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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새벽강
제 목 그대 기억하는가 - 영화 [화려한 휴가]


현실은 언제나 질문의 연속이다. 넘어설 수 없는 한계상황, 그것도 패배를 강제하는 폭압적 현실일 때 더욱 그러하다. 사람들은 이때 어떻게 행동할까. 가장 손쉬운 건 회피다. 도피의 범위는 의외로 넓다. 팔짱낀 방관자들의 물결도 얼마든지 도저했다, 그와 같은 현실에서는. 그리고 질긴 일상의 관성이란 또 얼마나 무서운가. 그것은 번쩍 빛을 내뿜지도 않고 치열하지도 않다. 불의에 맞서 싸우는 영웅들의 이야기는 그래서 늘 가슴 떨리게 만들고 새롭다. 80년 오월 광주의 이야기도 그러할까. 절반쯤은 그럴지 몰라도 나머지는 그렇지 않다. 그 나머지 절반을 채우는 건 부채감과 카타르시스에 충실한 눈물이기에. 곰곰이 따져보자면 이 야만의 시공 앞에서 객관적 시선은 아예 불가능했는지도 모른다.

27년이 지나서 만든 영화 [화려한 휴가]가 그렇다. 이 영화는 객관적 거리를 담보해가면서 감상하기를 거부한다. 포스터에 적힌 문구는 멜로드라마처럼 촉촉하게 감긴다. “꿈이길 바랐습니다.” 그러나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떠오른 문구는 곧바로 감정을 최대한 절제한다. “ 이 영화는 실제 사건을 극화했습니다.” 화면을 채우는 주인공들은 이름 없는 풀뿌리들이다. 택시 운전수(김상경), 간호원(이요원), 고등학생(이준기)들은 전혀 특별하지 않다. 그제나 이제나 내로라할 것 없는 이웃들이다. 게다가 또 다른 얼굴들. 구두닦이, 부랑아, 양아치들을 만난다. 이 지점에 배치된 영화적 장치는 치밀하면서 빼어나다. 그리하여 어느새 그리고 마침내 주연 배우들마저 뛰어넘고 강렬한 메시지를 획득한다. 실제로도 그랬다. 80년 5월 27일 마지막 밤. 전남도청을 끝까지 지킨 이들도 그들이었다. 한마디로 [화려한...]은 사실의 재현에 충실하다. 이 2007년도 한국판 리얼리즘은 성공적이라 할만하다. 그러한 기법은 소재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기 위한 장치이자 거리두기란 점에서도 성공을 거뒀다.

대한극장의 편안한 좌석에서 화면을 응시했을 때부터 자못 궁금했던 점. 영화를 만든 사람들은 모두 80년 광주를 경험하지 않았다. 이 점에서 문성근의 [꽃잎]이나 송지나의 [모래시계]와도 다르다. 우선 4반세기를 지나온 사회변동. 명예와 이름이 복권됐다. 광주사태가 민주항쟁으로, 폭도는 열사 또는 시민으로. 국회에서 5공 청문회가 열렸고 전직 두 대통령을 감옥에 보내 단죄했다. 처절한 고립에 몸부림쳤던 광주는 그 사이 시민운동의 꺼지지 않는 동력이 됐다. 더 나아가 압제에 신음하던 스리랑카, 미얀마(버마), 필리핀 민중들에겐 영감의 젖줄이 됐다. 이제 빛고을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다. 그와 같은 민주화의 과실을 누린 사람들에게 80년 오월은 어떻게 투영되고 있을까. 말하자면 모든 가위눌림에서 깨어난 신선한 새벽 같은 영상문법을 읽고 싶었다.

