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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죄선일보 > 월간 인물과사상이 파헤친 죄선일보 - 1998년4월호~2000년9월호


이 름 강준만
제 목 김대중과 ‘조선일보 코미디’
김대중과 ‘조선일보 코미디’

강준만

역지사지(易地思之)를 모르는 왕자병?

우리는 부끄럽고 창피한 저질 국회의원들을 너무나 자주 보고 있다. …… 우리의 국회의원들은 유권자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다. 유권자를 의식한다면 저런 저질을 연출할 수가 없다. 그들은 유권자를 의식하기 이전에 공천을 걱정하고 공천권자의 마음에 들게 아부하며 지역성에 의존해 공천=당선이라는 도식에 몰입해 있다. 그들은 유권자들의 수준을 깔보고 있다. 조직있고 돈있고 관권있고 지역있고 ‘왕초’ 있는데 ‘너희들이 감히 누구를 찍겠느냐’는 식이다. 자기들이 국회에서 어떤 처신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해도 유권자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 것이며 오히려 당과 보스를 위해 충성하는 것이 공천에 유리하고 당선을 보장하는 것이라는 이 자신만만(`?`)한 ‘유권자 깔보기’는 이제 그들에게 체질화하다시피 됐다.

{조선일보}의 김대중 주필이 {조선일보} 1999년 8월 28일자에 쓴 <‘내년 총선때 보자’>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하신 말씀이다. 김 주필은 국회 옷로비 의혹사건 청문회와 조폐공사 파업 문제에 대한 국정조사 과정을 보면서 열을 좀 받았나 보다. 그는 흥분한 어조로 그렇게 개탄하면서 독자들에게 “더 이상 정치인들에게 깔보이지 말자”고 호소한다. 내년 4월 총선에서 그런 저질 국회의원들을 반드시 떨어뜨리자고 선동한다. 그게 진정한 정치개혁이란다.

지당한 말씀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역지사지(`易`地`思`之`)를 주장할 사람이 있을 법하다. 어떤 사람이 김 주필이 몸담고 있는 신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면, 김 주필이 무어라 대꾸할 것인지 그것이 몹시 궁금하다.

우리는 자기 분수를 모르고 날뛰는 신문을 너무나 자주 보고 있다. 그 신문은 역대 독재정권들을 찬양하는 데에 앞장섰으면서도 단 한번도 사과나 반성의 말을 하지 않았으며 주제넘게 ‘대통령 만들기’를 시도하는 오만방자한 짓을 저지르고 있다. 그 신문은 국민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다. 국민을 의식한다면 그렇게 뻔뻔할 수가 없다. 그 신문은 국민을 의식하기 이전에 돈벌이를 걱정하고 일부 간부와 기자들은 사주의 마음에 들게 아부하며 ‘수구 기득권 세력 비호`=`돈벌이’라는 도식에 몰입해 있다. 그 신문은 국민의 수준을 깔보고 있다. 조직있고 돈있고 수구 기득권 세력의 지지가 있고 국가안보상업주의와 선정주의가 있는데 ‘너희들이 감히 어떤 신문을 보겠느냐’는 식이다. 그 신문이 어떤 처신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해도 국민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 것이며 오히려 수구 기득권 세력을 위해 충성하는 것이 돈벌이에 유리하고 번영을 보장하는 것이라는 이 자신만만(?)한 ‘국민 깔보기’는 이제 그들에게 체질화되다시피 됐다.

설마 아니 그렇게까지야 심한 말을 할 사람이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 가지 근본적인 의문이 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김 주필이 독설을 퍼부어 댄 것처럼 국회의원들만 그렇게 형편없는 사람들이고 김 주필을 포함한 언론인들은 그들을 향해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돌을 던질 수 있을 만큼 당당한가 하는 것이다. 혹 김 주필은 역지사지(易地思之)를 모르는 왕자병에 걸려있는 건 아닌가?

