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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죄선일보 > 월간 인물과사상이 파헤친 죄선일보 - 1998년4월호~2000년9월호


이 름 정혁
제 목 H·O·T, 그 왜곡된 신화에 관하여
정 혁 │충북 영동군 영동읍│



H·O·T는 건전한 모습으로 팬들과 전파의 환호를 받으며 방송에 복귀했다. 큰 부상과 정신적 상처의 의혹을 낳던 문희준은 매우 건강해 보였다. 건강하게 무대를 누비며 노래를 불렀고 춤을 췄다. 팬들의 끊임없는 괴성 속에서 전달되는 그들의 음색은 흥분되어 있었고 그만큼 의미 전달의 맥락은 불분명했다. 아무려면 어떤가, 팬들이 그토록 원하고 그토록 열광하는데. 그렇다. 그들은 건전했다. 그러나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어·떻· 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H·O·T는 전도된 신화

90년대 서태지라는 음악 감독이 있었다. 그는 그 자신의 탁월한 음악적 재능뿐만 아니라 대중을 선동하고 그들의 욕구를 선지(`先`知`)하는 능력에 있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앨범 제작을 구실로 한 전면적 활동 중지는 대중들의 호기심과 갈증을 증폭시켰고(`그것은 그의 음악적 비대중성을 대중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쇼맨십을 적극 수용함으로써 이미지 세대를 강렬하게 휘어잡았다.

서태지는 두 가지 값진 유산을 남겼다. 하나는 아무리 빼어난 음악성이라 할지라도 대중을 상대로 한 치밀한 기획 없이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 자신이 체현한-대중 음악가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지위로서-신화 창조였다. 그는 여전히 열광하는 대중들을 뒤로하고 스스로 과감히 한 시대를 마감했다. 왜? 그는 그 자신의 음악성을 대중적으로 체화하는 데 한계를 느꼈다. ‘음악성’이 거세된 상태에서 팬들의 열광은 그저 광기에 불과할 뿐이며 그것은 연예인 이전에 아티스트로서 그의 자존심이 허락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또한 그는 그러한 연장의 끝이 얼마나 비참할 것인지 깨닫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시각은 미래의 지평에까지 열려 있었고 영악하게 대중들의 격렬한 애원을 뿌리치는 현재적 고통을 감내할 줄 앎으로써 스스로 의심의 여지없는 신화의 자리에 등극했다.

H·O·T는 서태지 이후 가장 강력하게 등장한 기획체였다. 서태지에게 혼재했던 음악적 자의식을 완전히 거두어 버리고 서태지가 완성했던 기획력을 극대화시켰다. 그들은 기획사에서 만들어진 노래와 춤, 그리고 조작된 이미지를 그대로 ‘연기’함으로써(`그들은 기획사의 완벽한 꼭두각시다.`) 서태지의 유산을 가감 없이 왜곡했다.

그들은 서태지가 남겨 놓은 대중적 여진을 그대로 끌어안았다는 점에서 매우 영리했다. 음악을 포함한 문화는 다양성을 견지했을 때 비로소 도착된 신화가 깨질 수 있다. 그러나 서태지가 통용되던 시기는 과도기였다. 제도가 미비된 상태에서 다양한 서태지의 수용은 불가능하게 되어 있었다. 대중들은 음악을 구분하여 보다 개인적으로 음악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된 상태였다. 따라서 그들은 쉽게 어느 구호와 선동 밑에 복속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대중적 여진을 H·O·T는 재빠르게 수용하며 대중을 안심시켰다.

