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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산하
제 목 개념에 대하여
(2006. 5. 8)



한 달 전 한 시골에서 저는 나쁘다기보다는 참으로 개념이 없어 뵈는 한 촌로를 만났습니다.  나이 예순 여섯이라고 했는데 그보다 다섯 살 (실제로는 일곱 살) 위이지만 겉보기로는 10년은 더 늙어 뵈는 다른 노인을 노비처럼 부리고 있었지요.  말 탁탁 놓아가면서, 허리 굽은 노인네가 거름 담긴 리어카를 밭에 부리느라 발버둥칠 때 뒷짐 지고 소리만 지르고 있더군요.  

그에게 접근해서 도대체 일하고 있는 노인은 누구이며 왜 이리 힘들게 일하고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머리가 이상해서 그 형이 자신에게 맡긴 사람이며, 나이는 많아도 힘은 나보다 세고 삽질하는 거 보면 대단하다."고 말입니다.  쑥스러운 빛도 없고 경계하는 내색도 없이 그는 자랑스럽게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감정을 못 속이고 이미 삐딱해진 제 목소리가 "품삯은 주셔야 되는 거 아닙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는 예의 당당한 어투로 "담배는 내가 대는 거고...... 먹여 주고 재워 주고 입혀 주면 됐지....."라고 답하더군요.  그러면서 리어카에 거름을 싣는 할아버지에게 "그만 가져가! 감당하지도 못하면서....."라고 걱정해 주는 건지 핀잔을 주는 건지 모를 소리를 내뱉습니다.  

대화를 끝내고 차로 돌아와 이야기를 해 주니 기사 아저씨가 한 마디 뇌까립니다. "개념없는 자식"  

군대에서 이등병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개념 없다는 말일 겁니다.  그 말에는 여러 의미가 숨어 있지요.  경우가 없다거나 아직 뭘 모른다거나 속된 말로 똥오줌을 못 가릴 만큼 허둥댄다거나 뭘 해야 할지, 하면 얼마나 할 지에 대해서 전혀 무대책이라거나 기타 등등 다양한 경우에 쓰이는 말이지요.  

할아버지를 부리던 촌로에 대해서 제가 든 생각 역시 동일했습니다.  그는 나쁜 사람이라기보다 인간에 대한 개념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가족도 버린 모자라는 영감, 먹여 주고 입혀 주면 감지덕지이지 늙어 버린 노친네 두어 시간 일 시키는 걸로 품삯을 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거지요.   오히려 그를 거친 세상에 내치지 않고 자신의 울타리 안에서 거두어 주고 있는 사실로 인해 내심 스스로에게 복받을 거라 쓰다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의 국민투표 관련 담화문이 아직도 붙어 있는 쓰러져가는 행랑방에서,  황소 바람을 넘어 공룡 바람이 들어옴직한 구멍 뚫린 창호지 밑에서 전기담요 한 장으로 겨울을 나는 것도,  소변을 방바닥에 지려서 썩은내가 완전히 장악해 버린 방 안에서 새우잠을 자는 것도  '이서방' (이른바 주인이 일하는 할아버지를 부르는 호칭이었습니다)에게는 매우 합당한 처우로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이른바 주인의 부인도 개념 없기로는 부창부수를 넘어 청출어람 수준이었습니다.  쓰레기를 주워 먹는 모습을 보고 도대체 밥을 주기는 하는 건지 물으러 간 제작진 앞에서 그녀는 "누가 죄 받으려고 우리를 모함하느냐?"면서 밥을 챙겨 주는 걸 보여 주겠다고 했지요.  

제작진의 카메라 앞에서 그녀가 할아버지의 밥상을 차려 준 곳은 다용도실이었습니다.  그래도 이 할아버지가 어떻게 사는지 보러 왔다는 카메라 앞에서 그녀는 "냄새가 나서 집 안에는 못 들인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녀에게 그것은 당연한 행동이었던 겁니다.  자신이 돌보고 있다는 한 사람의 밥상을 질퍽질퍽한 다용도실에 차려 놓고 쭈그리고 앉아 먹게 하면서도 그녀는 득의양양하게 "저렇게 밥을 고봉으로 퍼 주지 않느냐?"면서 저희들을 다그쳤지요.  이건 개념의 부재가 아니라, 개념의 상실이며 개념의 실종이고, 개념의 사망이었습니다. 인간에 대한 개념, 아무리 보잘것없는 인간에 대해서라도 마땅히 지켜져야 할 예의, 그리고 보호받아 마땅한 심신 미약자에 대한 배려 따위는 그들 부부가 늘상 해 왔던 관성이라는 불도저 앞에 깔아뭉개지고 납작해져 있었던 겁니다.  