{조선일보}는 왜 자꾸 외신(外信)을 왜곡 인용하나

{한겨레} 1999년 9월 10일자 8면을 펴 보자. 정연주 워싱턴 특파원이 쓴 <이지러진 한국 언론>이라는 제목의 칼럼이 눈에 띈다. 그는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김 주필처럼 파렴치한 짓을 저지른 언론인은 미국에서라면 즉각 퇴출되었을 터인데 왜 한국에서는 건재한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 특파원이 그간 미국 물을 많이 먹어 너무 미국 잣대로 한국을 보는 것 아니냐고? 아무래도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 잣대는 미국 잣대가 아니라 한국에서도 영원한 성역인 언론권력을 제외하곤 널리 통용되는 잣대다.

여기서 김 주필의 파렴치한 작태를 다시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건 지난 대선 때에 김 주필이 외신을 왜곡·조작해 김대중 후보에게 타격을 가한 사건을 말하는 것이지만, 그 이야기 계속 해봐야 누워서 침 뱉을 수밖에 없다. 어떻게 된 게 이 나라에선 무지무지하게 부도덕하고 뻔뻔한 짓을 저질러도 그 놈의 짓이 정치인, 그것도 김대중을 겨냥한 것이면 그냥 정치적인 문제가 돼 버린다. “나는 정치적인 문제엔 끼여들고 싶지 않아.”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영원히 매장되어 마땅한 김 주필의 파렴치한 짓도 대선 시의 해프닝쯤으로 치부돼 버리고 그는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가장 유력한 언론인으로 군림하고 있다. {한겨레}는 정연주 특파원의 칼럼에 ‘이지러진 한국 언론’이라는 제목을 달았지만, 이지러진 정도가 아니다. 형체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묵사발이 돼 있다고 보아야 옳다.

외신의 왜곡 인용은 {조선일보}의 장기인가? 하기야 주필부터 그러니 일반 기자들인들 무엇이 다르랴. {미디어 오늘} 1999년 8월 26일자 3면엔 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 있다. 그 기사의 일부를 여기에 소개할 터이니 독자들께서는 이걸 읽으시면서 {조선일보}를 한국 제1의 신문으로 계속 모셔도 되는 건지 그 점에 대해 생각해 주시기 바란다.

{조선일보}가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한 외신을 부분 발췌하면서 그 의미를 왜곡시켜 물의를 빚고 있다.

조선은 {워싱턴 포스트}지가 지난 17일 서울발로 게재한 <사라지지 않는 한국의 대통령들>이라는 기사를 18일자 2면에 <“YS의 DJ 깎아내리기 한국인 상당수가 동의”>라는 제목으로 인용 보도하면서 “놀랄 정도로 많은 사람이 김 전 대통령의 주장에 동의하고 있다고 보도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조선은 {워싱턴 포스트}지의 이 문장 바로 앞 부분 “상당수의 국민이 김 전 대통령의 이러한 행태에 얼굴을 찡그리면서도”라는 부분을 누락시켜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다.

{워싱턴 포스트}지의 기사는 “한국에서는 전직 대통령들이 문제”라며 “전직 대통령 가운데 한 명은 암살됐고 한 명은 망명 길에 올랐으며 두 명은 쿠데타로 쓰러졌고 다른 두 명은 교도소로 끌려갔다”는 내용으로 최근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정치 재개 선언에 대한 한국 내의 긍·부정적 시각과 함께 김대중 대통령과의 40년 정적 관계를 소개한 글이다.

그러나 조선은 이 가운데 “김 대통령의 인기가 하락, 취약점을 노출하면서 YS같은 정적들이 칼을 갈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등 김 전 대통령에 대한 긍정적인 부분만을 게재하면서 국민회의 유재건 의원의 “국민들은 김 전 대통령이 회고록이나 쓰면서 조용히 지내길 바란다”는 내용 등은 누락시켰다.

김대중 주필의 외신 왜곡·조작 사건을 특종했던 {딴지일보}는 이번에도 이 왜곡·조작 사건을 그대로 넘기지 않았다. {딴지일보}는 정말 대단한 신문이다. 박수! {말}지 99년 10월호 226∼227쪽에 ‘특약’ 게재된 {딴지일보} 기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독자들께서는 오랜만에 수준 높은 영어 공부도 하실 겸 {딴지일보} 기사를 꼼꼼히 읽으시기 바란다.

