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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죄선일보 > 월간 인물과사상이 파헤친 죄선일보 - 1998년4월호~2000년9월호


이 름 정 혁
제 목 <H.O.T> 그 왜곡된 신화에 관해>에 관한 주석
그 왜곡된 신화에 관해>에 관한 주석  
- 서하니님, 그리고 10대 팬들에게

정혁 │충북 영동군 영동읍│

걱정 마십시오, 언론은 H.O.T 편입니다

제가 를 쓰게 된 동기는 두 가지였습니다. 그 첫째는 서하니 님이 생각하신 것과는 정반대로 이 사건(그러니까 H.O.T의 컴백공연과 팬의 죽음)이 유야무야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고 있는 장면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서하니 님이 지적하신 대로 H.O.T와 H.O.T팬들을 평소 안 좋게 보던 언론, 혹은 기성세대들이 옳다구나 이때다 싶어 비판 아닌 비난에 열을 올린 것이 사실일지도 모릅니다. 그 소녀의 죽음이 오로지 H.O.T에게 있는 것처럼 과장되게 보도된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언론의 과장 대로라면 주범인 H.O.T 역시 뭐가 어떻게 되어야 했던 것 아닙니까. 그로 인해 방송사에 출연금지가 된 것도 아니고 음반 판매가 줄어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요 순위에서 떨어진 것도 아닙니다. H.O.T가 상처받았다구요? TV를 켜 보십쇼. 어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누가 죽었다고 전해집니까?

서하니 님의 우려와는 달리 언론은, 아니 기성세대는 H.O.T를 그렇게 쉽게 버릴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서하니 님이 쓰신 대로 간단합니다. 언론은 ‘상업적’이고 H.O.T는 ‘상업적’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상업적 가치가 있다 못해 아주 대단해서 H.O.T를 두고 방송사와 기획사 사이에서 웃지 못할 이전투구까지 벌어집니다. 그러니 믿으셔도 좋습니다. 아직까지 언론은 H.O.T 편입니다. 잠시 시기하는 족속들이 H.O.T를 ‘무책임하게’ 비난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H.O.T팬들이 안심해도 좋을 만큼 ‘H.O.T의 컴백’ 사건은 이렇게 결론이 났습니다. 화면은 흑백으로 70년대 어느 외국 가수의 방한 공연장에 열광하는(급기야 팬티까지 던지는) 관중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랬던 그들이 지금 H.O.T에 열광하는 당신들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여기서 보여주는 메시지는 전적으로 당신들에게 유리합니다(“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를 비난하기”).

당대 최고의 대중가수로서 서태지, 그리고 H.O.T

서태지와 H.O.T는 여러 면에서 비슷합니다. 특히 그들이 10대들의 강력한 우상이라는 점, 팬들의 열광과 추종이 거의 맹목성을 띠어간다는 점, 이점에 있어서 서태지와 H.O.T는 거의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음악적으로 서태지가 천재여서 H.O.T보다 위대한 것일까요. 물론 서태지의 음악이 H.O.T보다 뛰어나다는 것에 대해서는 서하니 님이 인정하신 것처럼 어느 정도 객관적인 합의가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 역시 합의에 불과한 것이고 수용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음악 생산자가 천재이건 천재가 아니건 직접적으로 큰 상관은 없습니다. 얼마나 듣기 편하고 귀에 쏙 들어오느냐, 즉 얼마나 대중적이냐가 실은 가장 중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어쩌면 대중적으로는 H.O.T의 음악이 서태지의 음악보다 더 뛰어나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서하니 님은 H.O.T팬으로서 괜스레 서태지가 천재라는 사실에 주눅 들으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병 주고 약 준다고 어안이 벙벙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H.O.T에 대한 제 비판의 요지가 조금이라도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왜 유독 H.O.T가 문제가 되는가 하는 서하니 님의 억울함의 항변.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H.O.T가 당대 최고의 대중가수이기 때문입니다. 대중가수 중에는 가창력이 뛰어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춤 실력이 뛰어난 사람, 작곡 능력이 뛰어난 사람, 무대 매너가 뛰어난 사람, 외모가 뛰어난 사람, 제각기 다양한 능력으로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제각기의 요소들이 평등하게 비교되기 어려운 것은 그들 중 누군가는 당대 최고라는 지위를 누리게 되고 또 그만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구태의연하게 H.O.T의 상업성만을 비판하려고 했던 것이 아닙니다. 만약 제 글이 그런 상업성에 대한 음악 순수주의자들의 진부한 음성으로 들렸다면 지금 다시 부연하겠습니다. 저는 H.O.T에 앞서 서태지를 들었습니다. 90년대 대중음악의 기호이자 징표로서 대중성과 음악성의 조화로 요약해 보았습니다. 이것은 대중성(현실)과 음악성(이성)의 조화란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보였고 여기서 H.O.T가 대중성만을 차용해 왔다는 단언을 내렸었습니다. 제가 지표로 삼을 만하다고 여기는 건 상업성과 음악성의 조화이고 만약 당대에서 최고의 지위를 누리는 뮤지션이라면 응당 이 조화에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제 가치 판단이었습니다.

