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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산하
제 목 플란더스의 개
(2006. 9. 3)




요즘 아내는 아들 녀석의 목소리 때문에 걱정이 태산입니다.  변성기가 오려면 아직 밥 천 그릇은 더 먹어야 할 녀석이지만 벌써 목이 쉬고 도레미파솔라 이상 올라가면 노래를 못부르는 허스키 보이스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건 녀석의 말투 자체가 워낙 높은 톤이고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조차 그 목소리로 압도하려는 듯 쨍쨍 그 성향을 키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게는 부아가 치미는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 목소리를 가지고 노래를 하는데 그 노래들이 하나같이 기이하고 불량하며 듣기에 흉한 자칭 창작곡,  황당한 노가바들이기 때문입니다.

“단군 할아버지는 탱크 앞에서 물총 들고 개기다 돌아가셨고, 그 밑에 아들은 기관총 앞에서 쌍칼 들고 설치다 돌아가셨다.   고구려 세운 똥내왕 배째 온조왕...... 백결 선생 떡볶이, 삼천궁디 의자왕.......”
“어젯밤에 우리 아빠가 폭력적인 모습으로 한 손에는 육삼빌딩을 뽑아들고 오셨어요..... 한대 맞고 혹이 났어요.  두 대 맞고 날아갔어요 세 대 맞고 피가 났어요 네 대 맞고 뻗었어요. 오오”
“동해물과 백두산이 삼만 구천 팔백원.......”

이런 노래를, 거기다 꺽꺽거리는 허스키 보이스로, 그나마 그 노래가 가진 박자와 음정을 깡그리 무시하고 불러 젖히는 걸 듣다 보면 참을 인(忍)자가 눈 앞을 가물가물 유영을 하게 됩니다.  결국 가끔은 그 참을 인자를 걷어차고서 “야 임마 넌 학교에서 뭘 배우냐? 좀 예쁜 노래 좀 해 봐!” 하고 발작적인 호통이 날아가긴 합니다마는.

그저께였던가, 또 한 번 그런 상황이 벌어졌길래 오늘은 한 번 본때를 보여 주리라 참을 인자 지우개로 파다닥 지워 버리고 너 이 자식아 일루 와 호령을 일발 장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짧은 찰나, 제 뒤통수를 더듬고 지나가는 노래 하나가 있었습니다.
“종이 울리네 열 두 시 종이 이제부터는 내 세상이다. 담을 넘고 창문을 여니 주인양반 코골고 있네 훔치자 훔치자 주인양반 빤쓰 끝까지 아름다운 서울에는 훔칠 것도 많답니다.” 제가 딱 제 아들만한 나이에 동네방네 부르고 다녔던 도둑송이었습니다.  누구한테 배웠는지도 기억에 없지만 하여간 저는 그저 재미있어서 그 노래를 입에 달고 다니다가 아버지에게 많이 혼났던 겁니다.  순간 입이 삐죽 나온 채 제게 혼날 태세를 갖추고 있는 아이가 눈에 들어왔고, 제 어깨에선 힘이 빠졌습니다.  누가 누구를 나무란단 말입니까.

그래서 저는 작전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아이에게 동요 가르치기? 아닙니다.  아들 녀석은 고향의 봄 같은 노래 가르치려 들면 하품부터 가동합니다.  일단 입에 달라붙고 재미있는 노래를 골라야겠다는 마음으로, 그리고 요즘 녀석이 세계 명작에 심취하고 있음에 착안, 옛날의 애니메이션 노래들을 소개해 준 겁니다.

  ‘사랑의 학교’를 읽은 뒤엔 “오늘은 이라고 쓰고서 나는 잠깐 생각한다. 어떤 하루였나 하고 점수를 주게 되면 몇 점일까.....사랑의 학교 우리 학교 랄랄라 재미있는 우리 학교.....”를 가르쳤고, ‘사랑의 학교’에 나오는 에피소드인 ‘엄마 찾아 삼만리’를 읽은 아이에게는 “아득한 바다 저 멀리 산 높고 물길 설어도 나는 찾아 가리 엄마 찾아 삼만리.....”를 열심히 익히게 했던 겁니다.  조금 있으면 “빨간 머리 앤, 귀여운 소녀~~~”를 불러야 할 것 같고, 하이디의 요들송을 제가 흉내 내는 엽기적인 상황도 도래할 것 같습니다.  

아이가 재미있게 부른 노래 중 하나는 “플란다스의 개”였죠.    랄랄라 랄랄라 랄라라랄라 랄랄랄라 ..... 로 시작해서 “먼동이 터오는 아침에 길게 뻗은 가로수를 누비며 잊을 수 없는 우리의 이 길 파트라슈와 함께 걷는” 그 노래를 적어도 서른 즈음 이상의 사람이라면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아이에게 이 노래를 가르쳐 주면서 저 역시 추억에 젖었습니다.  네로와 아로아, 그리고 아로아의 아버지 코제쯔.  그리고 파토났슈 이크...  파트라슈의 얼굴들이 시야를 가득 덮었다가 사라져 갔지요.  네로가 파트라슈와 끌어안고 함께 얼어 죽어가는 모습에서 얼마나 많이 울었던지요.  네로가 죽는 날 동네 아이들 눈두덩이 많이도 부었던 추억도 잔잔히 머리 속에 동터 와서 잠시 아련한 미소를 짓고 있는데 아들 녀석이 그 감회를 깨뜨렸습니다.