이 기사를 전하는 좃선벼룩의 제목은 뭐였더라? <`WP지, “YS의 DJ 깎아내리기 한국인 상당수 동의”> 좃선은 원기사의 제목과 topic sentence를 완전히 무시하고 엉뚱한 제목을 떡 하니 달고 있다. 마치 그것이 {워싱턴 포스트} 원 기사의 주제라는 듯. …… 다음 문장이 좃선이 지들 기사의 제목으로 뽑는 데 사용한 문제의 문장이다.

But even as they wince at the blunt language, a surprising number of Koreans say they agree with the gist of Kim Young Sam’s charges. <그러나 그들(한국인들)은 (김영삼의) 절제되지 않은 언어에 움찔하면서도, 예상외로 많은 한국인들은 김영삼의 비난의 의미에 동의한다고 말한다.> “wince”도 사전만 가지고 번역해서는 이게 “cringe”만큼이나 함부로 사용하기 힘든 강한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 힘들다. “cringe”는 어원을 보아도 ‘몸을 구부리고 뒤척이다’ 정도이지만 “wince”는 ‘발길질하다’이다.

다음의 “a surprising number”라는 것은 좃선의 말처럼 그냥 ‘놀랄 정도로 많은 사람이’라는 의미인가? 아니다. 여기서 “surprising”은 상대적인 말이다. 즉, 앞에서 기자 자신이 “cringe”, “wince”라는 매우 강한 단어로 묘사할 정도인 한국인들의 김영삼 출현에 대한 혐오 심리가 바로 ‘상대적 기준’인데, 한국인들의 김영삼 출현에 대한 학을 떼는 거부감에 ‘비하자면’ 예상과 다르게 ‘뜻밖의 수가’ 동의를 표한다는 뜻이다.

이 문장의 대구를 이루고 있는 바로 앞의 “wince”, “cringe”가 들어간 부분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다짜고짜 ‘놀라울 정도로 많은’이라고 번역하고, 그걸 또 기사 제목으로까지 뽑아내며, 나머지는 마치 있지도 않았다는 듯하는 좃선의 뻔뻔한 능력이 정말이지 놀랍기 그지없다.

본기자 좃선기사의 마지막의 결론 단락에 나오는 부분인, <신문({워싱턴 포스트}지)은 또 한국의 전직 대통령 중 1명은 암살, 1명은 망명, 2명은 쿠데타로 실권, 2명은 감옥행 등의 불행한 과거를 겪어왔다고 보도했다>를 읽으면서 이거 ‘김대중도 이렇게 된다는 소리네’로, 거의 {워싱턴 포스트}가 ‘김대중도 이렇게 될지도 몰라’ 하고 협박한다는 내용으로 해석했다.

그런데 WP의 원문 기사로 갔더니 이게 웬일인가! 이는 원 기사 머릿부분에서 ‘전직 대통령들의 운명이 그러했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김영삼이 조디 닥치기 바라는데도 김은 순순히 닥치지도 사라지지도 않으려고 한다’로 연결되는 맥락에서 나오는 문구였던 것이다. 세상에, 글의 위치를 바꾸어 마음대로 쑤셔 넣다니!

결과적으로, 이번 {워싱턴 포스트}건은 과거 김대충 주필의 ‘性門지조때로영문법 사건’ 이후, 좃선 기자의 감동적인 지조때로 영문 해석기법들이 눈부시게 동원되어 만들어 낸 또다른 국제적 쾌거다. 정보를 차단하고 왜곡하는 나치 괴벨스의 기술과 유산이 1999년의 한국 사회에서도 얼마나 버젓이 사용되는지, 그 가증스러운 면모를 알려 주는 사례다. 어이 좃선. 도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국민들을 속여 먹을라고 하냐 엉? 도대체 언제까지 여론을 니들 맘대로 좌지우지할라고 하냐 엉? 이 국제적 사기꾼 씹송들아.

강준만의 편견

내 신세도 딱하다. 딱해도 이만저만 딱한 게 아니다. 내가 생각해도 불쌍하다. 정의와 양심을 외치고 진보를 전세 낸 양 떠들어대는 인간들도 {조선일보}에 글을 기고하지 못해 안달을 한다. 나는 감히 정의, 양심, 진보를 내 입으론 말 못한다. 나는 기껏해야 소시민의 윤리 의식 정도를 갖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내 눈엔 머리가 확 돌 정도로 이상한 짓이 저질러져도 정의와 양심과 진보를 외친다는 인간들은 너무도 담담하고 너무도 너그럽다. 그런데 왜 나 같은 소시민이 주제넘게 열 받는 건가.