서태지의 위대성과 H.O.T가 지니는 부정적 함의

불행하게도 저는 음악적 견지에서 깊이 있게 그들을 분별할 감식안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단지 음악성만 가지고 서태지와 H.O.T를 비교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주목한 건 그들의 활동이 야기하는 사회적 현상, 즉 외연에 있었습니다. 대중가수는 대체적으로 두 가지 측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하나가 대중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이라면 다른 하나는 이른바 대중음악계에 끼치는 영향력이 될 것입니다. 모르긴 모르되 당대 최고의 가수라면 수용자들에게 정서적 해방감과 순화 등을 선사해야 옳을 것입니다. 또한 대중음악계에서는 다른 뮤지션들에게 다양한 영향을 끼치고 그로 인해 대중 음악이 일층 풍요로워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 비판의 준거로 들었던 것이 서태지였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과연 서태지가 은퇴할 수밖에 없었는가. 은퇴하지 않고 더 인기를 누리며 오랫동안 돈을 벌 수는 없었는가. 왜 그는 갈수록 좀더 어렵고 비대중적인 음악을 끼워 넣었는가. 과연 H.O.T와 같이 10대들의 구미에 맞는 음악만을 좀더 지속적으로 철저하게 생산해낼 수는 없었던 것일까.

앞서 말했듯 저는 음악성에 관해 서태지를 판단할 능력이 없습니다. 따라서 당연하게도 저에게 있어 서태지가 위대한 것은 순전히 그의 천재성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그가 위대한 건 팬들의 사랑, 대중적인 인기도보다 자신의 음악적 자의식을 더 우선에 두었다는 것이고 그래서 과감한 음악적 실험도 할 수 있었다는 것이고(대중이 듣기에 불편한) 급기야 팬들의 엄청난 애원을 뿌리칠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가 의도했던 하지 않았던 어쩌면 그를 정점으로 극단적 파문을 야기할 만한, 즉 서태지교라는 광신 집단이 생겨날 만한 파시즘적 진로를 스스로 차단했다는 것. 그리고 그 자신의 거대한 자리를 비워 놓음으로써(그 자신은 한계에 부닥뜨렸고 지쳤다고 발언했지만) 다른 새로운 뮤지션들이 그 자리에 흡수되어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 바로 여기에 서태지의 위대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서태지는 은퇴라는 형식을 통해 수용자들과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활동 당시 그를 향해 쏟아지던 수많은 질시와 비난마저 무화시켰습니다. 스스로 신화를 완성한 것입니다. 물론 그가 순수하게 한국 대중음악의 발전을 위해, 그리고 수용자들의 광적 현상을 환기하기 위해 은퇴를 결심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건 당시 대중음악계가 ‘기획력`-`마케팅’의 걸음마 단계였던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서태지 자신의 음악적 자의식 때문이었다는 게 제 추론이었습니다. 그의 출발은 당시로서는 드문 헤비메탈 그룹인 시나위의 베이스 연주자였습니다. 그에겐 음악이 먼저였지 팬들의 사랑이 먼저이지 않았습니다. 팬들의 사랑은 부차적이었던 것, 그러니까 자신의 음악적 자의식이 더 이상 수용자들의 보조를 맞출 수 없었을 때 과감히 은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가 활동 당시 보여주었던 선도적 음악, 다양한 실험 등은 많은 뮤지션들에게 직·간접으로 영향을 끼쳤습니다. 많은 젊은 가수들이 서슴없이 자신의 원점으로 서태지를 삼는 것만으로도 이는 쉽게 확인됩니다. 서태지의 등장과 퇴장, 그 과정이 모두 90년대 한국의 대중음악을 한 단계 비약시켰다는 사실은 결코 쉽게 부정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문제는 그가 비워 놓았던 빈자리가 그가 없는 동안 얼마나 성장하고 발전하느냐에 있을 것입니다. 언젠가 그가 다시 복귀해서 예전과 같은 명성, 대중적 인기를 회복할 수 있다면 그 사실은 곧 한국 대중음악의 지체성