또 하나의 개념 상실은 마을의 일부 주민들로부터 왔습니다.  할아버지에 대해 묻는 제 앞에서 그들은 "태생이 그런 걸 어떡하느냐"거나 "호령 안하면 일이나 하는 줄 알아요? 그냥 아무것도 없이 와서 살던 사람이에요. 그렇게 살다가 가는 거지."라고 스스럼없이 외부인에게 말하는 그들에게 주인 내외는 할아버지를 "정으로 거두는 (어떤 주민의 증언)"것일 뿐일지도 모릅니다. 그 개념 상실의 높은 벽 안에서 한 사람은 쓰레기를 주워 먹으며 "나는 그 집에 냄새 나서 들어가지도 못해요" (이른바 주인 아줌마의 고백)라는 말이 실감나는 끔찍한 방에서 시들어 가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다 숨을 거두면 주인은 양지 바른 곳에나 묻어 주고서 자신의 선행에 만족해 했을지도 모릅니다.  가련한 사람, 다음 생에는 좋게 태어나게.... 하는 덕담이라도 했으면 금상첨화겠지요.  그것은 공포였습니다.  인간에 대한 개념이 상실된 현장을 목격하는 공포.......  

그렇게 개념 없는 일부 마을 사람들과 후천성 개념 결핍증인 듯한 부부의 보호(?) 아래 있던 한 할아버지의 사정을 폭로하고, 할아버지를 격리시켜 좋은 곳으로 모신 것을 골자로 하는 방송이 나간 뒤 1주일이 가깝습니다만 저는 요즘 또 하나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 공포의 근원은 인터넷 게시판이었습니다.  

방송이 나간 뒤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가해자의 실제 주소가 뜨더니 실명까지 오르락내리락거리고 마을 사람 전체를 매도하고 인터뷰했던 공무원을 악마로 몰아붙이고 그들을 땅에 파묻어 버리려는 글의 칼과 글의 삽들이 게시판 위를 종횡무진 난무하기 시작한 겁니다.  어떤 이는 위성 사진을 다운 받아 올려 놓았고 나중에는 가해자의 아들이 어디어디에 근무한다는 황당한 사실마저 게시판을 장식하더니 그 근무처의 홈페이지가 다운됐습니다.  이들의 분노를 터뜨리게 만든 PD 입장에서 저는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 만큼 공포스러웠습니다.  그 네티즌들은 분노의 정당함을 빌미삼아서,  할아버지를 부리던 주인과 똑같은 형상으로,  인간에 대한 개념을 트럭으로 잃어가고 있었던 겁니다.  

다음 날 어떤 사람들은 해당 마을의 면사무소로 가서 등본을 뗀 다음 그 등본을 구겨서 잔돈과 함께 직원들에게 던지는 방식의 자칭 응징 제가 보기엔 폭거를 자행했고 그걸 자랑스럽게 게시판에 올렸습니다. 어떤 이는 그 집을 불살라 버리겠다고 휘발유를 싣고 가는 중이라고 했고 쓰레기를 투척했다는 사람들마저 나타났습니다.  촬영 중 비밀을 지켜 주고 정보를 제공해 주며 할아버지의 구원을 진심으로 응원했던 사람들마저 그 마을에 살고 그걸 오랫 동안 지켬봐 왔다는 이유만으로 악마가 됐습니다.  

인간에 대한 개념의 상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부족한 이들을 고발하고 싶어서 만든 프로그램이 또 하나의 인간에 대한 개념 미달과 무례함의 무대로 거듭나는 모습에 저는 공포를 넘어 환멸을 느꼈습니다.  대박을 칭찬하고 히트를 격려하는 메시지와 어깨 두들김이 정말로 싫었습니다.  구질구질해서 쓰레기나 파먹고 다니는 정신병자 늙은이에게 밥이나 재워 주고 옷이나 입혀 주고 잠자리나 재워 주면 땡이라는 사고방식과 "저놈들은 나쁜 놈들이니 우리의 분노는 정당하다"는 생각으로 필요 이상의 분노를 과시하는 행동 양태가 도대체 어느 정도의 거리가 있을까요.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도 누려야 할 권리가 있듯이 세상에서 가장 악독하다고 생각되는 자에게도 보장되어야 할 권리가 있다고 이야기해보고도 싶었습니다. 하지만 게시판 상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마치 할아버지의 마을에서 인간에 대한 개념이 나자빠졌듯, 패대기쳐진 개구리꼴로 짓밟히고 있었습니다. 너 아무개 친척이냐? 너 아무개 첩자 아니냐?  