여기서 대중은 물론 10대 위주로 재편되었다. 그들에게는 과거의 유물로서 신화가 아닌 현세적 신화의 재생이 필요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음악적 호소력 자체에 의해 성숙되어야 할 문제였지만 이것은 잠정적으로 불가능한 이상이다. 따라서 차선이며 유일한 현실적 대안인 서태지의 유산-음악적 호소력과 기획력의 복합적 조화에 의한 점진적 성숙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나 H·O·T는 10대들의 욕구에 혼재된 이성과 본능 중 비열하게 본능에만 호소했다. 그들은 그들의 팬으로 하여금 몰이성적으로 싸우게 했고 그 싸움으로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했다. 그들은 10대들의 감수성과 신화에 대한 욕구를 한 단계 전진시킨 것이 아니라 가장 저열한 것을 극대화시키며 자신들의 존재 의의를 채우는 부도덕을 공공연히 실현시켰다.

이것을 전도된 신화라고 부를만하다. 그들의 출발은 물론 부도덕하지 않았다. 그들의 기획력은 충분히 긍정적인 엔터테인먼트 효과를 보여 주었다. 다분히 정략적인 노래들(`예컨대 좬전사의 후예좭`)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그들의 ‘조작된’ 이미지는 밝고 명랑했으며 선량했다.

그러나 그들은 서태지의 두 번째 유산조차도 배반했다. 아니 배반했다기보다는 체현이 불가능하다는 표현이 더 옳을지 모른다. 그들은 음악적·연예적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체적으로 무대에서 내려올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들에게는 음악적 자의식(`혹은 자부심`)이라는 한 축이 애초에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직 팬들의 열광과 사랑에 대한 자의식만으로 작동되는 것이다. 팬들이 원하는 한 그들은 그 어떤 추태를 보이면서까지도 무대 위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것이 또한 기획사의 기획된 ‘말씀 logos’이기도 하다.

신흥종교 H·O·T교

한 소녀 팬의 자살은 이제 아무 것도 아닌가? 그녀의 사인에서 H·O·T의 혐의는 대폭 축소되었다. 그녀는 학교에서 왕따였고 가정에서는 불우(`정서적인 의미에서`)했다. 우리는 이러한 객관성에 눈이 멀어 H·O·T가 상징하는 위험성을 놓쳤다. 팬들은 성원했고 H·O·T는 아무렇지도 않게 무대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녀는 학교에서 왕따였고 가정에서 불우했다고 해서 H·O·T는 무죄인가? 웃기는 소리다. 팬들은 H·O·T를 무분별하게 옹호하면서 H·O·T가 아니었더라도 그녀는 충분히 죽을 수 있었다고 잔인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가장 공감하고 연민을 느껴야 할 친구를 죽어서까지 왕따시킬 수 있단 말인가. 말을 바꿔보자. 그녀는 학교에서 왕따였고 가정에서는 불우했다. 그리고 그녀의 유서에 H·O·T가 아닌 교사의 체벌이 들어 있었다고 하자. 교사는 무죄인가?

죽음에 대한 시선은 ‘객관성’이 아니라 ‘윤리’여야 한다. 체벌한 교사가 만약 스스로 교단을 떠나 버린다면 그는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죽음에 대한 객관성은 말이 되지 않는다. 공학적 규준성에 주관적 양심을 팔아버릴 만큼 인간이 뻔뻔해졌단 말인가.

