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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산하
제 목 서희의 편지
(2006. 9. 27)




에라 그냥 올리자... 몰겠다





갑자기 여러 후손 분들  세상에서 고구려 풍년이 들었습니다.  고구려 동명성왕이 나라를 세우신 이야기가 여러분 사이에서 최고의 인기를 끌고 있음은 이곳에서도 화제가 되고 있지요.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난데없이 안시성에 나타나 큰 칼 휘두르는 풍경에는 안시성주 양만춘 장군이 단단히 토라지기도 했소이다만  왜국에서 최고의 인기를 끌고 있다는 잘 생긴 배우가 광개토대왕 역을 맡는다는 전언에 광개토대왕의 용안에선 웃음이 떠날 줄 모른다오. (그러나 황공하옵게도 대왕 이외에는 대왕과 그 배우 둘이 닮았다고 보는 이는 ......없소)


그러나 오늘 내가 여러분께 입을 연 뜻은 그 감동을 함께 나누고 치하하고자 함이 아니올시다. 차라리 기우일지언정 여러분께 선인(先人)으로서의 근심 한 조각을 슬며시 내려놓고자 한다는 편이 맞을 것이오. 여러분에게 감히 묻소이다마는, 여러분이 고구려로부터 얻고 싶은 것이 무엇이오?  한때 우리 조상이 이리 강성했었다는  자부심에 도취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마는 그 취기가 지나쳐서 고구려 8백년 역사가 전하는 쓰디쓴 쓸개와 날카로운 가시섶을 외면한다면 결국 여러분이 기리는 고구려의 영광이란 달이 차고 기울면 떨어질 단풍의 화려함에 지나지 않으리다.


여러분은 고구려 하면 살수와 안시성을 먼저 떠올릴 게요.  그러나 고구려가 기지개를 펴던 무렵의 이야기 하나를 먼저 들려 주고 싶소. 중원의 주인 신나라의 군주 왕망이 흉노를 치고자 할 때,  그는 고구려에게도 파병 요구를 했고, 고구려는 마지못한 출전을 해야 했소.  그러나 고구려는 싸우는 시늉만 하다가 전선에서 이탈해 버렸고 진노한 왕망은 고구려를 하구려라 부르라 명하며 길길이 뛰었소.   그러나 고구려인들은 알고 있었소.  하구려가 아니라 땅 밑의 구려라 한들 남의 나라 전쟁에 끼어들어 화살받이가 된 뒤 아무개 장군에 충신 칭호를 받는 것보다는 영예로운 일이라는 것을 말이오.  그것이 여러분이 즐겨 읽는 삼국지에 종종 등장하여 중원의 장수들 밑에서 보조병력으로 용맹을 과시하던 만족, 이족의 군대와 고구려가 다른 점이오.


중국의 삼국 시대, 동천왕은 위나라와 국교를 맺고 있으면서도 오나라 손권의 사신을 받아들였고, 위나라의 압력이 드세지자 이내 그 목을 베어 위나라로 보냈소.  그러면서 별안간 서안평을 공격했고 관구검의 침략으로 수도가 불탔었지. 또 장수왕은 중국의 남북조 시절, 북위에 칭신하면서도 남조의 송나라에 말 8백필 (북방 기병대에 속수무책 당하던 보병 군단 한족에게 어떤 의미일지를 생각해 보시오)을 보내며 책봉을 받아들였소. 선비족의 북위를 견제하기 위해 북방의 유연과 통했고,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는 기미가 보이자 바로 돌궐에게 다가섰소. 당나라가 돌궐을 굴복시키자 오늘날의 사마르칸드까지 사신을 보내서 동맹을 구하려 했소.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시겠습니까?


고구려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극복하는 강력함도 여러 번 선보이기는 하였지만 그 상황을 절묘하게 이용하는 지혜가 더 돋보이는 나라였소.  스스로에 대한 오만함과 무조건적인 사대(事大)의 양 극에 걸쳐진 줄 위에서 훌륭하게 균형을 잡는 광대와 같은 나라였다는 말입니다.  중국에 비굴하다 하여 연개소문의 반정에 빌미를 준 영류왕조차 천리장성을 쌓았고,  영류왕을 죽인 연개소문도 전쟁을 피하기 위해 이세민에게 백금을 바쳤소.  


광대의 몸이 왼편으로 기울어질 때 광대의 오른손에서 부채가 펴지고 오른편으로 힘이 쏠리면 그 부채가 왼손으로 옮겨지듯 , 고구려는 위태로와 보이지만 슬기로운 균형을 잡아 나갔고,  그래서 "너희 나라는 비록 속국이라 하지만 정성과 절개를 다 하지 못한다" (수서 동이전)는 불평을 들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오.  즉, 고구려는 중원에 들어선 그 어떤 대국에도 머리를 숙였으되 위압당하지 않았고,  칭신(稱臣)하였으나 복종하지 아니하였소.      