나는 확실히 편견이 강한 사람이다. 내가 봐도 너무 강하다. 내 편견은 무엇인가? 나는 누가 봐도 나쁘다고 손가락질하는 사람 또는 사안에 대해선 무관심하다. 화가 나기는커녕 오히려 동정심을 가질 만큼 너그럽다. 나쁘게 말하면 정의감 또는 윤리 의식이 희박한 것이다. 그런데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아주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사람이 그런 평가에 어울리지 않는 짓을 저지르는 걸 보면 혈압이 올라간다. 그런 짓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진보적, 자유주의적 지식인들이 {조선일보}에 글을 기고하는 것이다.

물론 나는 더 이상 ‘오버’하지 않기 위해 그런 사람들을 일일이 거명하면서 비판하는 짓은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내 속마음은 여전하다. 내 생각은 이렇다. {조선일보}가 어떤 신문인지 잘 모를 정도로 무식하다면 우리 사회에 대해 아예 이야기를 하지 말아야 하며, 그 신문이 어떤 신문인지 잘 알면서도 그 신문에 굳이 글을 기고해야겠다면 그것이 세상이야 어찌되건 말건 나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자신의 이기심 이외에 무슨 이유가 있다는 것인지 그걸 밝혀달라는 말이다.

‘그 신문에 침을 뱉어라’

관두자. 자꾸 내가 똑같은 이야길 반복한다고 일부 독자들이 싫증낸다. 조금 딴 이야기로 넘어가자. 한겨레신문사가 발행하는 {씨네 21}이라고 하는 주간지가 있다. 이 주간지 1999년 9월 7일자엔 출판인 김규항 씨가 쓴 <그 신문에 침을 뱉어라>라는 제목의 칼럼이 실려 있다. 물론 ‘그 신문’은 {조선일보}다. 나는 이 칼럼을 아주 감동적으로 읽었다. 영화와는 무관한 주제를 다룰 수 있는 ‘유토피아 디스토피아’라는 코너를 마련한, 그리고 그 코너의 고정 필자도 솔직히 내 맘에 쏙 드는 사람들로 모시는, {씨네 21}에 대해 지지와 격려를 보내면서, 김규항 씨의 칼럼 가운데 내 눈을 사로잡은 가장 매력적인 부분만 여기에 인용하고자 한다.

나는 만만치 않은(적어도 나 같은 건달보다는 훨씬 훌륭해 보이는) 지적 능력을 가진 지식인들이 그 신문이 다른 보수신문들과 다른 게 무어냐, 반문할 때 맥이 풀린다. 나는 차라리 이 나라의 전근대적인 교육 시스템을 원망한다. 그들은 그 신문에 기고하면서 말한다. 어떤 신문이든 글만 바르면 되는 일 아닌가. 나는 이런 순진한 사람들에게 {월간조선}과 그 신문의 문화면을 찬찬히 비교해 보기를 권한다. 그 둘 사이의 믿기 힘든 간극이야말로 ‘조선일보라는 극우조직’의 운영 원리다. 그 신문의 정치 사회면이 다른 보수신문과 다를 바 없는 얼굴을 하다가 먹이가 나타났을 때만 기동한다면 {월간조선}은 ‘조선일보라는 극우조직’의 별동대로서 상시적인 전투를 수행한다. {월간조선}은 ‘조선일보라는 극우조직’의 정신이 좀더 노골적으로 드러나며 심지어 사무라이 정신과 몽골기마민족론 따위의 위험천만한 파시즘 멘털리티로 무장되어 있다. 그에 반해 그 신문의 문화면은 ‘조선일보라는 극우조직’을 중화하는 임무를 띤다. 문화와 학술로 포장된 진보적이고 비판적인 담론들은 그 신문에 어떤 위협도 주지 않지만, 수많은 좌파나 자유주의 성향의 지식인들이 ‘자유롭게’ 기고하는 신문은 그저 건전한 보수신문이 되는 것이다. 나는 그 신문의 소품 노릇을 마다하지 않는 지식인들이, 오늘날 근대성을 가진 나라라면 지식인이 극우신문에 기고하는 일만으로도 사회적 스캔들이 된다는 상식쯤은 갖길 바란다.