“아빠, 근데 네로는 왜 그렇게 죽어? 왜 아로아 아빠는 네로를 싫어해? ”
“응 네로가 가난하니까 그랬지.”
“왜 네로는 그렇게 가난해?”  

아반떼 타면 그랜저 타는 사람보다는 가난하다는 정도의 개념만 소유한 아들 녀석에게 가난이란 게 무엇인가를 설명해 주면서 제가 흠칫 놀랐던 것은 저는 어릴 적 플란다스의 개를 보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왜 네로가 가난한지를 물어 본 기억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동네에 작은 수영장이 있는 부잣집과 고만고만한 단독주택들과 세탁소와 ‘전빵’(구멍가게)과 연쇄점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옆에 시궁창 옆 판자집들이 공존하고 있었던 동네에서 살았던 탓이었을까요.  어렴풋이나마, 하지만 자연스럽게 네로같은 아이들이 있고 아로아같은 아이들이 있고, 코제쯔같은 어른들도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지요.

그제야 엘지 자이 코뮤니티다 현대 홈타운이다 또 우후죽순처럼 들어선 브랜드 아파트들에서 몰려든 아이들이 득실거리는 학교에 다니는 아들 녀석에게 그런 경험을 할 기회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파트 대단지가 들어선 이후 대단지의 학부모들이 십시일반 돈을 거둬서 학교의 외벽을 싹 ‘개비’했다는 이 학교에 과연 네로와 같은 아이들이 있을지, 있다고 하면 어떤 대상일지가 무척 궁금해지더군요.  실질적인 ‘가난’을 듣도 보도 못한 아이들이 태반인 학교에서 네로는 친구들을 만들 수 있을지, 코제쯔같은 어른들이 나타나서 “얘네들이 어떻게 우리 애들이랑 같은 학교에 다녀요.”하면서 항의할지 도무지 알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일류대’를 위한 필수 코스가 되어 버린 ‘외국어고등학교’가 학부모들의 꿈이 되어 버린 마당에 ‘국제중학교’까지 들어선다 만다 하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평준화’ 자체에 흰눈을 들이대며 하향 평준화니 수재의 둔재화니 하면서 팔뚝을 걷어부치더군요.  똑똑한 놈들은 똑똑한 놈들끼리 몰아서 더 똑똑한 놈 만들어야 하고 민한 놈들은 그놈들끼리 모아 놓고 거기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면 된다는 주장에 딱히 논리적으로 반박할 마음은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똑똑한 놈들의 정의가 원래부터 머리가 기차게 좋거나, 노력으로 인해 그 머리를 성취한 이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초등학교 때 이미 해외연수를 통해 영어를 마스터하고 선행학습을 통해 학교에서 배울 걸 다 배워 버린” 유복한 아이들을 가리키고 있다면 아마도 그 학교는 아로아만이 들어갈 수 있는 학교일 뿐일 겁니다.  한 동네에서 네로와 애틋한 마음을 주고받는 아로아는 소설 속에서만 찾아볼 수 있을 것이고,  아로아는 압축유리창 밖의 풍경 속에서나 개를 끌고 우유 배달하는 네로를 만날 수 있게 되겠지요.  

제가 사는 동네의 학군은 폭탄이기로 정평이 있습니다.  그래서 중고등학생을 거느린 학부모들은, 또 “생각이 있는” 학부모들은 어떻게든 목동 진입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고 하고 실제로 신학기가 되면 아무개네 목동 진입에 성공했다는 소문이 심심찮게 들립니다.  결국 그 맹모목동천지교가 성공할지 안할지는 모를 일이나 결국 네로의 학교와 아로아의 학교는 그렇게 분리되어 가고 있겠지요.  빈과 부가 분리되지 않은 어설픈 동네에서 놀았고 철저한 평준화 지역에서 자라난 저로서는 까닭 없이 안타깝습니다.  그러면서 아이에게 노래를 가르치러 갑니다.

먼동이 터오는 아침에 길게 뻗은 가로수를 누비며 잊을 수 없는 우리의 이 길 파트라슈와 함께 걸었네.  하늘과 맞닿은 이 길을...... 랄랄라 랄랄라 랄라라라랄라 랄라라라 랄랄라 랄랄라 랄라라랄라 랄 라      

t

퍼 가실 분은 참고하세요. 이 글의 주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neo.urimodu.com/bbs/zboard.php?id=column_sanha&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401

2006/09/03 (19:23:57)    IP Address : 202.150.184.133

Notice  =축= 산하(김형민) 님의 <썸데이서울>이 출간되었다고 합니다. 시만 2003/12/21 1573
Notice  들러주시는 이들께 - 약간의 안내 시만 2003/07/24 1357
Notice  산하 님에 대한 하종강 님의 소개("하종강의 노동과 꿈" 싸이트에서) 시만 2003/07/24 1548
287  화장실의 비극 산하 2006/10/28 1147
286    [re] 화장실의 비극 호수저편 2007/06/26 814
285  성길이 보아라 산하 2006/10/25 1066
284  "콩나물 아저씨"가 죽었습니다. 산하 2006/10/25 1065
283  도박중독자에 관한 보고서 산하 2006/10/14 1147
282  서희의 편지 산하 2006/09/27 8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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