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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산하
제 목 성길이 보아라
(2006. 10. 24)



하루 비 온 뒤에 계절의 이름이 여름에서 겨울로 바뀐 것 같다.  오늘 바깥에 있다가 얼어 죽는 줄 알았거든.  이런 식으로 가다 보면 해마다 우리는 실종된 가을이를 찾아 헤매야 될지도 모르겠다.  올해는 단풍조차 별 볼 일 없다니 (단풍놀이를 언감생심 못가 봐서 모르겠다만) 유난히 가을을 타는 성길이, 가을만 되면 ‘여자 마렵다’는 희한한 표현으로 좌중을 싸하게 만들곤 했던 네게 이 짧은 가을이 달가울지 떨떠름할지 짐작이 가질 않는구나.  

아무튼 성길아.  한동안 소식 없던 네가 갑자기 전화를 해서는 동아리 송년회를 12월 모일날 하기로 했고 이 성길 형님이 준비위원장이니까 알아서 해라고 으르대는 목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많은 생각이 들었었다.   네가 지금까지 무수히 멨던 총대와 무심한 호응 사이에서 상처 받고 열 뻗치기를 수십 차례였건만 또 총대를 멘 것이 고맙기도 했고, 까마득한 70년대부터 뉴 밀레니엄까지를 망라하는 학번들에 이르는 네 넓디넓은 마당발을 떠올리면 존경의 념까지 들지 뭐냐.  그러면서 나는 싱긋 웃었다.  대학 시절 너와 나만큼의 앙숙이 있었을까.  너와 나만큼 서로에게 날선 비수를 교환하고 표창을 던져 댔던 친구가 또 있었을까. 갑옷의 틈을 노렸던 중세 기사들의 마상 시합처럼 상대의 빈틈에 창을 질러 대려 눈에 불을 켰던 사이가 있었을까.  

우리 둘은 참 무던히도 싸웠다.  그 말이 생긴 지 20년이 흐른 요즘, 떠오르는 시사용어가 된 NL과 PD의 허울을 쓰고서 말이다.  어차피 피차 딴따라 노래패였던 처지에 고백하자면 너는 품성 나쁜 NL이었고 난 공부 안하는 PD였다.  품성 나쁘다고 했다고 눈 부릅뜨지 마라.  그냥 둘 다 얼치기였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음 넌 아니라고?  그래 오늘은 양보해 주지.  넌 멋진 NL이었고 난 얼치기 PD였다.   사실 나는‘좌파’ 그러면 은근히 찔렸다. 너도 언젠가 그랬잖아.  “저 새끼가 좌파면 좌파 다 뒤졌다”고 말이다.   그 말 처절하게 인정한다.   너 또 나더러 그랬지. 김규항씨가 B급 좌파라는 말을 쓸 때 거기에 빗대 나는 “재수강 좌파”라고 했더니 “저 새끼는 부정입학 좌파”라고 말이야.  그 지적 눈물이 찔끔나도록 수용한다.  지금은 논할 가치도 없거니와 예전에도 나는 좌파의 평균 수준을 급강하 폭격기 궤적으로 떨어뜨리는 놈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얼치기는 너를 위시한 멋진 NL 친구들에게는 참 성가신 존재였을 것이다.  평소엔 허허거리면서 다니던 인간이 네 말마따나 “혀에서 독침을 뿜어 대는” 일이 어디 한 두 번이었냐?  그 한 토막이 지금도 기억난다.  “넌 정말 혀에서 독침을 뿜는다”고 했을 때 나는 차디차게 내뱉었었지.  “피식, 독침? 그거 니들이 잘 쓰는 거 아니냐?”  그때 울그락불그락하는 네 얼굴을 보면서 나는 얼마나 쾌재를 불렀는지 모른다.