어느 철학자가 말했다. 현실을 해석하는 데 그치지 말고 건설하자고. 바로 세우려면 바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해석은 늘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다. 이에 비춰 영화는 지식인들을 빗겨가지 않았다. 얼굴 주름살이 오묘한 ‘국민배우’ 안성기. 계엄군에게 기관포를 겨누게 되는 공수부대 예비역 대령으로 나온다. 시민군에 합류한 가톨릭 신부 송재호, 제자의 죽음에 눈물짓는 고등학교 어느 교사, 현장에서 구급차를 몰다가 죽는 외과 의사를 뒤따르는 카메라는 언뜻 건조해 보인다. 그러나 관객의 가슴을 마구 뒤흔든다. 따라서 점수주기에 인색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민주화와 인간존엄의 성과물이 오롯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국가폭력의 실체에 던지는 질문은 소중하다. 이것만 해도 어쩌면 우리 영화의 경우, 서기 2000년 산마루를 넘고 나서야 얻게 된 조망이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화려한...]은 과감하게 거기에서 더 나가지 않는다. 민감한 사안들, 예컨대 발포명령자라든지, 당시 핵 항공모함을 포항 앞바다에 파견했던 친구 나라 미국의 역할 등을 비켜갔기에 하는 말이 아니다. 새 세대라고 버거운 짐에서 자유롭지는 않았을 게다. 문제는 행간 이곳저곳에 박힌 금제(타부)를 새삼 확인했기에 그렇다. 그건 또 다른 강박처럼 보였다. 불현듯 새 세대들은 좀 더 ‘발칙해도’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직접 영화를 보시라. 감상자에게 맡기느라 더 자세히 안 쓴다). 종합적으로 볼 때, 영화는 결국 소재주의적 한계를 드러낸다. 또 하나의 흠이라면 입체감이 떨어진다. 막대한 제작비에도 불구하고 성난 군중들을 포착하는 노력이 미흡했다. 글쎄, 80년이 그리도 까마득한가. 일부 인물들은 마치 그림 속 정물 같다. 당연히 대사에 생동감이 덜하다.

다시 그러나, 빼어난 장면들을 얘기하며 끝을 맺자. 5월 21일, 계엄군이 철수하겠다는 전남도지사의 방송을 듣고 시민들이 몰려든다. 시민들은 도열한 계엄군을 눈앞에 두고 10분 전, 5분 전, 합창하듯 시간을 세면서 장난을 친다. 12시 정각. 무방비의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총격이 일제히 가해진다. 비명과 공포와 전율...영화사에 새겨진 그 유명한 오데싸 계단의 학살에 견줄만한 장면이라 아니할 수 없다. 광주 어느 교외. 20여 명의 승객을 태운 버스가 한적한 시골길을 간다. 그러다가 맞은쪽에서 탱크를 몰고 오는 계엄군과 마주친다. 시민군  두 사람이 버스에서 급하게 내리더니 풀밭에서 엉덩이를 깐다. 순전히 우연이다. 이윽고 그들이 볼 일을 보는 거의 비슷한 시각, 버스는 계엄군의 집중포화에 벌집이 돼버린다. 카메라는 겁에 질려 푸르른 보리밭에 숨는 두 젊은이들을 좇는다. 무지막지한 탱크와 출렁이는 보리밭의 극명한 대비. 그건 흉측한 강철무기마저 딛고 일어서는 생명의 메타포에 다름 아니다.

마지막으로 5월 27일 밤. 시민군 지휘자의 딸(이요원)이 괴괴한 적막에 휩싸인 광주거리를 돌며 가두방송을 한다. “시민 여러분, 지금 우리의 형제자매들이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계엄군과 싸웁시다. 우리는 끝까지 광주를 지킬 겁니다. 광주시민을 사랑합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주세요.” 다음 날 아침. 도청을 지키던 사람들이 하나 둘 죽어간다. 송수신기를 통해 울리는 목소리들. “저는 아무갭니다. 부디 저를 잊지 말아 주세요.” 그들이 선택한 삶의 방식. 그것은 목숨까지 버리며 지켜낸 인간적 품격이었다. 앞서 회피와 돌파라고 했다. 그 다음으론 제3의 방식도 있을 법하다.영화는 그것이 기억의 내면화라고 말하고 싶은가 보다.

영화의 여운은 길다. 영화는 끝을 맺으며 조금 뜬금없다고 할까 결혼식 사진 한 장으로 화면을 가득 채운다. 청초한 신랑 신부 곁에 모든 출연진들이 나란히 웃음 짓고 앉아 있다. 잠깐 생각을 가다듬자니 실제로 있었던 영혼결혼식(고 윤상원 열사)이 떠오른다. 여기 저기 객석에서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린다. 장중한 오케스트라 음악이 따라 흐른다. 옆에서 함께 보던 내 친구는 아예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님을 위한 행진곡”.
이때 어느 도시의 시사회에선 관객들이 모두 기립하여 합창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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