(遲滯性)을 의미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저는 그가 다시 돌아올 자리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생산자나 수용자 모두가 충분히 질적 양적으로 성장해 있어서 과거와 같이 한국 대중음악계가 서태지 단독에 의해 평정될 수 없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서태지 이후 가장 강력한 대중음악의 우상인 H.O.T는 어떻습니까. 음악적 실험은 기획사에 의한 상업적 기획으로 대치되고 음악적 영향력은 기획력에 대한 맹신으로 대치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기획력으로 결정될 때 살아남는 것은 오직 자본뿐입니다. 형평성 있는 ‘음악성’의 룰이 완전히 배제되고 막강한 자본력만이 대중음악의 성패를 가늠하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돈 있는 자가 더 돈을 벌게 된다는 겁니다. 정말 대중성 있고 음악성 있는 뮤지션이 있다고 칩시다. 이런 음악 시장에서 그가 자본의 힘을 얻지 못하고 사장된다면 이는 그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대중음악에 있어서도 불행한 일이 될 것입니다.

지금 제가 오버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미 자본이 대중음악 시장의 판도를 결정하는 현상은 곳곳에서 목격됩니다. 도대체 조성모 앨범은 왜 그리 파격적인 세일이 가능한 겁니까. 왜 한스밴드는 그런 인기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가난하게 살아야 합니까.

H.O.T는 기획상품입니다

H.O.T는 분명 기획된 상품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존재 규정입니다. 그들이 점점 자신의 음악을 만들고 음악적 자의식을 지녀 간다고 해서 이 존재 규정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H.O.T는 과연 완전히 자유로운 음악적 자의식을 가질 수 있을까요? 설혹 그들에 의해 파격적인 음악이 만들어진다고 해도 기획된 범위에 의해 검열될 것이며(음반에 실리지 않거나 편곡, 수정되는 방식으로) 아니 애초에 그 범위를 벗어나는 음악을 만들어 내기도 힘들 것입니다. 음악이 만약 예술의 한 부류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 누군가에 의해 교육되기에 앞서 순수한 자기 자유의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H.O.T는 각 개인이 각자의 음악적 주체로서 성립하기 힘든 하나의 동일체입니다. 과연 그들 개개인이 지금 스스로 그 동일체를 부수고 나와 독립적으로 하나의 음악적 주체로 당신들 앞에 설 수 있을까요? 혹은 서태지처럼 음악적 한계나, 음악적 자괴감만으로 은퇴 선언을 할 수 있을까요? 바로 여기에 음악적 자의식으로서 서태지의 위대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들이 그들에게서 보는 ‘전사’의 이미지도 철저하게 기획된 것에 불과합니다. 3집({열맞춰})과 4집 타이틀({아이야})의 구태의연함을 보십시오. 당신들은 그 메시지에 열렬하게 동의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메시지 면에서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그들은 부도덕하게도 매번 기성세대와 당신들의 대립 구도를 골조로 한 곡을 타이틀로 하면서 여전히 당신들을 위해 싸우는 전사의 이미지를 어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당신들의 전사도 투사도 아닙니다. 그들이, 활동 때문에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을 그들이, 혹은 해외에서 학교를 다녔을 그들이 어째서 당신들의 고달픈 현실을 대변하는 전사일 수 있단 말입니까.