분명 잘못은 있다고 생각되지만 나름대로 자기 생각을 이야기했던 공무원은 그 말을 했다는 이유로 인민재판을 당했고 자신의 일터에서 직위해제되었습니다.  그 공무원은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신중한 조사와 합당한 절차를 거쳐 그러한 징계를 당할 권리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방송상 행한 담당 공무원으로서의 업무상 발언 (그래서 모자이크도 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하루 아침에 목이 날아간다면, 도대체 그 징계를 한 사람들의 개념은 대체 지구상 어느 곳에 상주하고 있는지, 가련한 시골 공무원들이 보장받아야 할 권리는 어느 결에 녹아 없어졌는지 모를 일입니다.  

인간에 대한 초보적인 권리가 개인이나 다중이 스스로 세운 정당함의 방패와 의로운 분노라는 칼날 앞에 설 때, 그 정당함과 의분이 불가살의 괴물로 화하는 꼬락서니는 역사에서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역사까지 들먹일 것도 없이 오늘 제 손끝에서 편집되어 방송된 한 프로그램에서 나온 파장은 저 스스로를 전율케 하고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개념이 사라진 순간 남는 것은 머리 위에 끼얹어진 화로의 뜨거움만이, 그리고 희생양에게 휘두를 날 무딘 칼의 금속성 뿐일 겁니다.  또 그 뜨거움과 칼놀림은 결국은 난도질당하고 이리 저리 불에 지져진 시체 몇 구 밖에는 남길 것이 없을 테지요.  

제가 방송에 낸 사건의 가해자는 구속되었습니다.  이 역시 놀라운 일입니다.  폭행 등 중요 범죄에 대한 명확한 증거도 없는 상태에서 단지 노인 학대의 방임 정도로 구속 영장이 떨어진 것은 유례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죄목이 무엇인지 모르나 이 역시 들끓는 여론이 법의 저울 위를 길길이 날뛴 탓이고 그 여론의 질타를 굳이 받아내고 싶지 않은 경찰과 검찰과 판사는 평소엔 생각해 보지 않았을 구속영장을 만들어 냈겠지요.  저는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가해자를 구속시킬만한 뚜렷한 법적 근거가 없음을 아쉬워했었습니다.  변호사나 전문가의 자문 결과가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지금 가해자가 구속된 것을 결코 통쾌히 여기지 못합니다. 차라리 그가 자유롭게 활개치고 다니는 상황에서 저런 사람이 자유로운 것이 어찌 정상인가를 외치고, 그 법의 미비함을 제기하는 게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사건이 선례가 될 수도 있겠고 최초의 판례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프로그램은 후속편까지 만들어집니다.  지금 그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끝나고 나면 할말이 참 많을 거 같습니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





퍼 가실 분은 참고하세요. 이 글의 주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neo.urimodu.com/bbs/zboard.php?id=column_sanha&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388

2006/05/09 (21:21:56)    IP Address : 211.41.204.101

Notice  =축= 산하(김형민) 님의 <썸데이서울>이 출간되었다고 합니다. 시만 2003/12/21 1573
Notice  들러주시는 이들께 - 약간의 안내 시만 2003/07/24 1356
Notice  산하 님에 대한 하종강 님의 소개("하종강의 노동과 꿈" 싸이트에서) 시만 2003/07/24 1548
287  화장실의 비극 산하 2006/10/28 1147
286    [re] 화장실의 비극 호수저편 2007/06/26 814
285  성길이 보아라 산하 2006/10/25 1066
284  "콩나물 아저씨"가 죽었습니다. 산하 2006/10/25 1065
283  도박중독자에 관한 보고서 산하 2006/10/14 1146
282  서희의 편지 산하 2006/09/27 883
281  괴물 산하 2006/09/21 858
280  가화만사성? 가족만사성 산하 2006/09/12 854
279  플란더스의 개 산하 2006/09/03 1004
278  견권과 인권 산하 2006/08/30 805
277  5분 지각에 200대 산하 2006/08/18 848
276  내가 감독이라면..... 산하 2006/08/16 828
275  핌과 구에라임 산하 2006/07/21 874
274  고향을 알려드립니다 산하 2006/07/05 866
273  찬차가 산하 2006/06/30 806
272  아이에게 가르치는 6.25 산하 2006/06/27 817
271  4년 전 포르투갈전 산하 2006/06/13 791
270  블루시걸과 여왕벌 산하 2006/06/10 890
269  사람은 희망이 아니다 산하 2006/06/10 740
268  슬픈 오버랩 산하 2006/05/27 803
267  할아버지의 세 번 웃음 산하 2006/05/24 804
 개념에 대하여 산하 2006/05/09 796
265  아빠 힘내세요 정식이 나을게요 산하 2006/04/24 841
264  이슬람 성원에서 만난 기독교인 산하 2006/04/15 835
263  90년, 94년, 06년의 5만원 산하 2006/04/12 822
262  나는 보수이고 싶다 산하 2006/03/28 842
261  탈북, 성매매, 그리고 디지베타 테이프 산하 2006/03/21 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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