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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죄선일보 > 월간 인물과사상이 파헤친 죄선일보 - 1998년4월호~2000년9월호


이 름 강준만
제 목 『중앙일보』 권영빈 논설위원의 빛과 그림자
97 대선시 권영빈의 활약

점잔 빼는 글쓰기를 좋아하는 권영빈 논설위원까지 드디어 옷 벗고 나섰다. 그는 97년 9월 19일자 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TK든 PK든 호남이든 국가 지도자를 지역 대표자로 뽑아서는 안 된다는 당연한 결심을 이젠 해야 한다. 허전한 선택이 아니라 헛된 욕심을 버리고 이성과 합리에 바탕을 둔 미래 지향적 선택을 해야 한다. 한 지역의 한을 대통령 뽑기로 풀려 한다면 향후 20년 세월도 모자란다. 대통령 선거란 지역 대표 뽑기도 아니고 패거리 집단의 권력 독점 절차도 아니라는 이 평범한 체험을 TK, PK 뿐만 아니라 유권자 모두 공유해야 우리의 정치 문화가 한 걸음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TK, PK라는 용어 자체가 사라질 수 있다.

어째 지역주의에 관한 양비론인 것 같으면서도 실은 아무개 후보를 씹기 위한 칼럼이라는 냄새가 물씬 풍긴다. 그 냄새가 결코 잘못 맡은 게 아니라는 건 나중에 증명된다.……

대선이 다가올수록 『중앙일보』 논객들의 몸도 달아오른 것일까? 권영빈 논설위원은 97년 10월 17일자 <‘적’은 내부에 있다>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이렇게 말했다.

DJ 지지는 많아야 35%선이라는 한계를 지닌다. 남은 65%를 두 이씨와 조씨가 나눠선 누구도 35%를 넘을 수가 없다. 해답은 자명하다. 같은 뿌리의 여권 후보 두 사람이 어떤 형태로든 연대하지 않고서는 3김 시대 청산은 허공에 치는 메아리일 뿐이다.

이건 마치 이회창 후보 진영의 대변인 성명 같은 느낌을 준다. 오죽하면 민주언론운동협의회에서 발행하는 『민주언론운동』(97년 9/10월)이 2개월만에 한번씩 뽑는 ‘최악 칼럼’에 바로 이 칼럼을 선정했겠는가. ……

권영빈 논설위원은 뒤늦게 자신의 주장이 너무 밑도 끝도 없이 내뱉어진 것이라는 걸 깨달은 걸까? 1주일 후 10월 24일자 <왜 3김 시대 청산인가>라는 제목의 칼럼에선 아예 이회창 후보의 선거 운동원 같은 발언을 내뱉는다.

비자금·권력 남용·패거리 정치가 군사 문화가 낳은 최악의 정치 행태임은 누구나 알고 있다. 때문에 군사 문화의 잔재는 3김 시대의 청산과 함께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대통령 선거야말로 축제의 한마당이 돼야 한다. 새 시대 새 정치라는 구호만을 내세울 것이 아니라 깨끗한 정치를 할 수 있다는 증거와 현물을 제시하는 집단끼리 뭉쳐 낡은 정치를 청산하는 정치 혁명을 이룩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권영빈의 역공

위 내용은 지난 98년 2월에 나온 『인물과 사상』 제5권에 실린 <한국 언론인의 자존심을 위하여: 97 대선과 『중앙일보』의 ‘위험한 장난’>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다시 가져온 것이다. 나는 권영빈 논설위원이 그 글을 읽고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반성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는 반성하지 않았다. 내가 무슨 한국 언론의 심판관도 아닌지라 반성하지 않았다고 해서 어떻게 응징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럴 수 있는 자격도 권력도 내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로선 그냥 두고보는 수밖엔 없었다.