그들이 사용하는 기성세대와의 대립 구도는 남용으로 보입니다. 지나친 억압 구조였던 그 구도를 처음 대중화시킨 것은 서태지였습니다({교실 이데아}). 제가 보기엔 H.O.T는 그 구도를 우려먹을 때까지 우려먹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다행하게도 시간이 지나고 세대가 바뀌어 자꾸 새로운 당신들이 탄생됩니다. 새로운 당신들에게는 당연히 새롭고 신선할 메시지가 될 이 기성세대와의 대립 구도는 그들에게 얼마나 편리합니까. 기성세대의 오만과 권위는 비판받고 타도되어야 마땅하지만 그들의 노래가 가진 메시지는 그저 구태의연하고 무책임한 선동에 불과하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은 분명 기획상품입니다. 당신들의 위로와 위무가 먼저가 아니라 이윤추가가 먼저라는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서하니 님, 부탁컨대 대체 누가 누구에게 유린당하고 있는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문화의 지향점은 다양화입니다

우리 대중음악의 현주소를 냉철하게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언제부턴가 대중가수들 사이에서는 조금이라도 몸을 흔들지 않고서는 어필하기 힘들다는 인식이 지배적이 되었습니다. 가창력만으로는 안 된다는 인식은 이제 불문율입니다. 발라드면 발라드, 록이면 록, 한 장르만 줄기차게 물고 늘어지는 가수도 이제 찾아보기 힘듭니다. 단일 곡에 다양한 장르가 범벅되는 예도 생겼습니다. 그것도 하나의 ‘전위’로 볼 수 있지 않느냐는 말도 있는데 소가 웃을 일입니다. 무언가 제대로 섭생하지도 않고 어거지로 비벼놓은 비빔밥이 잘된 것이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게 과연 올바른 현상일까요?

음악을 포함해서 문화의 지향점은 ‘다양화’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한 생산이 가능한 터전이 필요합니다. 어느 정도 음악성만으로도 인정받고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는 판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춤이 안 되면 춤을 추지 않는 개성과 고집이 통용되는 터전, 록이 안 되면 그저 발라드만으로도 고정 팬들의 사랑과 경제적 수입이 보장되는 터전, TV 출연 없이도 그저 소극장 라이브무대만으로도 행복한 뮤지션의 길을 걸을 수 있는 터전, 자신의 능력에 맞게 어느 정도 생계가 보장된 터전에서라야만 대중음악의 질적 양적 풍요로움이 가능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럴 때만이 그들이 진정 하고싶은 음악, 그들이 원하는 음악을 자유롭게 만들고 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곧바로 수용자들에게 연결됩니다. 이로 인해 수용자들은 자신의 음악적 기호를 세련되게 추구할 수 있기 때문에 문화적 인식 및 가치의 폭이 넓어집니다. 이렇게 생산자와 수용자 사이의 행복한 순환이 올바른 대중음악 시장의 표상이 아닐까요.

지금 한국 대중음악계는 어떻습니까. TV에서는 매일 같은 대중가수들이 가수에서 MC, 심지어 연기의 영역까지 누비고 있습니다. 말못하고 뻣뻣이 서 있다가는 교체되기 일쑵니다. 그들이 가수인지 연기자인지 코미디언인지 모를 지경입니다. 한국의 가수는 10대 댄스그룹이 전부입니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다양성입니다. 얼굴·몸매가 음악보다 받쳐주는 가수, 말발이 음악보다 받쳐주는 가수, 춤이 음악보다 받쳐주는 가수, 다 좋습니다. 그런 가수들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넘쳐남이 음악 자체를 호도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닙니까. 대중음악도 음악인 한에서 음악이라는 가치 기준 자체가 변질되어서는 곤란한 것입니다.

서하니 님, 현재 일본 대중문화로부터 우리 나라의 대중문화를 지킬 힘을 가진 유일하다시피 한 가수가 H.O.T입니까? 일본을 너무 과소평가하시는군요. 일본의 X-저팬이 가능했던 건 그들의 문화 전반에 걸쳐 역사적으로 형성돼 온 ‘다양성’ 때문입니다. 일본에서는 결코 한 가수가 이것저것 다른 장르를 기웃거려야 할 사태가 벌어지지는 않습니다. 실력만 있다면 평생 재즈만 한다고 해서 먹고살 걱정을 하는 뮤지션들은 적어도 없다는 얘깁니다. H.O.T에 대한 당신들의 사랑은 얼마나 계속될까요? 2년? 혹여 애국심이 작동된다면 5년까지도 가능할까요? 아니, 과연 H.O.T가 지킨다는 우리 나라의 대중문화는 무엇입니까? 팬들에 대한 사랑을 빼면 그거 정말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단 4줄이었습니까?

제가 를 쓰게 된 두 번째 동기는 바로 서하니 님의 다음과 같은 진술 때문이었습니다. “콘서트 며칠 후, 여고생 팬이 투신자살했습니다. 그녀의 유서, A4 2장에 빽빽하게 채워진 글 중 H.O.T에 관한 글은 단 4줄이었습니다.”