고구려 풍년이 든 후손 여러분 사이에, 제 나라의 군대 작전권조차 대국에 바쳐 두고, 제발 더 맡아 주십사 맘 떠난 통수권자의 발 밑에 조공하는 군상들이 있다고 들었소.  그리고 대국의 위엄에 기대는 것 외에는 살 길이 없고, 그 위엄에 도전하는 어떠한 움직임도 불충스러우며 불경스러워 능지를 해야 마땅하다 외치는 자들도 있다고 하였소.  적어도 그들은 고구려의 후손을 자처할 수 없으리다.  그들은 고구려 인으로서는 꿈도 못 꿀 '정성과 절개'를 그 주인에 바치고 있음이요.  그 손에 광대의 부채란 개발의 편자요,새발의 버선일 뿐이기 때문이오.   또한 그들은 한때 당나라에 허리를 꺾었으되 그 야욕을 알아챈 후엔 서슴없이 칼을 들이밀었던 신라의 후예조차 되지 못하리다.  항차 저들에게 조국이란 저들이 태어나고 자란 나라가 아니라 저들의 부와 이익을 의지할 만한 나라일 것이기 때문이오.


동으로 연해주, 북으로 시베리아, 서로 황하, 남으로 아산만까지 지배했다는 대제국 고구려를 황홀하게 우러러보는 것까지는 내 뭐라고 하지 않겠소.  그러나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 따위의 망상에 젖어 '고토회복'같은 남가일몽 중의 잠꼬대같은 소리를 내지르기 전에 여러분이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한다면, 그 역사가 우리 조상의 역사라 자부한다면, 도대체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를 생각해 보시오.  


오랜 혼란을 수습하고 욱일승천 제국의 길로 향하는 문제(文帝) 치하의 수나라같은 중국, 쓰라린 패전과 학정의 상처를 수습하고  중국 역사 최강국을 일군 태종 치하의 당나라같은 일본, 가장 강성한 시기는 지났으되 여전히 힘을 잃지 않았던 효문제 치하의 북위 같은 러시아, 전 세계를 집어삼켰던 쿠빌라이 칸 치하의 원나라를 방불케 하는 미국 등  고래 같은 강대국들이 여러분들을 감싸고 있는데 그 고래 틈을 날렵하게 헤엄쳐야 할 새우의 등은 반으로 갈라져 있소이다. 그리고 아직도 그 반쪽끼리의 드잡이질믈 멈추지 못하고 있소이다.   한때 전쟁도 치른 적이 있으며 당나라 빈공과에서 어느 나라가 더 급제자를 많이 내냐를 두고, 사신들의 서열에서 누가 앞서느냐를 놓고 볼썽사나운 싸움을 벌였던 신라와 발해처럼 말이오이다.


헌데 이미 여러분의 경쟁 상대는 망국 직전의 신라 형국이 된지 오래입니다. 신라에 남은 것이라고는 천 년 사직의 자존심 뿐이었듯, 여러분의 상대 역시 이미 시들어 버린 "우리 식대로"의 깃발을 부여잡고 있을 뿐이며, 신라의 백성들이 무더기로 조령 죽령을 넘었던 것처럼 그 삼엄하던 경계가 백성들의 발길에 허물어지고 있는데, 여러분은 한때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이유로 그 적개심을 불태우며 신라에서 투항하는 자들을 모두 죽였던 궁예가 되고 싶으시오?  포석정에 쳐들어가서 경애왕을 죽이고 비빈을 욕보이고서야 속이 시원했던 견훤을 본받고 싶으시오?   이른바 주석궁에 탱크를 들이밀어야 그 염장에 찔린 가시가 떨어지겠소?


우리 태조가 그 멸망 직전까지 신라에 군대를 보내어 허울 뿐인 신라 왕을 보듬었던 이유를 생각해 보시오.  개국공신 신숭겸과 김낙의 원수요, 태조를 몇 차례나 사경으로 몰아넣었던 견훤을 상부로 받들어 모신 까닭을 한 번 고민해 보시오.  그 너그러움이 아니었다면 수백 년 묵었던 앙금이 녹아들 수 있었겠소?  그 포용력이 없었더라면 차후 삼한의 땅에 고구려 신라 백제의 유령이 수시로 출몰하지 않았으리라 장담할 수 있겠소?   만약 우리 태조가 사사로운 원한을 들어 망국의 임금에게 술을 치게 했던 신라 문무왕의 전례를 따랐다면, 그리고 중원과 북방의 세력이 솥발처럼 갈라선 후삼국에 개입할 채비와 여유가 있었더라면 (천만다행히도 그들도 우리처럼 지리멸렬이었소마는) 도대체 어떤 일이 발생하였겠소이까.  