참으로 지당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스캔들은 전혀 엉뚱한 방향에서 일어나고 있으니 그게 문제다. {조선일보}에 왜 글을 쓰느냐고 실명을 대면서 좀 꾸짖었더니 그걸 가리켜 ‘파시즘적’이라느니 ‘오만과 편견’에 가득 찬 짓이라느니 하고 떠들며 오히려 그걸 ‘스캔들’로 몰고 가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으니 말이다.

‘그 신문에는 침뱉을 필요도 없다’

그런 현실 때문일까? 김규항 씨와 번갈아가며 ‘유토피아 디스토피아’에 칼럼을 쓰는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이자 문화평론가인 김종엽 씨가 바로 다음 주인 {씨네 21} 99년 9월 14일자에 <그 신문에는 침뱉을 필요도 없다>는 제목의 칼럼으로 화답을 했다. 물론 여기서의 ‘그 신문’ 역시 {조선일보}다. 김종엽 씨는 김규항 씨의 주장이(그리고 강준만의 주장도) 일종의 ‘계몽작업’이라고 지적한 다음 그것 만으론 부족하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계몽을 완성하는 단호한 행동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행동이란 바로 {조선일보}를 더 이상 보지 않는 것이다.”

김규항 씨나 강준만 모두 이 결론에 찬성하지 않을 리 없다. 김종엽 씨에게 무언가 색다른 주장이 있는 건가? 이 결론에 이르게 된 김씨의 생각을 들어 보자.

많은 진보적인 사람들이 하는 말 중에 적을 알기 위해서 {조선일보}를 본다는 말이 있다. 딴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조선일보}의 부수를 늘려주는 일일뿐이며, {조선일보}의 사회적 영향력을 유지하는(시켜주는) 길일뿐이다. …… {조선일보}의 사주와 편집진들은 자신의 기사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아무런 우회나 논의 없이 직접적으로 통용된다고 생각하는 바보가 아니다. ‘서글픈 일이지만 그 신문은 300만 부가 팔린다’(그 신문의 주장대로라면)고 하며, ‘그 얘긴 1천만 명이 그 신문을 보고 읽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그것이 {조선일보}의 논조에 1천만 명이 휘둘리며,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에 공감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1천만 명 사이에서 그것이 읽혀지고 논의되고 있음을 뜻할 뿐이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조선일보}의 논조를 좋아하는 사람들 못지 않게 그것에 둔감한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 모두가 {조선일보}를 읽어야 하는 매체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인식되는 한, {조선일보}의 영향력은 기묘한 방식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팔리는 만큼의 화폐가 {조선일보}로 흘러 들어가며, 읽힌다는 사실 때문에 높은 광고료를 받으며, 그 읽힌다는 매력 때문에 필자로 쓰여지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며, 각종 단체와 정부기관이 그들에게 지극히 성의 있는 보도자료를 보내는 것이다. {조선일보}가 겁내는 것은 자신들에 대한 혐오나 공격성이 아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그런 태도가 행동으로 전환되는 것, 즉 더 이상 사람들이 {조선일보}를 사지 않고 읽으려 하지 않으며, 그것의 논조를 문제적이고 고려할 만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 문제는 행동으로의 이행이다. 더 이상 {조선일보}를 보지 않으며, 그것을 보지 않아도 정치적 식견을 갖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것을 단호히 믿는 태도, 그리고 누군가 {조선일보}에 난 어떤 기사나 칼럼을 입에 올리며 나에게 보았느냐고 물을 때 그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주눅은커녕 약간의 냉소를 보낼 줄 아는 격조 있는 태도, 그것이 필요한 것이다.

‘행동’을 강조한다고 그게 행동이 되나?