묻겠습니다. 어떻게 “단 4줄”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겁니까. 저는 죽음의 동기가 객관적으로 정량화되기 힘들다고 썼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단 4줄”이 아니었다면, 그러니까 문희준의 부상이 아니었다면, 그 소녀가 H.O.T의 팬이 아니었다면, 혹, 죽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라는 관점에서 그 죽음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신들이 H.O.T, 혹은 H.O.T팬의 입장에서 H.O.T 때문이냐 아니냐를 이야기할 때 당신들은 이미 망자(`亡`者`)의 입장을 무참히 왕따시켜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삶과 죽음이 문제가 아니라 H.O.T의 유죄 무죄가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은 안심했을 것입니다. 단 4줄뿐이어서.

저는 다소 충격을 받았습니다. 적어도 또래인 당신들에 의해 “단 4줄”이라고 말해져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설령 “H.O.T 때문에 자살한 것이 아니”었다고 해도 당신들은 “H.O.T 때문에 자살한 것이 아니”었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단 4줄이었지만 가장 어처구니가 없었고-문희준의 부상에 대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가장 비이성적인 이유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저로 하여금 “단 4줄”에 불과했던 H.O.T를 사이비 교주와 히틀러에 비유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히틀러를 우습게 보지 마십시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는 “H.O.T를 사이비 교주나 히틀러에 비유한 것은 지나친 비약이라는 것을 인정하십시오”라는 서하니 님의 요구를 들어 줄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것을 정당한 비약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변명하자면 H.O.T를 히틀러나 사이비 교주의 어느 한 속성에 비유한 것이지 그들 전체에 비유한 것은 아니라는 것 정도일까요. 물론 그 어느 한 속성이 전체주의

- 파시즘이라는 데 있어 그들 전체를 비유한 것과도 다를 바가 없을지도 모르겠군요. 아마 모르긴 몰라도 서하니 님은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을 머리에 떠올리셨던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것 역시 파시즘의 산물이기는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그나마 H.O.T는 그런 히틀러와 비교될 수도 없겠군요. 히틀러는 그 스스로 탁월한 대중선동가였습니다. 어느 뛰어난 철학자도 그의 연설에 감명을 받을 만큼. 그러니까 그 방면에 있어 그의 능력은 빼어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H.O.T가 이런 히틀러와 비교될 수 없다는 건 그들 스스로 탁월한 선동가일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의 대중 선동은 오직 기획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니까요.

음악 자체에 정확한 이유와 논리가 있을 수 없다는 의미에서 당신들의 H.O.T 선택은 분명 정당합니다. 그러나 “나름대로의 생각과, 감성, 가치관”이 있어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정도의 이성이” 있는 당신들의 상당수가 H.O.T에게 보여주는 광범위한 동의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정도의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기는 어렵습니다. 나름대로 생각과 감성, 가치관이 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서로의 개성에 의거 각자 다양한 기호와 가치관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 아닐까요. 모르긴 몰라도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노래를 듣고, 똑같은 액세서리에, 똑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을 개성이라고 부르기는 힘들 것입니다. 당신들은 개성을 부르짖지만 3만5천 명이 보여주는 H.O.T에 대한 사랑과 열광이 과연 개성일 수 있을까요. 100여 명의 졸도와 스토킹 따위를 과연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정도의 이성”이란 이름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저는 지금 당신들을 비판하려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들이 기성세대와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분명 정서적이고 감정적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은 것입니다. 당신들은 아직 불안합니다. 여백이 많습니다. 그만큼 순수한 여백이 견고해지기도 전에 상처받기 쉽다는 것, 그것을 지적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 여백이 아직은 상당량 정서로 채워져 있다는 것. 그 정서적 순수성이 바로 대중음악 기획사들의 공략 대상이 된다는 것. 이 싸움에서 이득을 보는 것은 기획사를 중심으로 몇몇에 불과합니다. 기성세대와 당신들이 서로 욕하며 적의를 보이는 사이, 그리고 기성세대가 천덕꾸러기처럼 불신되고 당신들이 정서적으로 상처를 받는 사이 그들은 돈을 챙깁니다.