요즘 중국에서 벌인다는 동북공정에 대해 말들이 많은 것을 압니다.   그것이 이치에 닿지 않음을 따지자면 그 입에 가시가 돋고 그 혀가 돌덩이가 되도록 말해도 모자랄 것이나 한 지역을 차지한 강자가 그 지역의 역사마저 지배하려 드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오.   바로 내가 상대한 소손녕이 그랬소.


여러분이 잘 아는 바처럼 자신들은 고구려의 땅에서 일어난 나라이고 우리는 신라 땅에서 일어난 나라이니 고구려의 옛 영토는 거란의 것이라 우겼소이다.   그때 내가 우리야말로 고구려를 이은 나라이고 나라 이름조차 고려라 했으며 귀국의 동경성까지 우리 영토였다고 하자 소손녕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고 배웠겠지요.  그러나  80만 대군을 끌고 온 장수가 그 정도로 단순하지는 않았소.


사실 그에게나 우리에게나 고구려가 누구의 역사인지는 별 의미가 없었소이다.  고구려 논쟁은 그 이후 지루하게 이어진 줄다리기의 서막일 뿐이었소.  그리고 소손녕의 입을 막은 이는 내가가 아니라, 우리 태조가 그 너그러움 때문이건 정치적 계산 때문이건 따뜻하게 맞아들였던 발해 유민 출신의 장수 대도수였소.  그가 안융진에서 승리하였기에, 즉 고려가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입증하였기에 소손녕은 차선을 택했고, 나는 그와 거래할 수 있었던 것이오.


그 거래 방법이란 바로 과거 고구려가 썼던 방식이었소.  송과 거란과 동시에 통하며 책봉 따위는 받아들이고 연호 따위는 기꺼이 따라 써 주되 저들의 분란을 철저히 이용하면서 고려의 실리를 취하는 방식....... 그래서 거란의 힘으로 여진을 소탕했고 실로 수백 년만에 고려 말을 쓰는 군대가 압록강에 닿았으며 옛 고구려의 땅에 고려의 성을 쌓을 수 있었지요.  


소손녕의 후예들의 참람한 말에 괘념치 마시오.  이웃 나라들간에 서로의 입맛과 처지에 맞게 역사를 뒤바꾸고 윤색하고 적절히 생략하고 터무니없이 과장하는 것이 하루 이틀의 일이요, 어제 오늘의 일이오?  고구려의 역사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걱정 지극히 마땅하나 지금 그대들 스스로 보여 주고 있는 고구려답지 못함에 울분을 나누는 것 또한 더욱 마땅한 일일 것이오.  고구려의 영광을 기리는 일이 가치 있다 하나, 여러분이 고구려에 버금가는 조상이 되는 일보다 더 요긴할 것이 무엇이겠소.


제멋대로 안동도호부, 웅진도독부, 계림도독부 설치하면서 사이 좋게 싸우라는 식으로 부추기던 당나라처럼, 제 입맛에 맞게 삼한 땅을 요리하려는 강대국들의 손길에 놀아나, 갈라진 반쪽끼리 끝내 서로를 용서하지 못한 채 칼을 맞댄다면 그 역사는 또 어느 후손이 찾아 줄 것이오?  그래서 50년 전 경인년에 그러하였던 것처럼 여러분끼리 죽고 죽이는 놀음을 재현한다면 그 피울음 속에서 웃을 자는 누구이겠소.      


고구려를 찬양하기에 앞서서 그대들이 고구려인이 되시오.   고구려를 잊지 말자 외치기 이전에 고구려인이 여러분에게 남긴 교훈부터 살피시오.  그것이 진정 동북공정에 맞서는 길이리다.  고구려 인들의 지혜를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 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 하시오.  그것이야말로 정녕 고구려의 기상을 회복하는 일이리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고구려를 잊지 않는 길이리다.   그것이 여러분 시대의 '다물'이리다.  


                전 고려국 중랑장 서희, 저승에서 서


퍼 가실 분은 참고하세요. 이 글의 주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neo.urimodu.com/bbs/zboard.php?id=column_sanha&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404

2006/09/27 (17:27:41)    IP Address : 211.41.205.105

Notice  =축= 산하(김형민) 님의 <썸데이서울>이 출간되었다고 합니다. 시만 2003/12/21 1573
Notice  들러주시는 이들께 - 약간의 안내 시만 2003/07/24 1357
Notice  산하 님에 대한 하종강 님의 소개("하종강의 노동과 꿈" 싸이트에서) 시만 2003/07/24 1548
287  화장실의 비극 산하 2006/10/28 1148
286    [re] 화장실의 비극 호수저편 2007/06/26 814
285  성길이 보아라 산하 2006/10/25 1067
284  "콩나물 아저씨"가 죽었습니다. 산하 2006/10/25 1065
283  도박중독자에 관한 보고서 산하 2006/10/14 1147
 서희의 편지 산하 2006/09/27 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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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  내가 감독이라면..... 산하 2006/08/16 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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