그런데 최근 그가 쓰는 일부 칼럼들이 지난 대선 시의 ‘위험한 장난’을 능가하는 문제를 드러내고 있어 아무리 힘없는 글이지만 그걸 다시 지적은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권 논설위원의 모든 칼럼이 다 잘못된 것은 아니다.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그는 때로 나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칼럼을 쓰기도 한다. 사실 그래서 더 안타깝다. 전반적으로 보아 꽤 훌륭한 언론인 같은데 왜 가끔 ‘위험한 장난’을 하는 걸까? ‘조직인’이라는 한계 때문인가? 그렇다면 이건 개인 권영빈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언론 전체의 문제가 아닐까? 독자들께서는 그런 문제의식을 갖고 이 글을 읽어주시기 바란다.

권 논설위원은 지난 대선시에 자신이 썼던, 그리고 사회적으로 적잖은 논란을 빚었던 두 개의 칼럼에 대해 전혀 반성하지 않았다. 오히려 <왜 3김 시대 청산인가>라는 칼럼을 쓴 다음 주인 10월 31일자 칼럼 <`축구장과 선거판`>을 통해 다음과 같이 역공을 취하였다.

최근 나는 두 차례에 걸쳐 신한국당은 ‘내부의 적’이 문제임을 지적했고 왜 3김 시대가 청산돼야 하는지를 내 나름대로 합리적 사고를 거쳐 글을 썼다. 이 글 때문에 나는 축구장의 훌리건 못지 않은 언어 폭도들의 감정적 뭇매를 맞아야 했다. ‘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데 그 따위 글을 써!’‘너 신한국당 첩자야’등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전화로 들어야 했다. 글 써 먹고 사는 사람의 직업적 후유증이라고 자위하기엔 사태가 심각하다. 축구장의 훌리건처럼 합리와 상식과는 담을 쌓고 자기편이면 무조건 애정을, 상대편은 무조건 적이라는 철저한 적대감으로 무장돼 있는 우리 정치 현실이 큰일이다.

정말 큰 일이다.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전화로 퍼부은 ‘언어 폭도들의 감정적 뭇매’에 대해선 나 역시 권 논설위원과 더불어 개탄을 금치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곧 권 논설위원의 칼럼에 대한 면죄부가 되는 건 아니다. 대 일간지에 글을 쓰는 사람이 최소한의 상식조차 결여된 글로 경쟁관계에 놓여 있는 어느 한쪽의 편을 일방적으로 들어줄 경우 그 사람 역시 비판받아 마땅하다.

교묘하고도 해괴한 논리

권 논설위원은 그런 칼럼을 쓰기 이전에 우리 나라 신문들도 선거 시엔 사설과 칼럼을 통해선 특정 정당, 후보의 편을 들어줄 수 있게끔 기존의 법과 규칙과 관행을 바꾸자는 주장을 먼저 했어야 옳았다. 나는 그런 주장에 찬성한다. 그러나 아직 우리 나라에선 그렇게 할 수 없게 돼 있다. 권 논설위원은 ‘나름대로의 합리적 사고’를 주장하지만, 선거 시에 경쟁관계에 놓여 있는 어떤 정당, 어떤 후보들도 나름대로 합리적 사고를 한다는 걸 잊어선 안 된다. 권 논설위원의 주장과 반대되는 주장 역시 나름대로의 합리적 사고의 결과라는 말이다. 달리 말하자면, 권 논설위원이 진리와 진실을 독점하고 있는 게 아니다. 권 논설위원의 주장은 자신의 주관적 견해일 뿐이고 기존의 법과 규칙과 관행을 위반한 것이었다. 권 논설위원은 그 점에 대해 먼저 사과했어야 옳았다. 그리고 나서 ‘언어 폭도’들을 꾸짖는 게 온당한 게 아닐까?