김종엽 씨의 칼럼도 감동적이긴 하지만, 김씨의 주장과는 달리 그의 칼럼은 김규항 씨의 칼럼과 전혀 다를 바 없다. 김종엽 씨 말마따나, 문제는 행동으로의 이행이다! 누가 그걸 모르나? 그런데 그걸 어떻게 해야 하느냐 이 말이다. 김종엽 씨, 김규항 씨, 그리고 강준만이 셋이서 특공대 조직해서 {조선일보} 보는 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조선일보} 보지 말라고 협박해야 하나? 그렇게 할 수는 없으니 ‘계몽’에 주력하는 것이다. 그러니 ‘계몽’만으론 미진하다거나 부족하다는 말을 해선 안 된다. ‘계몽’만으론 부족한 게 아니라 ‘계몽’이 부족한 것이다. ‘행동으로의 이행’을 강조한 김종엽 씨의 주장 역시 ‘계몽’일 뿐 그 말이 곧 ‘행동’은 아니질 않은가.

내가 보기엔 김종엽 씨가 할 말을 다하지 않은 게 아닌가 생각한다. 혹 그는 아예 {조선일보} 비판도 하지 말자고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실제로 나는 개인적으로 그런 주장을 많이 접했다. 자꾸 {조선일보}만 집중적으로 비판하면 {조선일보}에 대해 잘 모르던 사람들도 궁금해서 {조선일보}를 보게 될 수도 있으니 아예 무관심으로 대하는 게 더 낫다는 주장을 많이 접했다는 말이다. 심지어는 나부터 아예 {조선일보}, {주간조선}, {월간조선}을 일체 끊고 주로 다른 신문들에 대해서만 비판하면 그것이 오히려 “{조선일보} 제몫 찾아주기”에 기여할 것이라는 주장을 한 사람들도 있었다. 김종엽 씨는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건가?

난들 왜 그 문제로 고민을 안 해 봤겠는가? 그러나 그것 역시 답은 아니다. 생각해 보자. ‘무관심’이 대안이라면 {조선일보}에 대한 비판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사람들이 {조선일보}를 덜 보게 될까? ‘상술’은 여러 신문들 가운데 {조선일보}가 가장 뛰어나다는 건 나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다. 그게 가장 중요한 사실이다. 세상이 달라지는 바람에 신문이라고 하는 상품의 성격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사회 개혁에 관심이 있는 지식인들은 신문을 우선적으로 ‘이념 상품’ 또는 ‘정치 상품’ 또는 ‘윤리 상품’으로 보고 싶겠지만, 대다수 일반 소비자들은 그 점에 개의치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서 신문은 공산품과 다를 바 없는 ‘소비 상품’인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무관심’이 대안일 수는 없는 것이다.

신문의 그런 성격 변화와 무관하게 던질 질문도 있다. {조선일보}에 대해 비판을 한다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도대체 얼마나 되나? 김종엽 씨는 “{조선일보}가 겁내는 것은 자신들에 대한 혐오나 공격성이 아니다”고 말했지만, 그건 옳은 진단은 아니다. {조선일보}에 대해 혐오나 공격성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나? {조선일보}는 그 수와 규모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그걸 겁내지 않는 것일 뿐이다. 그걸 드러내야 마땅한 진보적 매체들까지 {조선일보}에 홍보성 기사 하나 실을려고 안달하는 게 문제가 아닐까. 김종엽 씨나 나는 그걸 공격해야지 {조선일보}는 자신들에 대한 혐오나 공격성을 겁내지 않는다고 말하는 게 온당한가?

그러니까 답은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더라는 것이다. 그 경우 답은 ‘계몽’일 수밖에 없다. ‘기록과 평가’래도 좋다. 화끈한 대안은 없으니 그거나마 꾸준히 하자는 것이다. 내가 생각했던 답은 지식인을 지렛대로 이용하는 것이었다. {조선일보}에 글을 쓰거나 그 근처에서 기웃거리는 지식인들을 비판함으로써 지식인 그룹으로부터 {조선일보}를 ‘왕따’시켜 그 ‘상품성’을 떨어뜨리는 전술이었는데, 그 이전에 내가 그 지식인들에 의해 죽을 뻔했다. 의연하게 순교(`殉`敎`)를 한다면 그건 해볼 만 하겠는데, 그게 아니라 {조선일보} 근처에서 놀던 지식인들이 사적인 보복 차원에서 나에 대해 다른 온갖 트집을 잡으며 물고 늘어지는 데 그건 도저히 당해낼 길이 없더란 말이다. 그래서 나는 여러 사람이 같이 해보자고 “조선일보 제몫 찾아주기 운동”의 문호를 개방하는 차원에서 그 운동의 주체를 자임했던 나의 자격을 스스로 부정하고 박탈했던 것이다.