어째서 H·O·T가 사이비 종교일 수밖에 없는가가 여기서 드러나고 있다. 사이비 종교는 이성과 최소한의 양심을 마비시킨다. 자아를 몰살시킨다. 모든 가치를 교주를 중심으로 돌게 한다. H·O·T교의 심각성은 더하다. 왜냐하면 H·O·T 스스로 주체성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저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 자의식에 준하는 음악적 재능도 대중을 선동하는 재능도 그들에게는 없다. 그들은 기획사의 계산된 양식과 범위 안에서 움직이며 신도들의 열광과 환호를 받는다. 따라서 신도들의 믿음은 그들의 진자아와는 무관한 철저한 허구 개념이며 그들은 그 허구 개념에 자신을 ‘정언적(`定`言`的`)으로 동의’시키고 있다(`신도들의 믿음을 자신에 대한 진정한 믿음인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그들이 그들의 존재 의의-teenager-를 다했을 때 그들은 서태지와 같은 신화에 결코 등극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신화는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 기획사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 전도된 신화의 말로는 그들 개개인에게 비참한 게 될 것이다. 사례는 있다. 80년대 New Kids On The Block을 보라. H·O·T는 New Kids On The Block의 한국화였다. 그들의 노래는 이제 ‘추억’조차 되지 않는다. 그토록 열광했던 팬들은 다 어떻게 되었는가. 또 팬들을 선도했던 그 화려했던 그룹 멤버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H·O·T는 별다른 이변이 없다면 그들의 운명을 좇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미 예정된 이 불우한 운명을 감안해 줄 기획사는 어디에도 없어 보인다. H·O·T 개개인들도 서태지에 비견하는 음악적 자의식과 미래에 대한 주체적 비전이 없는 한 팬들에 대한 절대적 의존에서 헤어나기 힘들 것이다. 팬들의 사랑은 마약이다. 기획사가 그 마약을 그들에게 주입하고 있으며 유감스럽게도 마약은 영원하지 못하다.

정언적(`定`言`的`) 동의

여자들은 적·백·청의 블라우스를 입고…… 행진곡을 연주했다. 행진대열이 관람대에 가까이 오면 더없이 지루해 하고 있는 얼굴들까지도 마치 자기들이 감동적으로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기들이 당연히 동의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처럼 미소를 띠면서 화기를 풍겼다. 그러나 단순히 공산주의에 대한 정치적 동의가 문제된 것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에 대한 동의가 문제된 것이다. 5·1절 축제는 존재에 대한 정언적 동의(`필자 강조`)의 깊은 우물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1)

밀란 쿤데라의 소설 좬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좭에서 나오는 위 대목은 지난 9월 18일 올림픽 주 경기장에서 3만5천 명이 운집한 가운데서 벌어진 100여 명의 졸도 사건을 어느 정도 설명하고 있다. 이때 100여 명은 순간적으로 자아를 잃었다. 그들은 부상당한 문희준에게 열렬히 정언적으로 동의했다. 3만5천 명과 함께 하면서, 소리를 지르고 열광을 하면서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의 독립된 존재를 지킬 수가 없었다. 이성이 작동되지 않는 자아의 죽음은 결국 졸도라는 집단적 히스테리로 막을 내렸다.

누구나 ‘존재에 대한 정언적 동의’를 경험한다. 한국과 일본전, 과거의 한국과 북한전, 그때 경험하는 순간의 자아(`균형적인 이성으로서`) 몰각은 ‘존재에 대한 정언적 동의’이다. 관중석에선 그 빈도가 더 심해진다. 그는 언제 자신이 일어나 소리를 지른 것인 지 생각해낼 수 없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팀을 응원하고 있다. 정언적 동의란 그 존재의 부정성(`혹은 그렇게 여겨지는`)을 부정하는 것이다. 공정한 판결도 자신이 응원하는 팀에 부당한 것이 된다. 경우에 따라 상대팀은 무조건 ‘악’이 된다. 5·1절 행사에서의 정언적 동의는 공산당에 대한 정치적 함의를 몰각시킨다. 고귀한 인간에 대해서는 똥이 부정되고 예수에 대해서는 웃음이 부정된다. H·O·T에 대한 정언적 동의는 그들을 향한 비판(`이성`)을 허락하지 않는다. “도대체 왜 내가 그들을 좋아하고 졸도까지 해야한단 말인가?” - 그들에게 이 동의는 순간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영속적이다. 그것을 판단하고 비판하고 수정할 경험과 이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존재에 대한 정언적 동의는 쿤데라에 의해 반예술적이며 전체주의적인 속성으로 규정된다. 그것의 적극적 이용은 사이비 교주와 히틀러의 전매특허다.