이건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다. 『미디어오늘』 97년 10월 29일자와 11월 5일자도 각각 <`언론은 여전히 반DJ적인가`:`일부 언론 ‘반DJ연합 구축하라’… 신한국당 ‘화답’엔 상세히 중계보도`> <`편들기 나선 정치 칼럼`>

<류근일-권영빈칼럼 2탄`:`이회창 살리기 재탕`> 등과 같은 제목의 기사와 사설을 통해 권 논설위원의 칼럼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

내가 <`97 대선과 『중앙일보』의 ‘위험한 장난’`>이라는 글에선 지적하지 않았지만, 권 논설위원이 『중앙일보』 97년 8월 22일자에 쓴 <`병역시비 옹호론`>이라는 제목의 글도 읽기에 매우 민망한 글이었다. 이회창 후보를 옹호한 논리가 교묘하고도 해괴하다.

권 논설위원은 먼저 자신이 이회창 후보의 대쪽 이미지를 싫어한다는 걸 밝힌다. 그건 자신이 “풍진 세파가 휘몰아치는 오늘의 정치판에서, 이해관계가 얽히고 설킨 복잡한 세상사에서 대쪽처럼 곧고 학처럼 고고하게 살 바엔 아예 정계입문을 하지 않는 게 옳다는 입장”을 갖고 있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이 후보 아들의 병역 파동으로 이 후보의 대쪽 이미지가 깨진 건 “오히려 잘된 일”이란다. 그러면서 그는 병역 파동을 “지도층 사회에 대한 민심 이반(`離`反`) 현상”으로 풀이한다. 이걸 가리켜 ‘물타기 작전’ 또는 ‘물귀신 작전’이라고 그러던가? 왜 모든 지도층을 물고 들어가는 걸까? 그는 뒤이어 제도가 문제라는 결론으로 치닫는다. 그러니까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 파동은 지도층 전체와 제도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칼럼은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다.

한 후보에게 흠집을 내기 위해 병역문제를 시비할 게 아니다. 잘난 인사들의 허물을 들춰 카타르시스적 만족을 얻기 위해 남을 매도할 일도 아니다. 병역의 형평이 잘못됐다면 효과적 장치로 개선하는 게 민주시민사회의 역량이다.

권영빈의 감동적인 칼럼들

지나치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치다. 이래도 되는 건가? 그러나 나까지 권 논설위원의 그런 편파성을 흉내낼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권 논설위원의 칼럼에 대해 공정한 평가를 하련다. 그 칼럼들은 대선시에 『중앙일보』가 전사적으로 밑어 붙였던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 캠페인의 일환이었을 거라고 이해하고 넘어가련다. 권 논설위원의 본심은 아니었을 거라고 믿고 싶다는 말이다.