아마도 내 독설의 반절은 네 욕설로 갚았을 테지만(넌 독설은 못해도 욕설은 보성벌교급이었잖니)  혹 여분이 남았다면 거기에 대해서는 용서를 구한다.  하지만 그래도 이제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얼치기 시민으로서 나는 내가 독설가가 되어야 했던 이유를 네게 차분하게 설명해 보고, 아울러 나도 정돈을 해 보려고 한다.   워낙 이론적인 부분과는 남한과 북조선처럼 거리가 먼  탓에 결코 차분하지 못하고 제대로 정돈되지도 않겠지만 말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너희들의 스펙트럼은 무척 넓었다.  그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면 눈시울 뜨거워지는 불타는 청춘들부터 4월 15일날 되면 케이크 들고 나르던 친구들에 이르기까지 쌍무지개가 무색할 정도로 넓고 그 색깔도 달랐지. 하지만 그 무지개를 움직였던 것은, 그리고 그 넓은 스펙트럼 속에 숨어서 기동했던 것은 바로 ‘4월 15일’의 부류들이었다.  내가 아는 너는 4월 15일 부류에 속하지 않았다.  지금 자주민보에서 한참 목이 쉬고 있는 ‘바보 과대표’의 저자와 친했던 건 알지만, 걔만큼 외곬수도 아니었고, 아무개 조통위원장처럼 배낭 매고 판문점 넘겠다고 설치는 몽상가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성길아.  너를 포함한 너희들은 참 솔직하지 못했었다.  “북한을 모르면 비판하지 말라”면서 자기도 모른다던 북한의 신념 체계를 무슨 조화로 받아들였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장군님을 가슴에 받아 안은 지 오래라고 분명히 알고 있는데도 너희들은 후배들을 앞에 두고 선한 웃음을 지으면서 “내가 주사파 같냐?”라고 묻곤 했었어.  “그리고 조국을 위하는 일에 주사파라는 이름을 붙인다면 난 기꺼이 주사파가 되겠다.”는 식으로 말하곤 했었지.   명확하게 주체사상의 신념 체계를 통해 조국을 위하고 있었음에도, 그 방식은 그저 가슴 떨리는 조국 통일의 구호와 조국은 하나다라는 막연한 외침으로 숨겼던 것이야.  그러면서 요즘은 꽤 볼만한 전향자가 된 김영환이가 한 말을 비틀어 써먹었지.  무슨 주의다, 무슨 파다 하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그 타이틀을 마빡에 붙이고 태어나냐고.   그러면서 사소한 차이를 극복하고 통크게 하나가 되자고 했지.  나는 그 솔직하지 못함이 몸서리치게 싫었다.  지금도 진보정당이라는 당에서는 "북한에 대한 정보가 없기 때문에 비판할 수 없다"는 사람이 정책위의장을 맡고 있단다.  너와의 간고한 말싸움의 역사를 돌이키며 하릴없는 짓이었다고 웃어 넘기다가도 나는 다시 독침을 만지작거리게 된다.   너희는 소수였지만 너희의 무지개는 우리 하늘의 반 이상을 덮었고, 그 무지개는 아직 지지 않은 것이다.

몇 가지의 추억을 떠올려 보자.  너 콘크리트 장벽 반대 투쟁이라고 기억하니?  휴전선을 내두른 철조망으로도 모자라서 남한 당국이 콘크리트 장벽을 치고 있다는 것이 한동안 엄청난 이슈였는데.....  기억 안난다고?  잘 떠올려 봐.   분단 영구화 조장하는 콘크리트 장벽 철폐하라.... 어때? 기억나지?  남한 당국은 대전차 장벽을 일부 쌓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고 말이야.  어차피 민간인의 발길도 들이지 못하는 곳에 몇 백미터 대전차 장벽을 쌓는 일이 어떻게 분단의 영구화가 될 수 있을까 이해가 가지 않았었지만 그 구호는 한 한 달 반짝 하다가 갑자기 사라졌다.  남한 사회에서 전혀 피부에 와 닿지 않으며, 현실적인 호소력도 없는 구호를 왜 길거리에서 외쳐 댔을까.  나는 그 구호의 진원지가 ‘한민전’이었다는 사실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즉 북한에서 외친 구호를 스펀지처럼 받아들여 이른바 ‘주요 투쟁 목표’로 삼았던 대표적인 예라는 것이지.  (너 아직까지 한민전을 남한의 지하방송이라고 믿고 있는 건 아니지?  그럼 나한테 받을 독침이 아직 한 다스는 남았다.)    