저는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존재에 대한 정언적 동의는 쿤데라에 의해 반예술적이며 전체주의적인 속성으로 규정된다. 그것의 적극적 이용은 사이비 교주와 히틀러의 전매특허다.”
여기서 비유의 대상은 H.O.T가 아닙니다. 그것은 H.O.T 현상, 혹은 배후의 기획력에 있습니다. 도대체 H.O.T와 히틀러가 비유나 된단 말입니까. 히틀러를 우습게 보지 마십시오.

정언적 동의에 대한 부연
-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당신 자신입니다

집단 단위의 열광과 환호 속에서 이루어지는 정언적 동의, 그러니까 순간적인 몰아(`沒`我`)는 누구나 겪는 일입니다. 제가 그 문제의 H.O.T 공연장에 있었다면 당신들처럼 졸도하는 일은 없겠지만 적어도 열광이나 환호에 동화는 되었을 것입니다. 제가 이 개념을 쓴 것은 당신들을 인정하고 이해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당신들의 부모님이 함께 공연장에 있었더라면 당신들의 부모님 역시 적지 않은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순전히 H.O.T의 노래가 우수하고 그들의 무대 매너가 매혹적이어서만이 아니라 바로 집단 단위의 열광과 환호 속에서 이루어지는 정언적 동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야구에 대해 잘 모르고 TV를 보며 졸던 사람도 관중 속에 있으면 사정이 달라진다는 것.

이성이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기성세대라고 해서 모두 당신들보다 이성적인 것도 아닙니다. 역사는 아무리 이성적이고 뛰어난 사람들도 파시즘이라는 집단적 광기에 열렬하게 동의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제가 당신들의 이성을 폄하하기 위해 그런 ‘정신과 의사’적 발언을 했던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현상들이 오직 H.O.T의 위대성에 의한 것이라고 믿어진다는 것이고 그 믿음이 우상화되어서 일상 생활에까지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재록 목사의 만민교회를 보십시오. 그 신도들의 믿음 자체는 불순한 것이 없습니다. 그들도 역시 이재록 목사를 통해 위안을 얻고 기쁨을 얻습니다. 그러나 이재록 목사가 신처럼 군림할 때, 그 위대성의 어떠한 결점도 없어 보이고, 또 그 결점이 지적될 수 없을 때, 집단적이고 정서적인 정언적 동의는 신도들 개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가 버립니다. 그래서 집단적인 방송사 난입이 가능하고 부모자식간의 적대(`敵`對`)가 가능합니다. 분명한 것은 이재록 목사가 신이 아니라는 것이고, 실수가 있는 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이고, 그 점에 있어서 신도 개개인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이 스스로 무결점의 절대적 존재로서 군림하여 그를 향한 어떤 비판도 불가능할 때, 되려 그 비판이 신성모독이 되어 처단될 때, 우리는 그 체제를 독재라고 부르고 파시즘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H.O.T가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서하니 님의 말씀은 전적으로 옳습니다. 기쁨과 즐거움만 주는 것 그것만으로 족해야 합니다. 그 이상이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그런데 지금 과연 그것 만입니까. 저는 분명 이렇게 썼습니다. “공연장을 나서서 그들은 다시 일상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심신은 충전되어서 다시 그 일상과 응전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자아를 여전히 공연장에 저당 잡히고 나온다면?” 당장 연예 전문기자들에게 행해지는 팬들의 협박, 또는 압력을 보십시오. 이것마저 그저 언론의 엄살로 치부해야 할까요. 생방송 도중 진행자가 ‘아이야’를 ‘아이다’라고 실수한 일이 과연 원성을 들을 만한 일입니까. 그들의 빨래줄에서 없어지는 속옷은, 그리고 그들의 차에서 도난당하는 번호판은 어떻습니까. H.O.T 팬과 젝스키스 팬들 사이에 벌어지는 맹목적인 다툼은 또 어떻습니까.

“그러나 H.O.T를 사이비 종교와 히틀러에 비유한 정혁 님의 글을 읽었을 때, 제가 느낀 모욕감과 분노, 상처에 비해서는”이라는 서하니 님의 문장에서도 별 수 없이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 서하니 님은 H.O.T 때문에 모욕감과 분노를 느끼고 상처를 받아야 합니까. H.O.T가 서하니 님 자신만큼 소중하고 귀하다는 것입니까. H.O.T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종이 한 장 꺼내 놓고 그 이유를 열 가지 정도로 한번 적어 보십시오. ‘사랑하니까’라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면 좀더 기다리십시오. 좀더 자라서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귀한 것은 바로 서하니 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말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귀한 것은 바로 서하니 님 당신입니다. H.O.T가 아니라 당신들이 바로 위엄 있고 귀한 존재입니다. H.O.T가 당신 자신보다 잘난 것이 무어가 있단 말입니까.