아닌게 아니라 그렇게 이해하고 넘어가면 권 논설위원이 의외로 좋은 칼럼들을 많이 쓴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예컨대, 그가 96년 12월 4일자에 쓴 <`아! 서울대학`>은 아주 감동적인 칼럼이었다. 그는 그 칼럼에서 이석범씨의 소설 『윈터스쿨』을 읽으면서 “내가 교육개혁위원중 한 사람이고, 교육에 관한 글을 쓰는 논설위원이라는 사실에 매우 부끄러움을 느꼈다. 교육현실을 모르거나 알면서도 애써 외면해 왔다는 사실을 이 소설은 너무나 아프게 제기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그 이후에도 <`‘서울대 고시학원’`>(`98년 5월 22일자`), <`서울대는 어디로 가나`>(`98년 8월 14일자`) 등의 칼럼을 통해 서울대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이러한 칼럼들 이상으로 감동적인 칼럼으로 권 논설위원이 98년 10월 23일자에 쓴 <`생사람 잡는 지식풍토`>를 빼놓을 순 없을 것이다. 이 칼럼은 『조선일보』와 『월간조선』의 ‘최장집 죽이기’에 당당히 맞선 것으로서 그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간 존재해온 언론계 내부의 ‘동업자 봐주기’ 또는 ‘침묵의 카르텔’ 관행을 깨고 나온 것이라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이 칼럼에서 권 논설위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보수와 진보의 긴장관계 속에서 사회는 발전한다. 학문도 마찬가지다. 진보적 연구가 있어야 학문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 조금만 진보적 사상을 가졌다면 용공분자로 모는 매카시적 수법에는 동의할 수 없다. 더욱 가관인 것은 이 잡지가 나오자마자 야당과 자민련이 성명서를 내고 최 교수의 위원장직 사퇴촉구와 보안법위반 구속 운운까지 하고 있는 행태다. 성명서를 내기 전 단 한번이라도 저자의 원전을 읽어보았다면 이런 소리는 못할 것이다. ‘저 친구 평소부터 좀 수상했어, 알고 보니 용공분자였구만.’ 대충 이렇게 생사람 때려잡는 게 우리의 지적·정치적 풍토다. 어제 불던 바람이 오늘도 그냥 불고 있다. 개혁이고 민주화고 큰 소리 칠 게 없다. 아직도 언론이 앞장서 레드 콤플렉스 바람을 불어제치면서 선동하고 정치인들이 멋모르고 맞장구를 치는 이런 한심한 세태 속에서 우리가 학문의 자유와 정치의 민주화를 말할 자격이 있는가. 지금 우리는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정말 감동적이다. 나는 이 칼럼은 한국 언론사(史)의 한 페이지를 기록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한국 언론사』를 집필할 때에 반드시 기록할 것이다. 당시 어떤 사람들은 『중앙일보』가 『조선일보』의 경쟁관계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그런 칼럼이 나왔다느니, 개인적으로 최장집 교수와 권영빈 논설위원이 매우 친해서 나온 칼럼이라느니 하면서 그 칼럼의 가치를 폄하하는 발언을 해댔다. 그러나 그건 권 논설위원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조선일보』식 수구 냉전주의에 대한 반격

권 논설위원이 『중앙일보』 98년 2월 13일자와 4월 10일자에 쓴 <`구월산, 장길산, 황석영`>과 <`북에 대한 고정관념`>이라는 칼럼을 읽어 보라. 그는 이미 그 이전부터 매카시즘에 단호히 반대하는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자였다. 또 그는 동시에 햇볕정책의 적극적인 지지자이기도 하다. <미사일과 금강산`>(`98년 9월 25일자`), <금강산 이산가족 면회소를>(`98년 11월 20일자`),

<북한을 ‘왕따’로 몰면…>(`99년 3월 12일자`), <‘햇볕’이 유죄인가>(`99년 6월 18일자`) 등의 칼럼들이 그 점을 잘 웅변해주고 있다. 권 논설위원은 <‘햇볕’이 유죄인가>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조선일보』식 수구 냉전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날카로운 반격을 가한 바 있다.

서해안 총성이 울리자마자 무용론·폐기론이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마치 이 때를 기다리기나 한 듯 일부 언론, 일부 지식인들이 앞장서 햇볕론을 씹고 할퀴고 있다. 여기에 옷로비 파업유도설로 등 돌린 민심을 부채질하면서 야당이 햇볕론 총공세를 벌이고 있다. 마치 햇볕이 모든 재앙을 불러들인 듯 ‘햇볕 죽이자’로 나오고 있다. 햇볕이 유죄인가. 그렇지 않다. 남북간에 대결과 대화의 두 측면이 공존하듯 안보와 화해는 동전의 앞뒷면이다. 햇볕정책이란 강한 안보와 화해협력의 양날개를 달고 있다. 무력도발에는 단호한 응징이고 경제교류와 협력을 통해 남북 상생(`相`生`)의 공존체제를 유지하자는 게 햇볕론의 기본이다. 당파와 정권, 지역간 세대간 차이를 넘어서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빛을 볼 수 있는 남북문제 해결의 멀고도 험난한 길이다. DJ가 싫으면 햇볕도 싫고 DJ가 나쁘면 모든 게 나쁘다는 식이어선 대북정책이 바로 설 수 없다.