너희들로 통칭되는 그룹에 몸을 담갔던 네게 묻고 싶은 것은 너희들이 단 한 번이라도 북한 정권에 대하여 대척점을 가져 본 적이 있느냐는 것이다.  아니 비판적 시각이라도 가져 본 적이 있느냐는 것이다.  수령은 교황이 아니고, 북한 정권은 천국의 정권이 아닐진대, 지금까지 너희가 북한 정권을 꼬집은 손가락을 만든 적이 있었냐?  송곳은 고사하고 바늘같은 뾰족함만이라도 가진 적이 있었냐?   너희가 우스운 꼴을 자초하면서도 북한은 항상 옳아야 했고, 너희가 내뱉었던 말을 스스로 부인하면서도 북한의 손을 들어 주었으며 너희에게 북한을 비판하는 목소리란 모조리 제국주의의 그것으로 격하시키면 그 뿐인 존재였다.   좌파고 나발이고를 떠나서 그냥 좀 결기 세우는 청년이었던 내게 너희가 북한이라는 존재에 대해 조금만 더 이성적인 태도를 보여 주었더라면 나는 내 성격상 (알잖냐?  정색을 하면 약해지는 거) 네가 말하는 독침을 서둘러 거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악착같이 너희들을 씹고 늘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올림픽에 인공기를 들고 참석하는 것조차 '분단의 고착화'라'고 반대하고 그 논리를 금과옥조로 모시고 가던 너희들이 북한 당국의 UN 동시 가입 선언 다음 날  "북조선 당국의 결단을 환영"했던 그 기민한 기문둔갑술을 나는 잊지 못할 것이다.  시베리아 벌목공 문제가 나왔을 때 너는 처음에는 마타도어라고 부정했고 그 다음에는 "우리도 중동에 일 나가지 않았느냐?"라면서 엉뚱한 반박을 해 왔었다.  이른바 '고난의 행군' 때도 마찬가지, 북한 인민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는 말을 했을 때 내 멱살잡이라도 하겠다고 덤빈 네 친구들 한 둘이 아니었다.  북한 돕기 운동조차 너희들이 거부했던 것은 혹시 기억에 남아 있는지 모르겠구나.  하지만 그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되어 가자, 너희는 또 입장을 바꿨다.  너희의 입장을 알려 할 때 너희를 살피느니 북한의 입을 관찰하는 것이 더 쉬웠던 것이 어떻게 정상적인 일이었겠니.  

반전반핵가를 최초로 캠퍼스에 울려 퍼지게 한 건 너희들이었다.  안치환은 이렇게 노래했었다. (안치환이 너희 편이라는 게 아니라, 너희의 정서를 받아들여 만든 곡 중에서) "평화로운 내 땅에 뭐하려고 천 개씩이나 숨겨 놨니 양키들아. 우리에게 그런 것은 필요없어.  철 모르고 장난하다 피박 쓴다... 산넘고 물건너 바다 건너서 양키 고홈...."이라고 말이다.  나는 사실 너희를 통해서 한국에 그렇게 많은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었던 것을 알았고, 핵이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이며, 그것들을 제멋대로 배치해 놨던 미국에 대한 분노를 이해했다.  제국주의의 핵이건 소비에트의 핵이건 그것이 지구를 수십 번 멸망시킬 수 있다는 사실에 공포를 공감했었다.  그런데 알다시피 북한 핵 문제가 터진 뒤에 그 무섭고 끔찍한 핵은 네 후배들, 또는 아직까지 과거의 너와 비슷한 사고를 견지하는 네 동기들에게 매우 친숙하고 정당한 존재로 돌변하더구나.  "민족의 생존이 핵폭풍 전야에" 서도, 그 핵이 메이드 인 북한이면 괜찮다는 것인지......  어떤 북한 사람이 얘기한 뒤 여러 차례 인용된 말에 따르면  "핵은 남조선을 겨냥한 게 아니다."라고 했던가.  북한의 핵은 한국 사람 DNA를 식별하여 방사능을 쏘고 태풍을 날리는 민족혼 그득한 무기라도 된다는 말이냐.  

