운 비명이다. 수백만이 환호를 지르는 것을 보고 자본가들은 올해의 매출곡선을 그리며 웃음을 짓는다. 수백만이 불꽃 몇 방에 열광하는 것을 보고 지배층은 총선 승리에 자신감을 갖는다.

환상은 환상이다. 우리가 사이버 공간에서 한반도를 수백 번 통일시켜도 내일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죽은 님의 영상에서부터 목소리와 잠버릇에 이르기까지 모든 자료를 입력하여 살려놓아도 님은 돌아오지 않는다. 우리의 상상 속에서 어떤 환상이 펼쳐진다 하더라도 그 환상이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 아니, 환상은 현실을 사라지게 한다.

우리는 가짜가 진짜보다 더 진짜 흉내를 내는 시대에 살고 있다. 아무리 세계 최고의 지하수를 찾아 촬영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이미지 속에 있는 차고 신선하고 시원하며 깨끗한 지하수의 이미지를 다 내포할 수 없다. 그러기에 크라운 맥주는 우리의 이미지대로 컴퓨터그래픽으로 합성한 지하수를 만들었다. 이 가짜 지하수를 소재로 제작한 하이트 맥주 광고 하나로 크라운 맥주는 오비맥주를 눌렀고 두산그룹은 부도에 몰릴 정도로 휘청거렸다. 우리는 한 서울 시장 후보가 텔레비전 토론에 나서서 자신의 현실을 까발림을 당하기 전까지는 무균질 우유 광고에 나올 정도로 깨끗한 후보의 상징이었음을 기억한다. 이미지는 이미지일 뿐이다. 우리가 이미지에 취하여 현실을 잊는다면 다가오는 천년은 희망의 세기가 아니라 절망의 세기일 것이다.

더구나 우리는 환상에 취하여 현실을 잊은 과거가 있다. 유신 시절 70년대가 되면 우리가 선진국으로 진입한다는 환상에 젖어 그것을 위해 ‘오늘’ 허리띠를 졸라매고 민주주의나 휴머니즘 같은 것은 선진국 국민이나 하는 ‘사치’이니 유보하자는 통치자의 말에 넘어가 얼마나 많은 인권과 자유를 포기하였는가? 그 통에 우리의 민주주의는, 우리의 정치와 경제는 얼마나 후퇴하였는가? ‘선진조국창조’의 구호에 넘어가 학살극의 원흉을 얼마나 많은 이들이 떠받들었는가? 총선이 되면 또 여·야당 할 것 없이 이 땅의 정치인들은 얼마나 많은 장밋빛 공약을 남발할 것인가?

새천년도 시민이 아니라 군부와 엘리트가 이끌라?

이번 우리 나라의 새천년 맞이 축제는 나름대로 의미도 있고 평화와 화합, 미래에 대한 비전 등 긍정적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의 화쟁기호학으로 분석하면 이데올로기적 요소가 너무도 많다. 긍정적인 것은 매스컴에서 많이들 이야기하였으니 이데올로기적 요소에 대해 몇 가지 간단히 지적하고 넘어가자.

이번 행사의 장면 하나 하나가 드러난 품(현상, 相`)이라고 한다면 그 몸(본질, 體 1)은 새천년에 대한 대한민국의 밝고 희망에 찬 비전이며 그것의 짓(작용과 실천, 用`)은 이데올로기적 기능이다. 그리고 이것이 서로 작용하며 진정한 본질(참, 體 2)을 드러낸다.

우선 광화문이라는 공간이 갖는 의미 자체가 권위적이고 억압적이다. 광화문은 8·15 광복, 서울 수복, 4월 혁명과 환유관계(‘허수아비’ 하면 ‘참새’, 보름달에서 시간적으로 인접한 ‘추석’, 경험적으로 ‘달’과 관계 있는 ‘이태백’을 떠올리듯 ‘인접성’을 바탕으로 유추한 의미작용)를 갖는다. 그러나 그뿐이다. 6월항쟁이나 광주민중항쟁 등 가까운 근대사와는 관계가 없다. 더구나 광화문은 협곡이나 조선왕조의 조례와 은유관계(‘초승달’을 그와 모양이 비슷한 ‘쪽배’로 노래하고 ‘보름달’에서 그처럼 둥그런 ‘엄마얼굴’이나 ‘눈동자’를 떠올리고 이것으로 의미를 바꾸는 것처럼 ‘유사성’을 바탕으로 유추한 의미작용)를 이룬다. 정부청사와 세종문화회관, 교보빌딩 등 육중하고 권위적인 빌딩이 절벽처럼 막아서 계곡을 이루고 그 끝은 떡하니 북악산 - 청와대 - 이 막아서고 있다. 당신이 군사를 이끌고 진격을 하다 이 계곡 속으로 유인되었다고 생각해 보라. 끔찍하지 않은가? 또 청와대가 옥좌라면 정부청사 등의 건물들은 마치 조례에 참석한 조선조 관료처럼 머리를 조아리고 양쪽으로 늘어서 있는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처럼 광화문 광장은 가까운 시청 앞 광장하고 비교해도 아주 닫힌 공간이며 그 자체가 ‘봉건적 권위’이다. 더불어 미국 대사관 건물마저 있어 제국주의 종속의 의미도 갖는다.