햇볕이 군 사기를 죽이고 무력도발을 유인한다는 주장이야말로 마녀사냥식 감정대응이다. 군인은 전쟁도발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쟁억지를 위해 존재한다.…… 주기만 하고 받는 게 없는 햇볕론은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도 너무 단견(`短`見`)이다. 굶주린 북한동포를 돕는다고 비료와 식량을 보냈다. 지난 1년간 도합 7백억 원어치다. 결코 적은 돈은 아니지만 무너지는 은행 하나 살리기 위해 무려 몇조 원을 퍼붓는 판에 북한동포 돕기에 7백억 원 보내 놓고 돌아오는 게 없다고 금방 불평하면 너무 조급하다.…… 안보와 햇볕은 함께 가는 것이다. 냄비 끓듯 하는 여론몰이로 일전불사의 전쟁무드를 조성하지 마라. 이성을 되찾자.

누가 삼성을 죽였단 말인가?

나는 중앙 유력지에 권 논설위원과 같은 언론인이 있다는 건 우리 모두의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 마음이 더 안타깝다. 그는 평소 여러 분야에 걸쳐 감동적인 탁견(`卓`見`)을 제시하다가도 자신이 몸담고 있는 회사의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에 이르면 갑자기 달라진다. 물론 회사의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에 정당하게 대응한다면 그건 칭찬받아야 할 일이지 흉볼 게 아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질 않으니 문제다. 이번엔 또 무언가? 먼저 권 논설위원이 99년 7월 16일자에 쓴 <바람 바람 바람>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살펴보자.

삼성차를 법정관리 신청하고 삼성생명 주식 4백만 주를 출연해 부채를 갚는다는 발언이 나오자마자 빚 갚고도 돈 버는 특혜라고 몰아치는 바람이 불면서 ‘삼성 죽여라’가 시작됐다. 주주의 유한책임이나 사유재산권 보호라는 자본주의의 기본원칙은 거론조차 되지 않은 채 재벌매도로 일관했다. 잘못된 빅딜을 강요한 정부, 무턱대고 돈을 빌려준 채권단, 경영에 실패한 기업 3자가 각각 져야 할 책임이나 국민부담을 줄이는 합리적 대안을 찾기에 앞서 재벌 죽이기부터 착수한다. 바람처럼 몰려와서 그냥 무너뜨리고는 사라질 뿐이다.……

『중앙일보』 관련 기업체에 2개월 예정의 세무조사가 진행 중이다. 말인즉 통상적 세무사찰이라지만 어려운 세월을 겪어온 우리가 겉 다르고 속 다른 권력의 속성을 모를 리 없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유형으로 부는 음해의 바람, 해코지 바람이 골목길을 헤집어 돌아 그것이 언제 개혁이란 이름의 돌풍으로 돌변할지 그 귀추를 주목할 뿐이다.

바람이 통하지 않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 그러나 음풍·돌풍·광풍만 부는 폭풍의 언덕에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없다. 합리와 이성이 자리잡을 수 있는 미풍과 순풍의 사회를 기대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소망인가.

이 칼럼 역시 심하다. 너무 심하다. 바람처럼 몰려와서 그냥 무너뜨리고는 사라질 뿐이다? 권 논설위원은 지금 유행가 가사를 쓰는 건가? 그래서 삼성이 무너졌는가? 삼성이 죽었는가? 권 논설위원은 ‘겉 다르고 속 다른 권력의 속성을 모를 리 없다’고 했다. 동의한다. 그런데 동의하기 어려운 것은 그 속성의 일반화가 어느 경우에나 정당화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난들 겉 다르고 속 다른 신문의 속성을 모르겠는가? 그러나 나는 그 속성에 근거해 무슨 주장을 하진 않는다. 설사 의심이 가더라도 함부로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다.