가장 절망스러웠고, 나를 가장 극렬한 너희의 반대자로 만들었던 것은 너희의 억지였다.  말이 통하지 않는 억지, 어떤 이슈에 대하여 토론하는데 갑자기 "학형은 어제 총궐기에 참석하셨습니까?  그런 중차대한 일에 참석하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이런......."하면서 백태클을 걸거나 북한이나 너희들에게 비판적인 눈길만 던지면 "그것은 제국주의와 어용 언론의 시각과 동일합니다."라는 공안검사식의 논리를 전개하던 것 (공안검사 따로 있냐?  북한과 비슷한 말만 하면 다 빨갱이라는 논리와 뭐가 다르냐?)  애써 토론하다가 말 한 마디를 꼬투리잡아 토론의 자세가 글러먹었다면서 운동에 필요한 도덕성 논쟁으로 분위기를 부침개 뒤집듯 뒤집어 버리던 도덕군자의 행태는 지금도 혐오에 가까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이번 북한 핵 사태가 불거졌을 때 이른바 진보정당 민주노동당 내에서 그 구태가 고스란히 재연되는 것을 보면서 나도 간만에 독침을 챙겼더랬다.  아마 마누라가 보면 바쁘다더니 할  일 없구나? 하면서 비웃을 것이다.  마누라도 왕년에 한 가닥 하는 NL이었잖냐.  그래도 "비핵화는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며, 핵실험은 비핵화를 위한 것"이라는 해괴망칙한 말은 마치 타임머신같은 효과를 일으켜서 나를 15년쯤 전의 젊은이로 회춘을 시켜 주더구나. 정말이지 열사의 시신 부여안고 축전의 도시로 달려가자는 구호 이래 드물게 보는 걸작이었다. 정책연구원들이 정책위 의장의 실수를 지적하는 성명을 발표했을 때 '싸가지'론이 제기되더니 급기야 "너 FTA 선전전 때 안 나오고 뭐했어?"라는 힐난까지 나오는 것을 봤을 때는 정말 난 성길이 너의 옛 모습을 추억하며 웃었다.  대개 유쾌함으로 물드는 추억의 미소와는 달리 얼굴이 일그러지며 이빨을 드러내는 추한 웃음이었다마는.......

아마 이 글을 보면 너 또한 예전처럼 펄펄 뛰지는 않을지라도 네 특유의 쉬발넘 지랄허네, 너희들은 개지랄 안한 거 같냐? 하면서 나와 내 비슷한 부류들의 옛 과오들을 천자문으로 주워 섬길 것이다.  그래 잘못했다.  하지만 좌파도 우파도 아닌 애들 낳고 기르고 회사 일하며 살아가는 한 시민으로서, 지금까지 대한민국을 말아먹어 왔던 보수라는 이름의 수구보다는 설익은 진보 쪽에 한 표나마 던지고 싶어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과거의 너와 네 친구들이 오늘날에 펼치는 분신술에 반대한다.   제국주의의 봉쇄와 음모에 대한 비판은 아낄 것이 없겠지만, 핵이라는 가공할 무기를 손에 쥐려고 발악하는, 그것밖에 살길이 없다고 착각하는 패배자들의 정부 (진보, 보수를 떠나서 북한 정권을 실패한 정권이라는 손호철 교수의 말에 난 동의한다)에 삐딱한 말 한 마디를 벌벌 떨며 아낀다는 것은 진보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가 다시 독침을 챙겨든 까닭이다.  그나마 이젠 시들해졌고 독기도 예전만 못하지만 나는 가끔 그걸 꺼내들어야 할 것 같다.  

성길이 너를 들먹여서 미안하다.  과거에 그렇게 싸워 댔지만 넌 정말 좋은 친구였고 지금도 그렇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숱한 사람을 챙기고 총대를 메는 네 모습은 벗을 떠나 존경의 대상이란다.  이번 주에 만나기로 한 약속 시간과 장소를 왜 아직 말 안하는지 모르겠지만 빨리 연락 주기 바란다.  촬영하다가 밤에라도 가서 한 잔 하고 싶다.  쉬발넘아 술이나 먹어..... 하면서 면박을 받더라도 한 번 얘기나 나눠 보고 싶다.





퍼 가실 분은 참고하세요. 이 글의 주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neo.urimodu.com/bbs/zboard.php?id=column_sanha&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411

2006/10/25 (10:51:11)    IP Address : 211.41.206.217

Notice  =축= 산하(김형민) 님의 <썸데이서울>이 출간되었다고 합니다. 시만 2003/12/21 1573
Notice  들러주시는 이들께 - 약간의 안내 시만 2003/07/24 1357
Notice  산하 님에 대한 하종강 님의 소개("하종강의 노동과 꿈" 싸이트에서) 시만 2003/07/24 1548
287  화장실의 비극 산하 2006/10/28 1147
286    [re] 화장실의 비극 호수저편 2007/06/26 814
 성길이 보아라 산하 2006/10/25 1066
284  "콩나물 아저씨"가 죽었습니다. 산하 2006/10/25 1065
283  도박중독자에 관한 보고서 산하 2006/10/14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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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1  괴물 산하 2006/09/21 858
280  가화만사성? 가족만사성 산하 2006/09/12 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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