가소롭게 들리실지도 모르지만 해방구를 마련해 달라는 당신들 외침이 인천 호프집 재난 사건과 겹쳐 가슴 아프게 들립니다. 그러나 적어도 당신들이 생각하듯 H.O.T가 결코 해방구일 수 없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H.O.T보다는 차라리 시집 한 권, 소설책 한 권, 하다못해 만화책 한 권이 더 낫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H.O.T를 넘어서

H.O.T를 위해 ‘변명’하는 당신들이 저는 조금 서글픕니다. 왜 하고많은 것 중에 서하니님 스스로 순전히 상업적이고 어른들이 만들었다고 인정하시는 H.O.T여야 합니까. H.O.T는 당신들의 전사도 투사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당신을 위해 만들어진 것도 아닙니다. ‘헛것’임을 알면서도 ‘헛것’에 맹목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까요.

당신들 삶의 실체로서 전사이자 투사는 당신 자신이어야 합니다. H.O.T를 위한 변명이 아니라 꽃다운 나이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그 소녀를 위한 변명이 되어야 하며 부분적인 사실로 증폭된 분노가 아니라 전체적인 이해의 노력에서 오는 비판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주체는 주변의 대상들을 얼마나 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있냐에 따라 성장합니다. 즉각적인 반응, 정서적 감정적 반응은 일시적이기 때문에 그것이 정도를 넘어설 경우 주체는 불구로 자랄 공산이 큽니다. 영화 {비트}에서 민이가 보여주는 ‘두 팔 벌려 눈감고 오토바이 타기’는 탈출구 없는 환상일 뿐입니다. 그도 결국 앞서 오는 트럭을 피하기 위해 핸들을 잡고 눈을 떠야 하는 것입니다. 당신들이 그러한 유행에 민감하고 정서적으로 예민하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반드시 그 밑에 ‘자기 주체적 비판’의 씨앗은 간직되어야 옳습니다.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자기 주체와 가치관을 세워 가는 일이 곧 자신의 정체성이 되는 것이며 그것이 곧 남들과 구분되는 개성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또한 당신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게 해 주고 아울러 똑같이 남들도 소중히 여기게 해주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를 쓰게 된 것은 H.O.T가 그 엄청난 팬들의 사랑을 받을 만큼 대단치 않다는 인식에 있었고 그래서 그들이 한국의 대중음악의 장애물이 되고 있다는 데 있었고(다양성의 관점에서) 그것의 파시즘적 경향을 지적해 보려는 데 있었고(정언적 동의라는 개념을 통해) 그래서 미진하나마 H.O.T 개개인의 주체성을 자극, 촉구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서하니 님 자신이 H.O.T를 넘어서기를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 핵심 주장은 간단합니다. 문화는 다양화를 지양해야 한다는 것(그것을 저해하는 모든 것에 대해 발언하고 투쟁할 것!).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서하니 님을 비롯한 바로 개인 자신이라는 것(그것을 저해하는 모든 것에 대해 발언하고 투쟁할 것!).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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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8    텔레비전의 경쟁전략은 다양한 대안 프로그램뿐이다 조 흡 2002/06/28 859
457    연예계의 ‘약육강식(弱肉强食) 이대로 둘건가? 강준만 2002/06/28 793
456  [월간 인물과사상 2000년 1월호] 인물과사상사 2002/06/26 950
455    편집부의 글 - 소송과 관련해서…… 편집부 2002/06/27 1128
454    왜 고소당하기인가? 홍세화 2002/06/27 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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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0    {조선일보}와 재벌개혁 강준만 2002/06/27 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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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7    ‘엉거주춤 정권’과 ‘엉거주춤 시민운동’ 강준만 2002/06/27 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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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5    H.O.T에 대한 왜곡된 혐오증에 관하여 현제명 2002/06/27 1223
   <H.O.T> 그 왜곡된 신화에 관해>에 관한 주석 정 혁 2002/06/27 952
443    통합방송법 통과를 지켜보며 정 언 2002/06/27 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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