‘항아리 속 참게’가 이익치를 죽였나?

나는 권 논설위원이 어떤 주장을 하고자 할 때엔 은유법을 좀 자제했으면 한다. 우리의 언어 생활에서 은유법은 꼭 필요하지만 그 이용이 지나치면 남을 속이기에 앞서 자신을 속이게 된다. 그냥 직설적으로 삼성과 『중앙일보』를 옹호하면 될 일이지 웬 바람 타령인가.
권 논설위원의 그릇된 은유법 사용에 관한 한, 더욱 문제가 되는 칼럼은 『중앙일보』 99년 9월 10일자에 실린 <항아리 속 참게>이다. 나는 이 칼럼이 학생들의 논술 공부에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물론 이렇게 쓰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용도로 말이다. 왜 그런가? 우선 ‘항아리 속 참게’의 의미부터 들어보자.

참게는 민물게다. 털이 많고 발톱이 날카로워 깊은 항아리나 독 속에 넣어도 제 발로 기어 나온다. 그러나 게 여러 마리를 한꺼번에 항아리 속에 넣으면 한 마리도 나올 수 없다. 한 마리가 기어 오르기 시작하면 다른 게들이 뒷다리를 잡고 서로 엉켜 붙어 떨어지기를 반복하기 때문이란다. 독일계 한국인 이한우씨가 <내가 본 한국, 한국인>이라는 강연(『월간조선』 9월호 전재)에서 한국인의 ‘남의 뒷다리 잡기’ 풍조를 항아리 속 참게에 비유했다. 한 사람이 튀기 시작하면 금방 밑에서 끌어내리는 악습을 우리사회 발전을 저해하는 중요 요인이라고 그는 꼽고 있다. 남들은 어떤지 모르겠다. 적어도 내 마음속엔 이한우씨가 지적한 항아리 속 참게 근성이 도사리고 있음을 솔직히 시인하고 부끄러워 한다.

여기까지는 아주 좋았다. 그리고 권 논설위원의 자기 반성도 아주 좋았다. 권 논설위원이  ‘항아리 속 참게 증후군’으로 앙드레 김 또는 김봉남씨와 손숙씨 사례를 든 것도 아주 좋았다. 그렇게 끝냈더라면 이 칼럼은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주 좋은 칼럼이었다. 그런데 권 논설위원은 그렇게 잘 쓴 부분으로 독자들로부터 얻은 신뢰를 이용해 엉뚱한 논리의 비약을 감행한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반전이라 꼭 뒷통수를 얻어 맞은 기분이다. 권 논설위원의 말을 들어보자.

지금 현대증권 이익치 회장이 그 표적이 되고 있다. ‘바이 코리아’ 하나로 ‘이익치 신화’를 일궈냈다고 엊그제까지 헹가래치던 인물이다. 그러나 지금 헹가래치던 손을 쑥 뺀 채 땅바닥에 굴러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증권투자의 관행과 법규를 잘 알지 못한다. 다만 그의 예측과 뚝심이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에 허덕이던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고 사실상 ‘바이 코리아’ 덕에 잠겨있던 돈이 증시로 몰리면서 경기활성화를 유도한 기업인임을 알고 있다. 이런 그가 주가 조작 의혹에 휘말리면서 이미 몹쓸 중죄인이 돼버렸다. ‘몸통’ ‘깃털’설에 ‘어느 마름의 몰락’이라는 판결문까지 나와버렸다. 신화를 일궈낸 애국자라고 봐주라는 얘기가 아니다. 의혹이 있으면 밝히되 그 과정이 신중해야 한다. 불구속 수사로도 진상은 얼마든지 가릴 수 있다. 그러나 검찰은 출금조처에 구속설을 흘리면서 대기업 총수도 언제든 부를 수 있다는 으름장을 놓는다. 자원 없는 나라에서 유일한 살 길이 인재양성이다. 인재 한 사람 키우기에 수십 년의 각고가 필요하다. 잘 뻗은 나무를 하루 아침에 한칼로 베는 잘못을 검찰과 언론이 반복해선 안 된다. 내 마음속의 하이에나와 참게 근성을 걷어내는 일이 우리 모두에게 시급하지 않은가.