그 협곡의 끝이자 정가운데인 광화문을 중심축으로 레이저는 뻗어 나왔고 광화문보다 더 높은 곳에는 다 알듯이 청와대가 있다. 청와대는 여기에 모인 시민을 굽어보고 있다. 이런 구조는 권력구조와 은유관계를 이룬다. 새천년의 빛은 권력의 중심부로부터 나오는가? 새천년에도 청와대는 저 높이서 시민들을 내려다보고 통치를 할 것인가? 새천년에도 우리 나라 관료들과 미국은 하의상달(下意上達)을 막고 상명하달(上命下達)을 강요할 것인가?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이순신 장군상이 있다. 나도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는 사람 중에 하나이지만 이순신 장군은 ‘군사적인 것’과 환유관계를 갖는다. 박정희 대통령이 이순신 장군을 국민영웅화하여 군부독재를 정당화하고 국민을 민족주의적 열정으로 국가 사업에 동원시킨 것은 이제 주지의 사실이다. 그것을 행사의 중심축으로 삼음은 새천년에도 시민이 아니라 군사적인 것이 중심적인 가치가 될 수 있다고 함인가? 군부가 이 나라를 이끌기를 바라는가?

이런 권위적이고 엘리트적인 요소는 세계 석학들의 메시지에서도 마찬가지로 작용하고 있다. 논리학에서는 “이것은 세계 석학 누구 누구가 애용하고 있는 상품입니다”라는 식의 언술을 권위에 호소하여 허위를 진리처럼 주입시키는 오류로 본다. 이 메시지에는 이 오류와 더불어 사대주의까지 깔려 있다. 그날 꼭, 우리 나라 사정도 잘 모르는 세계 석학들에게 꿈꾸는 듯한 말, 어느 나라 어느 국민에게도 통할 말을 수억을 주고 사 와 그렇게 해야 했는가? 오히려 IMF실업자에서 달동네 주부, 최상류층의 마나님에 이르기까지 우리 나라 사람들의 새천년 소망을 들었으면 어땠을까? 거기엔 그들의 삶이 담겨 있을 것이기에 그것은 1999년의 반성이자 새천년의 비전이요 현실에 바탕을 둔 꿈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이 행사의 환상성, 비현실성과 비정치성을 지극의 경지로 끌어올린 것은 우주 사절단의 방문이다. 새천년 한민족의 최대의 과제가 통일임은 초등학교 어린이도 가슴에 새겨두고 있는 화두이다. 그런데 웬 황당한, 만화영화에나 나올 UFO이고 우주인인가? 그 자리에 북한의 사절단이나 그것을 상징화하는 것을 놓았으면 안 되었는가? 그리고 박세리는 또 무엇인가? 새천년에도 나치체제나 공산치하의 동독이 그랬던 것처럼 엘리트 스포츠 영웅 몇몇을 만들어 민족주의적 광기를 부추길 것인가?

과거와 전통에 대한 향수는 전체주의를 부른다

이번 축제에서도 장밋빛 미래와 함께 여느 행사처럼 또 등장한 것은 과거와 전통의 과시였다. 이 땅의 누가 우리 문화의 독창성과 우수함을 의심하랴? 나는 문화제국주의와 미디어 제국주의의 치열한 공세에 맞서 “민족”은 아직 달성하고 지켜내야 할 이념이며,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말처럼 자기 문화의 자주성을 세우는 것이 세계 문화창달에도 이바지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거와 전통은 현재화할 수 있을 때 의미를 갖는다. 그날 밀레니엄 축제에 제시된 우리의 전통 예술과 가치 가운데 과연 무엇이 밀레니엄의 현실에서도 유용하고 새천년의 지평을 열 가치이겠는가?