‘계몽’이나마 부족하다

그러나 김종엽 씨의 주장 가운데 매우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방안이 하나 들어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많은 진보적인 사람들이 하는 말 중에 적을 알기 위해서 {조선일보}를 본다는 말이 있다는데, 이제 제발 그런 짓은 그만 두자. 나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지금 당장 이름만 대면 누군지 알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의 이름을 여럿 댈 수 있다. 제발 그 짓 좀 그만 해라.

나부터 그만 두라고? 그게 아니잖은가. 그런 이유로 {조선일보}를 보는 사람들이 어떤 지면에든 공개적으로 {조선일보}를 비판할 기회와 마음이 있다면, 나는 그런 사람들이 {조선일보}를 열심히 보는 것에 찬성한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99.999%)이 그런 목적이 아니잖은가. {조선일보}는 내가 대표로 대신 열심히 보면서 이모저모 알려줄 터이니 나를 믿고 김종엽 씨의 권고를 따르기 바란다. 앞으론 이 이야기도 자주 해야겠다. 적을 알기 위해서 {조선일보}를 본다는 사람들도 나쁜 사람들이라고 말이다.

김종엽 씨가 {씨네 21} 1999년 10월 5일자에 {조선일보}에 대해 한마디 더 했는데, 이른바 ‘조선일보 코미디’를 즐기기 위해 {조선일보}를 보는 사람들도 만만치 않게 있는 것 같다. 김종엽 씨의 말을 들어 보자.

{조선일보}를 보지 말자라는 글을 쓰자,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친구는 글 잘 읽었다고 하면서도 자기는 {조선일보}를 앞으로도 볼 것이라고 했다. 왜냐고 물었더니 ‘그렇게 재미있는 코미디를 왜 안 보고 사냐’는 것이었다.

김종엽 씨의 친구처럼 ‘조선일보 코미디’를 즐기기 위해 {조선일보}를 보는 사람들도 나쁜 사람들이라고 말해야 하나? 그것 참 고민된다. 아니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질까? 그 논리대로라면 나와 같은 사람들의 {조선일보} 비판은 오히려 코미디 관객들을 불러 모아주는 데에 기여하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앞서 내가 반론을 편 바 있는 김종엽 씨의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는 이야긴데…….

그러나 나는 적을 알기 위해서라거나 코미디를 즐기기 위해서 {조선일보}를 보는 사람들은 지식인 계층에 한정돼 있는, 극소수일 것이라 믿는다. 나는 절대 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계몽’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혹 독자들께서 다른 생각이 있다면 반론을 주시기 바란다. 이거야말로 차분하게 논의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주제가 아니고 무엇이랴.

나는 언젠가 다른 지면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조선일보}가 우리 사회의 수준을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생각한다. 지식인들의 기회주의와 이기주의를 포함하여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수준이 {조선일보}를 제1의 신문으로 섬겨 마땅한 그런 수준이라는 것이다. 이건 냉소도 자학도 아니다. 정확하고 정직한 평가다. 그러니 답은 길게 내다보면서 단기적인 효과에 집착하지 않고 묵묵히 ‘계몽’에 임하는 수밖엔 없는 것이다. 소비자들이 인식하는 신문이라고 하는 상품의 성격 변화도 ‘계몽’으로 대처하자는 것이다.

‘계몽’으론 부족하다는 말은 더 이상 하지 마시라. 그게 먹혀 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 어떤 대안도 방안도 없는 상황에서 주저앉지 말고 그거나마 끈질기게 하자는 것이다.‘계몽’으론 부족하다고 말하기보다는‘계몽’이나마 부족하다는 점에 착안하시어 기회가 닿는 대로 {조선일보}의 정체를 폭로하고 그 신문 근처에서 노닥거리는 지식인들의 무지 또는 탐욕을 꾸짖는 데에 뜻 있는 사람들이 동참해주시길 간절히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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