“어느‘마름’의 몰락”

여기서 권 논설위원이 ‘판결문’이라고까지 비아냥댄 ‘어느 마름의 몰락’은 『문화과학』 홍성태 편집위원이 『한겨레』 99년 9월 7일자에 기고한  칼럼의 제목이다. 먼저 이 칼럼의 일부를 인용한 다음에 권 논설위원의 주장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하자. 홍 편집위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참여연대의 계속적인 비판과 고발에 힘입어 마침내 현대그룹의 주가 조작 의혹은 사실로 드러나고 말았다.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이 주식을 이용하여 아들인 이재용씨에게 무려 3조 원에 이르는 재산을 변칙 증여할 동안, 현대그룹이라고 증시를 시장에 맡겨 두고만 있지는 않았다는 것을 이 사건은 분명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이익치, 그는 아마도 ‘마름’일 것이다. 그에 대한 주인의 신뢰가 아무리 돈독하다고 해도, 또한 그가 아무리 출중한 재주를 가졌다고 해도, 총수 지배의 재벌체제에서 그는 ‘마름’일 수밖에 없다. 현대그룹이 어떤 곳인데, 그가 감히 주인 행세를 할 수 있겠는가? 주가 조작이 어디 길바닥에서 하는 야바위 놀음인가? 수천억 원의 돈이 오고가는 초고액의 놀음인데, 주인의 허락없이 ‘마름’이 제 멋대로 베팅을 할 수 있었을까? 그러니 검찰의 수사는 당연히 총수의 집안을 향하여 직진해야만 할 것이다. 총수라고 하는 이 괴물들을 법에 따라 처벌하지 않는 한, 한국 경제는 이 괴물들의 밥이라는 신세를 계속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익치, 그는 질이 좋지 않은 ‘마름’이었던 것 같다. 최근에 『한겨레』와 한 인터뷰 기사에서, 그는 자신이 고소득 계층에게만 부를 몰아주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고 있으며, 그 혜택에서 소외 받는 저소득 계층을 위해 소액 투자자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펀드를 구상중이라고 했다(`『한겨레』 7월 31일치`). 주가 조작의 죄책감을 이런 식으로 표현했던 것일까? 이런 소리만 하지 않았어도 나는 그를 재벌경제의 희생자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기사는 그를 재벌경제에 기생하는 혐오스런 장사꾼으로 생각하게 한다. 이어질 정부의 조처를 우리 모두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자.

글을 거칠게 쓰는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온당한지는 모르겠지만, 이 글엔 거친 대목이 없지 않다. ‘괴물’이라느니 ‘혐오스런 장사꾼’이라느니 하는 표현은 좀 지나친 것 같다. 그러나 표현상의 문제를 제외하곤 홍 편집위원의 글은 권 논설위원의 반론에 비해 훨씬 더 진실에 가까운 것임에 틀림없다.

권 논설위원은 “의혹이 있으면 밝히되 그 과정이 신중해야 한다”고 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우리 사회에선 그 과정이 전혀 신중하지 않다. 그건 검찰만의 책임이 아니다. 언론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 나는 그것이 우리의 문화요, 우리의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고쳐나가도록 하자. 그러나 그런 문제 제기를 특정 사건과 연계시켜 마치 그 사건에 대해서만 그런 것처럼 사실을 호도하지는 말자.
왜 부정부패를 외면하나?