과거 5공화국에서 ‘국풍81’이라고 해서 한국의 전통예술축제를 대대적으로 전개한 적이 있었다. 소위 어용학생들이나 참가하였지만, 그 시대에 가장 진보적인 집단의 하나였던 탈반 등 각 대학의 전통예술 관련 동아리들은 혼동에 접하였다. ‘민족’이 진보와 동의어라고 생각하였는데 그 민족을 가장 추악한 지배층이 선점하였는데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그때 나는 어리둥절해 하는 후배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탈춤이 양반층에 대해서 그리 노골적이고 치열한 풍자와 비판을 행하였는데 왜 양반이 후원하였으며 고을 사또가 입법, 사법, 행정을 실행하는 동헌 마당에서 대개 섣달 그믐에 이를 열게 하였는가? 탈춤 텍스트의 상(`相`)을 보면 봉건사회에 대한 치열한 저항을 담고 있다. 하지만 텍스트의 짓(`用`)은 체제보존적이다. 당시 서민계급은 탈춤의 마당에서 양반계급을 풍자하고 비판하면서 저도 모르게 당시 지배층에 대해서 품고 있었던 불만과 갈등을 해소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난 1년간 가졌던 불만과 갈등을 이 자리에서 훌훌 풀어버리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였다. 비판이 거세면 거셀수록 분노는 쉽게 누그러진다. 이처럼 탈춤은 반역을 향한 동경을 거세하고 길들이는 문화의 역기능을 톡톡히 수행하였던 것이다.

더불어 열린 민족주의는 진보와 통하지만 닫힌 민족주의, 국수주의는 항상 파시즘과 결탁해 왔다. 히틀러가 그랬고 박정희 또한 과거의 영광을 부추겨 국민들을 전체주의 건설에 동원하였다. 닫힌 민족주의는 변화하는 조류를 무시한 시대역행적인 발상이거니와, 히틀러의 나치즘이나 일본의 군국주의처럼 안으로는 내부 구성원을 통제하고 지배층의 정책에 국민을 ‘동원’시키는 이데올로기로 이용되고 밖으로는 배타적 폭력을 조장한다.

반성없이 진보는 없다

나라를 위기로 몰아놓고도 반성은 하나도 없이 조작과 왜곡을 서슴지 않고 자화자찬에 골몰한 어느 전직 대통령의 회고록을 보면서 분통을 터트린 자가 어디 피해 당사자뿐이랴? 그런 회고록을 쓰는 한 그에게서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아름다운 노년’을 기대할 수 없으며 한국의 정치 발전 또한 없다. 과거에 대한 철저하고 냉혹하며 쓰라린 반성이 없는 한 미래는 없다. 21세기도 마찬가지이다. 언론마저 20세기를 반성하는 데 소홀하고 장밋빛 환상에만 몰두한다면 우리 사회의 미래는 없다. 그에 취한 사람들만이 우리 사회를 마약환자처럼, 지친 유령처럼 떠돌 것이다. 장밋빛 미래로 현실의 모순을 은폐하고 국민들로 하여금 ‘기대감의 팽배(the explosion of expec-tation)’에 젖게 해 현실의 불만을 잊고 국가 일에 총동원하도록 하는 정치술과 미디어 조작술은 20세기의 지는 해에 실어 버리자. 그리고 그 자리에 구체적이고 생동하는 현실에 철저하게 바탕을 둔, 그 현실을 처절하게 분석하고 반성한 데서 출발한 새천년의 비전을 환하나 눈부시지 않게 비추게 하자. 현실이 없는 비전은 망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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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8    예술과 외설에 대한 편견 최정아 2002/06/28 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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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3    한국인의‘누이좋고 매부좋기’ 이데올로기 강준만 2002/06/28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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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0    {동아일보}와 어경택 논설실장을 해부한다 강준만 2002/06/28 940
479    기자의 주장을 진리로 둔갑시키지 마라 예병일 2002/06/28 862
478    선거와 지역감정 금병태 2002/06/28 824
477    정형근‘정의’를 지키는‘부산의 아들’ 강준만 2002/06/28 776
476    새천년의 정치의식 송기병 2002/06/28 876
475    김동민 교수의 <국가보안법 폐지운동 바람직한가?>를 읽고 이영직 2002/06/28 724
474    배복남 님께 1 정창호 2002/06/28 782
473    배복남 님께 2 인물과 사상 편집부 2002/06/28 829
472    강준만 님의 엘리트주의를 비판한다 박지훈 2002/06/28 843
471    ‘조선일보에 너그러운 분들’- 강준만 교수 최규정 2002/06/28 868
470    김대중 정권과 방송 강준만 2002/06/28 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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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8    행정에 얽매인 교육 차병섭 2002/06/28 1038
467    ‘신장개업’과 ‘학교’ 서태원 2002/06/28 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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