H·O·T의 공연장. 여기서 그들의 음악과 춤을 순수한 예술로 인식하기 위해서 수용자는 결코 열광해서는 안 된다. 냉담하고 관찰자적인 시선에 의해서만 그들은 예술로 인식될 수 있다. 그러나 H·O·T의 음악이 반드시 예술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다시 H·O·T의 공연장. 팬들의 환호와 열광은 정당하다. 그들은 그 환호와 열광을 통해 일상 생활 속에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던 스트레스를 해소시킨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해소되었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그 믿음이 진짜로 스트레스를 해소시키는 것이다. 정서의 순환과 복귀. 공연장을 나서서 그들은 다시 일상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심신은 충전되어서 다시 그 일상과 응전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자아를 여전히 공연장에 저당 잡히고 나온다면? 현실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불순한 것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다.

H·O·T는 그들의 빛나는 기획력으로(`그것은 10대들의 불행한 시대적 환경에 기생한다`) 그들에 대한 팬들의 ‘정언적 동의’를 부추겼다. 이 혐의만으로도 그들은 유죄다.

H·O·T의 결단을 바람

H·O·T의 전 시대가 부정적이지는 않다. 그들은 서태지 이후 10대들의 허기진 욕구에 어느 정도 대안 구실을 했다. 그러나 그들의 탄생부터 천형처럼 채워진 존재 규정 - H·O·T(`High five Of Teenager`)와 음악적 자의식(`자부심`) 결여는 한정된 수명을 예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수명을 뛰어넘으려는 ‘기획력’의 야심은 갈수록 위험수위를 넘고 있다. 한국 대중 음악 시장은 기형이 되어 버렸고 비주류의 주류 진입, 그로 인한 음악적 다양화와 수준 향상은 계속 지연되고 있으며 몇몇 일급 작곡가에 의해 안정적이고 평준화된 음악이 한국 대중 음악을 독점하고 있다.

그런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에게 무엇을 요구할 수 있단 말인가. 기획사를 설득할 논리는 아무 것도 없다(`그들은 정당한 상업주의인 것이다`). 그렇다면 H·O·T 개개의 진자아는? 어쩌면 그들은 서태지의 신화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들에게는 팬들의 열렬한 사랑만 있으면 된다. 팬들의 사랑이 영원하지 않으면 뭐 어떻단 말인가.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인 것을.

그러나, 바로 지금 이 순간, 한 생명이, 죽었다. 이것은 불길한 징후다. 그들은 불행한 10대들의 우상임을 자임하면서 기성의 제도와 똑같은 방식으로 10대들에게 폭력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그 전체주의적인 방식은 아직 여린 감수성과 덜 여문 자아인 10대들에게 폭력과 다름없다. 그들이 스스로를 위엄 있고 귀한 존재로 여기게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스스로를 타인에게 완전히 헌납하고 자신을 가벼운 것으로 취급하게 만들고 있다.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눈을 찔렀다. 그는 알지 못했다. 자신이 죽인 왕이 자신의 친아버지이며 자신이 결혼하여 몸을 섞은 여자가 자신의 친어머니란 것을. 이 가혹한 신의 운명 앞에서 그는 스스로 자신의 눈을 찌름으로써 ‘윤리’라는 가치를 들고 신으로부터 달아났다. 궁극적으로 모든 죄는 기획사에게만 있는가? H·O·T는 몰랐고 아무 죄가 없는가? 아니, 몰랐다고 죄가 없는가? 그들에게도 분명 결단하는 주체는 있다. 그들도 스스로 제단에서 내려올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이건 단순한 희망사항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 순간에도. 기획사는 표절까지 상술로 둔갑시키며 끝내 최후의 음악적 경계선까지 밀고 나가는 과감성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H·O·T는 방송활동에 들떠 있다. 아무려면 어떤가. 광기 어린 신도들이 있는데.


퍼 가실 분은 참고하세요. 이 글의 주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neo.urimodu.com/bbs/zboard.php?id=choisun_insa&page=9&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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