권 논설위원은 “증권투자의 관행과 법규를 잘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니 주가 조작이 얼마나 큰 범죄인지 제대로 알 리 없다. 그건 소액 투자자들로부터 돈을 부당하게 강탈하는 강도짓이다. 이익치 회장이 그런 죄를 저질렀다고 단언하는 게 아니다. 지금 나는 주가 조작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을 뿐이다. 만약 과거에 많은 사람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던 사람이 그런 범죄를 저질렀다면 그 사람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는 더욱 클 것이다. 그걸 표현하는 것은 ‘항아리 속 참게’ 근성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리고 이익치 회장에 관한 한 그를 헹가래치던 주역들은 『중앙일보』를 포함한 언론이었음을 잊지 말자. 권 논설위원은 먼저 언론인으로서 반성의 말을 했어야 했다. 그리고 나서 정씨 일가의 허락 없이도 이익치 회장이 얼마든지 수천억 원의 돈을 움직일 수 있다든가 하는 그런 식의 알맹이 있는 반론을 폈어야 했다. 또는 현대그룹을 비판하면서 왜 괜히 이건희 회장과 이재용씨를 끌어 들이느냐는 따위의 반론을 폈어야 했다.

“잘 뻗은 나무를 하루 아침에 한칼로 베는 잘못”이란 표현은 은유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그렇게 따지자면 성공하고 출세한 사람은 그 어떤 부정부패를 저질러도 면책될 수 있다는 논리로 빠진다.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오히려 정반대의 논리다. 잘 뻗은 나무가 엉뚱한 짓을 하면 더욱 호되게 다뤄야 아직 뻗지 못한 나무들이 무얼 제대로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 사회의 부정부패에 대한 인식 수준이다.

그러고보니 다양한 주제를 건드리는 권 논설위원이 부정부패에 대해선 거의 다루지 않더라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닌게 아니라 그는 자신이 “풍진 세파가 휘몰아치는 오늘의 정치판에서, 이해관계가 얽히고 설킨 복잡한 세상사에서 대쪽처럼 곧고 학처럼 고고하게 살 바엔 아예 정계입문을 하지 않는 게 옳다는 입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회창 후보의 대쪽 이미지를 싫어한다는 말까지 하지 않았던가. 권 논설위원은 정치개혁을 원치 않는 건가?

그것 참 큰 일이다. 권 논설위원이 앞으로 정치 칼럼을 쓰더라도 이회창 총재에겐 이전의 대쪽 이미지를 지켜 달라는 고언(`苦言`)을 해야 할 터인데 오히려 그런 이미지가 싫다고 그러고 또 “잘 뻗은 나무를 하루 아침에 한칼로 베는 잘못”이라는 말까지 해대니 이 노릇을 어찌 할 것인가.

차라리 나는 권 논설위원이 실질적으로 여전히 재벌 언론사인 『중앙일보』에 몸담고 있는 ‘조직인’으로서의 어쩔 수 없는 입지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말씀을 하신 것으로 믿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선 도무지 그의 들쭉날쭉한 칼럼의 흐름을 이해할 수가 없잖은가. 이익치 회장의 구속 이후 현대그룹 주가 조작 의혹 사건은 언론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아무리 신문들의 주식(`主`食`)이 재벌 광고라지만 이건 정말 해도 너무하다. 권 논설위원이 언론이 이래도 되는 거냐고 항변하는 칼럼을 쓰는 걸 기대할 순 없을까? 이렇게 묻는 내가 바보거나 나쁜 놈일까?

권 논설위원이 보여준 빛과 그림자는 우리 시대 언론의 자화상은 아닐까? 나는 권 논설위원의 빛이 그림자를 완전히 몰아내는 그런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물론 그런 날을 위해 나의 미력한 힘이나마 계속 보탤 것을 약속드린다. 그 날이 오기까진 권 논설위원이 가능한 한 대북문제와 교육문제만 집중적으로 다뤄 주실 것을 간절히 희망한다.


퍼 가실 분은 참고하세요. 이 글의 주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neo.urimodu.com/bbs/zboard.php?id=choisun_insa&page=9&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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